이후 동성애는 종종 무언가 죄스러운 것, 비정상적이며 왜곡되어 있고 불법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대부분의 이성애 사람들은 동성애를 무시했고, 정신과 의사들은 동성애를 성적 일탈, 혹은 진단 가능한 장애로 보았으며 동성애 경향을 알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비밀로 감추었다.상황이 언제 변하기 시작했는지, 그 시기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60년 전 섹스 연구가인 알프레드 킨제이가 동성애를 널리 알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몇 년 후, 정부의 지원을 받은 동성애 연구서가 영국을 뒤 흔들었고 오래잖아 동성애는 대서양 양쪽에서 정부와 언론 논쟁의 토픽이 되었다. 게이와 레즈비언은 긍정을 나타내고 그리고 더 부정적인 표현을 대체한, 적극적 행동주의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게이는 1950년대, 레즈비언은 1970년대) 사용되기 시작했다. 세계 인구의 10퍼센트가 동성애임을 보여주는 과학 자료가 있다는 사실은 널리 용인되고 있다. 1948년도 책에서 킨제이와 동료들은 미국 인구의 4퍼센트가 동성애라고 평가했고 남성 인구의 37퍼센트가 적어도 한 번은 동성애인 행위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들은 백인 남성의 약 10퍼센트가 16살에서 55살 사이에
동성애는 동성매력장애로서 동성애 경향성과 동성행위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동성애는 성경에 7차례 언급되는데 항상 부정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동성행위나 동성결혼은 죄악된 것이지만, 동성 경향성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신구약에서 동성애는 죄악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수많은 과학적 연구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의 원인은 식별하기 어려우며 복합적이다. 생리적 유전적 요인, 부모-자녀관계, 동성 또는 이성과의 건강하지 않은 관계 등이 동성매력장애로 이어지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동성애를 지향하는 사람이 이성애를 지향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가능하지만 쉽지는 않다. 동성애를 상담하는 사람은 내담자의 필요와 목표를 검토해야 하고, 현실적인 희망을 고취시키고, 정확한 지식을 나누고 사랑과 용납을 보여야 하며, 행동의 변화를 격려하되, 상담이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는 동성애자들에게 ⑴수용의 분위기와 ⑵지원의 분위기를 제공하여야 한다. 동성매력장애(SSA)에 대한 우리 해결책은 사랑과 이해이다.모든 동성 매력 장애는 (1) 치유되지 않은 어린 시절의 상처와 (2) 사랑과 용납에 대한 충
에이브러햄 링컨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가 대통령직에 있을 때 많은 청탁도 받고 송사도 받았다. 송사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있다.평소 링컨을 잘 보필하던 A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각료 중 한 사람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각료는 링컨과 링컨 측근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일만을 하고 다녔다. 어느 날 A는 그 각료를 송사하는 편지를 써서 링컨에게 가지고 갔다. 그리고는 링컨 앞에서 읽었다. 그러자 링컨은 그가 쓴 편지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링컨의 반응에 힘을 얻은 A는 그 편지를 그 각료에게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링컨은 다음 과 같은 말을 했다. “지금까지 그 사람을 헐뜯었으면 됐지 편지는 뭐 하러 보내나? 나도 내 비위를 거슬리는 사람들을 상대로 수십통의 편지를 썼지만 이제껏 한 번도 붙인 적은 없다네! 사람에 대한 인내 무척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인내하셨고, 주님계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해 인내해야 한다.“주님,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송사하려는 마음이 찾아올 때 저희의 생각과 저희의 영혼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당신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꼭 1년 전쯤 이 맘 때 인터넷에는 이색적인 대회가 있었는데 그 때의 기사를 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제 1회 멍때리기 대회가 열렸다. 나이, 성별, 직업을 불문하고 멍때리기에 일가견이 있는 50명의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미 사전에 신청서를 내고 3:1의 경쟁률을 뚫고 대회 참가 자격을 얻은 선수들이었다. 스트레스 쌓인 직장인, 공부에 지친 수험생, 쉬다가 과로사 한다는 백수·백조까지. 평소 멍때리기의 달인이라 불리는 이들의 치열한 경합 가운데, 세 명의 탈락자와 한 명의 기권자를 낳으며 대회는 말없이 이어졌다. 멍 때리기 대회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현대인들의 뇌를 쉬게 해주자는 취지에서 열렸고 공정한 심사기준과 진행을 위해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자문을 얻어 진행됐다”고 한다.우승은 아홉 살 여자 아이에게 돌아갔다. “멍때리는 것이란 아무 생각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차분하게 말하던 그 어린이는 엄마가 멍때리기 대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적극적으로 참가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멍때리기 대회를 연 이유는 빠른 속도와 가열된 경쟁의식에서 요구되는 스트레스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보자는 것이었다고 한
용기란 무엇일까? 어떤 글에 보니 이런 말이 있었다. 더러운 물로 가득 차 있는 물통이 있었는데, 한 사람이 그곳에 깨끗한 물을 붓기 시작했다. 그래도 물통은 여전히 더러운 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실망하는 기색이 없이 계속해서 물컵으로 깨끗한 물을 부었다. 그렇게 한참을 되풀이한 후 물통을 바라보자 그 물통은 이제 더러운 물이 아니라 맑고 깨끗한 물로 가득 찬 물통이 되어 있었다. 만일 그 사람이 깨끗한 물을 꾸준히 붓지 않고 지겹다고 포기했다면 과연 그 물통에는 어떤 물이 들어 있었을까? 그렇다. 용기란 1초를 더 견디고, 한 번을 더 하는 힘이다.우리가 무슨 일이든 실패하는 이유는 너무 빨리 절망하기 때문이며, 너무 빨리 단념하기 때문이다.대학시험에서는 1점 차로 합격과 불합격이 판가름나고, 100미터 경주에서는 0.1초 차이로 금메달과 꼴지가 결정된다. 이런 때에 한 번 더 시도하고, 1초를 견디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용기가 아닐까?사실 모두가 포기하는 상황에서 혼자 버틴다는 것은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곳이 강도의 소굴로 변해 있었던 것이
9월은 각 교단마다 정기 총회가 있는 달이다. 우리 교단도 제105차 정기 총회가 9월 21일(월) 부터 24일(목)까지 강릉 실내 체육관에서 있을 예정이라는 공문을 총회로부터 받았다. 신앙생활의 아름다움은 변화와 성숙에 있다. 성숙해 가는 공동체는 아름답다. 성숙은 병화를 수반해야 한다. 104차회기를 지나오면서 우리 교단과 총회는 많이 변화되었고 성숙해 졌다. 특별히 104차 회기의 총회장 곽도희 목사를 비롯한 임원진의 수고와 노고에 힘찬 감사의 박수를 보내 드리고 싶다. 동시에 이번 제105차 정기 총회는 가 일층 변화되고 성숙한 성총회의 모습을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신앙의 성숙과 변화는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중요한 것은 체험일 것이다. 동시에 배움과 훈련을 통해서 성숙되고 변화된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없는 것이 깨달음이다. 영적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비밀을 깨닫는 것이야 말로 영적 생활의 중요한 관건이다.개인적인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면 복음은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개인적인 신앙으로 체계화되기까지는 꽤 오랜 기간이 지난 후였던 것 같다. 그중에 하
최근에 부족한 사람이 칼럼집을 책으로 묶어 펴냈다. 책을 접한 최성열 평론가로부터 서평을 보내 오셨다. 원문을 요약형태로 조심스럽게 게재해 본다. 목회 경험을 틈틈이 신문에 기고한 내용들이다. 이 평론을 이렇게 게제 하는 것은 결코 자랑을 하려 함이 아니다. 이 서평을 읽고 혹 책을 읽고 싶어진 독자가 있어 책을 원하면 기꺼이 보내드리고 싶은 생각에서이다. 반종원 목사님의 칼럼과 목회의 글들을 모은 동행 30년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느낌을 적어본다. 반종원 목사님은 『동행 30년』에서 다섯 주제로 잡은 첫 번째 ‘삶과 신앙 사이’라는 주제로 ‘설교한 대로 살면 잘 사는 것’이라고 하면서 첫 서막을 연다. 그는 친구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기쁨, 의미, 가치라고 한다. 지하철에서 외판원으로부터 캐온 ‘희망’이라는 메시지와 만남, 비전, 어려운 일이 닥칠지라도 굵은 획을 그어가며 지켜온 요동하지 않는 인생을 책의 서문에 싣고서 아름다운 동행의 발걸음을 내디디셨다. 게다가 남이 변하는 것을 바라기보다 자신이 변화되는 모습 속에서 찾은 능력, 사람이 아름답게 사는 길은 생명의 끝이 사랑이라는 것이라고 한다. 그 안에는 다 닳아서 쇠갈고리가 된 호미처럼 나누는 사랑
군목 시절의 이야기다. 한 번은 동계종합훈련을 마치고 복귀했더니 인사과 사병계가 군종병 신병이 하나 왔다고 알려주었다. 부대가 훈련 중이어서 근무소대 내무반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지 궁금해서 내무반으로 찾아갔더니 신병답게 내무반 침상 끝에 차렷 자세로 앉아 있었다. 맞은 편 침상에 앉아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신병 뒤 침상 안쪽에 앉아 있던 상병 하나가 나를 보며 손을 가로로 마구 휘저으며 소리 없는 입모양으로 ‘얘는 안 돼요’라는 말을 인상을 쓰며 거듭 말하는 것이었다. 그 옆에 있던 다른 병사마저 덩달아 같은 사인을 보냈다.내무반에서 나온 다음 그 상병을 불러 군종병으로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 왈 “제가요 이것저것 물어봤거든요. 그런데 애가 술 담배도 하고 순 날나리예요.”라는 것이었다. 그 신병은 술 담배를 해도 문제가 안 되는 학교 출신이었는데 그 상병은 술 담배를 하는 것을 보니 순 나이롱 신학생으로 보였던 모양이었고 그런 사람이 군종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상병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그 때 나는 술 담배 문제가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신실한 신자인지 나이롱 신자인지를 구분하는 잣대로
아주 오래 전 썰렁한 유머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63빌딩에서 한 가족이 떨어졌는데 모두 다 살았다. 이런 기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정답은 이렇다. ‘아버지는 기러기 아빠, 엄마는 새 엄마, 아들은 비행청소년, 딸은 날라리였다.’ 이게 90년대에 유행하던 썰렁개그다. 그런데 요즘은 냉소적인 유머가 판을 친다. 몇 년 전, 병맛이란 말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병맛‘이란 ‘병신 같은 맛’의 준 말로 ‘어떤 대상이 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신조어다. 당시에 인터넷에는 병맛만화가 뜨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인 ‘이말련 시리즈’에 이런 만화가 나온다. 어느 현대인이 필수품인 차가 없어 허전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차를 사러 갔다. 경차를 고르는 그에게 판매원은 안전이 중요하다며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중형차를 선택했더니 대형차가 들이받으면 위험하다고 한다. 대형차를 사더라도 트럭이 와서 충돌하면 위험하다고 생각한 이 사람은 결국에는 25톤 덤프트럭을 샀다. 그리고 신나게 달리다가 무궁화호 열차와 충돌한다. 이야기는 ‘안전하고 튼튼한 대중교통 기차를 애용합시다-철도청’이란 어이없는 결론으로 막을 내린다. 한 마디로 어이없음 그 자체다. 그런데
천지창조 세쨋날 주님의 역사하심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러나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현재의 추세로 나아간다면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먼저 멸종하게 될 것이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가 내 놓은 암울한 전망이다. 현재와 같은 낮은 출산율을 방치할 경우 마지막 한국인은 2750년에 사망하고, 마지막 일본인은 3011년에 태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는 먼 미래를 내다본 인구 예측이어서 추정에 많은 불확실성이 있으나 다른 변수들도 감안해야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단순한 엄포만은 아니다. 한국은 인구 노령화에 출산율까지 낮아지고 있는데다 여성들은 갈수록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013년 출생률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인구 1000명당 8.6명이 태어나 전년 대비 9.9%나 급감했다. 여성 1명이 일생 동안 1.187명의 아기를 출산 세계에서 다섯째로 적다. 이런 추세가 이어질 경우, 북한과의 통일이나 상당한 이주민 유입이 없다면 한국인은 2750년 자연적으로 멸종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현재 5141만여 명인 인구가 이번 세기 말에는 2000만 명으로 줄어들고, 부산에선 2413년, 서울에선 2505년에 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