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로 산다는 것」의 저자 크레이그 그로쉘 목사는 어느 수련회에서 수많은 청소년에게 말씀을 전했다. 마지막 밤에 수십 명이 앞으로 나와서 기도하고 구원을 받았고, 수백 명의 아이들이 무릎을 꿇고 겸손히 죄를 회개했다. 하나님의 임재에 압도당했고, 그분이 나를 통하여 그렇게 일하시는 데 입이 벌어졌다. 그런데 집회가 끝나고 방에 돌아와 앉았는데 왠지 모를 외로움에 가슴이 휑해졌다고 한다. 하나님이 방금 전까지 나를 강력하게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을 도우셨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버림받은 기분, 절망적인 기분이 찾아든 것이다. 3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서 있고 앉아 있고 놀고 있고 자고 있었건만, 그들이 이역만리 멀게만 느껴졌다고 한다. 목회를 하다보면 이러한 느낌을 가져본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이제 목회자로서의 연륜이 오십을 훨씬 넘다보면 더욱 자자질 수 있다. 한 때는 열심을 가지고 앞만 보고 나갔는데 그로쉘 목사님처럼 어느 순간에 나 혼자 밖에 없는 것처럼 외로움을 느낄 수가 있다. 항상 성령이 충만해서 늘 주님과 함께 사시는 분이라면 여기에 해당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것이 사추기(思秋期)라고 말 할 수 있다. 갱년기 혹은 사추기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내 어린 시절의 신앙 영웅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이주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된 그의 인생 이야기는 어린 소년의 마음을 흔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미국 유학시절 가족치료를 공부할 때 가족 관계 체계의 관점으로 아브라함과 그의 가정 이야기를 다시 조명하면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많은 부분들이 새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아브라함의 영웅적인 삶에 흥분했으나, 이제는 ‘보통 사람’이었던 그를 그토록 영웅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쓰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주목하고 흥분했다.아브라함과 그의 가정은 21세기의 가정들 못지않게 빠른 사회문화적 변화와 복잡다단한 내적갈등 및 관계의 위기들을 경험했다. 익숙한 삶의 환경을 떠나 낯선 땅으로 이주하여 힘든 정착의 과정을 겪었다. 주소만 있으면 한국에서 구글지도 영상을 통해 내가 살 미국의 집과 거리까지 낱낱이 확인하고 인터넷으로 각종 필요한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뽑아내는 요즘에도 타국에 가서 산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살던 당시 상황에서 뚜렷한 정보도 없이
2012년 우리나라 이혼율은 11만 4300여 쌍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 회원국 중에서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혼 부부 중 과반수 이상이 자녀가 있는 이혼이어서 한 부모가정의 증가로 이어지게 됐다. 한 부모가정의 증가율 역시 매면 증가했는데 연도별로 보면 2009년 155만 872가구, 2010년 159만 4624가구, 2011년 163만 8537가구, 2012년 167만7415 가구. 해가 거듭할수록 한 부모 가구는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부부란 살다보면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 살거나 살다보니 가엾어서 살기도 하고, 또는 등 긁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살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얼마 살아 보지도 않은 20대, 30대 이혼이 급격히 늘어나고 심지어 가엾어서 산다는 50대, 고마워서 산다는 60대, 등 긁어주면서 산다는 80대까지 이혼을 서슴지 않는 탓에 우리나라가 이혼율 1위가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전체 이혼 건수의 절반에 가까운 46.8%가 결혼한 지 3년 미만의 신혼부부라는 통계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쉽게 만나 쉽게 결혼하고 또 쉽게 헤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인 현상에 교회가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현대
자신의 중독적이고 강박적 행동이 무엇이었든 자신이 그것에 무력했음을 깨닫고 시인하므로 자신의 부족, 즉 수치심을 끌어안지 않으면 내면화된 수치심이 중독적인 성향으로 나타나 절대적이고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사람들에게 실수 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인식시키며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는데 그 뿌리가 수치심에서 만들어 진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수치심은 모든 감정을 오염시키고 결국 남은 것은 거짓자아로 형성된 의지력뿐이다. 이러한 의지력으로 추구하게 되는 것이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처럼 되는 목사와 함께 있는 성도들도 상호의존중독에 걸렸다고 본다. 목사는 강박적 완벽함으로 자신의 수치심을 가리어 하나님처럼 되려하고 성도는 목사를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허물어진 자기경계를 완전한 목사로 대치하여 의존하게 된다. 자신의 경계와 타인의 경계를 지키면서 하나 되는 방법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함으로 아들이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 고백을 한다. 이만큼 이루신 분도 주님이시오, 나의 부족을 채워 가실 분도 주님이시란 고백이다. 남편이 머리요 아내는 몸임을 강조하는 남편은 수치심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자녀의 감정에 상해를 입힌다. 자녀는 발달과정에서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현재로서 자유롭게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됐다는 말이다. 그것을 또 다른 말로 감정이 오염됐다고 한다. 오염된 감정은 자신이 자신을 느끼지 못하게 함으로 거짓자기를 생성하게 한다. 그 거짓자기는 형제들 사이에서 돌보는 자, 작은 부모, 또는 영웅 등으로 역할을 떠안게 한다. 요즘은 자녀를 한 명 정도 낳는 것을 고려하면 핵가족 안에서의 역할은 마스코트, 반항아, 또는 중재자가 될 수도 있다. 자기가 참자기로서 스스로 느끼는 참된 감정이 숨고 오염된 감정이 만들어 내는 거짓자기를 인식하는 방법은 직면이다. 직면은 어린 시절의 감정을 재 경험 하는 것이다. 그 감정은 과거 상처 입은 사건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기에 과거 상처 입은 사건에 대한 직면을 할 때 그 사건과 연결 되어 있는 감정을 함께 직면하게 된다.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아버지이지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서 참자기가 숨어 버리면 동시에 참 감정도 숨어 버린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아버지가 늙고 자녀가 성장하여 어른이 됐지만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 당시의 아버지를
지난 6일 주일예배를 마치고 돌아와 KBS1 강연 “100”을 시청하면서 아내와 함께 울었다. 얼굴 한 쪽을 덮은 큰 모반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김희아 집사님. 그녀의 살아온 삶과 살아가는 진솔한 간증은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을 만큼 큰 감동이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사랑과 희생과 용서와 감사가 무엇인지 알게 해 준 그녀가 고맙다. 이런 여인이 이웃임이 고맙고 한 하늘아래 함께 숨 쉬고 있음이 감사하다. 그녀의 아름다운 간증이 몇 편의 설교보다 나을 것 같아 주일 낮 예배에 영상예배로 드렸다. 성도들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예배 후 온통 눈물자국으로 얼굴들이 발갛게 됐다. 참으로 큰 은혜를 나눴다. 오후예배는 소그룹 목장별 나눔을 통해 또 한 번 눈물을 적셨고 회개의 고백들이 쏟아져 나왔다.대구에서 공예미술 강사로 활동하면서 두 아이의 엄마로 열심히 살고 계신 김희아 집사님. 태어날 때부터 얼굴 한쪽을 다 덮은 커다란 붉은 반점 때문에 부모로부터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란 그녀. 그런데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좋은 보육원에 보내졌기에 자신은 잘 자랄 수 있었고 자신을 버린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이 세상에
중독을 치유의 첫 관문은 순복이다. 순복은 자신의 중독적이고 강박적인 행동이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순복은 중독과 강박에 자신이 무력했고 자신의 삶을 관리 할 수 없었음을 시인하면서 시작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내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었지만 이제는 내 자신이 스스로 통제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일이며 또한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즉, 자신을 피조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치유는 자신의 순복을 통해 참 자기로서 하나님을 정확히 만나 주님께 나의 의지와 생명을 맡기기로 결정하는 과정이다. 순복이 아닌 굴복으로(힘 있는 부모 밑에서 굴복 당했던 상처 입은 자녀처럼) 많은 사람은 알코올이나 여러 중독형태를 멈추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종교인이나 봉사자등 또 다른 중독 형태를 띌 수도 있다. 원 가족의 역기능을 통해 생긴 거짓자아가 기능을 하면 평생 겸손한 성직자나 봉사자의 모습을 띌 수도 있고 종교의 힘을 빌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를 하게도 된다. 그래서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합법적으로 통제함으로 자신의 수치심은 여전히 가려지게 되고 마치 중독과 강박처럼 점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뺏기고 죽을 정도로 맞은 채 버려졌다. 이 사람은 신체적 폭력, 심리적 충격으로 곧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적하고 외진 길이었지만 마침 지나가던 사람들이 있어서 구조될 수도 있었건만 그들 또한 그를 버려두고 피해 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한 사마리아인이 위기상황에 처한 이 사람을 안타깝게 여겨 신속히 응급조치를 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 살 수 있었다(눅 10:30~35). ‘위기’(crisis)의 사전적 정의는 ‘위험한 고비나 시기’를 일컫는다. ‘분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어떤 판단이나 선택, 결정의 분기점 혹은 전환점에 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위기 사건이나 상황 자체가 문제이지만 그 위험한 고비나 시간을 어떻게 지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위기는 흔히 개인적 혹은 상황적 요소에 의해 발생하게 된다. 길에서 강도만난 사람은 ‘강도’라는 상황적 요인에 의해 삶과 죽음의 위험한 고비 혹은 분기점에 이르렀던 것이다. 위기상황은 치명적인 심신의 문제나 정서적 외상 혹은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어
요즘 기업 광고에 CEO가 직접 출현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사실 CEO의 얼굴이 회사의 얼굴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회자의 이미지가 곧 교회의 이미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보편적으로 그 교회의 목회자를 보고 교회를 보게 되면 모두가 묵시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가 있다. 대개 목회자와 교회는 닮아가게 되어있다. 당장이야 알 수 없지만 시간을 두고 보면 반드시 관련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더 확실한 것은 목회자의 집, 목회자의 가정의 모습이 바로 목회자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근원지이다. 지금은 예전과 달라서 가정에 충실한 목회자의 모습을 성도들이 보고 싶어 한다. 비록 우리나리의 이혼율이 30%이상에 육박하고 있지만 그래도 목회자만큼은 가정을 지켜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것은 그만큼 가정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모든 이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가정은 행복의 보금자리요, 안식처라는 사실을 목회자 가정을 통해 확인 받고 싶어 한다. 아마도 이런 성도들의 소망은 시대가 황폐해질수록 더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목회자가 아무리 성도의 행복을 운운한다 해도 그 자신이 행복한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지 않는
외과적 수술 환자들은 수술 후 회복실이란 곳으로 옮겨진다. 회복실은 위급한 일이 발생 했을 때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곳이다. 회복실에서는 마취가 풀리면서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데 그게 바로 통증이다. 통증이 두려워 마취를 깊게 한다거나 자주 마취를 해 통증을 피하려 한다면 회복하는데 장애가 생긴다. 그래서 회복단계에서는 환자가 통증을 직면해 이기려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 통증의 고통은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고, 또 수술을 선택했기에 꼭 만나야만 하는 회복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건강의 회복을 위해서는 얼마간의 통증은 내 스스로 선택하여 감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암의 특징은 자각증상이 없는 것처럼 부정적 수치심의 특징도 자신과 타인에게 멋지고 건강하게 보이는 행동으로 위장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수치심을 찾아내고 내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은 아프고 힘들다. 나는 이것을 직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어느 정도 치유하는 데에도 이르렀으나 완벽하다거나 완전한 치유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내 스스로 완벽하거나 완전한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한, 또 내가 나 스스로 그렇게 여겨져서 자신이나 가족,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타인을 완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