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산 예벨 무사(Jebel Musa) 북서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성 캐더린(St. Caatherine) 수도원’ 에는 닐루스라는 수도사가 수도하면서 살고 있었다.작은 체구에 깡마른 몸은 그가 얼마나 많은 수도에 전념했는가를 잘 반영해주고 있었고, 학식과 지혜, 인품과 덕망을 두루 갖춘 수도사였기에 많은 젊은 수도사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이 노수도사가 어쩌다 한마디 던지는 말이 수도사들의 영혼을 뒤집어 놓는 까닭에 항상 젊은 수도사들이 그의 주변에서 떠나지 않고 그를 존경하고 따르고 있었다.5월이 지나고 6월의 길목으로 접어 들어가는 어느 날, 테오나스라는 젊은 수도사가 노 수도사에게 질문을 했다.“선생님 수도원에 정원을 만들고 싶습니다. 어떤 꽃을 싶으면 좋겠습니까?” 말없이 젊은 수도사를 바라보던 노 수도사는 “나 같으면 들꽃들을 심겠네”라고 대답을 했다.젊은 수도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노 수도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 수도사는 다시 말했다. “자네 마음에 안 들면 백합과 장미를 심게”하고 말을 끝냈다.젊은 수도사는 열심히 정원을 조성했다. 그리고 장미와 백합을 나누어 심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장미와 백합은 꽃을 피웠고, 많은 사람들
사랑한다 말해요미워하며 살기엔 너무 짧지요두어 번의 실패와 포기그래,궤도 수정은 없어 광야생활 40년느보산 마루에 서면들어갈 수 없는 가나안빛나는 땅이 보인다 거기영원으로 가는 순간멈춰선 시계물은 늘 바다로 흐르지 않는다 달이 차오르는 밤이면역류하는 강아하스의 해시계가 물러날 때도있었다 하지만 내 삶의 이정표시간이 없어빙벽을 깬다 정명진 전도사는 파주 자유교회 담임목회자로 섬긴다.『한맥문학』으로 등단, 목산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꼴통’이란 말이 있다. 물론 비속어다. 그래서 국어사전적 의미를 정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용되는 경우를 살펴보면 대략적으로 그 의미를 산정할 수는 있다. 이 말은 원래 주로 아이들끼리 사용하던 비속어로 머리 나쁜 혹은 멍청한 말썽꾸러기라는 의미로 사용됐는데 일반적으로는 그런 경우 바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나중에 ‘극우 꼴통’이나 ‘극좌꼴통’과 같은 사회적 의미를 가진 말로 사용되면서 비합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막무가내라서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말썽꾸러기라는 의미가 더해졌다고 생각한다. 그 의미를 통해 꼴통이라 취급되는 사람들의 문제를 세 가지로 생각해보았다.첫째는 비합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매우 치열하게 전개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주장의 근거가 박약하거나 엉터리거나 일방적이며 억지스러운 경우가 많고 주장의 전개도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점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합리적 보수’ 라는 호칭도 ‘극우꼴통’이 보편타당한 합리성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차별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자신들의 주장만이 옳다는 자기중심적 전
현인과 구도자가 묵묵히 길을 걷고 있었는데, 이들이 조그마한 강가에 도착했을 때, 아리따운 여인 하나가 비 때문에 물이 불어난 강을 힘겹게 건너려 하다가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다행히 강이 깊지 않아 재빨리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난 다음이라 물에 젖어 맨살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여인의 모습에 구도자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여인은 강을 건너지도 되돌아오지도 못한 채 덜덜 떨고 있었지만 구도자는 연신 헛기침을 해대면서 먼 산만 바라볼 뿐이었다.그때였다. 묵묵히 그 광경을 바라보던 현인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등에 여인을 업고 강을 건너는 것이 아닌가. 현인의 등에 엎혀 무사히 건넌 여인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여 감사의 말을 전한 뒤 총총히 사라졌다.그렇게 여인을 보내고 마침내 참을 수 없다는 듯 구도자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지만 스승님 같은 분이 맨살이 훤히 드러난 여인을 업고 다니다니요. 혹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생각만 해도 망측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몹시도 흥분한 구도자는 얼굴을 붉히며 현인을 힐난했다. 잠자코 구도자의 말을
며칠 전, 뜨거운 북한선교의 한 불꽃이 꺼졌습니다. 주님은 스데반처럼 이분의 영혼을 감격으로 영접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교단 소속 북한 사역자 고 임 애란 선교사님, 저는 이분을 중국에서 처음 만났습니다.이분은 사랑의 사도였습니다.수년 동안 한 번도 이분이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북한사람들에게, 중국인들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을 한 번도 못 보았습니다.설교 중에도 그들을 정죄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늘 웃어주고, 감싸주고, 품어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이분을 해코지 하려고 많은 특무, 보위부원이 신분을 숨기고 접근했지만 이분의 사랑에 맘이 녹아내려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며 이분의 안위를 걱정해주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분은 그들의 신분을 성령을 통해 미리 알았지만 두려하지 않고 사랑으로 뜨겁게 품었던 것입니다.한국에 온 탈북민들은 이분을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그중 공무원으로 일하는 한 형제는 양아들로 이번에 상주역할을 했습니다. 이 분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반사체로 수많은 사람들을 환희 비추었습니다.이분은 기도의 사도였습니다. 기도할 때는 정말 불꽃 그 자체였습니다. 그 은혜의 열기가 함께 하는 이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그 기도는
내 조국. 내 나라를 사랑합니다. 지난 월요일(14일)에 연세중앙교회(윤석전 목사)에서 초교파적으로 수천여명이 교회 본당에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모여서 조국을 위해 울며, 부르짖으며, 통성으로 3시간 이상 기도했습니다. 전국에서 모였습니다. 전국에서 온 대형버스가 주차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월요일 마다 흰돌산에서 모이는 초교파 목회자 모임인 ‘실천목회 연구원과 사모 목회대학’의 주의 종들이 중심하여 모였습니다. 내 조국이 없이는 국민도 교회도 없습니다. 애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조국을 사랑합니다. 전국에서 교파를 초월해서 벅찬 가슴으로 모였습니다. 그 동안 조국을 위해 늘 기도하지 못한 것을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1시부터 시작된 강의는 김성국 자유연합대표가 했습니다. 강사의 첫마디는 엡6:12절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현재 싸우는 대상은 혈과 육이 아님을 분명히 했으며 김대표의 강의의 핵심은 우리의 신앙의 핵심을 관통했습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김일성,김정일 우상화 곧 신격화를 전재하며 그들은 그것을 목숨의 가치와 동일하게 하고 있으며, 이에 반하는 모든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제거한다는 것이다(북한에 김일성 부자 동상-38
안식년으로 귀국한 선교사님이 퀴즈를 내면서 말했다.“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던 동방박사들은 한국 사람이래요!”“예? 동방박사들이 한국 사람이라고요?” 평소에 우스갯소리를 잘 하지 않는 분이라, 웃어넘기면서도 여러 생각이 들었다. ‘외국에서 무슨 엉뚱한 학설이 제기됐나? 아니면, 우리나라가 동방이라고 자칭 재림주 하나님이 몇 십 명이라더니 또 어떤 이단이 생겼나?’4가지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동방에서 왔다는 것이고, 둘째는 무리지어 다닌다는 것이고, 셋째는 선물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고, 넷째는 박사들이라는 점이 그렇다는 것이다. 어디서 누가 지어냈는지는 모르지만, 한참을 웃었는데, 마음 한 편으로는 씁쓸함이 가시지 않았다. 특히 한국이 엉터리 박사 천국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임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 않은가!교육과학기술부, 우리나라 박사학위 등록 등을 관리하는 곳에 의하면, 목사님들이 받은 목회학박사(D.Min) 중에 가장 엉터리가 많다고 한다. (‘가짜 박사’라는 명칭까지 써가면서 가짜박사를 남발한 학교 이름들까지 발표한 적도 있다). 물론 제대로 과정을 거쳐서 수여하는 곳이 더 많을 텐데, 억울하게 오해를 받는 곳
흔히 좋은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일벌레가 되었다”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자신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봐야 한다. 설령 중단하고 싶어도 방법을 모르거나 그럴 수 없을거라고 지레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 이러한 경우 평생 피로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해결책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위안을 삼자.먼저 일벌레가 되려는 목적을 생각해봐야 한다.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일벌레가 되어야 한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신의 역량 이상을 쏟아 붓는 이유를 물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생존에 국한되지 않는다. 개인을 넘어선 위대한 대의 때문이라고나 할까? 자존감을 끌어올리자. 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믿음은 개인의 가치를 인정하는 현실을 바르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만약 스스로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우주의 중심을 지탱하는 사람은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생각과 같은 의미다. 그렇지만 조건을 따지지 않고 나를 사랑해주는 가족과 친구가 있다면 그들은 당신의 참 자아상을 비추는 거울이 될 것이다.이처럼 현실을 제대로 보는 시선은 낮은 자존감을 끌어올릴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자신을 바르게 보는 안목
일반적으로 잡초는 어디서나 볼 수 있고, 또 아무데서나 볼 수 있어서 귀하게 느껴지지 않고 함부로 대해도 될 것같은 마음이 든다. 질긴 생명력 하나만이 잡초의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부각되어서 잡초에게는 자존심같은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읽어 주는 남자」에는 자신의 문맹을 드러내는 것보다 수감생활을 택함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여자이야기가 나온다. 누가 봐도 어리석은 선택이지만 그녀는 그렇게 한다. 그런 그녀에게 한 남자는 책을 읽어서 녹음한 테이프를 감옥에 보내줌으로 그녀만의 방식으로 자존심을 지키도록 도와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그 남자의 사랑을 깨닫고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글을 배운다. 녹음테이프와 책을 대조해 가면서 글을 배우는 과정은 진정한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녀는 삐뚤빼뚤하는 글씨로 편지를 써서 자신이 더 이상 문맹이 아님을 보여주는데도 그 남자는 여전히 테이프를 배달한다. 남자의 일방적인 방식은 그녀가 평생을 걸고서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 무너졌고 무너진 자존심은 절망으로 이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자발적인 감옥행은 어리석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자발적인
“나를 할아버지로 불러 줄 사람을 찾는다. 매달 많지는 않지만 사례도 할 것이다”2004년 8월 한 이탈리아 일간지에 실린 이색 광고가 독자들의 눈길을 붙들었다. 당시의 여든살 노인인 지오르지오 안젤로치가 자신을 ‘입양’ 할 가족을 구한다며 게재를 신청한 문안이다. 12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살아온 안젤로치는 로마 근교에서 애완 고양이 몇 마리와 연금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퇴직 후 해온 활동이라고는 교사 경력을 살려 어린 학생들에게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가르친게 전부다. 의탁할 자녀나 친지 하나 없어 외로움을 견디다 못한 안젤로치는 급기야 자신을 ‘할아버지’로 받아들여주는 가족에게 월 500유로(약 75만원)를 지불하겠다는 조건까지 달아 눈물의 공개 호소를 하기에 이르렀다.이따금 해외의 나이든 거부들이 ‘젊고 예쁜 아내를 구한다’는 따위의 구인광고를 내서 화제를 뿌렸던 일들이 있엇다. 하지만 안젤로치의 사연은 몇 마디 입방아 소재로 치부할 수 없는 현대 사회의 서글픈 단면이다.세계 3위의 고령국인 이탈리아는 철저한 연금제도와 노인복지 제도로 일찍이 고령사회를 대비하여 각국의 ‘실버정책’에 방향키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가족 중시의 전통마저 견고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