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는 교회학교 어린이부가 있다. 우리 교회에는 2명의 초등학생이 있고, 지난 1월에 만 한 살이 지난 아기가 있다. 이 어린이들을 위해 교회학교 어린이부가 운영되고 있다. 다행히 우리 교회에는 대형교회에서 어린이부 사역을 오랫동안 해온 경험이 있는 여자 목사님이 있기에 그 목사님이 그 어린이들을 담당해 교회학교 성경공부를 진행하고 있다. 사실 우리 교회의 교회학교 어린이부는 한 명의 어린이로 시작했다. 한 명이 초등학생이 그 엄마와 함께 우리 교회에 등록했고, 그 어린이가 우리 교회에 등록한 다음 주일부터 교회학교 어린이부가 시작됐다. 한 명의 어린이였지만, 부목사님은 PPT와 성경공부를 준비했고, 교회학교 어린이부를 위한 주보도 만들었다. 여러 가지 학습활동도 정성스럽게 준비해 진행했는데, 그 어린이도 성경공부 시간을 매우 즐거워했다. 그러다가 한 명의 어린이가 더 등록했고, 이젠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기도 간헐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물론 아기는 엄마와 함께 옆에서 지켜보는 정도에 그치고 있지만 말이다. 보통 개척교회나 작은 교회들은 교회학교 어린이부나 청소년부를 운영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교육부서를 담당할 일꾼이
“1소대 김진혁 병장님 행정반에 전화 와있습니다.” 창문을 하나 열어도 초가을의 상쾌함이 느껴지는 토요일 오후, 병장을 단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한민국 육군 오대장성 중의 하나라는 자부심으로 그 조용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여보세요?” “어, 형이다.” “어쩐 일이야? 대한민국 해병 출신께서 전화를 다 주시고?” 형입니다. 대뜸 불안한 느낌이 들기 시작합니다. ‘형이 부대로 전화를 한다? 무슨 일 있나?’ “응 특별한 것은 아니고, 너 혹시 장민경이라고 아냐?” “장민경? 알지” 저하고 같은 학번 동기로 조막만한 얼굴에 키도 작고 수줍음을 잘 타는 그런 자매였는데, 저하고도 간단한 인사 정도는 하는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교육학과 97학번?” “그렇지!” “근데 왜?” “아니, 걔가 좀 어떤 사람인가 싶어서? 사람 괜찮냐?” “아 그럼! 착하지. 나 군대 올 때까지 그 자매 얼굴 보면 한 번도 웃지 않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래 알았어. 나중에 통화하자.” “어? 그, 그래.” ‘이거 이거~ 작업 들어가려고 하는구나’ 직감이 왔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처음이요, 마지막인 형과의 통화가 그렇게 짧게 끝나고, 형이 말한 자매가 내가
(창세기 4장 16~24절) 아버지 세대 잘못을 그대로 따라 한 가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또 한 번 참으시고 더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신 장면을 봤습니다. 이후 가인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창세기가 가인의 나머지 삶을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으니 많지 않은 기록을 가지고 추측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 4:16~17) 가인은 에덴동산 동쪽에 있는 놋 땅에서 살게 됐습니다. 이곳에서 아내를 만났고 아들을 낳아 에녹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지 모르나 정착 생활을 못하는 벌을 받았으니 농사는 아니었을 테고 터를 잡아 집을 지을 수도 없었을 겁니다. 다만 그의 가족은 유랑생활을 할 이유가 없었죠. 아들 에녹이 태어나자 가인은 성을 쌓았습니다. 성을 쌓는 일이 혼자 힘만으로 될 리가 없으니 이 당시만 해도 가인이 꽤 큰 세력을 얻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을 쌓은 뒤 행적은 창세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유랑생활을 하면서 젊은 시절 범했던 실수를 후회하며 살았
저에게는 특별한 조카가 한 명 있습니다. ‘아영이’인데요. 지난 2014년 2월 16일 이집트 무장단체 알 마크디스의 자살폭탄테러로 숨진, 동생 김진규 목사의 딸입니다. 아영이가 4살이 되자 벌어진 일이니 크고 나면 자신의 아빠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샤르맬 셰이크 국제병원 냉동 창고에서 마주한 동생을 데리고 서울 대방동 보라매병원 장례식장으로 왔습니다. 동생 소식에 오열하고 정신 못 차리는 저와는 달리 형님은 매우 의연했습니다. 어쩜 눈물 한 번 흘리지 않을까 할 정도였는데, 저는 냉동 창고에서 막내 동생의 시신을 마주하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시신을 어루만지며 오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정신을 못 차리니 동생을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 혹 틀어질지 모르는 일처리를 위해 냉정함을 유지했었던 것입니다. 인천국제공항 카고 터미널에 대기해 있던 의전차량에 동생의 관을 싣고, 약 한 시간 가량을 달려 도착했는데, 우리 삼형제가 이렇게 한 차량에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왠지 1분도 걸리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미리 나와 있던 가족들과 많은 지인들이 눈물로 동생을 맞았습니다. 제수씨를 포함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생이 떠나
저의 모교회는 대전대흥교회입니다. 1985년 중학생 때부터 시작해 2019년 12월 부사역자까지 34년의 시간이었습니다. 2020년은 휴식을 취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간에 이계호 교수(태초먹거리)의 요청으로 2020년 3월부터 함께 사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3개월은 문서사역과 함께 주변 카이스트, 충남대, 목원대, 한밭대 청년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 코로나19가 발생하고 모든 사역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서사역과 함께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면서 낯선 환경에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적응하게 됐습니다. 당시는 교회 사역을 쉬는 상황이라 함께하는교회(김요한 목사)에 잠시 출석했고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집에서 비대면 예배를 드렸습니다. 2020년 8월 2일 주일부터 아들 은섭이의 권유로 은섭이와 함께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 이름은 어떻게 지을까 고민하면서 대전대흥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새벽에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은혜불꽃”이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은섭이의 이름도 한문으로 뜻을 풀면 “은혜불꽃”이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큰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았다고 족보에 올려야 한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얼마 전 ‘인도 천재’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인도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꿈의 직업은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다. 카스트제도의 뿌리 깊은 영향력으로 신분 상승이 쉽지 않고,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아이들에게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인도공과대학에 입학해 ‘엔지니어가’되는 것이다. 가난한 빈민가의 아이들이 ‘브릭스’라는 무료 공부방에서 열심히 공부해 인도공과대학에 들어가서 꿈을 성취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어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줬다. 몇 년 전 ‘세 얼간이’라는 인도 영화를 접하고서 인도를 다시 보게 됐던 만큼의 충격이었다. 인도는 대책없어 보이는 인구증가와 격심한 빈부격차, 열악한 사회환경 등으로 여행조차 꺼려지는 국가로만 인식되어 왔다. 몇 년 전 단기선교차 인도를 방문했을 때, 거리는 소와 사람들과 차가 뒤섞여 있었고 어딜 가나 사람들이 넘쳐났다
아들 은섭이는 미숙아로 태어났고 모든 것이 더디고 힘들었지만, 하나님께서 너무 이뻐하고 사랑하는 아들인 것을 항상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는 엄마의 임신중독증은 산모가 위험한 병이라는 의사의 이야기를 엄마 뱃 속에서 들었는지 다음날 이 땅에 태어났고, 7살쯤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7시간 가량의 ‘양쪽 고관절 수술’을 할 때도 의젓하게 잘 견뎌줬고, 8살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사시수술을 할 때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잘 버텨줬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수업을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학교에서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며 즐겁게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치료를 다니고 돌봄어린이집에 다니면서도 항상 밝게 웃는 ‘미소천사’였습니다. 그러던 중 엄마의 갑작스러운 뇌출혈은 어린 은섭이에게 충격이었지만, 매일 엄마가 깨어나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2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엄마를 보기 위해 병원에 갔습니다. 엄마와 함께 병원밥도 맛있게 먹었고, 엄마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했습니다. 12년이라는 엄마의 빈자리를 아빠 혼자서 채워 줬지만 아들은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고 오히려 엄마를 걱정하는 아주 착한 크리스천이
2014년 2월 16일, 저희 가족에게는 잊지 못할 아픈 기억이 존재합니다. 제법 알려진 대로, 동생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저희 곁을 떠난 날입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보통 저녁 9시 정도 됩니다. 그러면 저희 아래층에 계시는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2층으로 올라갑니다. 손 발을 씻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텔레비전을 틀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개그콘서트를 함께 보다가 잠이 들었고, 그제서야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뉴스를 보게 됐는데, 갑자기 속보 한 줄이 화면 아래에 굵게 자리하였습니다. 한국인 성지순례객이 이집트 타바 국경에서 폭탄테러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는데, 뉴스를 보다 속보라고 뜨는 내용이야 수도 없이 봐왔기 때문에 아내와 함께 다친 사람이 적었으면 좋겠단 이야기를 나눈 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통곡소리가 들려 누가 이렇게 울부짖냐 하니 아내가 1층에서 들리는 소리 같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뛰어 내려가니 아버지께서 저를 보시자마자 “우리 막둥이가 죽었다”고 큰 울부짖음으로 말씀하십니다. 깜짝 놀라 TV를 바라봤습니다. 아무리 확인을 해봐도 한국인 사망자 명단에 동생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당연
아내인 조은영은 1999년 대학원을 다닐 당시에 동기 전도사의 소개로 만나게 됐습니다. 모교회인 대흥교회 청년부를 출석하는 자매였습니다. 아내와 저는 비전과 꿈이 같았고 아내는 사회복지에 관한 일과 상담 관련 직장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며 빠듯한 생활을 하면서 부푼 꿈을 꾸며 신학생으로 열심히 공부해 앞으로 유학을 가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희는 2000년에 결혼해 가정을 이뤘고, 오랫동안 기도했던 아들을 주셔서 2001년 3월에 출산을 했습니다. 당시 아내가 사회복지 공무원으로 잦은 야근과 과다 업무로 인해 ‘임신중독증’이라는 산모에게 치명적인 병이 걸립니다. 산모와 태아가 모두 위험했는데 감사하게도 아들이 2개월 먼저 태어났고 둘 다 중환자실로 가게 됩니다. 아들 은섭이는 인큐베이터에서 1.73kg 미숙아로 태어나 한 달을 보냈습니다. 교회와 동기 전도사들의 간절한 기도로 퇴원했지만, 아들은 뇌가 심하게 손상돼 ‘백질연화증’으로 중증뇌병변장애아가 됐습니다. 충남대학교 재활의학과 교수는 아들이 이 땅에 살 동안은 평생 혼자 걷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판정을 내렸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힘이 들었지만
이 분위기는 제가 선배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3학년 졸업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는데, 졸업을 하고 떠난 사람이라도 흑석동 건일이 형의 존재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 3학년 수능시험을 몇 주 앞둔 어느 날 이었습니다. 위의 선배라는 사람을 한 명 데리고 건일이형이 학교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진혁아, 잘 지냈냐, 인사드려라 동석이(가명)형이다.” 덩치가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우리 학교 선배님이시기도 하다.” “네.” “일단 어디로 가자.” 동석이형은 이미 술이 좀 취해 있었는데, 학교 앞 도로에서 제 교복을 벗어 달라더니 자기 바지까지 다 벗어서 저에게 던져줍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팬티 한 장 걸친 채 옷을 갈아입고, 형들이 안내하는 지하 술집으로 향했습니다. “야! 얌마!! 거기 교복 어디가!” 화장실 쪽에서 나오던 사장님이 우리를 불러 세웁니다. “사장님 저에요, 동석이” “동석이 왔는가? 이게 뭐여 깜짝 놀랐네.” 조그만 밀실 같은 곳으로 들어가니, 이미 술이고 뭐고 다 세팅이 되어 있고, 제 자리까지 마련되어 있습니다. “진혁이라고 했냐? 한 잔 받아라.” 옆에 있던 건일이 형이 양주잔을 하나 들어 저에게 주며 말을 잇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