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을 “자칭 사도”로 그의 사도직을 조롱했다. 적대자들로부터 사도직에 대한 의심을 받았던 바울은 당대에 거짓 사도들로부터 자신을 구분하였다. 바울이 제시한 참된 사도와 거짓 사도를 구분하는 대원칙은 하나님으로부터 ‘파송 받은 자인가,’ ‘아닌가’ 이다. 바울은 자신은 사람들로부터 파송 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복음 전파의 소명을 받아 파송된 자임을 강조한다(갈 1:1, 11~12).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복음의 계시와 이방인 선교에 소명을 받고 파송 받았다면, 거짓 사도들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위임을 받고 파송된 자들이다. 바울이 거짓 사도들과 구분하여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는 것을 볼 때, 신약이 기록되던 원시 기독교 시대에 12사도와 바울 사도 외에도 다른 사도들이 있었거나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희사한다. 그렇다면 신약성서에서 “사도”라는 명칭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에 관해 물음에 답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도”로 번역한 아포스토로스는 아포(~로 부터)와 동사 스텔로(내가 보낸다)가 결합해 파생한 “~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의 명사이다. 고대 헬라어 문헌에
넷째는 방문상담사 돌봄과 성장을 위한 자문 제공이다. 방문상담은 교회의 목양적 방문이나 사회적 방문의 경우 모두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와 격려 및 필요한 지원과 돌봄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가치 있는 사역이자 전문적인 활동이다. 하지만 낯선 곳을 찾아가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사람만 아니라 호의적이지 않은 여러 가족 구성원들이나 관리되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무거운 이슈들을 다룬다는 것은 스트레스가 크고, 신체적·정신적으로 에너지를 소진(burn-out)시키는 힘든 작업이다. 자신들의 상담교육이나 훈련의 범주를 벗어나는 이슈에 직면하거나 상담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더 악화되는 경우 상담사로서의 부적절감 등으로 혼란을 경험하기도 한다. 어느 전문 상담사도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이슈를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한계와 전문성에 관한 회의를 경험할 때가 있다. 실제로 필자가 만난 방문상담사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그들의 속마음을 들어주고 공감하며 위로와 격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많은 경우, 경제적 보상도 충분치 않거나 자원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경험을 오래 지속하기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들의 이름에 대해서 관여와 배려해주심이 있다. 사가랴의 아들 이름을 천사를 통해서 “요한”으로 미리 알려주셨는가 하면(눅 1:13) “고귀한 아버지”란 뜻의 아브람의 이름을 더 크고 위대한 ‘열국의 아버지’ 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꿔 주시기도 했다(창17:5). 또한 개인적으로 특별히 이름을 불러주신 사례들도 있다. 호렙산 근처에서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러간 모세나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던 사무엘을 밤중에 각각 부르시고는 사명 이나 장차 될 일을 말씀해주셨다(출3:4, 삼상3:10).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이름을 기억하시며, 불러 주시며, 다윗처럼 존귀하게 만들어주시기도 한다(대상17:8).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이름을 귀중히 여긴다.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 지위, 업적, 생애 등을 반영하는 것으로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후세까지 명예롭게 되길 바란다. 그렇기에 목회자들도 교인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며 불러 주어야 한다. 나의 경우엔 대심방시 교인 자녀들의 이름을 갑자기 잊어버려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몇 번 이런 일을 겪은 후엔 메모지에 이름을 적어
텔레비전 드라마 속의 주인공은 화려하게 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운 퇴장이 더 중요하다. 어떤 주인공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리얼하게 연기하다가 불행하게 퇴장하는가 하면 어떤 주인공은 해피앤딩으로 등장할 때보다 퇴장이 더 아름다운 주인공도 있다. 미국의 대통령은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할 정도로 전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막강한 자리이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은 전 세계인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된다. 미국 46대 조 바이든 대통령은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며 엄숙하게 취임식이 진행되는 현장에 전임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를 부정 선거라며 바이든 당선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다가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 난동 사건이 발생하면서 트럼프는 오랜 전통을 깨고 취임 식에 참석하지 않고 백악관을 떠나는 대통령답지 않은 모습을 연출했다. 만 75세의 고령에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미국의 대통령으로 4년간 재임한 것도 영광스러운 일인데 신사답게 승복하고 취임식에서 축하의 악수를 하고 물러났더라면 멋진 모습이었을 텐데 왜 저렇게 비신 사적이고 명예롭지 못한 퇴장의 길을 택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는 정치인들이나 공직자들이 자신
토요일 저녁 젊은이부 예배에 들어갔습니 다. 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주안에서 살면서 혹시 간증할 사람이 있으면 한번 해보아라”라고 말입니다.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다음 주일에 똑같은 질문을 또 했습니다. 그때도 여전히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은 간증할 사람이 많아서 시간에 쫓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 다음 주 예배 시간에 이어서 할 정도로 이제는 간증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예배 때마다 간증 시간을 넣으니 아이들이 매주 깨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서 좋고 또 함께 있는 다른 젊은이들이 여러 면에서 다채롭게 은혜를 받게 되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감동스러운 간증은 대 예배 시간에 모든 성도와 함께 은혜를 나눴습니다. 그 후, 저는 전 교인들에게 이와 같은 교육하게 됐습니다. 제가 “신앙은?” 하면 교인들은 “삶이다”라고 고백하게 했고, 제가 “기도는?” 하면 교인들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의 우선순위는?” 하면 “교회〉 가정〉 직장”이라고 하며, “인격적인 우선순위는?” 하면 “하나님〉 가족〉 이웃”이 라고 합니다. 오늘날 청년들이
가족의 역기능 가운데 부모가 자녀에게 상처를 주는 학대에는 성적, 신체적, 정서적 학대 등이 있다. 첫째, 성적 학대다. 성적 학대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그러나 신체적이지 않은 학대는 학대가 아니라고 오해하기 쉽다. 부부 중 어느 쪽이든 자신의 배우자보다 자녀가 더 중요하다면 잠재적인 정서적 성적 학대가 된다. 부부 사이의 갈등과 부부 중 한쪽이 자녀와 밀착된 것이야말로 가족의 대표적 역기능의 삼각구조다. 즉 부모가 부부 사이에서 해결하지 못한 신체적, 정서적, 심리적인 필요를 아이를 이용해서 채우게 되기에 일종의 학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역기능의 삼각구조’라고 부르고 싶다. 부부가 갈등이 있을 때, 아이의 아빠가 주로 일을 나가면 집에서는 엄마가 자녀들과 밀착이 된다. 특히 이성의 자녀인 아들에게 밀착이 된다. 그러면 엄마가 아이의 심리적인 대리 아내가 되고, 아이는 엄마의 심리적 대리 남편이 된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아이로서 그리고 자녀로서 참 자아를 잃어버리고 누군가의 대리인이요, 역할을 하게 되기에 거짓 자기를 형성하며 가면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학대가 되는 것이다. 둘째, 신체적인 학대는 정신
미식가들의 바이블, ‘미슐랭 가이드’를 아시나요? 음식 맛, 서비스, 분위기, 가격 등을 기준으로 레스토랑의 등급을 매기는 가이드이다. 가장 낮은 별 1개부터 별 3개까지의 등급을 매기게 되는데 별 3 개를 받은 레스토랑의 요리사는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고 한다. 매년 별의 등급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별을 얻는 것도 힘들고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요리의 나라 프랑스에 조차 단지 20여개의 3스타 레스토랑만 있다고 하니 정말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은 정말 최고의 맛집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의 가격은 상상 이상이다. 점심 코스가 1인 10만원 수준이고 저녁 코스는 2인에 50만원에서 100만원에 이르는 메뉴가 많다. 그러니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 되는 것은 요리사에게 있어서 인생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명예와 부를 동시에 차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을 선발해 가이드를 만드는 회사가 아주 재미있다. 이 정도 권위라면 뉴욕의 대단한 요리사 그룹이나, 세계 최고의 프랑스 요리학교인 르꼬동 블루 정도에서 관장해야 맞는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미슐랭 가이드를 만드는 회사는 타이어 회사다. 우리가 잘
예수 그리스도는 한 마리의 ‘잃은 양’이라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들을 찾아가 필요를 지원하고 회복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은 시간적·경제적으로 합리적 판단이라 볼 수 없겠지만 ‘잃은 양’에 대한 사랑은 그런 모든 수고에 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한 것이기에 얼마든지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간곡하고도 단호하게 명령하셨다(눅 10:37). 필자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방문상담의 필요 성과 효과를 경험한 바 있다. 안면신경이 마비되어 입이 한 쪽으로 돌아가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 모습을 보이기 싫어 자신을 고립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원망 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때 ‘잃은 양’과 같은 소년을 찾아와 손을 내민 사람은 이웃에 사는 중년 여성 한 사람이 유일했다. 전문적 상담훈련은 없었지만 어린 소년의 내적 고통을 공감하고 들어주며, 욥의 친구들처럼 문제나 잘못을 묻는 대신 위로와 격려, 다시 활짝 웃는 날이 올 것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고 기도해 줬다. 그 방문 대화가
기적은 행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서 나타나는 것이다. 기적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곧 자연과 과학의 질서를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법칙이다. 국가에도 일반법이 있지만 특별법이 능가하듯이 더 높은 차원의 법칙인 기적, 이적은 물리적 법칙을 뛰어넘을 수 있다. 세상의 왕권도 자의대로 하는데,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특별히 원하신다면 자연법칙을 잠시 묶고 기적을 시행하실 수 없으시겠는가.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특수 목적을 위해 일시적으로 자연법칙을 중단하고 얼마든지 초자연적 법칙인 기적으로 대치하실 수 있다는 것이 기적에 대한 생각이다. 하지만 신학대학원에 들어가면서 만난 조직신학 교수였던 모 박사는 기적의 시대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계시하신 구약 및 예수님과 사도들의 시대를 지나면서 사라졌다고 했고,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나 오늘날에는 기적과 표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강의했다. 이에 나를 포함해 많은 신학생들이 의구심을 갖고 질문을 쏘아 붙였다. 그러나 교수님의 신학적 주장 (dogma)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난 70년간의 삶을 돌아볼 때, 주님의 손길 안에 일어난 기적 들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더러운 발자국을 지우기 위해서 허리춤에 빗자루를 매달고 다녀야 합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실 수도 없습니다. 사원에 들어가서 신께 기도드릴 수도 없습니다. 신성한 그곳에 그림자도 드리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천하게 태어난 것은 전생에 지은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 들은 우리와 닿는 것만으로도 오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은 불가촉천민 달리트입니다’ 이것은 나렌드라 자다브가 저술한 ‘신도 버린 사람들’이란 책 표지에 실린 불가촉천민에 관한 글이다. 힌두교에 의해서 생겨난 인도의 신분 제도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사, 수드라 등의 4계급인데 이카스트 체제에 속하지 않는 가장 하층의 사람들이 불가촉천민들이다. 1955년 법이 제정되어 그들을 종교적, 직업적, 사회적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인도 총인구의 약 15%에 속해있는 국민들은 지금도 차별대우를 받으며 절대적인 빈곤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불가촉천민은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파키스탄 남부의 ‘누더기를 입은 땅’이란 뜻의 쫄리스탄 사막에도 거주하고 있는데 바로 마르와리족이다. 이들의 숫자는 약 2만 명이나 그 이상일 수 있는데 힌두교도들로서 역시 천대받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