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숲에서 하천이 범람하면 지대가 낮은 지역의 개미들은 자동적으로 한 덩어리로 뭉친다고 한다. 그들은 여왕개미를 보호하기 위해 여왕개미를 중심으로 큰 구형을 형성한 후 강을 건넌다. 그렇게 새로운 둔덕을 찾아 헤엄치던 중, 가장 바깥을 둘러쌌던 개미들은 집단을 위해 장렬히 희생한다.개미의 이타 정신은 일개미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형제자매를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자식을 양육하는 것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무리의 이익을 위해 생명도 아끼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폭탄 하나가 연합군 진지로 떨어졌다. 상위(중위와 대위 사이)는 마땅히 엎드려 폭탄을 피해야 했지만 돌연 몸을 돌려 4, 5미터 밖에 있는 병사에게로 달려가 그를 감싸 안았다.폭발하는 소리가 지나간 후 상위가 몸을 일으켜 뒤를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좀 전까지 자신이 있던 자리가 폭탄의 잔해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사실 힘의 작용은 사람의 마음과도 같다. 어디에서나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 사회가 불공평하게 느껴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그러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해 주면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질 것이다. 사실 우리는 날마다 많은 사람들의 애정을 받으며
21세기의 교회가 당면한 큰 문제는 종교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 종교 다원과 포스트 모던니즘의 영향은 점점 더 단 하나의 객관적 진리를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의 복음을 과연 유효하게 선언하고 선포된 복음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력을 가지고, 그들의 삶과 생활을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이제까지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 혹은 교회 중심적 배타주의를 고수하며 신앙을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종교 다원주의란 종교 다원 현상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다원적인 종교들을 동일한 지평선에서 바라보며 다원적 종교들의 궁극적인 것의 실제를 주장하는 종교적, 신학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어떤 특수하고 고유한 종교로 바라보지 않고 다양한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데 문제가 있다. 따라서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의 진리가 있고 나름대로의 구원의 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기독교는 그 여러 종교들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든, 유교를 믿든, 잘만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행복한 곳을 찾으라면 분명 가정을 꼽을 것이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문제가 생겨도, 슬픔이 있어도 그 모든 것을 치유하고 풀어줄 수 있는 곳이 가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가정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가정에서 불행이 싹트는 경우가 많다.5월 달 마지막을 보내면서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깊이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보면 가정생활에 대한 지혜가 담겨져 있다. 특히 시편에서 보면 ‘너, 라고 일컬어지는 대상은 남자로 보인다. 또 ’네 집 안방에 있는 아내,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 네 자식의 자식이 다 등장한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가정은 주님을 경외하며, 화목하게 살고 있는 가정으로 우리가 모델로 삼을 만한 모범적인 가정이다. 이 시대의 가정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자식은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이 없어지고,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다. 요즈음엔 “역기능적 가정”이 너무 많아졌다. 가정은 깨어지고, 나누어지고, 미워하고 질시하는 곳으로 변했다. 이처럼 역기능적 가정이 늘어가는 이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우리나라 결혼 건수는 급격히 감소한데 비해 결혼 생활을 20년 이상한 부부의 이혼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내국인 이혼 통계를 보면 동거 지속기간별, 연령별, 자녀수 등등이 고르게 분포하고 있다. 그래서 단순히 이혼율을 계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이혼자의 평균 동거기간이 2006년에는 3.3년, 2007년에는 2.7년으로 점점 줄었다. 혼인 동거기간 4년 이내에 이혼을 하는 경우가 이혼건수의 90%를 차지한다. 동거기간은 최초 결혼부터 이혼 판결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결혼 후 바로 가출할 경우, 가출신고 후 6개월이 넘어야 이혼소송을 할 수 있다. 한동안 일본에서 “나리타의 이별”이 대유행이었다. 막내의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고 나리타공항에서 새로 맞은 자부의 신혼여행을 떠나보낸 일본의 부부가 함께 한 평생을 뒤로 하고 남남으로 갈라서는 것이다. 자녀들을 무사히 출가시키고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일차 마무리한 일본인 아내들이 “나도 인간”임을 내세우며 억압받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훌훌 내 갈길 떠나는 것이다. 10여 년 전 일본에서 일기 시작한 황혼이혼 바람이 우리 사회에도 거세게 불고 있다. 60대 이상 노부부의 황혼이혼 건수가 급
세월호 사건 보도를 지켜보면서 (주)세모의 회장 유병언 “목사”를 떠올렸다. 세월호 침몰사고의 이면에는 구원파라는 이단사이비종교의 교주가 있다. 이 한 사람의 잘못된 신학과 그릇된 가치관, 사기성 인격과 탐심이 오대양 사건과 한강 유람선 충돌사건에 이어 300명 가까이를 수장하는 참극을 빚어냈음이 드러나고 있다.사람들은 당장 무책임한 선장과 배에 탄 사람들을 구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제일 먼저 빠져나온 구원파 선원들의 행동에 분노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참극은 한 사람 유병언 회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평소 “하나님의 사업을 의논하는 것이 바로 기도이며 예배”라고 가르쳤다. “(구원파)교회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 ” “구원은 개인이 받지만 신앙생활은 교회가 한다” “일단 죄사함을 받으면 어떻게 살든 천국에 간다.” “구원파 안에 붙어있는 자만 예수 재림 시에 들림을 받는다”는 전혀 비성경적인 교리로 교인들의 충성심을 유도하여 1만여 구원파 신도들의 차명대출을 통해 5,000억원의 재산을 증식할 수 있었다.생각을 결과를 낳는다. 성경은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사람됨)도 그러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람은 믿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바울
5월은 언제나 싱그럽고 푸근하다. 신록과 젊음의 계절이다. 단언컨대 일 년 중 가장 활기차고 생명력이 넘치는 계절이다. 사람이나 자연 모두 마찬가지이다. 희망의 싹과 생명이 힘이 이 대 절정을 이룬다. 때문에 사람들이 5월을 가장 아름다운 달로 여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5일 어린이날, 8일 어버이날, 15일 스승의 날, 16일 성년의 날, 등이 줄을 잇는다. 5월을 ‘가정의 달’로 정한 것도 계절의 아름다움과 상관없지 않을 것이다. 12월이라고 해서 가정의 의미를 되새기지 말라는 법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5월에 가정의 뜻을 되새긴다. 그것은 아마 자연의 생명력을 통해 성숙과 조화와 상생의 듯을 배우라는 이유에서 인듯하다. 유독 사람만이 소중한 정과 기본적인 도리를 헤아릴 줄 안다. 사람으로서의 참된 가치를 높이고 되새기게 하는 날들은 5월에 몰려있다. 아름다운 계절이 사람들의 심성에 사랑이 넘치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갖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가정이 잘되고 화평해야 나라가 융성하고 평화롭다. 새삼 따져볼 것도 없다. 자신의 가정을 잘 돌본 다음 큰일을 도모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오늘에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되새겨야 하는 만고불변의 진리
선진교회/ 박영진 목사기독교 한국침례회 부흥사회에서 주최한 세미나를 통하여 부흥의 불을 붙여 놓은 기회가 되었다. 주제는 “부흥” 우리가 그렇게 바라며 꿈꾸는 부흥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는 부흥을 믿지 않고 있다. 부흥에 대하여 자꾸 변명을 하려고 한다. 지금 한국 교회에는 부흥은 지나갔다. 부흥이 안 된다는 이상한 마귀 같은 소문들이 퍼져있다. 지금껏 ‘왜 부흥하지 못했는가’ 여기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했다. 부흥이 안 되는 원인을 찾으며 변명했다. 결론은 개척은 안 된다. 상가는 안 된다. 작은 교회는 안 된다며, 부흥하지 못함을 환경과 세상의 흐름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너무 약해져 있다. 이제는 기독교가 환경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단들을 무서워하고 있다. 누가복음 13:33절에서 예수께서는 뭐라고 하셨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다.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닌가? 기독교는 약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약해져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번 세미나의 특징이 있었다. 부흥의 불을 붙여 놓았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본다.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앞날을 생각하기 위해서다. 몇 일전 세월호의 침몰 소식에 전 국민이 안타까워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공항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수백 명의 탑승자를 바다에 수장시켜버렸다. 솔직히 300명이 넘게 죽거나 실종됐다.하지만 유가족과 지인들을 고려한 언론과 정부는 실종으로 표기해 두었다. 문제는 이번 세월호 침몰 참사와 구원파 논란으로 엉뚱하게 기독교 전체에 불똥이 튈 수 있다는 점이다. 교회 안에서야 구원파가 기독교와 별개지만, 밖에서는 그 같은 사실 인지가 어렵고, 또 구분의 필요조차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같이 반기독교 정서가 만연한 중에는 더더욱 그렇다. 뿐만 아니라 상당수 교인들의 모습에서 ‘구원파’ 와 유사한 구원관이 나타난다는 비판도 있어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 특히 기독교한국침례회 교단은 정통교단 중에서도 성경적 보수 교단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세계적으로 큰 교단이 침례교단이다. 그런데 유사 사이비들이 근래에 들어 침례교 간판을 걸고 있어 적지 않은 피해가 우려되고 있다. 중앙 일간지를 비롯해서, 메인 TV 방송에서도 침례교를 여가 없이 뉴스를 통해 내보내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한국침례회, 정통교단이 세월호
고등학생 300여명을 태운 세월호가 바다로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이 처음엔 분노를 느꼈다. 혼자 탈출한 선장과 엉망으로 사고 수습을 하는 공무원을 엄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는 불안감으로 바뀌고 있다. 이 나라에서 애 키우기가 겁난다는 불안이다. 젊은 부모나 예비 부모는 물론 이미 자식 다 키워놓은 중년까지 불안에 떨고 있다. 주말에 아파트 어귀에 모인 주부들은 “이런 나라에서 외동은 절대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한 주부는 “며느리한테 적어도 둘은 낳아야 한다. 하나는 절대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다른 주부들도 모두 맞장구를 쳤다. 자식 한두 명 잃는 것이 예삿일로 여겨진 못 살던 시절에나 오갔을 대화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들리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이런 불안감은 진도 사태 이전부터 누적되어 왔다. 아이들이 어이없이 죽어간 사건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년 7월 해병대 캠프에 간 고등학생 5명이 바다에 빠져 숨졌고, 올 2월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갔던 대학생 9명이 무너진 건물에 깔려 사망했다. 모두 우리나라에 사는 아이라면 일상적으로 거쳐 가는 행사에서 당한 일이라 남의 일처
살면서 낯설고 회한이 밀려올 때가 변화되지 않는 내면과 마주 할 때이다. 인생의 연륜이 묻어나는 숙성된 향기보다 초보를 버리지 못한 모습을 볼 때이다. 경주를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하고 그것을 기뻐해야 하는데 그 반대일 때 더욱 그렇다. 쉽고 편한 가벼운 길을 좋아하며, 안일하게 살고 싶은 어린 모습은 당황스럽게 한다. 이해관계에 따라 적당히 타협하며 대우받고 인정받는 것에 예민하다가, 살며시 관심 있는 모습을 볼 때 놀란다. 심는 대로 거두는 하늘의 추수법칙을 믿으면서, 속성이나 꼼수로 해결하고 싶은 게으른 착각도 여전하다. 힘들고 어려운 짐을 벗고 가벼운 것으로 바꾸면서도 사명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말을 걸어온다. 신앙생활의 나이테가 쌓여갈수록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길로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는 고백이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편리하도록 줄이고 바꾸어 쉽게 걷기보다, 정해진 것을 메고 정해진 거리만큼 가는 것이 몸에 익숙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아쉽다.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왔으면 적응되고 익숙해져서 세상이 오히려 낯설어야 하는데 말이다.사명의 무게만큼 지고가야 하는 것이 십자가이고, 그 거리만큼 걸어가야 하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개인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