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침례교회가 독자적 교단으로 존재하게 된 원인이자 침례교 정체성의 근간인 신약성경적 교회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지난 두 번의 글을 통해 신약성경적 교회관 중 신자의 침례, 중생자 회원, 엄격한 치리 전통 등에 대해 설명했다. 이번 호에서는 상징주의 성례신학, 회중주의, 개교회주의 등을 살펴볼 것이다. 1. 상징으로서의 성례 침례교회는 교회의식(성례)으로 침례와 주의 만찬 두 가지 의식만 인정한다. 그리고 침례와 주의 만찬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며, 따라서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상징적 의식으로 믿는다. 침례교회는 대표적인 반(反)가톨릭주의 교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성례를 통해 주입된다는 가톨릭 성례주의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성례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매개체 혹은 구원의 방도라는 다른 개신교단들의 사상도 인정하지 않는다. 침례교회는 구원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얻게 되므로, 성례는 구원과 관련이 없는 상징적 의미만을 가진다고 믿는다. 침례교회는 침례는 신자가 죄에 대해 죽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하며,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고 믿는다. 주의 만찬은 또한 그리스도
필자는 요한복음에서 ‘인자’(사람의 아들) 칭호가 나오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한 요한의 신학적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호에서는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에 나오는 인자 구절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하여 알아봤다. 인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속의 경륜 속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독생자이시다. 인자는 또한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장대에 매단 것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인자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시다. 이번 호에서는 오병이어 표적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다시 찾아온 무리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에 나오는 인자 말씀을 통해 제시되는 신학적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병이어 표적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다시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반가운 인사말에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들이 그를 찾아온 목적 곧 그들의
이해인이란 시인이 ‘고운 말 쓰기’를 위해 이런 제목으로 5행시를 썼다. 고 – 운 말을 써야 고상한 사람이 되지요 운 – 치 있는 우리말을 꾸준히 써가노라면 말 – 의 향기가 널리 퍼져 세상은 꽃밭 되지요. 쓰 – 지 말죠. 속어, 비어, 극단적 부정적인 말 기 – 품 있는 사랑의 말 다 함께 갈고 닦아요! 우리 사회의 언어가 점점 추악해지고 파괴적인 것으로 오염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순화를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는 이들이 있어 다행스럽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시인처럼 고운 말, 건전한 말, 아름다운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주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어여뻐하시는 입은 어떤 것일까? 아가 4장 3절에는 솔로몬 왕이 사랑하는 여인 술람미를 보고 “네 입은 어여쁘고”라고 칭송했다. ‘입’이란 입술에서 목구멍까지 이르는 부분이라고 국어사전은 정의한다. 입은 음식물 섭취를 위한 신체 기관이면서 소리를 내어 뭔가를 표현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솔로몬이 술람미의 입이 어여쁘다고 한 것은 젊고 아름다운 입일뿐더러 하는 말 또한 어여뻤다는 뜻일 것이다. 특히 솔로몬은 술람미의 입술을 ‘홍색실 같다’고 했다. 그녀의 입술 역시 젊고 붉어서 혈색이 좋았음을 나타냈으며,
2012년 10월 3일, 저희 아들이 결혼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평상시에 사람들을 통해서 말로만 듣던 며느리를 저희 가정에 실제로 맞이하게 됐습니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이 있듯이, 이 말이 그냥 전해 내려온 것이 아님을 실감했습니다. 제 눈에 며느리가 너무 사랑스럽고, 예쁘기도 하고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마주 본다는 자체만으로도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어느 날 우리 교회에서 여전도회 주최로 교회 앞 놀이터에서 바자회를 하게 됐습니다. 저희 며느리도 무리들 속에 함께 섞여서 옷가지들을 훑어보며 마음에 드는 것을 찾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평상시에 제 아내가 쇼핑을 가면 저도 때때로 같이 다니며 물건 고르는 것을 도와주곤 했는데 그날도 제 아내에게 했던 대로 며느리와 함께 물건들을 보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며느리가 고른 옷들을 모두 제 돈으로 지불해 줬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느껴지는 것은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선뜻 낼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전혀 아까운 마음이 안 들고, 심지어는 사준다는 그 자체만으로 제 마음이 너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며느리
“서양화에서 달을 그린다고 하면 붓으로 달의 모양을 확연하게 표현하겠지만, 동양화에서는 붓으로 직접 그리지 않는다. 달을 감싸고 있는 구름을 그림으로써 거기 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달이 있는 자리만 보여줄 뿐! 주변의 구름만 부지런히 그려내면 어느 순간,거기 달이 떠 있다. 이런 기법을 동양화에서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이라고 한다.” 김미라 저(著) ‘김미라의 감성사전’(책 읽는 수요일, 3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달을 그릴 때만이 아니라, 구름이나 안개를 그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붓으로 구름이나 안개를 직접 그리기보다는 산과 산, 산과 나무 사이에 여백을 둠으로써, 그것이 곧 구름이 되고 안개가 되도록 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내가 이러저러한 사람이라고 아무리 자랑을 해도 마음에 와 닿지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옆 그림 즉 그가 살아왔던 삶, 지금 살고 있는 삶을 보면 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문열의 ‘시인’은 우리가 잘 아는 설화 김삿갓 김병연의 이야기입니다. 가족의 애타는 바람을 뒤로 한 채 시인이 되어 일탈의 세계로 들어선 김삿갓을 둘째 아들 익균이 찾아 나섭니다. 이미 두 번이나 아버지를 놓친지라 단단히 벼르고, 드디어 아버지를
우연인지 행정상 편의 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에서는 안내전화와 번호가 114이지만 미국에서는 411번이고, 긴급전화가 한국에서는 119번이지만 미국에서는 911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어떤 국제통신의 약속일수 있다고 접어 둡시다. 또 한국에서는 초생달이 니은(ㄴ)자 방향으로 휘어져 뜨는 것을 볼 수 있고 교과서에서 그렇게 씌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초생달은 그 반대인 기역(ㄱ)자 방향으로 휘어져 뜰뿐만 아니라 교과서에도 그렇게 씌여져 있습니다. 지구는 둥급니다. 달을 보는 위치와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을 알면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고 사물의 양면을 보는 지혜를 갖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대개의 남의 말이란 사건 단면만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폐나 동전의 양면이나 뒷면 하나 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양면을 보고 사용해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 사람 나름대로의 처지와 입장이 따로 있습니다. 그 사람을 나무라기 전에 그를 먼저 이해하는 마음이 먼저일 것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잠깐! 정죄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합시다! 황희 정승이 농부에게 “검은 소와 누런
봄에는 싱싱한 황금빛으로 빛나며 여름에는 무성하고 그리고, 그러고나서 가을이 오면 다시 더욱 더 맑은 황금빛이 되고 마침내 나뭇잎 모두 떨어지면 보라, 줄기와 가지로 나목 되어 선 저 발가벗은 ‘힘’을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참나무(The Oak)’입니다. 테니슨은 인생을 달관한 경지에 이른 82세에 인생을 오크(The Oak)처럼 살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오크가 마침내 나뭇잎들이 다 떨어진 뒤에도 ‘나력(naked strength)’을 가진다고 예찬합니다. 나력은 본래적인 힘입니다.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은 뒤에도 남아 있는 힘을 나력이라고 합니다. 마치 권력을 휘두르던 정치가가 옷을 벗은 뒤에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나력을 가진 것입니다. 세상은 돈 때문에 권력 때문에 그 사람에게 모여 드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 사람이 돈과 권력을 다 놓고 난 뒤에도 힘이 있는가. 그를 존중하고 좋아하는가. 김은주 저(著) ‘1cm art’(허밍버드, 99쪽)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가 나보다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고개를 숙인다면 그것은 진짜 예의이다. 그가 나를 도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미소를 거두지
얼마 전 뉴스와 신문에서 빚 독촉을 받아 온 형이 흉기로 동생의 목과 등을 수차례 찔러 죽인 사건에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비극으로 끝이 난 형제 갈등의 시작은 우애가 돈독한 형의 사랑으로 시작됐다. 형이 로또에 당첨이 되어 8억 원을 손에 쥐게 되자, 아끼던 동생에게 집을 사주고 다른 형제들에게 당첨금의 일부를 나눠줬다. 형은 남은 당첨금으로 식당을 열었는데 경영이 악화로 문을 닫게 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사준 동생의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4천 600만원을 빌렸다. 처음에 동생은 그런 형의 처지를 이해했지만 빚 독촉이 계속되자 형과 동생은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사건 당일에도 술을 마신 형이 전화로 동생과 말다툼하던 중 형이 그만 화를 이기지 못하고 달려와 흉기를 꺼내 마구 휘둘러 동생을 죽이는 끔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신분석학과 사회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그의 책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have?)’에서 인간의 삶은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으로 구분하여 존재를 버린 지나친 소유욕은 인간을 우매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집트의 노예로 살고 있었던 히브리 백성들은 소유양식으로 살았다면 그들은 거친 광야에
4.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의 기독교전략 4차 산업혁명은 이전의 변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를 대신하는 기술이 아니라 지능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능으로 자연을 정복할 만큼 강해졌다면, 그 지능조차 보조하고 심지어 대체까지 할 수 있는 기술은 실로 가공할 힘을 행사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 무서운 힘이 반드시 건설적이고 결코 파괴적이지 않게 사용한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자동화가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허용해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1차, 2차, 3차 산업혁명이 이 세상의 일을 중심으로 다뤄 왔다면, 현재 진행 중인 4차 산업혁명은 신의 영역까지 들어갔다. 이러한 4차 산업은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종교계의 무서운 변화도 예측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육과 인간의 죽음을 결정짓는 영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신이 필요치 않은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종교는 있지만 신이 통치하는 세상은 없어지고 인간의 편리함과 유익을 추구하는 종교만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인 죄, 인간, 하나님이라는 구도 안에 예수
가정뿐만이 아니라 5만 명 이상이 거주하지만 신호등이 하나도 없는 스마트 도시도 등장한다. 이는 도시들이 서비스, 공공사업. 도로를 인터넷과 연결하고 스마트하고 지능적인 기능을 적용해 데이터 분석과 예측 모델링을 통해 이루어내는 미래의 도시가 될 것이다. 이처럼 4차 산업혁명은 빅 데이터 통계 기법을 통해 소비자의 욕구를 가장 정확하게 분석하고 파악하여 즉시 제품에 반영하는 기업이 시장을 주도하는 구조를 가져올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중심에는 소비자의 욕구가 있고, 이를 최고, 최대로 만족시키기 위해 연관된 기술들을 융합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3)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 사물 인터넷이란 인터넷을 기반으로 모든 사물을 연결하여 사람과 사물 혹은 사물과 사물 간의 정보를 상호 소통하는 지능형 기술이나 서비스를 말한다. 1969년 10월 29일 인류 최초의 인터넷 아르파넷(Arpanet) 두 컴퓨터는 접속 개시를 뜻하는 5바이트 크기의 한 단어 ‘Log In’을 전송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인류 최초의 인터넷 연결이후 90년대 초 개인용 컴퓨터를 중심으로 100만 대의 기기가 인터넷에 연결됐고, 90년대 말 노트북이 가세하며 10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