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함교회 5년 동안 목회하며 가졌던 작은 소원은 함께 소그룹으로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분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원이 별로 없어도 상식이 통하는 분들과. 한 번 목회하고 싶다는 배부른 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더함교회에 어르신들의 문맹률도 20% 정도 되고, 삶에서는 거의 이해력이 부족함 없이 살아가시는데, 복음과 말씀 앞에서는 이해력이 많이 떨어지는 어르신들이 많고, 오직 ‘의리’로 나오시는 분들이 많아, 설교시간에 성경동화 형식으로 꾸며도 시작만 하면 주무시는 기막힌 현상을 늘 보고 있기에, 성경공부에 대한 갈망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학생부 성경공부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능력있는 우리 학생부 여자아이들이 남자 친구들을 하나씩 데리고 온 터라 순식간에 학생부가 두 배로 급격히 부흥되어 6명이 모였습니다. 이들에게 예배만 드리고 그냥 흩어지는 이런 시간들을 잡아야겠음을 느끼고,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나름대로 학생부 사역 하는 곳마다 최소 5배 이상의 부흥의 붐을 일으켰던 터라, 자신만만하게 뛰어들었는데, 담임목회 5년동안 이 감이 다 사라졌음을 몰랐습니다. 대부분 편부모, 조손가정 아이들에게 비유로
지난주 캠퍼스에서 한 형제와 얘기를 나누던 중 이런 고백을 들었다. “목사님 사실, 저도 우울증이 좀 있어요. 그래서 스트레스를 좀 강하게 받는 일이 생기면 영락없이 증세가 올라옵니다.” 평소 기독대학원 학생회 리더로서 주중 캠퍼스 기도회 인도와 수요채플 찬양을 잘 섬겨온 형제 고백이었기에 의외였다. 그는 이렇게 자신만의 대처법을 소개했다. “목사님 그런데 저는 증세가 올라오면 예외 없이 캠퍼스 000건물 옆 인적 드문 소나무 군락 속으로 혼자 들어가서 한 두 시간 기도를 하고 나옵니다. 그러면 대개 회복이 되고, 적어도 큰 도움이 됩니다.” 요즘 캠퍼스에는 정말 많은 학생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각박해진 세상에서 극단의 경쟁으로 내몰린 이 시대 청춘들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수년전 서울대 조사의 경우 28.9%였다. 전교생 수를 감안하면 거의 1만 가량의 학생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의사들에 따르면, 약을 먹으면 당연 도움이 되지만, 그렇더라도 종종 나타나는 부작용들이 있다고 한다. 자기 통제력이 무뎌진 상태에서, 몸의 충동에 따라, 어떤 사회적 일탈행위로서 자기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폭음, 도벽, 도박, 성 문란
4) 예배 참석의 자발성 청중이 모임을 참여하는 자발성의 정도에 따라 듣는 태도와 반응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예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청중은 일반적으로 설교에 집중도가 좋다. 자발성이 떨어지는 청중은 설교내용이 어렵거나 설교시간이 길어질 때 쉽게 흥미를 잃게 된다. 청중의 자발성이 떨어질 때 설교자는 설교 길이를 조정하고 또한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을 넣어 청중이 계속해서 설교를 듣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4. 문화적 분석 공동체가 속한 문화에 대한 인식이 설교에 도움이 된다. 어떤 이슈에 대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성향을 나타내는 것을 태도라 한다. 이러한 좋고 싫어하는 태도를 결정하는 기본 바탕에는 신념이 있다. 또한 옳고 그름에 대한 지속적인 기준의 잣대가 가치이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와 신념과 가치가 융합되어 구성원이 공유하는 문화를 형성한다. 청중의 문화는 네 가지 영역(개인과 집단, 정확과 부정확, 언어와 비언어, 권위와 자유)으로 분석될 수 있다. 1) 개인문화와 집단문화 개인적인 자율성을 중요시하는 청중과 집단적인 일치성에 더욱 가치를 두는 청중이 있다. 설교자는 설교할 청중의 대체적인 성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더함교회 5년차 중 가장 감사한 일은, 30명이나 모이는 숫자도 아니며, 여러 매체에 사역이 알려진 것도 솔직히 아닙니다. 가장 감사한 일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거대한 철문 같았던 심령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며,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전과 28범 우리 박 형제님입니다. 우울증 10년에, 수많은 전과와 빚으로 인하여 삼일 이상 지속적으로 기쁜 적이 없었으며, 술을 끊고 한 달이상 산 적도 없었고, 마을에 석 달 이상 사고를 치지 않고 얌전히 방으로 들어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섯 달을 지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계속 되는 빚과 이자가 있음에도, 자기 쌀을 나누어 더함교회 식구들 점심으로 떨어지지 않게 공급하고 있고, 더함교회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이번에 어려움을 겪게 된 그리 친하지 않은 마을 사람의 트랙터 수리비를 대신 내 주고, 기회만 생기면 이 동네에 가난한 자들 데려다가 먹이는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매일밤 기도회 팀인, 우리 박형제님의 아내 집사님과 함께 답답한 마을을 가지고, 우리 박형제님이 10년은 족히 지나야 더함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젖어들어 조금이나마 변화 될까? 싶었는데, 그저 은혜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 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계2:1) 미국에서 대학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저희 부부는 그때 당시 교회에서 성가대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저희 성가대는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강대상 뒤편에 있었는데 그날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올라가서 11시에 맞춰 올라오실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갑자기 제 눈에 마주 보고 있던 성도들이 아사 일보 직전에 있는 아주 비참한 양들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두 눈에 힘을 주어 좀 전에 보았던 양들의 모습을 다시금 자세히 쳐다봤습니다. 그때 제 눈에 보였던 양들의 모습은 피골이 상접한 가운데 있었고, 입을 벌린 채 모든 머리는 힘없이 오른쪽 어깨에 걸친 상태에서 강대상 위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예의 주시하며 보고 있던 저에게 주님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들이 내 말씀을 먹지 못해서 그렇다”라고 말씀하심과 동시에 순식간에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바뀌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음성을 들었을 때 저들의 영혼이 얼마나 불쌍하던지 주체할 수 없
2) 영적 성숙(풍성한 삶)의 단계(abundant life) 신앙생활은 구원받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다 이뤄진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닮고 경험하는 삶이 필요하다. 설교자는 이러한 영적 성숙으로 안내하는 자가 돼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구원 이후에 청중들의 영적 성숙도를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윌로우크닉 교회에서는 영적 성숙도를 네 단계로 진단한다. 첫 번째 단계는 ‘초신자’이다. 초신자는 막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영적으로 자라가는’ 단계이다. 이때 신자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믿음 안에서 자라가게 된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께로 가까워지는’ 단계이다. 이때는 규칙적인 성경읽기와 기도생활을 하고 예배에도 정규적으로 참석하는 단계이다. 네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다. 완전히 그리스도께 순복하고 보다 일관성 있게 주의 일에 헌신하는 단계이다. 설교자는 청중의 영적 성숙도를 고려해 설교 본문을 정하거나 연간설교계획을 세울 때 반영할 수 있다. 3) 성경지식의 정도(Bible knowledge) 전달되는 주제에 대한 청중의 사전지식이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정도를 결정한다. 설교자들은 일반적으로 신학과 성경
고등학교 시절, 중학교 친구들 모두가 옥천으로 고등학교를 가던 시절, 저는 혼자 타동네 보은으로 떠났습니다. 사립학교였지만, 이 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어머니와 좀 알고 있던 음악 선생님이 클라리넷으로 S대 보내준다는 엄청난 소리에 그곳으로 가게 됐습니다. 그리곤 아는 사람도 어른도 없는 그곳에서 늘 어려웠던 우리 가정의 경제와 부모님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시작되자, 제 안에 감추어 있던 분노와 늦은 사춘기 혈기가 끝없이 나돌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매일같이 때리고 맞고, 싸우던 1학년때부터 특기생 명목으로 야간 자율학습을 빠져 나와 저녁이 되면 기본으로 남들 모두 하는 야간 자율 학습 때, 관악부실에서 연습을 빼먹고, 3m 담을 훌쩍 뛰어 넘어 학교를 나와 아르바이트를 해 모아 둔 돈으로 태권도 장, 검도장, 그리고 유도까지 하루에 최소 3시간씩 운동만 하고 그렇게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유일하게 집중했던 수업시간이 있었는데 바로 문학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선생님들이 하도 싸우고 다녀서, 꼴통이라고 눈길도 주지 않을 때, 그 당시 모든 학생에게 까다롭기로 소문났었던 문학 선생님께서 제가 수업시간에 써낸 시를 읽고 감탄을 하시며, 모든 반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지난 달 교회 청년 2명이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그들이 입대 하자마자 부대에서는 그들이 입고 있던 사복들을 다 벗기고 군복으로 갈아 입혔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조금도 군사 훈련을 받은 것이 없었지만 신분이 군인이 된 것입니다. 군복을 입어서 겉으로는 군인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속사람은 여전히 100% 민간인이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조교의 지시에 따라 군인에 걸맞은 사격 훈련과 체력강화 훈련과 군사전략 교육 등 한 가지, 한 가지 순종하며 나아갈 때 점차적으로 속사람이 군인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를 믿어 죄사함 받아 겉으로는 의인이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속사람 또한 의인으로 바뀌어 진 것은 아닙니다. 그 후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의로우신 말씀대로 한 가지씩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진짜 의인의 면모가 점차적으로 갖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위의 말씀을 다시 보면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 부터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구대
물론 옳은 말이긴 하다만 그래도 아직은 이런 구절까지 와 닿을 나이는 아닌데, 왠지 요즘은 사무엘상 7장 12절이 참 와 닿는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Thus far has the LORD helped us.)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여기까지 하나님 날 도우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난 없었을 거라는 고백. 생각해보면 너무나 정직한 고백이다. 아마도 이는 일주일 전, 어느 권사님 칠순예배 말씀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궐동굴다리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내가 사는 오산시에는 남북을 가로지르며 동서로 지역을 두 쪽 내는 경부선 철길이 있다. 그래서 오산의 동(東)과 서(西)는 고가도로나 굴다리 형태로만 소통되는데, 궐동굴다리도 그 중 하나다. 사실 폭은 얼마 안 된다. 해봐야 3차선 도로에 작은 인도 하나 있으니 뭐 20미터나 채 될까? 경부선의 총 길이 445km에 비하면 1/22,500밖에 안되는, 극히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그 굴다리는 절대로 무시되면 안 된다. 정말이지 만의 하나라도 그것이 부실해지거나 무너지면, 대한민국 국가기간망에는 상상하기조차도 끔찍한
헤럴드 브리슨(Harold T. Bryson) 박사는 “성경에 충실한 설교는 기본적으로 충실한 본문 주해에서 시작돼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와 모든 장소에서 모든 사람에게 연결돼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자는 본문과 현시대의 청중의 순전한 만남을 주선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본문과 청중 간에 어떻게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적용(application)이다. 그렇다면 적용은 무엇인가? 설교에서 적용은 라틴어의 두 개의 단어가 합성된 것이다. ap는 ‘to’이고 plico는 ‘to knit’(뜨개질하다)라는 뜻이다. 적용은 성경본문과 청중을 연결하는 것이다.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교 설교대학원 학장인 데이빗 알렌(David Allen)은 “훌륭한 설교는 실제적으로 적용된 강해설교”라고 강조한다.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 박사는 적용이야말로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힘으로 설교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강조한다. 설교는 단순히 본문 주해에서 끝나면 안 되고 청중에게 적용이 되어야 설교 본연의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적용을 잘할 수 있는가? 마치 설교자가 본문을 이해하듯 청중을 알아야 한다. 장두
부족하지만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도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났지 않느냐?”는 어느 분의 질문을 받으며, 주님의 마음이라고 믿고 진도에 내려와 목회를 위해 기도하던 시간을 회상해 본다. 몇 년 전 생각하기조차 힘든 시간을 몸소 겪은 진도 땅, 그것도 수많은 눈물과 통곡으로 얼룩진 팽목항에서 몇 분 거리에 교회가 있는 마을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하신 말씀이 가슴을 울렸다. 그리고 마을의 노년의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지 못한 마음이 느껴졌다. 민속공연을 광고하는 홍보지에 “굿 보러 오세요.” 공공연하게 적어 놓고,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교회에서 굿한다”고 말하는 지역이다. 한국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영적 무지 속에 살아온 지역 주민들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슬퍼진다. 복음을 들고 문화가 전혀 다른 선교지로 달려가는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말은 하지만 전혀 다른 문화와 다른 환경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교요, 선교사가 아니겠는가? 더욱이 고령화 되어가는 한국의 농어촌은 연령적으로는 더 어리고 젊은 타 문화권의 선교지보다 변화도 없고 희망도 없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는 환
이외수란 작가가 거미에 대해서 여러 면으로 칭송하는 글을 썼다. 우리나라 거미들은 독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물지 않으니 온순한 벌레라고 했고, 부화한 새끼를 위해서 자기 살을 뜯어 먹이며 기르는 에어리 염낭 거미를 예를 들면서 모성애가 숭고하다고까지 극찬했다. 특히 그는 거미줄로 지은 거미집에 대해서 ‘그것은 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고 투명한 실로 허공에다 섬세하게 드리워 놓은 한 편의 시이며 노래’라고 표현을 했다. 누구든지 거미가 허공에다 거미줄을 친 것을 보면 놀라고 신기하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거미줄은 견고성이나 영구성 면에선 언제나 형편이 없다. 1995년 6월에 100평 남짓한 예배당을 준공했다. 23년 전 일이지만 그 때 재정난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으며 몇 개월에 걸쳐서 지은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입당을 하고 며칠 지나서 예배당 바깥 한 곳을 보니 왕거미가 거미줄을 쳐놓았다. 얄밉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다. 우리들은 몇 달 동안 온갖 고생을 하며 건축했는데 왕거미는 하룻밤 공사로 우리의 예배당에다 자기의 주거용 사업용 거미줄을 쳐놓았던 것이다. 그 날 왕거미와 거미줄은 당장 없어졌다. 단번에 빗자루로 거미줄을 쓸어버렸고 왕거미는
회복은 무조건 옳다. 하나님의 복음은 망가진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기적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대학 다니는 아들이 최근 한 선교단체에서 개최한 이단관련 특강에 다녀와서 말했다. “아빠, 세상에는 별의 별 이상한 이단들이 많은 것 같아요.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JMS, 구원파….” 어느 덧 다시 학기말이 됐다. 매년 이 시기가 되면 캠퍼스의 CCC, IVF, JOY, SFC 등 기독교 선교단체들이 분주하다. 선교단체 마다에서 개최하는 여름수련회에 많은 학생들을 초청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같은 시기 같은 곳에서 동일하게 분주해지는 것이 이른바 캠퍼스 이단들이다. 이 시기가 되면 구원파는 IYF(IVF가 아님)라는 교묘한 이름으로 각 단과대학 거의 모든 화장실 소변기 위에 여름방학에 학생들이 보람있게 보낼 수 있도록 초청한다. “굿뉴스코해외봉사단”이라는 위장 단체를 내세워서 해외봉사 초청 스티커를 부착하고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다. 신천지는 UNPO(United New University Peace One)이라는 위장 단체를 내세워서 학생들을 유혹한다. 이 단체는 “새로운 문화로 분쟁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멋진 단체명의 의미를 내세우고, 마치 자기들이 U
그렇다면 바람직한 설교는 무엇일까? 좋은 설교는 성경 본문과 오늘날의 청중을 견고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설교이다. 성경 본문이 처음 쓰일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말씀의 의미를 찾고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를 통해 의도하신 뜻을 오늘날의 청중에게도 전달해야 한다. 남침례신학대학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는 헤셜 요크(Hershael W. York) 박사는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청중들과 교감을 강조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청중들에게 성경적 정보를 주는 것으로 충분하고 믿는다”라고 비판한다. 이와 같이 편향된 설교 접근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진리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청중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지양되어야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침례교회 설교는 어떠한가? 한국침례교회는 대체적으로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신학노선을 지향했다.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성경본문의 계시를 강조하고 연구하지만 실제로 청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많지 않은 경향이 있다. 한진환 박사의 설명처럼 “청중을 그저 메시지를 전달받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여길 뿐 그들을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한 변수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 침례교 설교도 본문과 청중 간에 균형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국 사회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화두가 되고 있는 말 중 하나가 4차 산업 혁명(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AI) 로봇과 사물인터넷, 3D 프린팅 등을 융합하는 기술적 변혁의 움직임이다. 미래학자들은 지금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성년이 되어 사회에 진출할 때는 이들 중에 70%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될 것이고, 10년 이내에 길에서 운행되는 자동차 10대 중 1대는 무인자동차가 될 것으로 예측한다. 이러한 고도의 기술적 변혁은 이미 시작됐고, 사회 각 기관에서는 혁신의 시대를 선도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기독교 연구기관에서도 근래에 이러한 사회 환경의 변화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되고 있다. 그렇다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교회는 과연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설교자는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현대 설교자에게는 ‘해야 할 일’(to do lists)이 많다. 또한 목회환경이 변화하기에 사역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캠벨 몰간(Campbel Morgan)은 “사역자의 최상의 임무는 설교이다. 우리가 범할 수 있는 큰 위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