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귀납적 개요 설교 본문 : 요한복음 3:1~15 주제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중생의 길 서론 : 이 땅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성공과 업적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삶의 공허감과 영적인 갈증을 가지고 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는 이러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대변해 준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I. 수많은 성취와 업적들(과학, 부와 재물, 학문, 지위 등등)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여전히 삶의 목마름과 갈증이 있음 - 수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는 인생 - 위대한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 - 본문의 니고데모 이야기 - 그러나 영적인 것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혼란 가운데 있는 인간 - 현실과 물질세계에 갇혀있는 인생 - 영적 진리(거듭남)에 어두운 당대의 지성인 니고데모와 같은 현대인들 II. 알 수 없는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방법을 찾는 인생 - 인간적인 능력(돈, 명예, 권력, 쾌락 등)을 의지하여 끊임없이 추구함 - 소유하면(위에 것들) 소유할수록 영혼의 갈증은 고조 됨 - 한국 정치인들의 말로 - 인기 연예인들의 자살 등등 III. 길과 진리 되시는 주 예수님만이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줌 - 모든 사람
우리 교회가 매입한 농지에 지하수를 세 곳이나 팠는데 물이 나오지 않아 업자들이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문제는 올해는 그 교회 땅에 교인들이 함께 깻잎농사를 통한 수익사업을 하기로 해 모든 준비를 했는데, 날씨가 너무 뜨거워 지면이 말라버려서 교인들이 깻잎 어린 모를 심는 족족 말라서 비틀어집니다. 고민 하다가 우리 이장 교인 형제님의 트럭을 가지고 와서(저희는 차키를 서로 아무 때나 공유하는 교회입니다.) 800리터짜리 큰 물통을 싣고 바로 옆 교인 하우스에 가서 물을 받아 가져와서, 우리 농사짓는 밭으로 가져와서 일일이 물조리개로 주는, 다시 30~40년 전의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돌아갔습니다. 일일이 10리터짜리 물조리개 두통으로 최소 80m 이상 되는 골을 수도 없이 다니며 일일이 물을 주어 거의 90%이상 살렸습니다. 뜨거운 태양에 생명의 싹이 죽어가는 것을 보니, 견디기 어려워, 8시간동안 점심밥도 못 먹고 시리얼로 대신하며 20kg을 들고,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여러 번씩, 물을 줬더니 집에 들어와 스마트폰 어플에 제가 하루 종일 걸은 양을 보니 8.65km가 찍혔습니다. 그렇게 철야기도회 설교와 기도회 인도를 준비하며 교회당에 왔는데, 다리가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 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1~12) 위의 “이런 일”이란? 구원 받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우상 숭배자들”과 “간음한 자들”과 “주를 시험한 자들”과 그리고 “원망하던 자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멸망을 받은 사건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말세를 만난 우리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기록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깨우치게”란 단어는 개역개정 성경의 단어로서 그전의 성경의 단어와는 좀 차이점이 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 이전의 개역한글 성경에는 “경계”란 단어로 써져 있습니다. 그리고 NIV영어 성경에는 “WARNING”즉 “경고”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깨우치게”란 “깨어있어라, 정신을 차리라”는 말로, 감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딸 때는 따는 데만 몰입해서는 안 되고 감나무 가지가 약하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경계”라는 말은 자동차 도로에서 차들이 오고, 갈 때 중간에 경계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계선을 무시하고 차선을 넘어가게 되면 가히 상상하기조차도 힘든 무시무시한 사고를 당하
설교 구성 착안 사항 서론은 완성된 이야기로 제시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중간에서 단절됐다. 설교자는 서론에서 청중의 마음에 잃어버림에 대한 생각을 직면하도록 유도했다. 이것은 예수님이 본문에서 잃어버린 아들 이야기를 하시면서 잃어버린 상태에서 다시금 발견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핵심적으로 말씀하신 것과 자연스러운 연결고리를 형성시켜 준다. 설교자는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수사적 효과를 되살리려는 노력으로 청중이 잃어버린 상태에 대한 무게감을 느끼기 원했다. 서론에서 중단됐던 이야기는 결론으로 이어져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공군이 잃어버렸던 조종사의 위치를 알게 됐을 때, 어떻게 했을까? 그들은 그 조종사를 무시해 버릴 수 있었다. 그 조종사가 격추당한 대가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었고, 그를 비난하면서 버려둘 수도 있었다. 당신은 공군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가? 그들은 그 조종사를 찾으러 나섰다. 대여섯 대의 항공기와 수십 명의 해병대를 파견했고, 수백만 달러의 돈을 지불했다. 이 모든 것이 한 명의 격추된 조종사, 즉 자신의 힘으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사람을(작은 아들)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찾아오신 분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지방사투리로 “무엇이 중헌디 쉬었다 가랑께” 졸음쉼터를 알리는 광고 문구가 눈에 띈다. 졸려 눈을 비비면서도 조금 빨리 가려고 달려가는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말일 것이다. 운전을 하는 동안 눈에 비춘 글귀가 한참을 머리에 맴돈다. “무엇이 중헌디?” 바쁘게 달려가는 걸음 속에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 잊고 살아가지는 않았나 반문한다. 웃지 못할 이야기로, 초상집에서 한 참을 울다 “누가 죽었어요?” 물었다고 하듯이 무엇인가 정신 없이 달려가긴 하는데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땀을 흘리며 달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언젠가 제 아내가 주님께 기도 드리며 “열심히 했잖아요.” 투정 아닌 투정을 토로한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제 아내 마음속에 들려지는 주님의 음성은 “무엇을 위해 열심했느냐? 반문하셨단다. 그리고 돌아보니 그냥 바쁘게 살아왔는데, 주님의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 앞에 대답 할 말이 없어 펑펑 눈물을 흘리며 “주님, 죄송합니다.” 말씀드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일로 15년 넘게 목회자로, 사모로 열심히 목회 한다고 했지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그냥 열심만 부렸던 것은 아닌가 회상해
“목사님! 부교역자로 왜 안 불러줍니까?” “어느 교회에서 이미 사역하고 있다면서….” “그 교회 목사님과 뜻이 맞질 않아서 그만 뒀어요. 불러주면 바로 갈 수 있어요.” 전화를 준 사람은 한 때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했던 전도사였다. 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경기도 어떤 지역에서 교회를 창립하고는 얼마동안 개척 교회 사역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만두고는 다시 부교역자로 일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것마저 그만 둔 모양이었다. 그는 나의 개척 교회 목회 시절에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면으로 도움을 줬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늦은 가을인데 오리털 점퍼를 한 벌 사갖고 왔었다. “목사님, 곧 겨울이 올 텐데 새벽 기도할 때마다 춥지 않도록 입으세요.” “집사님, 무슨 돈으로 이 귀한 선물을 샀어요?” “삼일 동안 노가다해서 그 품삯으로 샀어요. 이 옷 입고 기도많이 해주세요.” 그는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많았는데 막노동을 해서 옷을 사온 것이었다. 사무엘하 23장에 보면 전쟁을 하려고 이스라엘 군대는 산성에 있고, 블레셋 군대는 베들레헴 요새에 진치고 있을 때였다. 다윗이 목이 말랐는지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
생명이다.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일은 무조건 옳다. 얼마 전 대학생 딸이 유기견 센터에서 죽기 직전의 작은 개 한 마리를 데려와서 집에서 키우게 됐다. 보호소에 갇힌 개들은 일정기간이 지나도 새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안락사를 시킨다고 한다. 처음에 이 외모 멀쩡하고 귀여운 개가 왜 버림을 받았을까 궁금했는데, 한 가지 혹시나 하고 짐작해 보는 대목은 있다. 전 주인이 베풀어준 정관 수술이 잘못됐는지, 이 개는 반가움을 표현할 때마다 오줌을 싼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거실에서 풀어놓고 키우려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묶어 놓되 가끔씩 산책을 시키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자신을 죽음 직전에 살려준 것을 안다는 것인지, 볼 때마다 반갑다고 오줌을 싸고, 먹을 것을 달라고 애걸하고, 가끔씩은 당당하게 짖어댄다. 이 개를 보면서 생명의 의미를 생각해 봤다. 구출당하지 않았다면 벌써 생명이 끊어졌을 운명. 마찬가지로 캠퍼스의 수많은 청춘들이 아파하고 있다. 죽어가고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낙오된 영혼들이 방황하고 신음한다. 한 때는 하나같이 치열한 입시 전쟁에서 이겨 영광스런 합격의 감격을 누렸으나,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기를 잃은 청춘들이다. 매주
지난 며칠은 조금 일찍 출근한 탓에 목양실로 향하기 전, 먼저 대예배실에 앉아 좀 오래 머물렀다. 물론 나 외엔 아무도 없을 시간. 조명도 없고, 찬양대도 없고, 반주도 없고, 함께 예배하는 성도들도 없는, 적당히 어둑하고 심하게 고요한 그 큰 대예배실에 홀로 앉으니 새삼 느끼는 그 경건함에 마음이 푸근하다. 어쩌면 목사에게는 그 어느 곳보다 익숙한 장소, 늘 설교하고 예배 인도하는 곳이건만 왠지 지난주는 참 다른 느낌이었다. 두 곳의 성전을 번갈아보아도 그랬다. 일단 그 분위기에 압도되니 찬양 한곡부터가 입에서 흐른다.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서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 그 흥얼거림을 따라 묵상과 읊조림을 반복하니 나중엔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란 후렴구만 남아 끝까지 반복된다. 마치 이사야가 보았던 성전의 영광도 이랬을까 싶었을 정도….그러면서 생각했다. 왜 하나님이 날 이곳에 이 아침에 앉히셨을까? 늘 앞에서만 성도를 바라보던 시선이 아닌, 앉아서 강단을 바라보게 하셨을까? 여러 생각들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우선 며칠 전 한 집사님과의 대화부터 떠올랐다. 오후 내내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III. 복음서 설교 실제 1. 본문 선택 일반적으로 성서의 모든 문학 장르를 설교할 때와 같이 복음서의 설교를 위한 본문은 ‘pericope’를 기준으로 설정돼야 한다. 본문의 내용은 주어진 콘텍스트를 고려해 해석돼야 하지만 때때로 복음서의 내용은 중심 구절들을 중점으로 설정될 필요가 있다. 또한 어떤 특정 사건이나 장면을 묘사하는 이야기(narrative)는 몇 개의 페리코피에 걸쳐 본문이 설정될 필요가 있으며 비록 본문은 핵심절들로 선택이 됐다 하더라도 이야기 전체를 고려해 설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설교에서 본문 선정은 단일 페리코피를 고집하거나 본문의 범위가 길고 짧은 것에 연연하기보다는 그 본문이 하나의 설교를 위한 한 단위로서(unit) 동일한 콘텍스트 안에 있느냐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아가 본문의 콘텍스트의 일관성이 요청되기 때문에 본문을 정함에 있어 다른 복음서의 페리코피나 병행구절들을 결합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특정한 페리코피를 다른 문학적 상황이나 역사적 콘텍스트와 혼합시킴으로써 저자의 의도를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가상 칠언”을 중심으로 성금요일(Good Frida
어떤 정치인은 가치 지향적이고 도덕 군자형이라고 한 때 평가받았다고 한다. 그는 정의, 공정, 신뢰, 인권 존중이란 브랜드를 내세우며 차기 대권 주자가 될 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각계에 미투 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서도 정무 비서인 여성을 성폭행을 했다는 것이다. 그가 내세웠던 브랜드는 그의 의해서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것으로 온 천하에 폭로되고 말았다. 스위스 루체른에서 ‘빈사의 사자상’을 본 적이 있다. 덴마크 조각가 토르발센의 작품으로 1821년 독일 출신인 카스아호른에 의해서 완성된 조각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길이가 10m이고 높이가 6m에 달하는 대형 조각이지만 사자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위스 용병들을 상징하는 사자가 어깨에 부러진 창이 꽂힌 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새긴 것이다. 이 조각상은 프랑스 혁명 당시인 1792년 8월 10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머물고 있던 궁전을 지키다가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는 것이다. 그 당시 스위스인들에겐 알프스 산맥에서의 관광업 외에 용병이 되어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은 자기들을 고용해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로고스 찬미가를 통해 성육신하신 로고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요약적으로 제시한다. 요한은 로고스의 신적인 존재성에 대한 선언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에 있어서 로고스의 주체적인 참여를 묘사한다. 요한은 나아가 성육신하신 로고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역사 현장에서 감당한 구체적인 사역을 이 어두움의 세상에 와서 각 사람을 비추는 참된 빛의 계시 사역으로 제시했다. 요한은 이제 그 참된 빛의 사역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먼저 말한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다”(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다”는 것은 그 다음 구절에서 언급될 로고스의 성육신과 세상에서의 활동을 가리킨다. “알지 못했다”는 말은 그의 참된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고 그에게 적절하게 반응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요한복음에서 ‘알다’라는 동사는 ‘보다’라는 동사와 동의어적으로 사용되는데, 일반적으로 사건이나 사물에 관한 사람의 인식을 가리킨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안다’는 것은 특별히 아버지와 아들에 관하여 아는 것 곧 그들 사이의 관계와 세상에 보냄을 받은 아들의
드디어 2년 6개월 만에 주일학교 예배를 다시 드렸습니다. 그간 더함교회를 중심으로 양쪽 마을에 새로 오신 목사님들이 사역들을 시작하며 주일학교를 하는 통에, 우리 아이들이 서로 쪼개져서 아이들이 민망해 하기에, 양쪽 교회로 아이들을 보내고 저희는 주일학교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잠시 지냈습니다. 지난 2여년동안 제 짧은 목회인생에 가장 여유 있던 주일들을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양쪽 동네 아이들이 거의 주일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던 2주전, 옥천 시내에서 잠시 일을 보고 차를 타려는데 한 무리에 중학생 여자 아이들이 “준영쌤이다!” 하고는 달려와서 손을 잡고 팔짱을 낍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 너무 커서인지, 한 10초간 누군지 도무지 몰라 한참 버퍼링에 걸려 멍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이 아이들 놔두면, 금방 이 험난한 세상에서 지쳐서 쓰러지고, 술에 찌들어 사는 부모에 영향 받고, 삭막해져가는 세대에 변질되어 평생 힘들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참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그 마음이 그 일이 다시 주일학교를 시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 오늘까지 오게 됐습니다. 드디어 지지난 주일 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을 쓰실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시다. 미국에서 생활을 시작할 때, 근처에 있는 공원에 나가 공원마다 있는 연못에서 낚시를 즐길 때였다. 옆에서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함께 나온 어린아이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른들은 옆에서 지렁이를 낚시 바늘에 끼워 주고 아이들은 쉴 사이 없이 던지고 조금 있다 다시 올리면 또 지렁이를 끼워 줬다. 건 두 세시간이 지나도록 똑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다 상관없는 내가 화가 났다. “이제 그만하자.” “낚시도 안되니까 다음에 다시 하자.” 말을 하고 그만 둘 법도 한데 아무런 말없이, 혹시라도 작은 물고기라도 잡히면 “잘했다.” 칭찬하며 함께 하는 할아버지, 아버지. 그것이 함께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한국에서 목사로 부름 받아 목회를 하면서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고, ‘목사는 놀아도 교회서 놀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별로 생각이 안 날 정도였다.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또 분명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결과였는지 어려움도 많았지만 개척 3년 만에 작은 교회를 건축하는 복(?)도 누렸다. 새벽기도회를 드리고 잠시
남자들의 친교 모임에선 가끔 각자 군대 생활 했던 것을 대화로 나눌 때가 있다. 대부분 자기 경험이나 소속됐던 부대를 자랑하기 일쑤다. 누구보다도 강한 훈련을 받았다거나 뭘 잘해서 상사에게 인정을 받았다거나 자기 부대는 특별했음을 내세운다. 많은 얘기들을 들어봤지만 그 중에 나의 선배인 김 목사님의 간증은 두 세 번 들었어도 늘 감동을 주었기에 적어본다. 1960년 신학교 재학 중에 입대한 김 목사님은 신병 때부터 기도 제목이 있었다. 첫째는 군종병으로 복무하게 해달라는 것이요. 둘째는 군종병이지만 설교까지 할 수 있도록 구했다. 하지만 그는 통신학교를 거쳐서 통신병으로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에 있는 어느 전방 보병 대대에 배치됐다. 그리고 대대장 무전병이 되는 바람에 병과를 바꿀 수 없었다. 그 당시엔 통신병은 특수 병과 이다보니 신병 때부터 기도했던 군종병은 되기 어려웠다. 물론 군대에서 설교를 하거나 주의 일을 하기도 힘들어졌다. 그렇지만 김 목사님은 신병 때부터 해온 기도를 중단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군부대 안에 있는 어느 바위 밑에 토굴을 파고는 가마니를 깐 뒤 거의 매일 한 시간씩 그 곳에서 기도를 계속하였다. 인내하면서 끈질기게 기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10) 오늘날 ‘원망’이라는 이 죄가 하나님 앞에 멸망당할 만큼 큰 죄가 된다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위의 내용은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내용으로써, 고라가 다단과 온과 더불어 당을 지어 이스라엘의 지휘관 250명과 함께 일어나 모세를 거슬렀던 사건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교회의 중직들을 통해서 힘을 받아 주의 일들을 해나가도 뭐할 판인데 도리어 중직자들 때문에 신경 쓰이고, 힘들어 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대학원을 준비하며 여느 때와 같이 교회에서 제 아내와 함께 성가대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 성가대는 목사님 설교 강대상 뒤에 위치해 있어서 늘 성도들과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제 아내와 저는 매주 성가대석 앞, 뒤로 앉아 몇 년 동안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오전11시 예배 때 성가대원들이 먼저 올라가 앉아 11시에 맞춰 오실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 눈에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