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찰스 파햄의 신학 찰스 파햄의 신학에 있어서 그는 구원의 위기체험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양육에 의한 점진적인 개종을 거부하고, 오직 “위기체험(crisis experience)에 의한 개종을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분명하고 순간적인 구원의 체험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화를 가르쳤으며, 또한 그는 성령침례의 첫 증거가 바로 방언이라고 가르쳤다. 나아가 그는 믿음치료의 교리(The Doctrine of Faith Healing)를 가르치며 사역했고, 여기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왕국의 수립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부활이 환란 전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전천년주의를 가르쳤다. 이는 오순절운동의 신학이 확정된 것은 오순절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찰스 파햄 목사의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그는 캔자스 주 토페카에 있는 성경학교를 통해 오직 성경만을 교과서로서 가르쳤으며, 바로 그가 그르쳤던 이 성경안에서 발견한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가 방언을 말함이라고 확정을 지어 오순절 성령운동의 초석을 놓았던 것이다. 로스웰 플라워(J Roswell Flower)는 이 결정에 대해 현대 오순절운동의 출생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토페카의 부흥에 있어서 독특
미국의 경제학자이며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밀턴 프리드만은 1938년 기고문을 통해 유명한 말을 남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There are not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우리가 얻는 각종 편익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와 기회비용이 발생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 개념에 익숙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고 세속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을 보내실 때 당시 사회 기득권층과 수많은 갈등과 논란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안식일 논쟁이다. 유일신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일곱째 날 안식을 금과옥조로 받들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안식일에도 거침없이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말 그대로 ‘불경’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한 이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제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을 던지셨다. 창조의 사역은 안식이 완결됐고, 노동 뒤에 휴식은 필요하나, 구속의 사역은 멈출 수 없는 일임을 천명하신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거저 주시는 은혜’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 해이에 빠져 세상 가운데에서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에는 위대한 힘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필리핀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에게 붙들려서 감옥에 갇히게 됐다. 아주 열악한 위생과 전염병 때문에 갇힌 사람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10명이 있을 방에 50명을 집어넣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채 짐짝처럼 필리핀 사람들을 대우했다. 절망의 그늘이 짙게 포로들을 누르고 있을 그때에, 하루는 이 감방에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왔다. 그런데 보니까, 그 비둘기가 부상을 당했다. 비둘기가 어디에 부딪혔는지 날개가 떨어지고, 아주 깊은 상처를 입고 그 감방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죄수 하나가 비둘기를 발견하고 상처 입은 그 비둘기를 돌보기 시작했다. 같은 방에서 함께 생활하던 다른 죄수들도 비둘기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비둘기를 치료해 주기 시작했다. 자기들의 옷을 찢어 비둘기를 싸매어주고, 약을 발라주고, 하나하나 음식을 먹여주면서 비둘기를 돌보아 줬다. 한 달 두 달 지나는데 그 상처 입은 비둘기가 회복이 되어 갔다. 그 방 안에 있는 수많은 죄수들은 빨리 일어나서 비둘기에게 서로
수많은 축복을 경험하고 풍성한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멋진 관용구로 노래했던 다윗, 그리고 세상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구원의 잔’을 높이 들며 건배했던 그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범죄하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고 있다. 11장의 범죄 사건 이후 12장부터의 다윗은 안쓰러울 정도다. 책망과 징계가 매우 가혹하다. 그 추락은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절정에 이른다. 가정의 비극이자 나라의 비극이다. 그런데 이 또한 다윗이 마셔야 할 쓴 잔일 것이다. 압살롬을 챙기는 충신 요압 잘난 아들 압살롬이 다윗에게 뜨거운 감자가 됐다.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이 살인자가 되고, 결국 요단강을 건너 어머니 마아가의 고향 그술로 도망치는 탈주자가 됐다(13:37~39). 다윗은 비록 살인자이기는 해도 장남이나 다를 바 없기에 망명간 아들 압살롬이 그립다(13:30). 이런 왕의 마음을 헤아린 충신이 요압이다. 요압은 드로아로 사람을 보내 지혜로운 여인을 데리고 와 그 여인이 왕에게 요청하는 형식으로 압살롬을 챙긴다. 그 여인은 과부인 자기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들이 들에서 싸우다
디모데후서는 A.D 66년경 바울이 2차로 로마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쓴 편지이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주동한 폭동 때문에 바울은 체포됐다. 이 당시는 네로황제의 재위기간으로서 성도들에 대한 핍박이 많았던 시기였으며, 감금된 감옥은 너무나도 열악했다. 사슬에 매여 있었고, 아마도 암실이나 지하 감옥에 갇혀서 극심한 추위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바울의 옆에서 변호를 해주던 사람들이 거의 다 바울을 떠나고 누가만 그와 함께 있었다. 믿었던 사람들이 바울의 곁을 떠나고 극심한 핍팍과 박해 가운데 이미 자신의 인생이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떠날 날이 가까이 왔음을 느꼈다.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자신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수고를 하늘의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천국에 입성했을 때, 의의 면류관으로 보답해 주실 것을 확신했다(딛후4:6~8).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남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의 영의 아들 디모데가 교회의 리더로서 굳건히 설 수 있도록 따스한 마음으로 격려하며 교훈하고 있는 것이 디모데후서이다. 이 서신을 통하여 오고 가는 세대속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다윗 왕의 가정에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다. 부전자전일까? 장남도 비뚤어진 사랑에 빠졌다. 불편한 진실, 다윗이 뿌린 열매다. 마치 곁에 있던 시한폭탄 같은 성적 문제가 또 터졌다. 이제 다윗 가정의 비극이 시작된다. 성폭행과 칼에 의한 피 흘림, 왕자들의 권력 다툼…. 추악한 일들이 이어진다. 다윗 가정의 비극의 첫 부분, 비뚤어진 사랑과 권력 다툼이다. 콩가루 집안?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했던가? 지금도 아랍 지역에서는 코란의 율법에 따라 한 남자가 4명의 아내까지 둘 수 있는데 그 정도가 아니다. 역대상 3장으로 보면 부인은 사울의 둘째 딸 미갈로부터 말년의 봉양을 위해 얻은 수넴여인 아비삭까지 최소한 9명(미갈, 아비가일, 아히노암, 마아가, 학깃, 아비달, 에글라, 밧세바, 아비삭)이고, 그 외의 소실은 몇 명인지 알 수조차 없다. 아들들도 마찬가지, 최소한 19명(암논, 길르압, 압살롬, 아도니아, 그바댜, 이드르암, 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 입할, 엘리사마①, 엘리벨렛①, 노가, 네벡, 야비아, 엘리사마②, 엘랴다, 엘레벨렛②), 전체는 몇인지 알 수 없다(대상3:9). 엘리사마와 엘리벨렛은 각각 2명씩, 이름이 같을 정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호와 이레! 여기까지 저의 삶을 이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요즘 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특별한 휴가로 매우 행복합니다. 베푸신 삶에 자유와 평강이 넘칩니다. 감사함으로 단잠을 자고, 감사함으로 아침을 맞으며, 하늘의 별과 꽃들도 제 삶에 감사함을 더합니다. 저에게 허락하신 이 특별한 휴가, 은퇴의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올립니다. 그런데 이게 웬 호사일까요? 휴가를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웃음의 선물까지 덤으로 주셨습니다. 저녁기도를 편안한 웃음으로 마무리하고, 남편과의 소소한 대화와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에도 웃음꽃이 지지 않습니다. 진정 이 휴가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매우 특별한 선물인가 봅니다. 사실 저의 삶은 “하나님! 저에게 하루에 2시간만 더 주세요.”라며 이렇게 간구하며 살아 온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시간에 쫓기는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제가 지치지 않도록 언제나 말씀 가운데 격려와 권면으로 임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저를 강건케 하였으며(고후5:14), 늘 주님 기뻐하시는 길로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그 은혜로 저는 많은 영혼들을 만나 복음을 기뻐 전할 수
꿈은 미래를 창조하는 재료이다. 꿈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꿈은 꿈꾸는 자를 위대하게 만든다. 꿈을 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그가 꾸고 있는 꿈이다. 그러므로 꿈꾸는 자는 위대하다. 그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그 꿈을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희망찬 미래가 있다. 사람은 그 마음속에 무엇을 상상하고 선포하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은 확연히 달라진다. 피카소와 반 고흐는 비슷한 재능을 가진 화가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생은 극단적으로 상반되게 펼쳐졌다. 피카소가 성공의 표본 같은 삶을 살았던 반면, 반 고흐는 실패의 표본 같은 삶을 살았다. 피카소는 삽십대 초반에 이미 백만장자가 됐다. 그의 성공은 나이가 들수록 가속화됐다. 그는 천만장자가 되었고 억만장자가 됐다. 화가의 명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미술계 인사들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더니 곧 미술계의 스타이고, 세계적인 화가가 됐다. 반면에 반 고흐는 평생 돈과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20대에도 빈민이었고 30대도 빈민이었으며 죽을 때도 빈민이었다. 살아생전에 그의 화가로서의 명성 또한 우울하기 짝이없었다. 그는 철저히 무명으로 살았고 무명으로
“사람 하나를 발가벗겨 세상 사람들에게 전시하려 한다. 그 인간이 바로 나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참회록 시작 부분이다. 그는 “선악을 가리지 않고 감추거나 과장 없이 모두 말하고 싶다”고 했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은 “이제 당신을 떠나 산산조각이 나 흩어져있던 나를 거두려 한다. 나는 그때 명예와 돈과 결혼을 열망하고 있었고, 당신은 나를 보고 웃고 계셨다. 욕망을 추구하던 나는 쓰디쓴 곤경을 당해야 했지만 주의 자비는 그 곤경을 통해 크게 역사하셔서 내가 당신 아닌 다른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며 참회했다. 또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는 “성인이 된 후 30년을 쾌락주의자 또는 허무주의자로 살았다. 책도 많이 썼고 사람들의 인정도 받았지만 남은 것이 없다. 5년 전 나이 50이 됐을 때 비로소 내가 죄인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심했는데 그 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며 “예수 믿는 것이 지혜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라 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
군에서 제대한 후 복학한 대학생이 성 강박증 때문에 상담을 요청한 적이 있다. 짧은 상담회기 밖에 허락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직면을 일찍 하게 됐다. ‘너의 성 강박은 부모 때문이다’ 그러자 ‘왜 훌륭하신 부모님 때문이라고 하느냐?’며 화를 낸다. 다음 회기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부모와 자신과의 관계,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를 알아 오라는 숙제를 냈다. 명문대를 다녀서 그런지 자세하고 정확하게 숙제를 해 왔다. 내담자는 잠버릇 때문이라고 알았던 부모의 각방쓰기의 비밀을 알게 됐다. 오래전 아빠가 출장 갔을 때 한 번 외도를 하게 된 것을 엄마에게 고백한 후 용서를 못한 엄마는 10년이 넘도록 각방을 쓰게 됐다. 그 뒤 아들은 엄마와 밀착되어 아들은 엄마의 심리적인 대리 남편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엄마는 아들의 심리적인 대리 아내의 역할을 하게 됐다. 이러한 심리적인 상태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갖게 했다. 이러한 사실을 서로가 의식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비록 엄마는 아들과의 관계에서 눈에 보이는 신체적인 성 학대는 없었다 할지라도 부모가 갈등하는 가족의 역기능적인 관계 속에서 아들은 자신의 경계선이 무너진 성 학대의 경험을 하게 됐던 것이다. 이
지난 2021년 5월에 개최된 G20 정상회의에서 각국의 대표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인류의 파멸을 막기 위해 산업화 이전보다 기온이 1.5도 이상 올라서는 안 된다는 목표를 세웠다. 만약 기온이 2도가 상승할 경우에는 북극의 빙하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고, 해양생물의 40%를 지탱하는 산호초가 전멸하며, 기후난민이 수억 명 발생하여 인류가 이를 감당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지구 기온은 이미 1.1도가 올라 있기 때문에 앞으로 0.4도의 여유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목표인 1.5도를 지켜내기 위해선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과 흡수량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이것을 ‘탄소중립’이라 일컫는다. 탄소중립이야말로 현재 인류가 풀어야 할 가장 위급한 과제이다. 이미 130여 나라가 탄소중립을 하겠다고 선언했고, 우리나라도 이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올해 탄소중립기본법을 발효시켰다. 이 법에 의하면,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루겠다는 목표 아래, 매 5년마다 ‘국가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을 세우고 이에 따라 온실가스를 줄이도록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법령과 정책들은 다 이 정책을 따라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직장 말고 목회만 하고 싶지만 일터 사역의 고충을 물어오시면 망설이지 않고 피곤함을 이야기합니다. 아무래도 일터에서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기에 아파트 업무와 목회를 함께 한다는 것은 고단합니다. 그래서 일하는 목회자는 전통적인 목회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전통적인 교회 형태로 모임을 시작하며 개척했다면 저는 일찍 나가떨어졌을지 모릅니다. 조금 더디지만 하나씩 만들어가며 일터 목회의 단점을 상쇄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른 고충은 사람들의 인식입니다. 목사가 일하며 교회 개척한다는 말을 들으면 반응이 크게 엇갈립니다. 현대에 어울리는 목회라며 박수를 보내주시는 분도 있지만 믿음을 평가당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신뢰하지 않는 목회자가 돼버립니다. 종종 저도 겪었기에 주변에 일하는 목회자들이 왜 숨어서 일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한 번은 대형교회의 미자립교회 후원 사역에 지원했다가 마음 아픈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일하는 목사는 지원하지 않습니다.” 일하는 목회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와 가정을 지키고 싶어 고생을 자처한 사람들입니다. 아껴주고 위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른 일하는 목회자의 경우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
교회를 개척한 후 언제부터 선교를 하면 될까? 선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목회자라면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교회를 개척하고 사역을 시작하면 출석하는 성도는 적은데, 나가야 할 비용들은 적지 않고, 목회자의 생활비도 빠듯하니 선뜻 선교에 동참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교회가 좀 안정되면 선교에 동참하겠다고 다짐하면서, 교회가 빨리 성장하기만 기다리게 되는 것이 개척교회의 실정이다. 그런데 교회가 맘처럼 쉽게 성장되지 않는 게 문제다. 등록하는 성도는 가물에 콩 나듯 하고, 오히려 지출해야 하는 비용은 점점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선교 사역을 위한 지출은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결국 선교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교회들이 하는 것처럼 여기고 손을 놓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11월에 있었던 해외선교회 주최 선교포럼에서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우리 교단의 교회들은 현재 약 3500여 교회가 있는데, 그중 724개의 교회가 다만 얼마라도 선교헌금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전체 교회의 약 20% 정도의 교회만이 교단에 속한 선교사들에게 후원헌금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교단 해외선교회를 통하지 않고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교회들도 있겠지만,
허약한 아이들은 꿈을 많이 꾼다고 합니다. 아마도 건강한 어린이들보다 고열에 시달릴 기회가 많기 때문은 아닌지, 저 역시 어린 시절 허약했던 탓에 열을 식혀주시던 어머니의 손길과 몽환에 시달렸던 기억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약했던 기억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이, 고열은 건강할 때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총천연색 꿈을 선사했고, 또 덕분에 상상력이 발휘된 꿈속 주인공이 되는 즐거움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2011년 음력설을 앞두고 시작한 얕은 기침이 어느 순간 쉼 없이 계속되더니 급기야 폐렴으로 이어져 10일간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지속되는 고열로 병상에만 있다 보니 그동안 운동 한번 하지 않은 게으른 나 자신에 대한 자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건강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곱씹게 됐습니다. 또 소득이라면, 성장하며 자연스레 사라졌던 잃어버린 환상의 세계, 총천연색 꿈을 참으로 수십 년 만에 다시금 경험한 것입니다; 꿈속에 짙푸른 바다를 봤습니다. 사람들이 물가에 줄지어 앉은 모습이 마치 물놀이를 하듯 평화로운 정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니 생각과는 달리 발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 곤두박질치는 폭포수가 아귀처럼 삼킬 듯 소리치고 있었습니
하나님은 인류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1:27). 우리나라 현행 헌법도 “성별”을 남성과 여성만이 해당함을 전제하면서 양성평등 이념을 구현하고 있다. 그런데 차별금지법(평등법)은 “성별”을 여성, 남성 그 외에 분류할 수 없는 제3의 성을 신설하여 헌법에 위배 되고 있다.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정의하며 정당화하고 있다. “성별정체성”은 자신들이 자의적으로 성별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별정체성이 자신의 성별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표현’도 포함하고 있다. 성별 정체성이 차별 금지사유가 되면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은 상태의 성별 표현도 존중해줘야 하는 사회가 되어 여성 인권이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평등법 제23조는 “상업·공공시설의 소유·관리자는 성별 등을 이유로 시설물의 사용·임대·매매를 제한·거부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여성이라고 여기는 남성 성기를 가진 남자들이 여자 화상실이나 사우나, 탈의실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미국 LA에서 한 여성 고객이 “외부성기 성형수술을 하지 않은 트렌스젠더 여성이 여성 탈의실을 이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항의한 것에 대해서 찜질방 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