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한 몸”은 교회, 특히 우주적 교회를 의미한다. 죄인이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것을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죄인들이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 순간 “‘풍덩’ 하고 성령의 강물 속으로 빠져서”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하는 “성령침례”는 방언이나 진동이나 뒤로 넘어짐 등 어떤 육체적 체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교회(한 몸)가 된다는 사실을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남침례교 신앙고백인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2000년판)”에서 “성령침례”라는 개념과 관련해 오순절 성령신학을 단호하게 배격하는 내용의 문장을 첨가했다: “그 분(성령-필자 주)은 중생의 순간에 신자 각자를 그리스도의 몸(교회-필자 주) 속으로 침례(성령침례-필자 주)를 베푸신다” 남침례교인들의 2000년판 신앙고백에서는 어떤 죄인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순간에 그 분의 피의 능력으로 죄사함 받고 거듭나는 것(중생)이며, 거듭나는 순간에 그 신자는 성령을 받게 되어 우주적 교회의 한 부분이 된다
루터의 구원론의 관심은 “나는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는가?”라는 구원의 방법에서부터 출발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대로 고행의 길을 걸었지만 해답을 얻지 못하고 절망하다가 로마서 1장 17절에서 ‘형벌적인 의’가 아닌 ‘대속적인 의’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값없이 주시는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루터는 자신의 죄의 문제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의 구원론을 체계화시켜 칭의교리를 만든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구원론은 인간의 관점에서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뜻과 약속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거두게 된다는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구원론을 제시하고 있다. 3) 평가 가톨릭은 갈라디아서를 ‘칭의·성화’라는 한 가지 개념으로 이해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해 믿음과 행위를 모두 강조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적인 인간의 선행(공로) 사상이 들어와서 섞이면서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행위나 종교의식을 통해서 구원받는 관점에서 구원론이 체계화됐다. 이는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성령으로 거룩하고 영화롭게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가는 것이 행복이다” - ‘혼자 사랑하고 상처받지 마라’ 중에서 역대상 28장은 죽음을 앞둔 다윗이 이스라엘의 모든 고관들을 모아놓고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다는 계획에 대해 말하며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이 일을 맡긴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전쟁을 많이 해서 피를 흘렸기 때문에 성전건축을 맡기지 않으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1~3절). 그리고 솔로몬을 향해 자애로운 눈빛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다윗은 솔로몬에게 세 가지를 당부했습니다(9절). “하나님을 알아라” “하나님을 섬겨라”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거나 정치를 잘해야 한다거나 어리다고 무시당하지 말라”는 등의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유언과도 같은 당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권면이며 합당한 요구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다면 가정이든 교회나 나라를 막론하고 형통하며 평탄한 길로 나아갈 것을 믿습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여호와의 나라를 이어받는 어린 아들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
-책을 보는 안목- 책을 대할 때 살펴야 할 몇 가지 항목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로, 추천사를 쓴 사람이 그 책의 주제(분야)와 연관이 있는 인사인지, 혹은 책의 내용과 관계없는 각계의 유명 인사들인지 살펴야 한다. 또한 추천자가 두세 명이 넘는 책은 대개는 저자의 홍보용이거나 책의 본연(本然)과는 동떨어진 특수목적의 책일 것이다. 많은 추천자를 나열하는 것은 저자가 스스로 책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이므로 학자나 저술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둘째로, 머리말(서문, 또는 저자의 말)은 책의 저술 목적과 내용을 요약 진술한 것이므로 제일 먼저 읽어야 할 내용이다. 셋째로, 목차가 편집된 모양을 보면 책의 짜임새를 알 수 있다. 들쑥날쑥 짜인 목차는 책의 내용도 다듬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넷째로, 판권(出板權) 페이지는 과거에는 대부분 책의 제일 뒤쪽에 붙였으나 근래에는 앞 쪽 속표지 뒷면이나 다음 장에 넣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들어가는 내용은 책의 인쇄일, 발행일, 저자, 출판사, 출판권 소유자, 판수(版數)와 가격 등이다. 중판(重版)을 거듭한 책일수록 많이 읽혀지는 책이므로 판수를 확인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섯째로, 책을 펴내는 출판사는
미국에 사는 동안에 한 달에 한번 매달 초가 되면 시내 한복판에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수시로 몰아치는 토네이도나 자연재해를 피하기 위한 대피 훈련이다. 한국에서 민방공훈련을 하던 생각이 났다. 세계 어디나 안전한 곳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전쟁의 공포가 없으면 자연 재해 등으로 준비하고 훈련하는 일들을 보며 공평하심을 생각한다. 세차게 바람이 부는 섬마을에 살면서 수시로 불어오는 바람은 이제 이웃처럼 느끼며 살아간다. 어느 날인가 밤새 심하게 바람이 불어 잠을 설치던 날에 아내가 제주도에 사는 처제에게 연락을 했다. 그랬더니 거긴 바람이 불어 나갈 수도 없다고 하소연했단다. 미국의 그 큰 땅 중간에도 바람이 불어 난리인데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섬이랴. 그러나 “참새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하신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으실 것이다. 세상의 주인이 누구신지, 자연의 섭리를 다스리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시려는 하나님의 메아리,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려는 주님의 메아리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일 게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12:1 상). 바다에서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면 반드시 영적인 신앙의 진보를 위하여 노력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예수님이 말씀하신 4가지 밭의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만이 결실하므로 “좋은 땅”에 심겨진 씨앗에 대하여 자세히 연구해 볼 필요성이 있겠습니다. 착하고 우리는 언제 착하다는 단어를 씁니까? 어린 아이가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음식물쓰레기 버리고 오라”는 어머니 말씀에 순종하고 들어오는 아이를 향해 “아이구 우리 아이 착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와서 밥 먹어라” “이제 가서 숙제해라”해서 순종할 때는 착하다라는 말을 안 씁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착하다는 말은 자신이 싫든, 좋든 상대의 뜻에 순종하는 겸손한 사람을 향해 착하다는 말을 씁니다. 여기에다가 더 힘든 요구에 순종할 때는 “참 착하다”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그 외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할머니의 짐을 들어 줄 때, 길에 널러져 있는 쓰레기를 자진해서 주워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을 향해 착하다는 말을 합니다. 즉, 하나님 말씀에 순종
그렇지만 동시에 침례교인들은 협동하는 사람들이라는 점도 매우 강조할 필요가 있다. 침례교인들은 지역교회 하나의 능력이나 자원으로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사역(교회개척, 해외선교, 신학교육, 대규모의 구제 등)을 위해서 지방회나 총회를 통한 협동사역에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믿는다. 침례교인들은 지역교회의 “자치”와 지방회나 총회를 통한 지역교회들의 “협동”은 상호 배치되는 가치가 아니라고 믿는다. 10. 성령침례와 성령충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오순절주의 신앙으로 인해 성령론에 있어서 적지 않은 혼란을 겪고 있다. 성령과 관련한 표현이 다양하게 많다: “구원받는다” “성령받는다” “성령의 인침을 받는다” “성령님이 내주하신다” “성령침례를 받는다” “성령체험을 한다” “성령충만을 받는다” 등. 오순절 신앙에서는 구원은 받았어도 성령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구원받은 후에 다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나의 구주요 나의 주님으로” 진정으로 믿었다면 성령을 안 받았을 수 있겠는가?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을 나의 마음속에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영을 모셔들인다는 말이 아닌가? 예수의 영이 바로 진리
그리고 사람이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려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으신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요, 도덕법을 통해 또는 전통이나 서원기도를 통해 의롭다 함을 받으려 할 때도 은혜에서 떨어져 가장 깊은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 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율법과 복음, 율법과 은혜, 율법과 믿음, 율법과 그리스도간의 구별을 반대의 개념으로 분명하게 이분법적으로 이해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의 논점을 다루는 앞부분에서 두 가지 짝 개념들을 설명한다. 먼저 ‘정치적 의,’ ‘시민적 의,’ ‘모세가 가르치고 있는 율법의 의,’ ‘십계명의 의’ 그리고 ‘능동적인 의’에 대항해 ‘이 모든 것들보다 뛰어난 믿음의 의,’ ‘기독교적의’ 그리고 ‘수동적인 의’를 대조시켰다. 루터의 이러한 신학은 믿음과 삶이 이분화되어 있고 사회, 윤리적 가르침을 등한히 하는 경향성을 띠고 공동체나 사회적 참여로부터 분리된 개인중심적인 경건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1535년 갈라디아서 강해를 중심으로 루터의 믿음과 사랑의 개념을 이해하려는 노력들이 시도 되고 있다. 루터의 신학이 사랑에 대한 가르침의 결핍으로 인해 그의 신학이 불가피하게 도덕성을 손상시키
-장정과 모양- 책에 대한 어휘로는 책(冊) 전(典), 서(書), 본(本), 도서(圖書), 문헌(文獻) 등이 있고, 합성어로는 간책(簡冊), 죽책(竹冊), 엽책(葉冊), 서책(書冊), 첩책(帖冊), 보책(譜冊), 책자(冊子) 등 이 있다. 보는 바와 같이, ‘책(冊)’은 대나무 조각을 엮은 책(策)의 모양에 따라 만든 글자이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전(典)’ 자는 상 위에 놓여있는 책의 모양을 보고 만든 글자로서 합성어로는 전책(典?), 전적(典籍), 고전(古典), 원전(原典), 법전(法典), 경전(經典) 등이 있다. <설문 해자(說問解字)>. 책의 장정(裝幀) 장정은 크게는 동양서적을 제본하는 동장(東裝)과 서양서적을 제본하는 양장(洋裝)이 있다. 동장에는 두루마리 모양의 권자본(卷子本), 나비 날개처럼 접은 형태인데 종이 중간에 글을 쓰고 바깥을 접어서 풀로 붙인 절첩장(蝴蝶裝)과 호접장(蝴蝶裝), 풀을 사용하지 않고 종이를 접어 구멍을 뚫고 끈으로 묶은 포배장(包背裝), 쇠침으로 여섯 곳에 구멍을 뚫어 묶는 족보 류 제본방식의 선장(線裝)등이 있다. 양장으로는 천이나 두꺼운 종이 표지를 써서 장본(장서)을 만드는 양장제본, 제본
얼마 전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의 배다른 장남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테러를 당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줬던 이 사건으로 인해서 많이 회자된 말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스탠딩 오더(standing order)”이다. 스탠딩 오더란 명령권자가 특정 명령을 내린 후 또 다른 취소 명령을 거론하지 않는 이상 지속적으로 유효한 명령을 뜻한다. 과거 김정은은 김정남의 살해 숙청을 지시한 이후 따로 취소 명령을 내린 바 없기 때문에 수년간 북한 정보당국 등이 끊임없이 살해를 기도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고 권력자의 복심을 실천하며 성취하기 위해서 그의 부하들이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결과 이러한 테러사건으로 표출됐다고 한다. 흔히들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얻어 보다 높은 서열의 권력을 얻기 위해서 경쟁하는 것을 “충성경쟁”이라고 한다. 권력자나 권력기관에 자신을 어필해 개인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 김일성 동상에 쌓인 눈을 맨손으로 닦아내는 사람들, 관제데모에 참여한 실적에 따라 예산을 조정하겠다는 지침을 내렸다는 청와대 권력자들의 소문, 시진핑의 눈에 들기 위해서 사드보복의 일환으로 한국 기업들을 자발적으로 괴롭
8. 지역교회의 독립성과 자치권 에베소서를 비롯해 일부 서신서들에서 “우주적 교회”가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도행전과 대다수의 서신서들에 등장하는 신약성서적 교회는 “지역교회”를 가리킨다. 일정한 지역이나 도시에 세워진 예수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갈라디아교회들, 골로새교회, 고린도교회, 로마교회 등은 지상에 세워진 지역교회들이었다. 지역교회는 상호 독립적이었고 자치적이었다.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A Spiritual Body of Christ)이었다. 1,000명이 모이는 교회도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요 10명이 모이는 교회도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다. 사명과 책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는 1,000명이 모이는 교회나 10명이 모이는 교회나 각각 하나의 독립된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침례교인들은 각 지역교회는 상호 평등하다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못박혀 죽으신 십자가 형틀은 평평한 땅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들 간의 교제를 위해 그리고 하나의 지역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적인 선교나 교육 사역을 수행하기 위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본 갈라디아서의 구원론-9 (3)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루터는 바울의 말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어떤 구별을 하여야 한다고 한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의 일 때문에 저주가 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전적인 강조는 “우리를 위하여”라는 어법에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격에 관한한 무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무에 달리지 말아야 했을 분이시다. 그러나 율법에 의하면 모든 강도는 십자가에 달아야 하였으므로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리스도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야 하셨다. 그는 죄인과 강도를 짊어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는 이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가장 기쁜 위로이다. 그리스도는 못 박히셨을 뿐만 아니라 죽으셨다. 그러나 신적인 사랑으로 죄를 그에게 지웠다. 죄가 그에게 지워졌을 때 율법이 와서 말했다. “모든 죄인은 죽게 하라! 그러니 그리스도여, 만일 당신이
가이우스 카이사르(Gaius J. Caesar, 100~44BC)는 로마의 군인이요 정치가로서 국정운영 방식을 황제와 원로원이 협의하는 공화정(共和政)을 폐지하고 황제 중심의 재정(帝政)으로 바꾸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실현하려다가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됐다. 그의 부하 브루투스가 검을 빼 든 순간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도?” 하고 절규하며 칼을 맞았다. 청년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안수 받고 처음 전도여행을 떠날 때 함께 길을 떠났으나 위험하고 힘든 일정을 견디지 못하고 밤빌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 일이 있었다(행13:13). 그 후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우리를)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반대해서 결국은 두 사람이 갈라져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시리아와 길리기아로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다(행15:38~41). 바울에게는 마가가 책임감도 없고 철도 들지 않은 젊은이로 보였을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의 인간관계도 끊어져 성경에는 이 일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했다는 기록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전국 방방 곳곳에 주의 종들을 보내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대도시에도, 중·소도시에도 그리고 농·어촌과 여러 섬들 안에도, 사람이 거주하는 곳에는 대부분 교회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목적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한 번은 진도에서 2시간 정도 배를 타고 내병도라는 섬에 가 본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11세대만 살고 있었는데, 교회에 나오는 가정은 4가정만 나오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목회자부부가 두 자녀를 데리고 힘겹게 사역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으로 보내주신 사역지에서 제각기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힘써 살아갈 때 훗날 하나님께서 교회 규모를 떠나 우리들 각자에게 공평한 상급을 주실 줄 믿습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주어진 목양지에서 인내하며 꾸준히 사역하는 분이 있는 반면에, 어떤 분은 개척교회만 세우며 다니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가 병들고, 무너지고, 닫힌 교회만 찾아다니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데 한 평생을 보낸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부흥사로, 어떤 분은 기도원과 병원 원목, 교목, 군목, 선교사 등 특수사역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곳곳
더 이상 국가는 특정 종교와 끈끈한 유대를 가져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 다시 말하면 국가가 특정종교를 박해하거나 편애하지 않아야 한다거나 교회문제에 개입하거나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헌법적인 규정으로 처음 제정했던 것은 1791년에 공포된 미국의 제1차 수정헌법(The First Amendment)이었다. 연방헌법(Federal Constitution, 1789) 제6조에서는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 종교가 시험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두고 있었다: (미연방헌법 제6조), “미국 내에서 공직이나 공적인 재단에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 그 자격요건으로서 어떠한 종교적인 시험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공무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에까지는 아직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같은 정치인이 앞장서서 제1차 수정헌법을 제출하여 미국 연방의회에서 통과가 됐다: (제1차 수정헌법), “의회는 국교의 제정에 관해 그리고 자유스러운 종교적인 활동을 금지하기 위하여 어떠한 법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 때 미국의 침례교 지도자들을 비롯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