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철 목사 한아름공동체교회 에베소서 1장 6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 안에서 남은 삶을 이해하고, 주인 되신 예수님의 교훈과 명령 안에서 남은 삶을 조정하며, 동행하시는 성령님의 섭리와 인도 안에서 남은 삶을 세워나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남은 생만큼은 부활예수의 산 증인답게 머리 되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고,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큰 기쁨이 되고, 더 이상 후회가 없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여, 날마다 내가 주인이 된 자리로부터 겸손하게 내려와야 하겠습니다. 주인의 생각과 계획을 알기 위해서라도 혹은 묻기 위해서라도 그 말씀 앞으로 진지하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들려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신 그 교훈과 명령 그대로 정직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부족하고 연약한 나의 안과 밖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드러나게 하소서. 이처럼 귀하고 귀한 남은 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소서. 진하고 강하게!
여주봉 목사 포도나무교회 나는 호세아 4:6을 토대로 몇 가지를 나누고 있다. 가장 주된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의 근본적인 원인과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특히 우리의 다음 세대를 잃어버린 원인을 보기 위함이다. “…나도 네 자녀 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오늘날 한국교회 반 이상의 교회에 주일학교가 따로 없다는 이야기가 제기된 지 오래됐다. 심지어 2030년까지 80% 교회에서 주일학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이야기까지 들린다. 하나님의 특별한 개인과 역사가 없이는, 주일학교가 더욱 줄어드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그것은 다시 청년부의 축소로, 그것은 다시 주일학교의 축소로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는 사이 현재 심하게 고령화되어 있는 한국교회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될 것인가는 생각 하기조차 싫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의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계신다고 확신한다. 앞으로 그런 부분들을 하나하나 나누려고 한다. 이 상황에서 가장 근본적인 해답은 영적인 면에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목회자들과 교회 중직자 들부터 모두가 하나님께로
독서 모임에 들어갔다가 정치범으로 사형 장까지 가게 된 도스토옙스키는 참 기구한 운명의 사람이었다. 처형당하기 직전 황제의 감형 조치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시베리아 유형, 수용소에 4년을 갇혀 지냈다. 그런데 참혹한 수용소에서도 열심히 성경을 읽었다. 또 출소 후의 건강을 위해 노동에도 정을 붙이려 노력했고, 장차 쓸 소설 소재를 위해 범죄자 관찰도 열심히 했다. 결국 나중에 유형 생활 수기인 장편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 외에도 4대 명작,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 범죄소설을 쓴 범죄 문학의 마법사가 된다. 위기를 기회로 삼은 것이다. 30대 대부분을 시베리아에서 보낸 도스토엡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에도 삶이 고달팠다. 형과 함께 잡지 사업하다 빚만 잔뜩 지고 형이 죽자 그의 빚까지 다 떠맡아 평생을 빚에 시달렸고, 폐결핵으로 7년 만에 시베리아에서 만났던 아내를 잃고, 자신도 간질, 폐기종 등 각종 질환에 시달렸다. 그러나 매 순간이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삶을 살면서도 ‘생을 선물’이라 여기며 지치기는 커녕 열심히 작품을 써서 러시아 최고 작가의 반열에 우뚝 섰다. 다
암 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는 얼마나 아팠으면 ‘너도 아프니?’라는 시에서 날아온 새나 꽃과 나무에게도 ‘너도 아프니?’라고 물었다고 했고, ‘환자의 편지’라는 시에서는 아플수록 침묵했다고, 남몰래 울기도 하고 괴로워 잠도 못 잤다고 했다. 또 ‘암세포에 대한 푸념’이란 제목의 시에서는 “약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대요”라는 첫 문장으로 시를 썼다. ‘마지막 편지’라는 시를 읽을 땐 이젠 정말 마지막인가 싶었지만 고맙게도 75세인 이해인 수녀가 우정을 주제로 한 글을 모은 ‘친구에게’라는 에세이를 2020년 7월에 출간했었다. 인생의 마무리를 너무 멋지게 잘하는 분인 것 같다. 반면에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의 마지막은 너무 외롭고 추하다. 사무엘상 후반부가 다윗 중심이었는데 본문은 초점이 사울에게 맞춰진다. 마지막이 임박한 때, 죽기 직전의 사울,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무당 이야기, 그것도 무녀는 긍정적이고 사무엘은 오히려 좀 부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분위기다.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기름부음 받는 명예와 특권을 누리며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질투심 때문에 무너지면서 갈 데까지 간 사울, 선을 넘었지만 마지막이라도 아름다운 퇴장이면 좋겠지만 마지막이 너무 두렵다. 급
에베소서 1장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어둡고 부패한 세상의 본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활개를 칠 때면, 여지없이 예수님의 자리와 가치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탐욕으로 물든 사람의 주장과 업적들로 소란을 피우기 마련입니다.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이 믿어져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옛사람의 악성과 악습이 통제되거나 소멸되지 않으면, 여지없이 예수님의 교훈과 명령은 부담스러운 과제로 남겨지고,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의 방식과 변명들로 저항하기 마련입니다. 이는 동서고금, 빈부귀천을 무론하고 하나님 중심을 벗어난 세상과 사람들이 보여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지금 당장에는 혹은 얼마 동안이라도 더 없이 안전해 보이고, 더 없이 확실해 보이는 갖가지 이유들이라도 때가 되면, 결국 퇴색되고, 대치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어리석은 반응입니다. 하여, 변하지 않는 영원한 실상(實像)을 오늘도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음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과 사람들의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확실한 안내자를 오늘도 믿고 따라가고 있음에
다윗이 3000명이나 되는 진영에 침투해 잠이 든 사이 자기를 죽이지 않고 머리 곁에 두었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간 것을 안 사울은 “내 아들 다윗”이라며 “다시는 해하려 하지 않겠다”고 한다. 26장에서도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26:25)고 했었다. 말끝마다 “내 아들”에 축복까지 하지만 26장은 각각 자기 길로 간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27장을 보면 사울 왕의 약속을 믿을수 없었던 다윗은 블레셋으로 망명을 떠난다. 오랜 생활을 도피 생활로 보냈던 다윗은 유대 땅이라면 어디든 사울의 추격에서 벗어날수 없었기에 망명길에 올랐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 다윗의 망명은 처음이 아니다. 암몬으로 망명한 적도 있고, 블레셋 아기스에게로 망명해서 살아남기 위해 미친 척한 적도 있다. 그때는 잠깐이었지만 이번 망명은 기약이 없다. ‘1년 4개월’(27:7)인지, ‘여러 날 여러 해’(29:3) 가 얼마나 더 긴 기간이었는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다윗의 이번 망명에 대한 시각은 곱지 않다. 올바르지 못한 선택, 심지어 비신앙적 선택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 이유는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에베소서 1장 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나의 신념으로 믿는 것과 성령님의 역사로 믿어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믿어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믿어지고, 성령님의 동행하심이 믿어지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믿어지고,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 믿어지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믿어지니, 시간을 더해갈수록 자원하지 않을 수가 없고,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말씀이 구구절절 마음 가운데 심겨질수록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을 수가 없고, 성숙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어진 그대로 행하기를 부단히 훈련할수록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경험하지 않을 수가 없고, 증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여, 오늘도 나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무능함과 부패함을 철저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겸손한 마음으로 정직하게 간구해야 합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이미 믿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마음 그대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변화된 사람답
신앙과 이성에 대한 전망 연구자의 목표는 신앙과 이성의 긴장과 조화로운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신앙을 발견할 수 있음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앙과 이성이 분리된 시대에도 신앙과 이성은 여전히 우리 안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성은 우리가 맹목적인 믿음으로 나가는 것을 막아주고, 신앙은 이성의 활동에 풍요로운 의미와 맛을 부여한다. 신앙과 이성은 원래부터 인간의 문화와 삶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두 요소였다. 새는 날기 위해 두 날개가 필요하다. 진리를 향해 우리가 날 수 있었던 것은 신앙과 이성이라는 두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이성의 빛만을 지나치게 절대화하는 오류가 이성주의, 합리주의이다. 또한, 신적 은총으로 이성이 정화되어 계시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이성의 가능성을 불신하는 것이 허무주의로 흐르게 한다. 이러한 양극단으로는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떻게 신앙의 본질을 손상하지 않고 철학을 신학으로 도입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성을 기반으로 한 철학은 언제든 오류 가능성이 있고, 비판되고 수정될 여지가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기에 기독교적 이성을 회복해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2. 토마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눈 여겨 볼만한 대표적인 학자는 아퀴나스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방법론을 수용하여 기독교사상을 체계적으로 종합하는데 성공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800여년이 지나고 아퀴나스는 종교와 철학의 조화에 대한 입장을 피력했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 모두가 동등한 자격을 지닌 진리에 이르는 길로 제시한다. 이성은 자연의 빛에 의해, 신앙은 은총의 빛에 의해 성립되는 것으로 봤다. 그는 계시는 이성을 전제로 하며 자연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한다고 본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으므로 계시가 없이도 이성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입장은 기독교 신앙에 문제점을 남겨 놓게 된다. 이성에 ‘자율성’(autonomy)과 ‘자기 충족 성’(self-sufficiency)을 부여하여 이성절대주의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됐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이 이성에 앞선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알기 위해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아퀴나스는 ‘믿기 위해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학과 철학을 분리하면서 신앙과 이성을 구분했다. 그러나 신앙과 이성은 구별되지만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파악했다
새해가 되면 으레 세우는 계획이 있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기도를 더 많이 하며, 살을 빼거나 술, 담배를 끊거나 관계를 회복하거나 승진을 하거나 사업을 더 일으키고 싶다. 지난해 이맘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계획이다. 그런데 그때 마음먹었던 변화를 지속해 왔는가는 지난해를 지내며 쌓은 습관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밤에 간식을 찾는 습관은 복근을 위한 한해의 프로젝트를 금세 포기하게 한다. 쉴 때마다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습관은 새로운 것을 배워보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미뤄두게 한다. 계속 ‘나중에 하지’를 반복하는 습관은 학업이나 일을 효과를 여지없이 떨어뜨리고 성공을 방해한 다. 비꼬거나 비난하는 말의 습관은 잘 지내보려던 관계들을 악화시킨다. 작은 일상이 삶의 방향을 좌우하는 것이다. ‘습관의 힘’이라는 책에서 찰스 두히그는 MIT의 한 연구를 소개한다. 뇌의 기저핵이 손상되어 기억할 수 없는 쥐들이 어떻게 미로에서 초콜릿을 찾아내는가를 지켜봤다. T자형 미로의 왼쪽 끝에 초콜릿을 놔뒀을 때, 한동안은 초콜릿을 찾지 못했고, 냄새를 따라 찾아 헤매는 동안 두뇌활동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수백 번 다니는 동안 쥐들은 왼쪽 오른쪽 길 중에
가족의 필수 요소는 결혼이다. 가족체계에 있어서 부모 자체가 서로 사랑하는 건강한 관계라면 가족체계는 순기능적이다. 아이들은 부모처럼 건강하고 자아경계선은 분명하며 잘 분화되어 성숙한 인격으로 자란다. 또한 자율적이고 책임감이 있으며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에너지는 건강한 배우자를 선택하는 안목이 된다. 결혼은 원하는 소유물처럼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결혼을 할 때 이상적인 부부가 된다. 그러면 그 부부는 자녀를 낳아 자신들과 같이 건강하게 아이들을 양육하기에 마치 유전자가 대물림이 되듯이 건강하고 기능적인 가족체계를 대를 이어 물려주게 된다. 건강하고 기능적인 부부란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고 스스로가 책임을 진다. 그들은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할 때나 병 들었을 때나 죽음이 둘 사이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한 몸 됨이요, 배우자가 바로 나이기에 그 무슨 조건이나 환경보다도 배우자가 생명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30대 초반의 한 젊은이가 있었다. 독신주의를 고집하다가 이제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결혼을 해야겠다고 한다. 현재는 취업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적성검사를 할 때에 그 질문들
Ⅲ. 신앙과 이성의 균형 종교적 신앙과 이성적 인식의 문제는 기독교 철학의 중심 과제일뿐 만 아니라 조직신학, 변증학 등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문제이다. 이 문제로 인한 질문은 다양하다. 예를 들면 믿음이 먼저인가? 아니면 앎이 먼저인가? 신앙이 이성에 의존하는가? 아니면 이성이 신앙에 의존하는가? 이성은 신앙에 걸림돌이 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이성과 신앙의 이상적인 관계는 무엇인가? 합리주의와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스스로의 이성을 자각하기 이전 2000년 가까운 서양의 역사를 지탱한 것은 바로 기독교였다. 과학과 이성이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고작 300년 남짓이다. 그 기간 동안 눈부시게 발달한 과학과 인간 이성에 대한 자각은 어느덧 종교와 신앙을 낡고 구태의연한 것으로 치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종교에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의 이성과 계시라는 종교가 어색하지만 여전히 공존하고 있고, 그로 인해 예기치 않은 갈등이 벌어지는 사회, 그것이 바로 오늘의 현대사회다. 그렇다면 과학의 시대를 살며 이성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사유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고 자부하는 현대인들에게 초월
신앙생활을 할 때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나 기도를 할 수는 있지만, 누구나 기도를 잘 하지 않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기도도 훈련이 되고, 습관이 되어 있어야 야베스처럼 기도의 “능력자”라고 칭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도의 원리는, 기도할 때 기도자의 관점, 시선, 초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서 역대기의 저자가 의도를 갖고 족보를 구성했다고 설명했으며, 유다 족속을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은, 유다 족속이 포로 후기 공동체의 중심으로 세워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서술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은 왜 야베스의 어머니가 고통 중에 야베스를 낳았다는 표현을 기록했을까요? 유다의 정통성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유다 족속의 기록 가운데에 삽입되어 있는 야베스 삶의 기록이 부정적인 표현으로 얼룩지어진 것은 선 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심지어, 본문은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을 분명하게 풀이까지 해주는데, 야베스의 이름이 “고통”이라는 단어에서 왔다라고 밝혀줍니다. 히브리어에서 고통이라는 단어의 자음 위치를 바꾸면 야베스라는 이름에 등장하는 자음의 순서가 됩니다. 우리말로 정확히 묘사하기는 힘들지
영어속담에 ‘Haste makes waste’라는 말이 있다. ‘서두르면 망친다’라는 뜻이다. 신앙생 활도 그럴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Word)과 하나님의 뜻(Will)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Way) 을 알아야 하는 것,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고 하셨지만 어떤 방법으로 왕이 될것인지는 말씀해주지 않으셨고, 다윗은 지금 계속 도피생활 중이다. 이게 뭔가 싶은 때도 수없이 많았을 것, 그런데도 다윗은 서두르지 않는다. 기다림의 대가, 기다림이 승리를 불러왔다. 조급한 사울 왕 본문은 도망자 다윗이 하길라 산에 숨어 있다는 십 사람의 밀고로 시작된다. 사울은 즉각 정예 용사 3000명을 이끌고 토끼 사냥하듯 다윗을 잡겠다고 나섰지만(2절) 정작 결정 적으로 승기를 잡은 것은 다윗이다. 상황은 24장과 비슷하다. 엔게디 동굴에서 용변 보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고도 옷자락만 베고 살려준 것, 그때 사울은 감동을 받고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며 헤어졌었는데 자신을 죽이려고 추격해오던 사울과 그 군사들 모두가 다 깊이 잠이 들었다. 다윗 입장에서는 엔게디 동굴
에베소서 1장 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이후로도 무엇을 더 가져서 혹은 무엇을 더 배워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더구나 나의 무능함과 부패함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넉넉한 마음과 자원을 매순간 받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도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오늘의 삶이나 남은 생애도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투명하고 친밀한 관계만큼 더욱 맑고 밝게 세워지고 풍성해진다는 진실을 어떤 형편 중에도 잊지 않고, 잃지 않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여, 오늘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자원을 충만히 채우게 하소서.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의 교훈과 명령을 온전히 순종하게 하소서. 동행하시는 성령님의 지도하심과 인도하심을 기꺼이 따라가게 하소서.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윤영철 목사 한아름공동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