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시대라면 십계명의 지위와 권위는 당당했을 것이지만 때가 때인지라 지금은 신약시대다. 신약시대의 십계명의 지위와 권위는 어떤 것인가? 초단부터 말하지만, 십계명은 이 신약시대에 와서는 설 제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에는 십계명이 관여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벌써 이런 표현에 알레르기식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내 눈앞에 훤하게 많이 보인다. 우선 십계명의 역사적 과정을 요약한다.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의 중간모음이 십계명이고 이것이 신약으로 넘어 오면서 산상수훈으로 자리를 펴다가 끝내 두 계명으로 응결됐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묻노니 어느 누구인들 최후의 요약적인 두 계명을 100% 지킬 자가 있느냐? 아무도 없다. 그러니깐 모두가 죄인이다. 이를 예수 해결해 주셨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사무엘상 17장은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야기다. 58절이나 되는데 골리앗이라는 이름은 4절과 23절에 한 번씩 딱 두 번밖에 나오지 않지만 이름이 너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골리앗’ 하면 거인이나 장애물의 화신이 됐다. 반면에 다윗은 어린 소년,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다. 그런데 결과는 완전히 예상을 뒤엎는다. 승리의 비결이 뭘까? 골리앗, 어마어마한 거인이다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4절), 한 규빗이 사람의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니까 대체로 45~50cm, 그렇다면 거의 3m 정도의 거인이다. 기네스북 역대 공식 최장신 로버트 워들로우(Robert Wadlow)의 272cm보다 한참 더 큰 비공인 역대 세계 최장 신이다. 키만 큰 게 아니라 힘도 셌다. 갑옷의 무게가 놋 5천 세겔, 1세겔이 11.4g이니까 57kg이고, 창날 무게만철 6백 세겔, 거의 7kg에 가까우니 맞짱 뜨다가는 뼈도 못 추릴 정도다 (5~7절). 그런데 고대 전투는 1:1 싸움으로부터 시작된다. 다윗은 골리앗과 맞짱을 뜬다. 블레셋과 이스라엘간에
요즘 많은 목회자들은 회중이 아니라 카메라 앞에서만 설교하고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한 두 주하고 끝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카메라 앞에 섰을 것이지만, 이제는 카메라 앞에서 설교한 지도 1년이 넘어서고 있다. 어쩌면 회중도 없이 혼자 설교하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속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전 세계가 온라인 환경과 생활에 더 집중하고 있고,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2020 도쿄올림픽이 열렸다. 무관중 경기라는 희대의 올림픽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집에서 TV로 올림픽을 봐왔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관중 경기는 별 의미가 없다. 그냥 TV로 보던 대로 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우리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은 것처럼, 온라인 일상과 온라인 신앙생활도 점점 우리 삶에 매우 깊숙이 들어오고 있다. 팬데믹이 시작될 때 우리는 온라인 예배가 가능할까 의구심을 가졌지만, 이제는 온라인 예배과 신앙생활도 하나의 예배와 신앙생활의 형태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온라인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사역 모델을 만드는 그룹도 등장했다.
V. 침례교 전통의 주의 만찬의 이해 주의 만찬에 대한 침례교 전통은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재할 수 있는가’란 추상적 논쟁보다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성례전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가 아니면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용돼야 하는가 하는 실천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둔다. 침례교 전통은 주의 만찬을 열린 주의 만찬과 닫힌 주의 만찬으로 구분해 실행한다. 열린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만찬에 참여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복음주의 교회의 회원들을 어떤 교리나 교회 의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게 한다. 반면에 닫힌 주의 만찬은 물에 잠기는 침례 의식을 받은 사람들만이 참여하게 한다. 어떤 의식 절차보다도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주로 결단하고 고백하는 것을 믿는 구원의 증거로 여기는 침례교 전통은 오직 침례(세례 또는 영세)를 받은 자에게 주의 만찬에 참여하게 하는 다른 교회 전통과는 달리 열린 주의 만찬에 문을 열어 놓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의 침례 의식을 행한 자들에게만 허용하는 닫힌 주의 만찬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기능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내가 시내 전철을 탄 시간은 여름 오후 4시경인가 싶다. 동대문역사 문화역에서 한 여인이 건너편 경로석에 와 앉았다. 오후라서 그녀와 나사이에는 가리울 승객도 없는지라 그녀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물론 나와 그녀는 생명부지간이다. 그런데 오늘 오후 나는 전철 여행 중에 값내지 않고 중년 미녀를 바라 는 기쁨을 갖게 되었으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일상 속의 보너스로 생각한다. 에이 목사치고는 좀 지나친 감정표현이 아닌가라고 옆구리를 슬쩍 찌를 다른 동역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 앞의 중년 미녀는 60세 후반인듯 한 여인이었다. 아래는 검은 바지를 입었고 상의는 하얀 블라우스 옷을 걸쳤는데 의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의 키는 어림잡아도 확실히 나의 163cm보다는 더 올라간 신장이었다. 샌들을 신은 그녀의 열발가락은 투명체로 손질되어 있었 다. 뭉실뭉실하게 부풀어있는 머리 카락 모습이 마치 구름 같았으나 단지 검은색 구름이었다. 눈은 맑은 호수처럼 시원하고 입술은 통통한 앵두 같고 코는 클레오파트라의 그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가끔 눈을 감았 다떴다 하는 모습이 더 매력적이었다. 얼굴색은 거의 백인같이 흰색인데 양볼엔 약간의 홍조가 띄었다. 가벼운 핸드
숀 코넬리 주연의 ‘왕이 되려 한 남자’(The Man Who Would King)라는 영화가 있었다. 007의 사나이, 숀 코넬리는 가장 제임스 본드다운 제1대 제임스 본드다. 그 영화가 나온 지 3년만인 1978년에 타임지(Time)가 영국 찰스(Charles Windsor) 황태자를 표지 모델로 선택하면서 제목을 ‘왕이 될 남자’(The Man Who Will Be King)라고 붙였다. 하지만 43년이 지났는데도 찰스 황태자는 아직도 왕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왕이 될 남자로 남아 있다. 그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는 올해 만 94세이고, 본인도 나이가 만 71세나 됐으니 정말 왕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본문 사무엘상 16장에도 ‘왕이 될 남자’가 등장한다. 다윗이다. 다윗도 왕이 되는 과정이 쉽지 않다. 왕은커녕 오히려 죽을 것 같은 위기들이 도사리고 있다. 15세에 기름 부음 받지만 왕이 된 것은 30세, 긴 세월 동안 ‘왕이 될남자’로 힘겹게 지낸다. 그러나 결국은 왕이 될 남자다.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의 히든카드로 등장하면서 다윗 시대가 시작된다. 왕이 될 남자 다윗, 이제부터는 사무엘서의 역사는 다윗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
일반인들이나 교인들도 목회자는 희생적인 삶을 사는 사람, 신앙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치며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목회자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면서 남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며 살아야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하여 보리밥 세끼도 먹을 수 없던 시절에 선배님들은 밥 세끼만 먹을 수 있으면 감사하며 목회를 했다. 어려운 시대에 선교사님들과 선배님들이 가난하게 살면서 목회하며 한국교회를 이만큼 발전시켜주셨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4차 산업시대를 말하는 21세기의 현대사회는 모든 분야가 놀랍게 발전했고 복지 제도도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다. 공무원이나 회사원들도 기본적인 복지혜택은 다 보장이 되고 정년퇴직 후에도 연금이 있고 큰 문제없이 노후의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아직도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이 많고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 현상이 너무 심각하다. 교회에 따라 부목회자나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은 복지라는 말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가장 기본인 사회보험(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분들이 많다. 큰
이번부터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전파 사역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가장 극적인 사역인 예수님의 귀신축출 사역의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소위 ‘축귀’ 사역으로 알려진 ‘귀신축출’ 사역은 지금은 이단으로 인정된 어느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일부 목회자들에 의해 개인적으로 행해지고 있지만, 많은 목회자들은 이사역에 관해 잘 모르기도 하고 무관심하기도 한 사역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신이 여러 차례 귀신들을 쫓아내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요약적 진술들에는 대부분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신 것”에 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마 4:24; 8:16; 막 1:34; 눅 6:18). 예수님이 그의 열두 제자들을 따로 세우신 목적 중 하나는 귀신축출 사역을 계승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막 3:15). 예수님은 그의 열두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사역을 계승하며 재현하는 복음을 일꾼들로 훈련하기 위해 그들을 내보내시면서 귀신축출의 권세를 주셨다(막 6:7; 마 10:1; 눅9:1;10:17). 마가에 따르면, 예수님의 귀신축출 사역은 그분이 행하신 첫 번째 공적 사역이었다(막 1:21~28; 참고, 눅 4:33~37). 누가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기의 공
인권과 기독교 인권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엄성을 갖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권은 사회에서 교회가 책임져야 할 아주 중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교회는 인권 문제에 대해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실천해 나갈 필요가 있다. 단순한 대응이 아닌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인권에 대한 문제들을 성서에 근거해 적절하게 이해하는 작업과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실천 방안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각 분야에 나타나고 있는 인권 문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선행을 바탕으로 인권에 대한 성경적 가치관 정립뿐만 아니라 올바른 성서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교육을 해야 한다. 그리고 각종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인권 실현에 대한 의지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야 한다. 이때 개인적 차원에서만 인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교회 간의 협력 등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서도 인권 신장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양극화에 대한 반성 양극화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 하는 빈부격차와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반목 현상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양극화의 심화를 겪고 있는데, 이는 갈등과 분열을 야기하고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화체설은 떡과 피가 직접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적 실체로 바뀜으로 그리스도가 임재한다고 설명했다면, 공재설은 떡과 포도주는 그대로 있지만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심으로 주의 만찬에 참여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과 떡과 포도주가 공존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루터는 삼위일체의 연합(일치)과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떡과 포도주의 연합은 유사한 신적 신비로 이해했다. 그가 떡을 분배할 때 그리스도가 그의 몸을 먹도록 주신다는 것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기술한 본문이 지금 여기에 있다. 이것 위에 우리는 주의 만찬에서 우리가 참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취한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믿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 발생하거나 어떻게 그가 떡에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속박하거나 측정하는 것 없이 우리가 믿어야만 한다. 우리의 눈으로 그 떡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현존한다는 것을 우리의 귀로 듣는다. 공재설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주의 만찬을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플라톤은 눈으로 볼 수 있
나는 지난 기고글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판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걷힌다는 것을 나눴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도 그의 책 ‘하나 님과의 신선한 만남’(요단)에서 정확하게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매우 좋은 예를 우리는 말라기 시대에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을 살펴보는 주된 이유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기 위해서다. 우선 말라기 시대는 하나님을 버린 시대였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 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 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1:6). 이사야 1장 4절을 보아도 알수 있듯이 하나님을 멸시한다는 말과 하나님을 버린다는 말은 같은 뜻이다. 문제는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항상 이런 일이 발생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그들에게
자주 외국에 체류하는 나와 아내는 양식에 약간은 익숙하지만 솔직하게 한국 마트에 가서 양식 식자료를 선뜻 사오지 못하는 것에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미안한 바도 느낀다. 오늘 TV에 햄이야기가 나오기에 나와 아내는 마트에 가서 햄을 사가 지고 와서 먹기로 하고 내가 심부름을 했다. 이렇게 해서 사온 햄의 껍질은 육안으로 보아서는 명백히 비닐 껍질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비닐 껍질은 벗겨내고 먹는 것이라 여겨 두 내외는 이놈의 껍질을 벗기는데 여간 공이 들지 않았다. 우선 잘 벗겨지지를 않는데다가 온 손에 기름이 묻고 작업 결과도 그 매끄럽던 햄이 전쟁터에서 총알을 맞은 듯 만신창이가 됐다. 그 매끄럽고 반들반들하던 햄이 몰골이 흉하기 말할 수 없었다. 이런 고통의 작업을 하는 것이 정상인가. 외국에서 먹어보던 햄을 생각해 보았다. 또 한국 호텔에서 먹어보던 햄을 생각해 봤다. 아무래도 그것들은 우리가 집에서 먹던 햄과는 모습이 다른 것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이 껍질 까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냥 먹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 아내는 그럴 것 같기도 하단다. 그래서 오늘 아침엔 오븐에서 갓 꺼내온 햄의 껍질을 벗기지 않고 먹어보았다. 이상하더군. 그래도 나와 아내는
뉴요커들에게 사랑받는 뉴욕 맨하탄 중심의 센트럴파크는 무려 100만 평이 넘는 공원이다. 사람들은 이 금싸라기 땅에 고층건물을 올리면 부가가치가 엄청날 텐데 왜 이렇게 크게 만드냐고 했지만 도시설계사 로버트 모지스 (Robert Moses)는 “이 엄청난 도시에 이만한 공원이 없다면 훗날 이 공원보다 훨씬 더 큰 정신병동을 지어야 할것”이라고 했단다. 가치가 흔들리는 시대다. 눈에 보이는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왕이 된 사울은 듣는 귀가 막히고, 보는 눈이 희미해지고, 깨닫는 능력이 줄어들면서 교만해진다. 말씀을 무시하고 오버하며 남 탓하다가 결국 하나님 눈 밖에 난다. 사무엘상 15장도 하나님 눈 밖에 난 이야기인데 그때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했던 말이 “제사보다 순종”이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 ‘가서 아말렉을 진멸하라’(3절),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진멸하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렘’(herem), 마치 번제처럼 다 태워라, 소멸하라는 것이다. 좀 잔인하고 충격적이지만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유아, 그리고 그 소유물까지 다 제거하라고 했다. 이유는 출애굽 때 아말렉이 이스라엘에 행한 악 때문이다(2). 아말렉은 유다 남
돈이 하도 많아서 돈 걱정 안하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무료할까. 자나 깨나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돈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 중에는 영 재미없어서 못 살겠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꽤나 많이 있다. 그런 상태가 심하면 돈덩이 위에서 생을 결단내는 자도 있다. 우유 먹기가 힘들었던 한국 1970년도에 유행어가 생겼다. 우유 배달원은 강하고 앉아서 우유 받아먹는 자는 약골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농촌에서 자라서 똑똑히 본 광경이 있다. 부잣집 맏아드님은 공자처럼 농일없이 그늘나무 밑에서 논어, 맹자 글을 읽는데 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갓 나온 아침 잠자리 같았다. 그의 아범은 자식 강하라고 씨암탉 잡아 보양해 주지만 아들의 약골의 모습은 여전했다. 그런데 그 집에 일꾼으로 들어온 머슴은 권투선수처럼 골육이 강했 다. 머슴에게 보양식을 안길 턱은 없고 주인이 주는데로 물론 식사는 건너지 않고 착실히 먹었는데 결과는 딱하게도 그 집 아드님은 조사(早 死)하고 머슴은 소 몰고 들로 가더라는 장면. 나는 극단적인 경우를 상상해보았다. 아주 돈은 많은데 자기가 쓰기에도 지루하고 또 딱히 어디에 어떻게 쓸 줄도 모르는 부자의 따분함을 택하랴. 혹은 돈이라면 언제나 호주머니가 배고파
침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육신의 모친 마리아는 친족 관계였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 문안했었다. 침례요한과 예수는 육신적으로 가까운 친족으로 모친들의 뱃속에 인사하고 즐겨 뛰노셨다(눅 1장). 마침대 6개월 먼저 출생한 침례요한은 예수를 위로 모시고 자기를 낮추는 임무의 온전한 수행자였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요1:7) “요한이 그에 대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5~18). 요한은 예수 증거하러 세상에 보냄을 받아왔다.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마저 예수에게로 돌리고 폭탄선언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 그런데 침례 요한의 초라한(?) 죽음을 보라. 요한은 헤롯이 자기의 동생 빌립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