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회는 선교하는 교단으로 세계선교에 선한 영향력을 지금까지 끼쳐왔고 여기에 더해 뜨거운 찬양과 기도, 말씀이 함께하는 교단으로 잘 알려져 있다. 최근 총회가 주최한 연합기도회인 라이즈 업 뱁티스트를 비롯해 한사목이 주관한 목회자 영성 세미나, 지방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천안지방회가 주관한 복음화 대성회는 말씀과 성경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충만한 능력을 구하며 기도하는 침례교단의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전국 침례교회 연합기도회인 라이즈 업 뱁티스트는 전국을 순회하는 것과 동시에 유튜브 플랫폼을 활용해 6월 3일부터 14일까지 12일간 모든 교회가 온라인으로 참여하며 찬양과 말씀, 기도가 어우러진 대축제의 시간이었다. 우리 모두가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던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시작된 연합기도회는 매년 6월이면 교단 전체가 기도의 불씨를 지피고 다가오는 여름 사역을 말씀과 기도로 준비하는 응답의 시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는 장소를 제공하는 교회와 말씀을 선포하는 강사, 성공적인 행사 진행을 위해 헌신하는 총회 스태프들의 수고로 기도회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올 초부터 일어난 113차 총회 의장단의 잇따른 직무정지 소식으로
한편 펜윅이 원산 과수원에서 재배한 과일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관해 이호철의 “개화기 서양능금과 과수 재배기술의 수용”(2002년)과 The Korean Repository(1898년)에 게재된 “원산 과일”(Fruit in Wonsan)과 The Korea Review(1901년)에 게재된 “새 달력”(New Calendar)에서 확인이 가능한데 7가지이다: (1) 사과, (2) 앵두, (3) 자두, (4) 배, (5) 구스베리, (6) 건포도, (7) 포도. 특히 원산 사과는 일본에서도 인기가 좋았던 것을 조선일보 1925년 3월 31일자에서 기록하고 있다: “원산평과(元山苹果)[원산사과]라 하면 도처(到處)에서 환영(歡迎)를 밧는바 일본(日本)에서도 상당(相當)한 가(價)를 획득(獲得)하는 모양(貌樣)이라는데 일정보이상(一町步以上)의 과수원소유자(果樹園所有者)의 씨명(氏名)은 좌(左)와 여(如)하다더라.” 펜윅이 재배한 원산 사과는 미국종이었지만 원산지와 질적으로 같았고 인기가 높아 잘 팔렸다. 그렇다면 펜윅의 원산 농장과 과수원의 연소득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이에 관해 1902년 5월 29일 자 황성신문에는 “원산항(元山港) 거류(居留)ᄒᆞᄂᆞᆫ
74년 전 한반도는 남북이 이념 갈등으로 전쟁까지 일으켜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38선을 중심으로 기습적인 남침을 감행한 북한은 침공 3일만에 남한의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물밀듯이 남으로 내려갔다. 삽시간에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를 점령당한 남한은 경상도까지 밀려와 패망의 길까지 치달았다. 당시 자유주의 수호를 내건 미국을 비롯한 UN군과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나선 젊은 국군 장병들의 피와 노력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자 고귀한 희생으로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한국침례교회 역시 1948년 강경에서 총회를 열고 재건의 길을 모색했지만 전쟁의 포화를 피해 갈 수 없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교회를 지키던 우리교단 이종덕 목사는 북한군에 의해 총살을 당한 아픔을 우리는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다시 일어서려던 침례교회들도, 믿음의 공동체도 자유를 찾아 피난을 떠났으며 부산까지 내려온 침례교회는 미남침례교 군목들과 선교사들에 의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전쟁은 참혹하고 모든 것을 앗아가는 비참한 상황임을 우리는 74년 전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 뼈저리게 체험했다. 수백만의
모 일간지에 우리 교단의 소식이 실렸다. 우리 교단의 현 사태는 ‘교단 정치’가 원인이라는 내용이다. 해당 기사는 이번 사태의 핵심이 한국침신대 이사 파송이라고 지적한다. 양측 당사자들이야 거짓과 진실의 싸움이라며 자신들이 교단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의롭게 나선 기드온의 용사라 칭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정치 목사들의 이권 다툼일 뿐이다. 어떻게든 이번 사항을 확장시켜 자신들의 편을 늘리고 싶겠지만 많은 목회자들은 혀를 끌끌 찰 뿐 동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를 내버려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점점 제대로 된 목회자는 교단에 관심을 끄게 될 것이고, 어느새 교단의 리더십들은 삯꾼으로 가득 찰 것이 뻔하다. 지금의 모습을 보면 우리에게 기독교한국침례회는 사치일지 모른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를 책임지기에는 능력 밖일지도 모른다. 침례병원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 둘 떠나보내다 주위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을 깨달을 수 있을지도 사실 의문스럽다.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또 누군가를 향한 손가락질만 하다가 하염없는 세월을 흘려보낼 것만 같다. 과한 표현 같은가? 교단에서 무언가 섬겨야 할 사람을 세울 때 “해야 할 사
샬롬! 저는 현재 대만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종훈 선교사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2004년 무작정 중국으로 들어가 운남성에서 아직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종족, 미접촉 미전도종족대상으로 2019년 1월까지 사역했습니다. 중국 대륙은 55개 소수민족과 한족을 더해 56개 종족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종족들을 언어와 문화로 구분하면 약 516개 종족이 중국 대륙에 살고 있고, 그 중 중국 운남성에는 이 종족들의 절반인 약 219개 종족이 살고 있습니다. 운남성에 복음을 들어본 종족이 약 47개 종족, 아직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거나 자생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종족은 약 172개 종족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 대륙 전역에 비슷한 상황과 통계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중국 대륙 전체 종족인구 대비 복음화된 종족이 약 89개 종족이고, 종족인구 대비 복음화율 2%미만인 미접촉 미전도 종족이 약 427개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아직 중국 대륙도 복음 전도가 필요한 국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시진핑 정권이 들어선 후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비자발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중국 대륙을 떠났습니다. 저 또한 중국 대륙에서 사
2년 후 펜윅의 편지는 1893년에 제임스 존스톤(James Johnston) 박사의 중남부 아프리카에서의 진실 대 허구(Reality versus Romance in South Central Africa)라는 책에 일부 내용이 게재돼 일파만파로 펴졌고 펜윅과 언더우드 간에 갈등과 불신은 더욱 증폭됐다. 마침내 이 내용은 한국연합선교회에 전달됐고, 선교회는 펜윅을 가르켜 “반드시 소환해야 할 어리석고 화 잘 내는 사람”이라 비난하면서 선교비를 끊어버렸다. 결국 펜윅은 필화사건으로 인해 한국연합선교회로부터 받았던 선교비가 1893년에 끊기게 됐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비즈니스 선교였다. 3. 원산 선교기지의 차별성을 제시하기 위함 펜윅의 원산 선교기지(mission station)는 초기 내한 선교사의 기지와는 달랐다. 선교기지(mission station)란 선교사들이 사역하기에 편리한 땅을 구입해서 그곳에 교회, 학교, 병원, 유치원 등을 세워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대개 ‘①교회-②학교-③병원’이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펜윅은 ‘①교회-②농장-③과수원’이라는 세 축으로 선교했다. 초기 내한
최근 우리교단 안에서 연이어 크고 작은 좋지 않은 선례들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총회장의 직무가 정지되면서 본안 소송인 선거법 위반 소송의 심리가 5월 9일 끝나고 다음달 13일에 1심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 총회장 직무를 대행한 제1부총회장도 선거 무효 확인 소송의 본안 소송으로 직무가 정지됐다. 이에 따라 현재 김일엽 총무가 총회장과 1부총회장의 직무를 대행하는 체제로 총회가 운영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총회의 혼란과 함께 한국교회 연합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캄선교회 대표의 믿기 힘든 일들이 폭로되면서 교계 전체가 이 문제로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 현재 당사자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모든 책임을 지고 선교회 대표직에서 물러났으며 교단도 탈퇴했지만 그 후유증은 당분간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안팎으로 터지는 교단 문제에 대해 많은 목회자들이 우려와 실망,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직무대행체제로 수개월을 보내면서 교단의 성장 동력은 멈췄으며 많은 교회들이 기다리고 기대했던 총회 사업들을 연기되거나 대부분 중단된 상황이다. 나아가 1부총회장까지 직무가 정지된 상황에서 정상적인 114차 정기총회가 개최될 지 불투
주 안에 신실한 모든 동역자 여러분들에게 하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번에 세계복음화를 위해 힘쓰는 침례교 모든 동역자들과 성도님들에게 대륙 중국의 선교현황과 사역을 함께 나눌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2003년 처음 북경공항에 도착했을 때 부터 20여 년의 시간이 주마등(走马灯)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회상을 하게 됩니다. 2003년 중국 1인 GDP 1390달러인 나라가 2023년 1만 3721달러로 경제성장 10배가 되어 있음을 실로 몸소 체험했던 시간 같습니다. 자전거에서 전기 오토바이로, 그리고 자동차에서 지금은 전기 자동차가 실생활이 되어버린 경제 성장 속에 중국 복음화, 중국 교회들 역시 수많은 지표를 가지고 성장했습니다.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전세계의 양적 교류의 확대가 수많은 사람들을 스펀지가 물을 흡수 하듯이 끌어들이며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세계의 성장 지표의 중심이었습니다. 많은 선교단체들과 선교사들 역시 이러한 세계의 흐름 속에 중국이라는 도시교회와 가정교회, 그리고 대학캠퍼스 사역으로 셀 수 없는 사역자들이 들어와 많은 교회들을 세워가고, 가정교회 리더훈련과 신
두 번째 질문의 답은 1896년이다. 펜윅의 원산 농장 10만 평 구입설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1891년 구입설이고, 다른 하나는 1896년 이후설이다. 연구자는 후자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펜윅이 1891년 원산에서 비즈니스 선교를 시작할 때는 경제적 여유가 없던 때라 작은 땅을 구입해서 원산 농장을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과 캐나다 방문(1893~1896년)을 마치고 귀국한 지 2년이 지난 시점에 “한국의 농사법”(1898년 8월)에서 “큰 땅”에서의 성공담을 소개한 것을 보면 1896년 봄 이후부터 1898년 8월 사이에 10만 평의 큰 농장을 매입한 것으로 본다. 여기에 주목할 점은 펜윅이 1898년 8월에 게재한 글이 “한국의 농사법”이지 “한국의 과일 재배법”이 아니라는 점이다. 농작물은 1년 단위로 수확하지만, 과일의 경우 특히 사과는 8년째부터 수익이 발행하기 때문이다. 펜윅이 1896년에 구입했다면 2~3번 정도의 성공담이, 1897년이면 겨우 1~2번 정도의 성공담이 잡지에 담아있기에 연구자는 1896년 구입설을 지지한다. 오지원은 1897년에 펜윅이 약 10만 평의 농장을 구입했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질문의 답은 펜윅이 3년간 미국과
흥선 대원군이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 이유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여러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시간 언급한 이유 외에 다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퀴즈 하나를 내본다. 조선의 정궁(가장 으뜸이 되는 궁궐)과 법궁(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은 무엇일까? 대부분 사람들이 경복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다. 상징적인 의미로 조선의 정궁은 경복궁이 맞다. 그러나 경복궁이 왕의 거처로 사용된 것은 조선왕조 518년 동안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경복궁은 조선의 상징적인 궁일 뿐, 실제적으로 왕이 거처하고 실질적인 정사를 보던 곳은 대부분 창덕궁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다음과 같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1399년 정종이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완공된 지 4년 만에 경복궁은 빈 궁전 신세가 되고 만다. 또 그 이후 여러 가지 사건으로 경복궁은 법궁의 위치를 잃게 된다. 시간이 흘러 임진왜란 전인 1553년(명종 8년),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하고, 더구나 안타깝게도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왜냐하면 백성을 버리고 파천한(임금이 도
한국침례교단이 꼭 기억해야 날 중에 하나가 바로 일제강점기 일제의 탄압으로 교단이 해체되고 모든 교회가 폐쇄된 1944년 5월 10일이다. 특별히 올해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수난을 당한지 80년이 되는 해이다. 당시 침례교단의 전신인 동아기독교는 원산을 중심으로 한강 이남에는 강경과 공주, 문경 등지에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발자취를 걸어갔으며 북방으로는 연해주와 북만주에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자비량 순회 선교사들이 희생과 헌신이 이뤄졌다. 교회가 없는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 외에는 어떠한 것도 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일제 강점기의 탄압과 회유 속에서도 꿋꿋하게 복음을 지켜 나갔다. 그렇기에 신사참배와 궁성요배는 침례교인으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정치적인 사안이었으며 타 교단과는 달리 하나님이 이 땅의 주인임을 당당하게 말하며 일제와 맞서왔다. 그렇기에 교단이 폐쇄되고 교회의 재산이 몰수되는 수모를 겪으며 교단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구금되며 또한 순교하는 일은 일제에 항거한 본으로 삼아 마땅할 것이다. 2023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수난을 당한 침례교 32인의 뜻을 책으로 펴내고 이들의 후손에게 공로패를 수여하며
10년 단위로 묶은 기간에서 기록상 가장 더웠던 여덟 번의 햇수가 들어 있던 때는 언제일까? 10년 단위로 가장 더웠던 햇수가 가장 많이 들어 있는 기간은 현재를 기준으로 가장 최근의 10년간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 의하면, 적어도 1880년 이후로 지구 표면의 평균 온도는 지속적으로 상승해 왔다. 지구의 평균 온도를 높이는 이산화탄소 농도가 대기 중 점점 짙어지고 있다. 이산화탄소의 수치는 1985년 315ppm 수준에서 현재도 계속해서 연간 약 2ppm의 비율로 상승하고 있다. 현재는 419ppm이다. 산업화 이전만 하더라도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0.03%, 즉 300ppm을 넘지 않았다. 지구 대기의 역사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대기권에서 가장 낮은 층의 이산화탄소의 수치가 지난 모든 역사 중에서 지금이 가장 높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산화탄소는 기후 위기 대처를 위한 탄소중립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산화탄소(CO2) 외에도 오존(O3), 메탄(CH4), 아산화질소(N2O), 염화불화탄소류(CFCS), 수증기 등이 온실가스에 속한다. 이 온실가스는 대기권에 존재하면서 적외선이 우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 열을 가두는 기능을 한다. 이
I. 펜윅의 비즈니스 선교 배경 펜윅은 한국선교 46년 동안 두 축을 중심으로 선교했다. 첫 번째 축은 영혼구령 사업이다. 여기에는 교회개척 선교, 북방 선교, 문서 선교, 토착화 선교가 포함된다. 두 번째 축은 농업 사업이다. 이것은 원산 농장과 과수원을 중심으로 한 비즈니스 선교를 말한다. 본 장에서는 두 번째 축을 다룰 것이고, 왜 펜윅이 비즈니스 선교를 하게 됐는지 그 배경을 살펴볼 것이다. 1. 자립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함 펜윅이 비즈니스 선교를 하게 된 첫 번째 배경은 자립선교(self-supporting)를 하기 위함이었다. 리빙스톤 재단의 최고 경영자인 켄 엘드레드(Ken Eldred)는 비즈니스 선교의 목적이 외부의 재정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는 데 있음을 밝혔다. 펜윅이 그러했다. 특히 펜윅의 자립성은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자였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읜 후 펜윅은 형들과는 달리 어머니 곁을 지키면서 성인이 된 18세에는 온타리오주의 프라이즈 시범농장(Prize Model Farm)에서 농업과 원예를 배웠고, 21세부터 23세까지는 토론토에서 회계법과 금융을 배웠을 뿐 아니라 26세에는 철물상 도매업의 창고 관리인과 한 판매장의 지점
이 땅의 교회 공동체가 세워진 이후, 이단과의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교회와 이단은 서로 거부했으며, 이단을 가리는 헬라어 용어는 나쁜 의미로 사용되곤 했다. 그런데 이단에 대한 개념은 교회가 하나님이 거룩하신 구원의 기관이며 구원의 진리 보고라는 교회관의 발전과 함께 발전했다. 기독교 신앙의 독자적인 특성을 보존하기 위한 긴 투쟁에 있어서 교회는 기독교의 교의에 큰 강조점을 뒀다. 따라서 교회는 그 자체를 보존하는 데 있어서 기독교 전통의 통로에 관한 규정을 확정 짓는 일을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됐다. 그 결과 사도 계승권이 확정됐고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에 절대적인 권한을 주자 이단과 정통 사이에 논쟁이 더욱더 가열됐으며 그 결과 이단은 정죄를 받았다.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신앙, 교리의 갈등이 첨예화될 때, 언제나 이단 논쟁이 일어나게 됐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유대종파와 사명적인 헬라학파와의 대립, 2~3세기의 영지주의(노스티시즘)와 동양적 신화와 결합하려고 한 신비주의,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 의의 신과 선의 신의 이원론적인 신관을 주장하는 마르키온주의, 그리스도를 완전한 인간이라고 한 네스토리우스파 등 각양의 이단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렇듯
한국이 중국과 공식적인 수교를 맺은 1992년 이후로 각 교단과 선교회는 앞다퉈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고, 우리교단 해외선교회(FMB) 역시 1995년에 최초로 박OO 선교사 가정을 중국으로 파송했다. 2000년대 초까지 한국 선교사의 중국 선교 부흥기로 FMB 중 선교사 가정이 70유닛에 육박하기도 했다. 초기 선교사들의 열정적인 헌신과 희생은 공산화와 문화대혁명의 핍박과 박해의 역사를 경험한 중국 가정교회에 기폭제가 됐다. 중국 교회가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성장과 발전에 영향과 공헌을 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1949년 이후 현재까지 중국 공산당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은 강경하고 단호했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뿐만 아니라 중국 교회를 둘로 나누고, 대립과 대적의 관계에까지 이르게 했다. 아직도 공인 교회인 삼자교회와 비공인교회인 가정교회의 구분은 명확하게 나눠져 대립하고 있다. 특히 중국 정부의 2018년 신종교 사무조례의 시행은 중국 내 외국인의 종교활동을 제한하는 것과 더불어 선교사들의 존립을 어렵게 했다. 소위 기독교 중국화 정책의 가동으로 본격적인 중국 가정교회 박해와 외국 선교사들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8년 이후 대부분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