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부자(富者)가 여행 중에 어떤 수행자(修行者)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집안에는 헌 옷가지와 밥을 지을 부엌 도구 몇 가지와 그릇 몇 개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집안을 둘러본 부자가 딱하다는 듯이 수행자에게 말했다. “집안에 살림도구가 아무 것도 없군요. 불편해서 어떻게…?”부자의 말을 들은 수행자가 대답했다.“나는 여행 중이니까요.”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누구나 꼭 필요한 것만을 챙겨 간다. 수행자는 인생이란 존재를 나그네에 비교해서 사람은 누구나 여행자라는 의미로 말한 것인데 부자가 그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 인간은 세상이라는 여객선에 표를 끊어 승선한 승객이다. 언제인가는 주어진 여행을 마치고 하선할 것이며, 그 때는 예언의 말씀대로 영혼은 그 떠나온 곳으로, 육체는 ‘흙의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십여 년 쯤 전에 어떤 일로 남미 몇 나라를 단체여행한 일이 있었다. 일행 중에는 수집에 열정을 가진 이들이 있어서 그들의 편의를 보아주다가 버스를 놓치기도 하고 여러 시간동안 공항 세관에 볼모로 잡힌 일도 있었다. 취미 생활은 보람된 것이지만 모으기는 젊을 때 시작해서 중년에는 모은 것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노년에는 취미든 무엇이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 인간에게 자기 자신과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성품]”을 주셨기 때문에(롬1:19) 인간은 피조물 중 유일하게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다.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 인간에게 자신과 자신의 뜻을 나타내셨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섭리 가운데서 친히 수행하시거나 일어났던 사건들 즉, 창조, 타락, 홍수와 노아 방주, 아브라함과 모세를 부르심, 출애굽, 예언자 시대,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 등등의 역사적 사건 속에 나타내셨다.그런데, 이러한 사건의 참 뜻은 입에서 입을 통해 구전(口傳) 되는 과정에서 왜곡되기 쉬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사람들에게 감동(영감)을 주셔서 사건들을 기록하게 하셨으니 그것이 곧 성경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온전히 기록된 하나님의 책이다. 종결된 성서계시성서계시는 사도 요한의 계시록을 끝으로 완성 되었다. 요한은,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얼마 전 일반 국민들의 모범이 돼야 할 서울시의회 모 의원이 살인교사를 했다는 혐의로 인해 온 나라가 큰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피의자는 자신의 오랜 친구에게 재력가 송모씨를 살해하도록 지속적으로 사주했고, 살인사건의 정범인 그의 친구는 오랜 세월 동안 심리적인 압박과 갈등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다. 형법 제250조에서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형법 제31조에서는 “타인을 교사하여 죄를 범하게 한 자는 죄를 실행한자와 동일한 형으로 처벌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살인교사 역시 살인죄와 같이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중죄이다. 어떤 면에서는 살인교사가 더 죄질이 나쁘다.교사범(敎唆犯)이란 타인에게 범죄를 결의하여 실행케 한 자를 말한다. 교사범이 성립하려면 교사자의 교사행위와 정범의 실행행위가 있어야 한다. 책임능력이 없는 소년이나 광인(狂人)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주어 범행을 하게 한 때에는 간접정범이 되는 대신 교사범이 되지 않는다. 교사범의 성립요건으로서는, 먼저 주관적 요건으로서 자기의 행위에 의하여 타인에게 어떤 범죄를 실행하도록 결의시켜 그 자에게 그
세계에서 가장 자연경관이 뛰어난 나라 스위스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까지 된 데에는 꼭 알아둬야 할 슬픈 역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로맨틱한 호반의 도시 루체른의 작은 언덕 바위산에 새겨진 “빈사(瀕死)의 사자상(獅子像)”에 얽힌 스토리다.말 그대로 이는 “용맹한 사자가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조각한 것인데, 1792년 8월 프랑스의 루이16세 왕가를 지키기 위해 무려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이 장렬하게 전사했음을 기린 것이다. 듣기만 해도 감동인 이 스토리를 직접 가서 본 감동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등에 창이 깊이 꽂힌 상황에도 그 프랑스왕가의 문장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모습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사실 당시의 프랑스왕 루이16세는 시민혁명으로 몰락할 왕가였다. 실제로 대세도 이미 기울었다. 그래서 왕궁을 지키던 근위병들조차 다 도망가 버렸다. 그래서 그는 모든 걸 체념하고 스위스 용병들에게도 “이만 철수하라” 명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끝까지 그 궁을 지킨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자기 나라 왕도 아닌 남의 나라 왕인데, 옳은 왕도 아닌데, 그저 돈 받고 적당히 자리만 지켜주면 되는 용병이었을 뿐인데, 왜 그들은 끝까지 그 아까운
능력이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은 기적적인 현상이나 사건을 일으키는 초자연적 힘을 말한다. 그러므로 능력이 나타나는 현장에선 항상 놀라움과 두려움이 야기되게 마련이다. 능력사역은 주님께서 지상사역을 펼치실 때 친히 사용하신바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과 능력을 나타내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도록 부르시는 은혜의 방편이었다.예수님은 주로 능력 행하심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효과적인 복음전도를 위한 여러가지 다양한 이론과 전략들이 소개되고 있는 데 특히 20세기 후반부에 널리 파급된 이적과 기사 그리고 축사와 치유사역 등 능력사역은 복음을 전파하는 영적 전투가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는 복음전도의 최전선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능력사역은 현대목회 사역 현장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으며 능력전도 또한 교회성장 분야에서 중요한 주제로 여겨지고 있다. 능력사역의 중심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윔버(John Wimber)는 능력전도(power evangelism)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능력전도라는 말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이성적인 방식만이 아니라 이성을 초월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복음
교단 연차총회를 앞뒤로 해서 회의 참석에 대한 대의원들의 태도를 말하려다 보니, 처음으로, 내가 마치 이 칼럼을 통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아무에게나 가르침을 주려는 것으로 비쳐지지 않나하고 염려됐다. 이 칼럼은 필자가 평소에 느껴온 것을 세상, 특히 젊은 목회자들에게 외치는 것일 뿐 특정 단체나 개인을 지목해서 말하는 것이 아님은 독자 여러분이 알고 있을 것이다. 가을이 되면 모든 교단이 연이어 연차 총회를 개최한다. 옵서버 신분으로 다른 교단 총회에 참석해본 경험에 의하면 교파 간에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점은 회의에 참석하는 대의원의 수가 등록회원 수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노회나 지방회에서 대의원(총대)을 선출해서 총회에 파송하는 교단들은 참석률이 좋았다는 점이다.대의원은, 교회로부터 파송된 위원 신분이므로 첫 회기부터 마지막 회기까지 성실하게 참석해서 의견을 개진하고 투표권을 행사하고 교회에 돌아가서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등록 하고 이름표와 자료를 챙겨서 곧장 골프장으로 가는 대의원, 단체관광을 나가거나 때도 아닌데 음식타령을 하며 삼삼오오 관광지와 유명식당을 찾아 나가는 대의원들이 부지기수이다.회의장에서는
말세상에 태어나서 고통이나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백 여덟 가지 고통 중에서 세상을 산다고 말한다. 그 중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피할 수 있을듯하면서도 피하기 어려운 고통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말로 인한 고통이다. 참소하는 말필자가 미국 연구유학을 마칠 즈음 평소에 다정했던 그 대학 교직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외면하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그들이 내가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남아서 목회하기로 했다는 헛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사역할 복음적 일꾼을 양육하려고 장학금과 온갖 편의를 다 제공한 대학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실망스러웠을 것이다.잠언은 참소하는 사람을, “칼로 찌르는 것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라 했고 우리 사자성어에도 촌철살인(寸鐵殺人)이란 말이 있거니와 지어낸 말보다 무서운 전염병은 없을 것이다. 참소하는 사람의 입은 터진 아궁이 같아서 태산으로도 막을 수 없다. 목회하면서 이런 사람을 만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일이다. 무례한 말 국가적으로는 다른 나라 정상과 기밀을 전재로 회담한 내용을 발설해서
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의사가 외출할 때는 언제나 왕진가방을 들고 다녔다. 그것은 목회자가 항상 성경찬송을 지참하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의사는 언제 어디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환자를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며, 목사는 상담을 하거나 말씀 전할 것을 대비해야하기 때문일 것이다.필자가 다닌 미국의 신학교(대학원대학교)에서는 교수는 물론 전교생이 넥타이를 매고 등교해야 하고 캠퍼스에서는 반바지와 청바지 및 운동화 착용까지도 금했다. 그것은 대학원 학생부터는 목회자로서의 품위를 유지해야하고 외출 시에는 언제 어디서든 예배를 인도 하거나 의식(儀式)을 집행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군인은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다니며 기자는 수첩을 가지고 다니고 사진가는 자나 깨나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교회가 아무리 흔하고 목사의 수자가 아무리 많다 해도 목사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자나 깨나 경성(警省)하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아닌가. 차제에, 목회학에서 지적하는 평가항목에 곁들여서 자신의 목회 사역을 한번 평가해보는 것이 어떨까.목회 중간 평가1) 교회가 왜 나를 초청했으며 교회는 내게 무엇을 기대하
“하겠습니다” 하고 말해야 할 것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자신 없는 말이다. 우리말 사전에서 ‘하도록’을 찾으면, “하여금…하도록”이라는 관용구로 설명됐고, “그로 하여금 집을 설계케[하도록] 하라”는 예문이 붙어 있다. ‘하도록’은 원래 단독으로는 쓰이지 않고 ‘하여금’ 다음에 붙어서 누구에게 무엇을 시킨다는 사역의 의미로 사용되던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앞의 ‘하여금’이 생략되고 뒤의 ‘하도록’만 남아서 우리말을 그르치고 있다. 주인이 하인을 불러서,“이 서방, 오늘은 재 넘어 매밀 밭에 김을 매고 오게” 했다. 하인이, “예, 김매고 오도록 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하인의 말을 들은 주인이 성난 음성으로, “이 서방, 내가 자네한테 김매라고 했는데 누구한데 하도록 하겠다는 말인가?” 하고 역성을 낸다. 이 서방은 곧 주인의 뜻을 헤아리고 ‘하도록’을 빼고, “예, 어르신, 제가 매밀 밭에 김 매고 오겠습니다” 하고 대답한다.그 집에서 주인의 말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주인의 지시를 받아서 일꾼들에게 전달하는[하도록 하는] 청지기 [뿐]이다. ‘하도록’은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겠다는 말이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살해당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죽음의 성격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반적으로는 단순 사고사, 의사(義死), 국가 유공자와 순국자를 구별하는 문제; 종교적으로는 순교와 순직을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가 있다. 사고사, 의사자, 및 유공자1) 공무나 업무 수행 중에 천재지변이나 사고로 숨지는 것은 순직2) 위험에 빠진 동료나 동행인을 구조하다가 희생당한 사람은 의사자(義死者) 3) 공무 수행중인 동료나 상사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함으로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은 국가 유공자(有功者)4) 나라를 구하기 위해 희생당한 죽음은 순국이다.그러나 비록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사고나 천재지변에 의해 죽은 사람을 의사자나 유공자로 예우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늘 아침 대법원에서는 군에서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해 자살한 병사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공을 세운 사람이 유공자이지 자살한 사람이 어찌 유공자란 말인가. 그런 의견은, 제안하는 이의 의도와는 달리 자살을 정당화하고 조장하는 동기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소수 의견이기 바랄뿐이다. 연민(憐憫)이
일찍이 중국 송나라 시인 양만리(楊萬里)는 야생장미 ‘월계’(月桂)에 대하여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읊었다. “제 아무리 화려한 꽃이어도 열흘 붉은 꽃은 없다”는 말인데, 지금도 자주 권력의 무상함을 말할 때 쓰인다.1661년 8월, 프랑스에선 이런 일이 있었다. 루이 14세가 다스리던 시절, 재무장관이었던 니콜라 푸케(Nicolas Fouquet)가 자기 살려고 ‘보르비콩트’(Chateau de Vaux-le-Vicomte)라는 어마어마한 대저택을 지었는데, 그는 그 집 하나를 지으려고 마을을 세 개나 사들였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워낙 많아 자랑하고파서였단다. 그렇게 해서 그는 4년간이나 집을 지었는데 동원된 인원만도 18,000명이란다. 정원의 넓이만 해도 무려 10만평이란다. 이번에 내가 가보고 정말 놀라 자빠질 뻔했던 건 마굿간이다. 웬만한 우리나라 박물관보다도 더 컸다. 정말 최고급의 마차와 말들까지도 다 구비해놓았다. 놀라움은 집 크기만이 아니다. 당대 최고의 설계사, 당대 최고의 조경예술가, 당대 최고의 실내 장식가를 동원하여 꾸민 그 화려함의 극치는 혀를 내두른다. 그렇다면 정말 이 사람은 물려받은 유산으로만 그렇게 한 걸까?
필자는 지금까지 누가복음 24장을 토대로 누가가 제시하는 부활현현의 체험과 그 속에 포함된 부활신학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이제는 요한복음 20~21장을 토대로 요한이 제시하는 부활현현의 체험과 그것에 포함된 부활신학을 제시하려고 한다. 사복음서 기자들이 공통적으로 예수의 공생애 사건의 결론으로서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제시하는데, 각 기자는 각자의 관심사와 방식을 따라 그 작업을 진행했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초기 전승들에는 부활현현을 경험한 사람들의 목록이 포함되었으며(cf. 고전 15:5~8), 그 후에 빈무덤 이야기들과 현현 이야기들이 추가되었다. 요한도 기본적으로는 빈무덤 사건과 현현 사건들을 결합하여 예수의 부활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는 부활현현 사건들을 제시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예수의 부활을 묘사함에 있어서 공관복음서 기자들과는 또 다른 국면을 부각시킨다.요한은 먼저 빈무덤 사건을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와 익명으로 나오는 예수의 사랑 받은 제자를 중심으로 묘사한다(20:1~10). 요한은 다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홀로 그 무덤에 남았을 때 그녀가 개인적으로 체험한 부활현현 사건을 다룬다(20:11~18). 요한은 제자들이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은 상호 협력적인 존재시다. 물론 이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삼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지만, 성경은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협력적 관계이시고 협력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특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실 때(창 1장)와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교회를 세우실 때(엡 1장) 확연히 드러내셨다. 협력은 창조의 원리이다.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은 존재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드신 후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드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함께 더불어 살고 함께 어울려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일을 성취해야 정상인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가정도 그렇다. 남편과 아내가 한 마음 한 뜻으로 합심 단결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때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의도는 협력관계를 손상시키고 깨뜨려 버리며, 왜곡된 거짓 협력을 추구하게 된다. 창세기 11장은 타락한 인류가 합심 노력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일치된 언어와 주어진 능력을 가지고 하늘에 닿을 탑을 쌓아 그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고 하나
분별없이 사용되는 우리말 중에 “상황”을 빼놓을 수 없다. 상황은 “일이 되어가는 형편이나 모양”을 의미하는 말이다. 개인적 대화에서는 별로 많이 쓰이지 않으면서도 유독 뉴스와 스포츠를 포함한 보도 프로그램에서는 지나치도록 많이 사용되며 그만큼 오남용 사례도 많다(목회서신60회 참조). 다음의 사례를 보자 : 교통사고 현장에 나간 부하 경찰에게 서장이 전화를 걸어 처리과정을 묻는다 :“이 경장, 상황이 어떤가?” 상관의 물음에 대한 이경장의 가능한 대답 두 가지를 제시해 보았다 :(1) “네, 서장님, 가해 차량과 피해 차량을 갓길로 옮긴 상황이고, 양방향 소통이 원활하게 된 상황입니다. … 피해 차량 동승자는 응급처치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2) “네, 서장님, 방금 가해 차량과 피해 차량을 갓길로 옮겨서 양방향 차량 소통이 원활하게 됐습니다. 두 운전자와 피해 차량 동승자는 지금 응급처치를 받고 있습니다.”대답 (1)은 말끝마다 “상황”을 붙여서 말을 얼마나 품위 없게 만드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대답 (2)는 상황을 묻는 질문에 “상황”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상황을 조리있게 설명한다. 대답 (2)가 바른 표현이다. 잘못 사용된 사례 몇 가지
근래 일부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말씨가 지나친 속어 사용과 거친 말투로 인해 생각 없이 내뱉는 시정 말이 되어가는 것 같다. 문헌에 의하면, 지나간 시대의 교양인(君子)들은 절제되고 고운 말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요즈음은, 나라의 말씨를 대표하는 일부 방송 매체까지 여과되지 않은 거친 말을 쏟아내고 있다. 한 여성 앵커가 자신의 대담 “프로”에서 초청 경제 전문가에게 말한다. “그러니까 4/4분기의 경기회복은 물 건너갔다. 이런 말씀이지요? 재경부는 헛물만 켰군요.” “물 건너갔다”는 표현은 시정 상인들이나 가까운 친구사이에서 사용되는 남정(男丁)들의 속어(俗語)이며, “헛물을 켠다”는 말은 성행위를 묘사한 데서 나온 마구발방 말로서 방송인이 공적인 대화(보도)에서 사용할 말이 결코 못된다. 다음과 같이 고쳐 말해야 한다: “그러니까 4/4분기의 경기 회복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재경부의 기대가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또, 근래에는 한 문장으로 해야 할 말을 장난치듯 두 동강을 내어 말하는 습관을 가진 방송인이 많다. “관악산 댐 공사는 맞지 않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2012.4.15. 6:45,MBN). “이번 겨울도 끝자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