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항성 또는 행성들이 인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요체를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당기고 밀면서 자전 공전을 거듭하면서 각자의 위치를 유지하듯이 한 사회 역시 말 이라고 하는 요체를 통해서 이렇게 저렇게 엮이어지면서 문명이라고 하는 옥동자로 가시화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 멀리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말이라는 것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더없이 멋쟁이이고 더없는 요술쟁이입니다. 그러므로 말에 대한 이야기를 좁은 지면에다 표현 할 수가 없겠습니다만 그 많은 말 중에 남의 말에 관해서는 신중해야 할 필요를 너나 할 것 없이 느끼고 있습니다. 말의 공해라고 해야 합니까? 그 말의 공해란 “필요 이상의 남의 말”이 그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또 남의 말이란 “사돈이 밭을 사면 배가 아파요”는 질투의 심성과 자신의 결백이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하는 자기변호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그 주종을 이룹니다. 성경은 비판한 그대로 헤아리는 그대로의 보응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보응은 뒤로 하고서라도, 장난으로라도 연못에 던진 돌맹이가 아이들에게는 재미놀이가 될는지 모르지만 물속을 집으로 삼고 살아가는 개구리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심각한 사건
평생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 “마더 테레사” 수녀가 생전에 봉사활동을 하실 때에 함께 일 할 사람을 선발하는 기준이 아주 간단했습니다. 첫째, 잘 웃고 둘째, 잘 먹고 셋째, 잘 자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이 3가지가 잘되어 있는 사람이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는 기본자세가 잘 되어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뿐만 아니라, 어느 유치원 원장도 직원을 채용 할 때에는 잘 웃는 직원을 뽑는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 역시 아주 간단했습니다. 잘 웃는 직원이 어린이들을 더 친절하게 더 열성적으로 더 열심히 보살핀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업무와 관련된 지식은 한두 달이면 익히지만, 잘 웃는다는 것은 인격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웃음이 인격이며, 성품이고, 기회라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잘 웃을 수 있다면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물건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도 같은 값이면 잘 웃고 친절한 사람에게 물건을 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객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구매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질(내용)이 문식(꾸멈)보다 승하면 야하고,문식이 실질보다 승하면 너무 화미하다. 실질과 문식이 겸비되어야 한다. 이것을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고 한다.” 김성우 저(著) ‘명 문장의 조건’(한길사, 18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치열한 역사에 승리하면서도 황홀한 신화를 아는 사람. 차가운 경제 용어를 알면서도 시어(詩語)에 젖어 사는 사람. 추상같이 냉엄한 결단을 내리지만, 이웃의 아픔 앞에 이슬 같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 멀리 보는 독수리의 눈을 가졌지만, 곤충의 눈으로 발밑의 미물(微物)을 볼 줄 아는 사람. 명검이 있지만, 제어하는 칼집이 있는 사람. 아끼고 절약하지만,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는 거룩한 낭비를 하는 사람. 지식이 있지만 지혜까지 넘치는 사람. 진지하지만 유머가 넘치는 사람. 달려갈 줄 알지만, 멈춤의 돌아봄이 있는 사람. 옳기도 하고 좋기도 한 사람. 물음표도 있고 느낌표도 있는 사람. 목표의 아름다움과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의 아름다움이 있는 사람. 중심이 흔들리지 않지만, 어울릴 줄 아는 사람. 자존심은 낮출 줄 알고, 자존감은 늘 높은 사람. 예민하지 않지만, 이웃의 필요에는 민감한 사람. 뱀 같은 지혜로움이 있지만,
가나 혼인 잔치 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두세 통 되는 항아리 여섯에 하인이 물을 채움 같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에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서 두 눈을 씻음과 같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명하신 예수님 말씀에 베드로가 순종해 배를 타고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림과 같이 그리고 군대장관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라는 선지자 엘리사의 말에 그대로 순종함과 같이 그리고 갈릴리 바다 위로 걸어 “오라”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한 베드로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의 의지가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해와 상식을 벗어나 순종하기에 심기가 불편하게 여겨져도 그리고 순종할 때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과 업신여김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리고 피곤하고, 지쳐서 도무지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순종하므로 인하여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에 많은 손상을 입는 일들이 발생하며 또한 위험과 두려움이 뒤따른다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 앞에선 자신의 마음을
요셉이 애굽에 간 것은 인신매매되어서이다. 여러 형제들이 시기와 미움으로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유다의 제안을 받아들여 은 20에 팔아넘김으로 그곳에 가게 됐다(창37장). 그는 팔려갔지만 거기엔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 있었다. 애굽에서 총리가 됐고, 전에 꿈꾼 것들이 거기서 다 이뤄졌다. 기근에 애굽까지 식량을 구하러온 형제들에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요셉을 누구보다 편애했던 아버지 야곱은 어떤 경우에도 그를 애굽으로 보내지 않으려 했을 것이나 인신매매되어 먼저 애굽에 가게 됐다. K 선교사는 나의 초등학교 동기동창으로 파키스탄에서 선교 사역을 하고 있다. 내가 섬기는 교회를 방문한 그에게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됐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비전을 갖고 오랫동안 기도하며 준비했느냐, 바울이 빌립보에 간 것처럼 환상을 보고 갔느냐는 질문에 그는 뜻밖의 대답을 해줬다. 파키스탄인에게 속아서 갔다고 했다. 그는 괌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하다가 고국을 방문했을 때 자기 나라에서 고아원을 운영한다는 파키스탄인을 만났다. 파
오래 전 대전에서 목회할 때의 일이다. 교회 가까이에 있던 무당을 전도하기 위해 찾아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본색을 드러내고 동네에 있는 교회에서 왔다고 말하자 “가세요. 같은 업종끼리 영업 방해하지 말고 어서 가세요.” 갑자기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전도대원이 소리를 내며 웃어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그래서 “같은 업종 아니고 한쪽은 지옥으로 데려가는 업종이고 한쪽은 천국으로 데려가는 업종이니 전혀 다른 업종이죠.”하며 전도한 결과 모든 것 청산하고 얼마 후에 교회에 나온 사람도 있었다. 대전에서 유명한 보문산 근처에 교회가 개척되고 지역에 곳곳에 걸려 있던 무속 깃발이 3여년 동안 교인들과 함께 기도하고 나니 다 전도도 되고 이사도 갔다. 심지어 동내에 있던 불교 용품점까지 장사가 안된다며 이사를 갔다. 진도에 있는 식당에 가면 국악이나 민속공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가는 식당마다 붙어 있는 공연 포스터를 보다 거슬리는 문구가 눈에 띄였다. 민속 전통 공연을 알리는 글과 함께 “굿 보러 오세요.”라고 적혀 있다.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이 운영하는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일괄적으로 만든 포스터고 별 관심 없이 볼 수 있을 수도 있다. 진도라
지금까지 중생의 의미와 조건, 중생과 다른 구원의 용어와의 관계, 중생관 전개 구조와 방식, 그리고 중생 교리의 실제적 적용을 살펴봤다. 중생의 의미와 조건에 대해서, 대그는 중생의 의미를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마음의 변화인 갱신으로 보았고, 보이스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의한 마음의 변화로 간주했다. 하지만 멀린스는 중생의 의미를 회개와 믿음에 의한 영혼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기질변화로 봤으며, 카너는 회개와 믿음에 의한 인간 본성의 체험적 변화, 즉 영적이고 도덕적인 성품의 갱신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무디는 중생의 의미를 회개와 믿음에 의한 새 생명의 성장으로 간주했다. 중생과 다른 구원의 용어와의 관계에 대해서, 대그는 중생과 칭의와 성화 그리고 양자를 믿음과 동시에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그는 경험적인 칭의를 말하지 않았다. 보이스는 중생이 먼저 발생한 후에 칭의와 성화와 양자가 동시에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경험적인 칭의에 대해서 부정했지만, 중생과 성화는 시작부터 지속적으로 변화한다고 말했다. 멀린스는 대그와 보이스의 견해와 달리 법정적인 칭의에 윤리적인 특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중생과 칭의와 성화 그리고 양자는 동시에 주어
필자는 요한복음에서 ‘인자’(사람의 아들) 칭호가 나오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한 요한의 신학적 교훈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 호에서는 인자 칭호가 첫 번째로 사용된 구절(1:51)을 중심으로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연결자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결자 혹은 계시자를 가리킨다는 내용을 제시했다. 이번 호에서는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에 나오는 인자 구절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해 알아본다.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는 처음에는 ‘너’와 ‘나’의 개인적 대화의 내용(3:1~10)으로 시작하여 ‘우리’와 ‘너희’라는 공동체 사이의 대화(3:11~15)로 진행한다. 이 단락에서 ‘인자’ 구절들은 공동체 사이의 대화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제시되며 인자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듭나게 만들어주시는 생명의 제공자로 제시된다. 예수님은 사람이 왜 거듭나야 하는지에 관하여 다시 ‘진실로’ 말씀을 통하여 니고데모를 설득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어느 누구도 외딴섬은 아니다 (No man is an Island) 시인 John Danne의 말이다. 우선 한문의 사람 인(人) 자(字)를 분석해 보면 두 가지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의존함으로서 사람이 된다는 뜻 글자인 것이다. 또 한문의 여(女) 자를 보자. 세 획으로 된 것인데 그 어느 획이든 빠지면 아무 의미가 없다. 여인은 남자의 허리를 잡을 때 여인이 된다는 뜻이다. ㈠은 남자이고 나머지 두 획은 여자되기 전의 형상이 아닐까. 운명에 의해 가족원이 되고 선택에 의해 친구가 된다고 했다. 운명이든 선택이든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네가 살고 내가 사는 것이겠다. 듣는 바에 의하면 교도소의 형법 중에 최고의 형벌은 독방 조치라고 하는데 그만큼 single alone은 괴롭다는 것이겠다. 인생은 친구 없이는 재미없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몇몇 인사들의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G. K. 체스터톤(G.K Chesterton)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우리는 놀라운 충정심을 피차간에 발휘해서 견딘다”고 엘버트 휴브라드는 말했다. “친구라면 그대에 관해 잘 알고 또 말없이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남
“일생을 하루같이 살라”는 옛말이 떠오른다. 오늘은 가을을 맞는 10월의 첫날이라. 3:30분에 일어나니 2020년의 새해를 맞기 전, 남은 4개월을 잘 설계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예수님보다 50여년을 더 살아왔는데 무엇을 했는가? 송구스럽기 늘 짝이 없었지만 나의 여생이 짧아지니 천국소망을 바라는 좋은 새날이구나! “내일 일을너희가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안개니라”(약 4:14) 아브라함의 175세, 모세의 120세, 여호수아의 110년, 장수(60), 희수(70), 산수(80)을 지나 졸수(90)을 향해 사도요한같이 천수 곧 100세수를 누린다해도 17년 밖에 내겐 남지 않았으니 짧아진 여생을 어떻게 더욱더 금쪽같은 시간을 아끼며 “죽도록 충성하라”(계2:10 이하) 명령하신 말씀 따라 선한 청지기의 새로운 결단과 도전을 위해 매진할 것을 각오해 본다. 요단강 건너 천국입성시에 나의 주 예수님을 만날 때 부끄럽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나 자신만의 준비되어 충성된 삶뿐만 아니라 내가 섬기는 교회의 어린 양무리들, 대부분 중국에서 한국
또한 한 환자는 원장에게 자신의 빈한함을 호소했고, 원장은 또 한 번 기가 막힌 처방전을 내립니다. “직원들이 퇴근 한 뒤 뒷문으로 오시오, 내가 문을 열어 두겠소.” 어떤 가난한 여인에게는 아예 탈출을 사주하기도 합니다. 치료비가 없다고 호소하는 여인의 손을 잡고 짤막하게 기도를 드린 뒤, 장기려는 눈을 빛내며 말했던 것입니다. “기회를 봐서 환자복을 갈아입고 탈출하시오.” 장기려는 왜 이런 행동을 했는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의사가 된 날부터 지금까지 치료비가 없는 환자들을 도와야겠다는 책임감을 잃어버린 날이 없었다. 나는 이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면 나의 생애는 성공한 것이고,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장기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한국 기독교에 침투한 맘몬신을 일생 내내 혐오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예배당이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으로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성전에서 비둘기파는 자들을 징치한 예수님처럼, 그는 이 말로 우리들 마음속에 활개치는 탐욕의 멱살을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배부른 제사장들, 종교 귀족들, 개 교회에서 로마황제처럼 군림하는
“자포자기”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자기가 할일은 포기하고 자기가 하지 말아야 할 일에는 기분 내는 것” 그것이 자포자기입니다. 인도의 민담입니다. 고매한 스승 밑에서 수행을 하던 제자가 스승에게 달려왔습니다. “스승님, 드디어 제가 물 위를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애 많이 썼구나. 그런데 이 강을 건너는 배 삯이 얼마더냐?” “20루피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너는 20년 동안 그 고생을 하고 20루피를 번 것이니라.”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거의 경지에 오른 제자 하나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일은 새들에게나 맡겨 두세나….”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걸어서 강을 건너고, 새들처럼 하늘을 날아다닌다면 그는 초능력자일까요? 아니면 질서 파괴자일까요? 아니 그보다 인생을 허비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영광 받으실 때는, 강을 걸어서 건너고, 하늘을 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이루며 살았을 때입니다. 아무리 신발이 예뻐도 발에 맞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신앙의 선조들과 음성으로 말씀하셨는가?” 높고 높으신 신이요, 영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비천한 인간들과 대화하셨는가? 구약성경에서 아담, 노아, 모세, 여호수아, 사사들, 사무엘 그리고 선지자들, 제사장, 다윗 같은 왕들과도 제사나 기도에 음성으로 응답하셨는가? 신앙의 연조가 들수록 이상하고 의아하게 늘 생각해 왔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에게도 중요한 시점에 말씀을 주셨다. 1974년 말 긴급조치 하에 8개월 옥고에서 나오니 도저히 지역사회에선 평판이 나빠 목회를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7)라는 말씀으로 기도에 응답해 줬다. 1975년 8월 한 달간 기도와 금식기도를 하고 시내를 뒤지며 새로운 목회지를 찾다가 가까운 안락동으로 정하고 전세금을 신문지에 싸들고 버스를 타고 이사벨여고를 지나서 동래로 가는 다리를 건너는데 갑자기 시끄럽게 들리던 도로 위의 차와 버스속의 사람 소리가 사라지고 너무 조용하고 두려운 정막 가운데 “너는 내려서 사직동을 둘러보고 결정하라!”는 조용한 음성이 들렸다. 이 음성은 매우 똑똑하면서도 부드럽게 울렸으며,
요사이 젊은 가수들의 노래는 그 몸 움직임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정신을 잃게 한다. 심하게 표현하면 소아마비 장애인의 몸놀림 같은 것을 보노라면 동정심마저 든다. 그리고 천부의 자기 목소리로 소리를 낼 것이지 온갖 변성(變聲)이란 변성은 다 내어서 어쩌면 광인(狂人)의 길거리 외침 같게도 들린다. 귀가 따갑다. 그런데 대중가요 가수 신모 군의 노래를 듣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내게 준다. 신모 가수는 요사이 젊은이 무리에 속하지만 다른 젊은이 가수와는 창법이나 그 창 태도가 전혀 다르다. 내가 신모 가수의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데에는 그럴만한 나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우선 그는 노래 부를 때 조금의 미동(微動)도 없다. 조그마한 미풍(微風)도 없는 양 결코 그 몸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완전히 부동자세로 노래를 부른다. 어쩌면 그의 머리카락 한 가닥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고 그의 의상의 한 폭도 꼼짝하지 않고 몸에 딱 달라붙어 있다. 그의 몸과 옷은 일체가 되어 있다. 흥분하는 격한 모습도 없다. 어떤 노래를 불러도 항상 그런 자세로 임했다. 어쩌면 저렇게 순박할까? 손발을 허공에 대고 한 번 흔들어 볼만도 한 데 끄떡없다. 그는 그런 유혹도 받
동방의 나라 조선에서 평생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던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장기려 박사입니다. 장기려 자신은 부인했지만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모델이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이름을 날렸던 의사였습니다. 일제치하 1928년 17세에 경성의전(서울의대) 입학시험을 보면서 “하나님 이 학교에 입학시켜 주시면 평생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몸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원했고, 1932년도에 수석으로 졸업한 뒤 그 당시 가장 뛰어난 수술 실적을 소유한 백인제 박사 밑에서 조교로 있으면서 수련을 받았습니다. 장기려는 스승으로부터 경성의전 교수 또는 도립병원장으로 가라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코스를 제안받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평양의 후미진 병원으로 향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었습니다. “치료비가 없어 평생의사 얼굴 한 번 못보고 죽는 사람을 위해 일하고 싶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셨고 병든 자들을 기도로 고치셨는데 그는 의술로써 그리고 더 크게 인술(仁術)로써 사람들의 가슴에 사랑을 심었습니다, 해방 이후 김일성의 외삼촌 강양욱이 조선기독교 연맹을 조직하고 그에 반대하는 목사들이 탄압 받던 시절, 김일성 대학에 재직하던 그 역시 북한 보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