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신대원에 입학해 여름방학 동안 고향집에 가지 아니하고 계속 첫 목회지인 도안교회를 돌보기 위해 하숙집을 구했다. 인자한 할머니는 둘째 아들, 교회에 나오지 않는 박현매 고등학생과 방을 같이 쓰게 했다. 9월 개학 후 오솔길을 따라 교회당으로 올라가는데 오른쪽 발목이 큰 가시에 찔렸다. “따끔”거리며 아팠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예배를 인도하는데 계속 발목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가리토시(멍울)가 생겨 절름거리며 예배 후 내려와 나는 우선 할머니에게 보였더니 “이거 큰일 났시유, 뱀에게 물렸구먼유!”하고 들기름 병을 갖고 와 발라주면서 빨리 유성으로 연락해 대전 큰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했으나 나는 절대로 아무에게도 입 벙긋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다. 월요일 아침 학교를 가려는데 발목이 부어올랐고, 색깔이 불고 누렇고 푸른색으로 뱀처럼 얼룩덜룩했다. 기숙사 동방인인 최한원 전도사는 사감 김 집사에게 얘기했고 나는 할 수 없이 목동병원으로 따라갔다. 의사는 뱀에게 물린 것이 확실하니 재빨리 치료해야지 그냥 두면 다리를 끊어내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이미 나았는데, 사람 겁주는구나” 하고 재빨리 도망쳐 올라와 다리를 절름거리면서 수업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입니다. 짧은 문장으로 긴 울림을 주는 시입니다. 1991년 이후 서울 광화문의 교보생명 본사 건물에 걸린 ‘광화문 글판’ 가운데 사람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가까이 자세히 그리고 깊고 오래 가야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습니다. ‘만남’이 있고 ‘스침’이 있습니다. 만남이 깊어지지 않고 인격의 변화가 없을 때, 만남은 스침이 됩니다. 음식을 씹지 않으면 소화 불량에 걸리고, 글도 음미하지 않으면 그저 의미 없는 낱말의 나열일 뿐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당신이 대상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것이다.”(If your photograph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 수 많은 광고 카피로도 쓰이고 있는 이 고백은 전설적인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의 사진 철학입니다. 그는 포토저널리스트로서 그 시대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담아내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대상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는 1954년 41세의 나이로 인도차이나전을 취재
교단 총회로부터 목회 근속 30년 공로패를 받았다. 나로선 그것이 감사했고, 또한 한 교회에서 30년 넘게 목회했다는 게 매우 자랑스러웠다. 전도사로 개척교회를 시작했을 때 선배 목사님이 10년을 인내하면서 목회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라며 열심히 하라고 권면해줬을 때 그렇게 오랫동안은 할 자신감이 없었다. 예전의 교편생활을 뒤돌아보니 전근을 자주 다녔었다. 심한 방랑벽 탓으로 1년, 2년, 심지어는 부임한지 6개월 만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겠다고 신청서를 제출한 적도 있었다. 그랬더니 교직원 회의석상에서 교장으로부터 호되게 책망을 받았다. 옛날엔 머슴도 남의 집에서 3년은 일해주고 옮기는데 교사가 교육관이 얼마나 잘못 됐기에 6개월만에 전근가겠다고 경거망동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교장이 전근 신청서를 받아주지 않음으로 그 학교에서 4년 6개월을 근무했다. 내가 한 교회에서 30년 넘게 목회할 수 있었음은 부흥 성장이 잘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온갖 어려움과 시련이 계속됐다. 그 중에 이런 일례로 개척한지 3년이 지나니 구역모임이 4개나 생겨났다. 더 열심히 하면 교인 수도 늘어나고 직분자들도 더 많이 세워질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어느 무렵
대부분 노인들만 있는 시골에서, 매일 학교를 마치고 센터에 오는 29명의 아이들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지역아동센터라는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아동들이 대부분 가정 형편과 처지가 열악한 아동들이다. 그래도 핵가족 시대에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며 어느 땐 웃기도 하고, 어느 땐 서로 사소한 다툼으로 얼굴을 붉히기도 하지만 공동체 생활을 익혀 나가며 밝게 웃는 모습에 함께 행복하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는 아동에게 “그럼 계속 같이 생활할 수 없어”라고 꾸지람을 했다. 그런데 대뜸 “그럼 나 안 올 테니 내 밥 값 줘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 말에 할 말을 잃고 멍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아이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집에서 부모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을 테고, 그것이 말로 나온 것일 것이다. 자기가 빠지면 밥 값이 남으니 달라는 말이다. 아동이 빠지면 식비도 청구할 수 없다는 생각은 못한 것이다. 오래 전 목회를 하며 교회 건물과 교회 마당을 일주일에 하루만 사용하는 것이 안타까워 시작한 것이 아동복지시설이었다. 매일 아이들이 교회 마당에서 놀고 교회 건물을 사용하게 되고 그러면서 아이들을 만나는 기회가 되어 시작
몇 달간 골치를 썩었던 문제가 있다. 어느 순간 집 주위에 개똥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개똥이 집 주위의 보도를 따라 열두어 군데에 늘어섰다. 집 주위를 좀 더 유심히 지켜보던 중에 범인이 이사온 지 얼마 안 된 옆집임을 알게 됐다. 아침마다 옆집 식구들이 번갈아 데리고 나온 강아지가 우리집 주위에서 유유히 큰 볼일을 보고 사라지곤 했다. 마주친 옆집 아저씨에게 개똥을 치워 달라고 요구하자 우리를 가리켜 “겨우 이런 일가지고 투덜대는 좋은 이웃”이라며 빈정댄다. 어이는 없고, 화는 치솟고, 이내 복수심이 불타오르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옆집과 개똥을 사이에 둔 전쟁이 시작됐다. 개똥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을 인터넷에서 검색하고, 사람들에게 조언도 구했다. 우스운 고민이지만 생각보다 이런 문제로 골치를 썩는 사람들이 많았던지 이래저래 한 마디씩 거든다. 그중에는 옆집에 개똥을 다시 던지라는, 귀에 착착 붙는 조언도 있다. 별 효과는 없었지만 마당에 뿌리는 약도 사보고, 똥 있는 자리에 깃발도 꽂아보고, Home Association에 이메일도 했다. 우리가 바짝 경계태세로 돌입한 것을 알자, 옆집의 중학생 아이들이 질세라 마당에 장난질을 치고 도망간다. 이쯤 되
어떻게 교회를 생명력 있게 할 것인가? 어떠한 교회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 탈봇 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을 가르치는 게리 멕킨토시 박사는 건전하고 생명력 있는 교회 성장을 위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최대한 헌신하고 믿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정적으로 소통하는 교회는 성경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는 건강한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인도하심을 분명하게 따르기 위해서 주의 몸 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적으로 건실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생명력 있는 메시지로 채워진 설교가 영적 공동체 가운데 선포돼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말씀이다. 따라서 주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공급을 받고 가르침을 따를 때 영적 생명력이 나타나게 된다(시1:1~3; 사55:11; 요5:39; 행20:32; 살전2:13; 딤후3:16~17; 벧전1:23; 벧후1:2~4; 히4:
이와 같이 고령화로 인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종합해보면 늘어나는 노인인구와 시대적 상황에 대비한 노인목회가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점이다. 노인사역에 대한 전문지식과 사명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이 나타나지 않은 채 노인들의 필요를 일시적으로 채우는 시도로는 궁극적인 문제해결이 이뤄질 수 없기에 노인사역에 관한 구체적인 인식이 전환이 요구되며 노인사역에 있어서 재정적인 측면을 넘어선 특단의 대책이 요구된다. 사역의 방법, 예산, 복지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포함한 제도 개선 등 가용한 수단을 총동원해 다가올 위기를 효과적으로 대비해야 할 것이다. 노인사역이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성경적 관점을 통해 노인들의 삶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인지하며 그들의 무한한 잠재력과 내재한 능력을 발견하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 살아가도록 돕는 일에서 이뤄져야 한다. 3. 노인사역에 대한 성경적 관점 1) 창조질서의 한 과정으로 노화를 이해 성경적인 의미에서 노화를 살펴보면 창조질서의 한 과정으로 태어나고 성장하며 발달의 과정을 겪다가 필연적으로 다시 쇠약해지는 단계를 거치게 된다. 단계별로 의미와 가치를 지니며 과정별로 이루어지는 변화에 적응하려면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목회’라는 것은 이 넓은 의미의 사역에 포함되는 것일 뿐이며 그것은 목회자로의 소명감을 가지고 헌신한 사람들의 사역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목회 사역’을 하는 것이고, 평신도는 ‘평신도 사역’을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목회자는 ‘교역자’ 또는 ‘목회자’라고 구별해 부르고, ‘사역자’라는 말이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다. 가르쳐야 할 또 한 가지는 사역이 교회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교회 밖의 세상이 평신도 사역의 주된 자리라는 점이다. 목회자에게는 교회에서의 평신도 구비사역이 그들 본연의 ‘봉사의 일’이다. 하지만 평신도의 ‘봉사의 일’은 교회공동체 안으로만 국한돼 있는 것이 아니며, 주로 세상 삶의 자리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이 대외적 평신도사역을 통해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실제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성도가 ‘봉사’를 곧 ‘교회 봉사’와 동일시하고 있다. 이런 잘못된 인식은 평신도들 뿐 아니라 목회자들에게도 많기 때문에 평신도에게 올바로 가르치려면 먼저 목회자의 인식이 정립돼야 할 것이다. 송인규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란 이름의 갈매기는 여러 갈매기 무리와는 다르게 고상한 생각의 소유자였다. 그와 같은 동류의 갈매기들의 일상은 어떠했는가? 작가 바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대부분의 갈매기들은 비상의 가장 단순한 사실, 곧 먹이를 찾아 해변으로부터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방법 이상의 것을 배우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갈매기에게는 먹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 무엇보다도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은 나는 것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다른 갈매기들과 친하게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님을 그는 알게 되었다. 그의 부모조차도 조나단이 하루 종일 혼자서 외롭게 시도하며, 수백 번이나 낮게 활강하는 것을 보고는 당황하고 있었다. 뼈와 깃털만 남은 자식 조나단을 바라본 그의 부모는 답답해했었다. “왜 그러니, 조나단?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그의 어머니가 물었다. “넌 왜 다른 갈매기들처럼 되는 게 그리도 힘든 거니? 저공 비행 따윈 펠리컨이나 알바트로스에게 맡길 수 없니? 넌 왜 잘 먹지도 않니? 얘야, 넌 너무 말라서 뼈와 깃털뿐이구나!”
꿈을 깨어 시계를 보니 주일 아침 5시였다. 어제는 토요일로 12월 첫날이라 교회당 강단 뒤에 꿇어 앉아 밤기도를 하다 보니 다리에 쥐가 나서 견디기 어려워 누웠는데 잠이 든 것이다. 남루하고 초췌하며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이 앞에 나타나자 놀라서 그만 꿈을 깬 것이다. 대통령 선거날 아침에 푸른 일바지를 입은 여자 후보가 나타나서 깨어보니 새벽 4시였다. 일찍 투표소에 가서 찍고 오면서 다시 생각하니 푸른 옷은 교도소 죄수복이란 해석이 되어 친한 10여명 벗들에게는 그녀가 교도소 갈 것이라 조심스레 얘기 한 일이 있었다. 꿈 해석을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들어왔고 대학시절엔 심리학에서 꿈 해석 공부도 했고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이나 친구들의 꿈 해몽을 부탁받고 해석을 해 주기도 했으나 조심스런 일이었다. 꿈은 신령한 영몽, 예언적인 예몽, 실제로 일어날 실몽, 잡다하게 꿈꾸는 잡몽, 꿈꾸고 잊어버리는 허몽, 악전고투하다 땀 흘리고 꿈 깨는 악몽, 아무 꿈 없이 깨어나는 무몽 등이 있다. 성경에는 요셉의 꿈을 위시하여 많은 꿈 이야기가 있다. 꿈 속에 나를 찾아온 그 불쌍한 한 사람은 누구일까? 길거리, 전철, 시장, 기타 여러 곳에서 만나서 전도했던 수많은 불쌍한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본디 이 노랫말은 ‘얼씨구 절씨구 지하자졸씨구’입니다. 한문으로는 이렇습니다.‘얼씨구 만씨구 지하자졸씨구(蘖氏求 卍氏求 至下者卒氏求)’ 여기서 ‘얼씨(蘖氏)’란 세상에서 멸시 당하는 서자(庶子)의 씨를, ‘절씨(卍氏)’란 스님의 씨를 말합니다. ‘지하자졸씨(至下者卒氏)’는 세상의 가장 밑바닥 인생에서 살다가 전쟁터에 나가 가장 궂은일을 해야 했던 졸때기의 씨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구나!”는 ‘서자의 씨라도 중의 씨라도 졸때기의 씨라도 받아야겠네’ 하는 노래였습니다. 사실 슬픈 노래이고, 절박한 상황의 노래이고, 그 슬픔을 극복한, 아니 극복하려고 하는 달관의 노래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인생을 망치는 가장 큰 슬픔이 바로 자신이 얼씨라는 것, 절씨라는 것, 그리고 지하자졸씨 출신이라는 사실에 좌절하며 무기력할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큰 아픔을 안고 태어났거나, 큰 아픔 속에서 자라났다 하더라도 복의 통로가 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다섯 명의 여인들이 나옵니다. 다말, 룻, 라합, 우리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기1:16~17) 2012년도 3월의 일입니다. 저희 아들이 어느 날 심각한 표정으로 저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 저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너무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한 나머지 배우자가 될 여자아이에 대하여 궁금한 몇 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첫 질문은 “신앙생활은 하겠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안 합니다” 였습니다. 이 아이는 저희집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며, 신학교까지 나온 녀석인데 불신자 며느리를 데리고 들어오겠다는 황당한 결정에 저희 부부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 생각이 앞서기보다는 하나님 뜻을 구하는 눈과 귀를 열어놓고 깊은 생각을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이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얼마나 좋으면 그런 아이랑 결혼하고 싶어 할까?” 싶어 “그럼 한번 데리고 와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 날 아침, 그것도 9시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젊은 세대는 이러한 현실을 고려해 은퇴 후 노후생활을 대비하고 있을까? 우리나라 30~50대의 중산층 10명 가운데 6명은 노후준비가 미흡해 은퇴 후 노인빈곤층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조사 결과를 나왔다. 은퇴 전문가들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은퇴를 맞이할 경우 노인 70~80%가 빈곤층으로 전락할 것으로 예측했다. 미래의 한국사회는 고령화와 함께 노년빈곤이라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와같이 재정능력이 감소하는 상황은 기독교인에게도 동일하게 발생할 것이다. 여기서 한국교회가 주목해야 할 점은 재정능력이 열악한 노인인구가 교회 내에 급증하는 현실이다. 교회연령의 고령화와 노인층의 재정능력 감소현상은 결과적으로 교회의 재정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헌금할 여력이 없는 성도들의 증가하는 상황에서 미래를 위한 사역의 경비를 줄어야 하는 재정적 압박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해 교회 내의 재정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다가올 재정위기가 인지하며 대비하고 있을까? 교회가 상환해야 할 부채총액을 살펴보면 가까운 미래의 닥칠 재정위기의 심각성을 교회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3년 기준
목회자의 평신도 구비사역에서 추구해야 할 ‘성숙’이라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수준을 향하여 “범사에” 있어서 전인적으로 성숙해 나가는 것이다(엡 4:13~15). 그런데 교회의 평신도교육은 성숙함보다도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역자를 만들어내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제자훈련’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대다수의 평신도 훈련이 영적 ‘재생산’을 목적으로 해 전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교회나 선교단체의 양적 성장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송인규는 교회가 성도들에게 봉사의 당위성을 설득력 있게 가르쳐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어떤 것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즉 “그런 내용의 교육과 훈련이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거나 목회자의 목회 전략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꼭 필요하다거나 하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신도 구비사역은 ‘일꾼’을 양성하는 것보다는 성도 개인의 성숙을 돕는 데 우선적인 목적을 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성숙함이 자연스럽게 ‘봉사의 일’로 표출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는 불신 대통령도 있었고 두 번이나 소위 장로 대통령이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인상은 불신 대통령 재직 시가 장로 대통령 재직 시보다 우선 세속 정치도 더 좋았고 더더구나 기독교에 대해서 아주 호의적이었다는 것이다. 언필칭 장로 대통령의 심중에는 자기가 크리스천 장로이니 기독교에 작은 제스처만 줘도 국민의 눈초리가 따가울테니 차라리 무관심하는 듯 지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꽉 차 있지 않았나 싶다. 암, 그렇고 말고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는 병행하지 않는다. 소위 정교 분리라는 명제가 그래서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세속 정치가 잘 되면 기독교는 하락세를 탄다는 이 아이러니컬한 현상이 있다. 독일에서 두어 달 체류하면서 느낀 것은 메르켈 지도자의 선정(善政)으로 독일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고의 안전과 경제부흥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보아하니 국민들은 빵 먹고 다리 뻗고 잘 공간이 거의 완벽하게 마련되어 있어서 아무런 걱정도 없이 지내고 있다. 주말이면 주말 즐김, 월말이면 월말 즐김, 1년이면 연가 2개월 해외여행 휴가, 사는 동안 무료 진료, 노후에는 연금보장, 죽을 땐 장지와 주례목사를 두고 있으니 세상살이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