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2년 6개월 만에 주일학교 예배를 다시 드렸습니다. 그간 더함교회를 중심으로 양쪽 마을에 새로 오신 목사님들이 사역들을 시작하며 주일학교를 하는 통에, 우리 아이들이 서로 쪼개져서 아이들이 민망해 하기에, 양쪽 교회로 아이들을 보내고 저희는 주일학교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잠시 지냈습니다. 지난 2여년동안 제 짧은 목회인생에 가장 여유 있던 주일들을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양쪽 동네 아이들이 거의 주일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던 2주전, 옥천 시내에서 잠시 일을 보고 차를 타려는데 한 무리에 중학생 여자 아이들이 “준영쌤이다!” 하고는 달려와서 손을 잡고 팔짱을 낍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 너무 커서인지, 한 10초간 누군지 도무지 몰라 한참 버퍼링에 걸려 멍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이 아이들 놔두면, 금방 이 험난한 세상에서 지쳐서 쓰러지고, 술에 찌들어 사는 부모에 영향 받고, 삭막해져가는 세대에 변질되어 평생 힘들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참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그 마음이 그 일이 다시 주일학교를 시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 오늘까지 오게 됐습니다. 드디어 지지난 주일 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하나님께 무진장으로 모든 것을 받았다. 태양은 태양 광선을 우리에게 준다. 땅도 우리에게 결실을 준다. 땅은 줌으로써 상실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받아들이는 것이 땅의 법칙이다. 땅이 많이 내지 아니하면 땅은 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땅은 풍성하게 자꾸 내기 때문에 풍성하게 도로 받는 것이다. 모든 동물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동물들도 자기 새끼를 낳고 씨앗은 뿌려져서 또 씨앗을 심어 풀이 나게 되는 것이다. 식물은 수없이 많은 종자를 낳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요 자연법칙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그냥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이 모든 세계의 것들을 거저 주시고 사용케 하셨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2:8)고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해, 달, 별 지구상의 모든 것 공기, 물, 땅, 바다, 무생물, 동물, 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물을 주셨다. 성경은 만인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하나님이 친히 주셨다(행17:25)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주신 만물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친히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을 쓰실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시다. 미국에서 생활을 시작할 때, 근처에 있는 공원에 나가 공원마다 있는 연못에서 낚시를 즐길 때였다. 옆에서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함께 나온 어린아이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른들은 옆에서 지렁이를 낚시 바늘에 끼워 주고 아이들은 쉴 사이 없이 던지고 조금 있다 다시 올리면 또 지렁이를 끼워 줬다. 건 두 세시간이 지나도록 똑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다 상관없는 내가 화가 났다. “이제 그만하자.” “낚시도 안되니까 다음에 다시 하자.” 말을 하고 그만 둘 법도 한데 아무런 말없이, 혹시라도 작은 물고기라도 잡히면 “잘했다.” 칭찬하며 함께 하는 할아버지, 아버지. 그것이 함께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한국에서 목사로 부름 받아 목회를 하면서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고, ‘목사는 놀아도 교회서 놀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별로 생각이 안 날 정도였다.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또 분명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결과였는지 어려움도 많았지만 개척 3년 만에 작은 교회를 건축하는 복(?)도 누렸다. 새벽기도회를 드리고 잠시
남자들의 친교 모임에선 가끔 각자 군대 생활 했던 것을 대화로 나눌 때가 있다. 대부분 자기 경험이나 소속됐던 부대를 자랑하기 일쑤다. 누구보다도 강한 훈련을 받았다거나 뭘 잘해서 상사에게 인정을 받았다거나 자기 부대는 특별했음을 내세운다. 많은 얘기들을 들어봤지만 그 중에 나의 선배인 김 목사님의 간증은 두 세 번 들었어도 늘 감동을 주었기에 적어본다. 1960년 신학교 재학 중에 입대한 김 목사님은 신병 때부터 기도 제목이 있었다. 첫째는 군종병으로 복무하게 해달라는 것이요. 둘째는 군종병이지만 설교까지 할 수 있도록 구했다. 하지만 그는 통신학교를 거쳐서 통신병으로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에 있는 어느 전방 보병 대대에 배치됐다. 그리고 대대장 무전병이 되는 바람에 병과를 바꿀 수 없었다. 그 당시엔 통신병은 특수 병과 이다보니 신병 때부터 기도했던 군종병은 되기 어려웠다. 물론 군대에서 설교를 하거나 주의 일을 하기도 힘들어졌다. 그렇지만 김 목사님은 신병 때부터 해온 기도를 중단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군부대 안에 있는 어느 바위 밑에 토굴을 파고는 가마니를 깐 뒤 거의 매일 한 시간씩 그 곳에서 기도를 계속하였다. 인내하면서 끈질기게 기
한자 사람인(人)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양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서로 기대며 더불어 살아야지 혼자 살 수 없다. 돈이 많다고 대궐 같은 집을 짓고 그 집에서 혼자 맛난 음식을 먹고 비싼 옷을 입고 산다고 재미가 있겠는가? 돈은 남을 위해 쓸 때가 즐겁고 지식은 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보람이 있다. 맛난 음식이 있어도 같이 먹을 사람이 없고 명품 옷을 입어도 봐주는 사람이 없고 해박한 지식이 있어도 들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삶은 하나도 즐겁지 않다. 인생을 즐겁게 살려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한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편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신 것은 다투고 반목하지 말고 서로 연합하여 더불어 즐겁게 살라는 말씀이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들어라 더불어 살기 위해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들어야한다. 들며 날며 인사정도 하는 이웃이아니라 이웃사촌이 있어야한다. 멀리 있는 친척 보다 이웃사촌이 났다는 말이 있듯이 좋은 이웃은 친척보다 형제 보다 더 좋을 수 있다.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
모든 성도는 약속이나 한 듯 함성을 내었다. “쉬~~이젠 허리 펴고 살겠습니다.” 언제는 죽어있었나? 그 답은 내가 보류하련다. 성도들의 표정은 밝아졌다. 전보다 더 열심히 봉사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나는 그들 앞에 “제발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엉뚱한 듯 한 당부를 했다. 지금까지 규정에 의한 예배 참여, 억압에 의한 헌금생활, 전통에 의한 경건생활 등 모든 그리스도인 생활의 패턴을 잠시 뒤로 하고 새로운 것을 따르도록 했다. “봉사하고 싶거든 하세요”하니까 어떤 성도는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어쩌야 되느냐고 묻기에 “봉사할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더니 “그런가요?” 응답하기에 “그런거요.”하고 나는 일러줬다. 율법과 복음의 이별을 모르는 교회는 애매한 교회이고 결국 고름이 피 되지 않기에 고름이 그냥 머물다가 온몸이 상하게 됐다. 나는 문제 해결을 “복음”제시로 했다. 해결은 간단했다. 좋은 예가 되지 않지만 우리나라 입장에서 북한을 보자. 북한이 왜 저렇게 큰소리치느냐. 원자핵을 보유했다는 것이라 하지 않나. 교회는 복음이란 원자핵을 보유해야 세상 앞에 당당할 것이다. 또 복음의 핵 없는 교역자는 힘을 못 쓰게 되
7살 1학년 때 한상철, 전원술, 이종철 등 5학년 형들을 따라 울릉도 저동 내수정 바위 사이에 우럭을 잡으러 따라 갔다. 형들은 그날 평균 15마리 정도 잡았는데 나는 외삼촌이 미끼를 끼우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했더니, 평생 처음으로 무려 28마리 우럭을 잡아 줄에 고기의 아가미를 끼워 끌고 집에 돌아왔다. 엄마 아빠가 매우 놀랐고 대우가 달라져서 그 후 일요일이면 우럭을 잡아와서 가족들의 좋은 반찬이 됐다. 중·고등학생시절 교회에 다니면서 누가복음 5장 1~11절의 성경말씀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베드로는 제자가 되기 전에 갈릴리 호수를 뒤지며 고기잡이 어부로 뼈대가 자란 훌륭한 어부였는데, 그날 밤은 고기를 잡지 못하고 그물을 터덕터덕 씻고 있는데 어찌 나사렛 산골 동리에서 온 예수에게 배를 빌려주고 대낮에 시킨 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에 가득 찬 고기를 두 배에 가득해 채웠던가? 목수 양반이 무엇을 안다고 고기잡이 전문가인 그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던가?”(눅5:5) 이 기적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목회를 할수록 어릴 때 우럭잡이 경험으로 차츰 깨달아졌고 실천하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베드로의 과거 경험, 지식, 어부로서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10) 오늘날 ‘원망’이라는 이 죄가 하나님 앞에 멸망당할 만큼 큰 죄가 된다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위의 내용은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내용으로써, 고라가 다단과 온과 더불어 당을 지어 이스라엘의 지휘관 250명과 함께 일어나 모세를 거슬렀던 사건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교회의 중직들을 통해서 힘을 받아 주의 일들을 해나가도 뭐할 판인데 도리어 중직자들 때문에 신경 쓰이고, 힘들어 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대학원을 준비하며 여느 때와 같이 교회에서 제 아내와 함께 성가대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 성가대는 목사님 설교 강대상 뒤에 위치해 있어서 늘 성도들과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제 아내와 저는 매주 성가대석 앞, 뒤로 앉아 몇 년 동안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오전11시 예배 때 성가대원들이 먼저 올라가 앉아 11시에 맞춰 오실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 눈에 갑자기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께서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라고 물었던 것처럼, 설교자는 비유 안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비유를 설교하는 설교자에게 하나의 비유가 그 콘텍스트 안에서 무엇을 말하기 위해 기록됐는지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현대 청중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기를 원하는지를 진지하게 찾아 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비유를 해석하기 위한 세 번째 관점은 비유 현장의 감동을 재현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예수님의 비유를 들었던 청중에게 어떤 감동이 있었는지, 당시 현장에는 어떤 정황이 연출됐을까를 유추해 볼 필요가 있다. 즉 당시 청중을 연상하며 감정이입을 시도하는 것이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 비유,’ ‘포도원농장 일꾼의 비유,’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등과 같이 대부분의 예수님의 비유는 반전 포인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원 청중의 감정적인 반응과 당시 그들에게 다가왔던 도전적인 교훈을 파악하는 것은 설교자에게 중요한 과제가 된다. 물론 이것이 언제나 수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때와 지금의 상황 사이에는 시간적 차이만큼이나 문화적
“심은 대로 거두는데서 봄에 심어야 가을에 거두듯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9:6) 아무래도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게 된다. 넓은 밭 혹은 넓은 등에다가 많이 심어야만 가을에 많이 거둘 수 있다. ‘수풀이 있어야 도깨비가 나온다’는 옛말이 옳다. 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다. 그런데 심지도 않고 거두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금 심으면 조금 거두는데도 불구하고 많이 거두려고 하는 사기꾼과 포학한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의 삼밭에 들어가서 밤사이에 삼을 전부 캐어서 도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나 다른 사람이 양육한 염소 모두를 도둑질해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40여년 한미전도대회에 통역해온 중에 미국 텍사스주의 아말리로에서 온 농부 성도는 비행기로 씨앗을 뿌리는데 가을의 밀 수확은 작은 산봉우리를 이룬다고 간증했다. 많이 나눠주면 많이 받고 오그라진 손은 줘도 받을 수가 없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는데 어떻게 여러 날 후에 도로 찾는가? 그것이 씨앗이 되어 많은 열매를 거둬 드리게 한다는 것이다. 많이 전도하고 많이 선교하는 교회도 역시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게
지난 부활주일은 더함교회가 5년째 맞는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여전히 전교인의 50%이상인 70대 이상 어르신들은 1:1로 메시지를 전해도 그 입으로 “예수님이 나의 주인 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란 소리는 쉽게 하는데 이상할 만큼 “예수님”만 말하면 딴 소리하는 현실입니다. 주입식 교육으로 따라하기 10번을 해야 앵무새처럼 영혼없이 1번 간신히 하실까 말까 합니다. 이것을 보면, 정말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 만으로도 굉장한 능력이 있음을 봅니다. 그럼에도 이번 부활절 예배시간에 스승님이신 박영철 교수님께서 개척 전 전수해주셨던 알찬 복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저희는 1년에 두 번은 주일 오전예배시간에 복음을 전하는데, 이 때 기존 교인들에게도 함께 전합니다. 교회 안에 교인 중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회심한 사람은 아직 20%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번 부활주일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늘 별로 관심없는 표정으로 들으시는 충청도 우리 어르신들에게 마지막에는 강경모드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제발 이제 오늘 내일 준비하셔야 할 어르신들, 앞집 할머니, 옆집 할아버지 돌아가셔도, 내 이야긴 아닐 것 같은 착각 버리셔요! 영원하지 않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경험했을 이야기다. 운전에 필수가 되어버린 네비게이션에 출발하기 전 도착할 장소를 입력하면 도착예정시간을 알려준다. 운전하다 잠시 휴게소에 들렸다 나오면 시간은 훌쩍 넘어가버려, 조급한 마음에 늘어난 도착 시간을 다시 줄이기 위해 속력을 내도 흘러간 시간을 줄이기란 쉽지 않다. 얼마 전 가까이에서 함께 목회하시던 분이 젊은 나이에 아직 가족에게나 주위 사람들에게 남겨진 일이 많이 있음에도 우리 곁을 떠나셨다. 진도에 내려와 만난 지 1여년의 시간에 건강하셨던 모습이 금방 무너져 버렸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했다. 시간을 조금만이라도 늘릴 수 있다면…. 분명 성도로서 천국을 소망하지만 아직 이 땅에 살면서 해야 할 일이 생각나 죽음 앞에서 시간을 조금만이라도 더 늘리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일평생을 주님께 헌신하며 살아도 돌아보면 부족한 것뿐이고 아쉬운 마음뿐이다. 늦게나마 깨닫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한 몸부림을 쳐도 주어진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끼며 시간을 늘리려고 애를 써본다. 그렇지만 무엇이 그리 바쁜지 시간을 늘리기가 쉽지 않다. 기도의 시간,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 맡
우리 신앙의 모든 기초는 하나님의 목적과 본성에 있으며, 주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한 줄만 남은 비파의 이야기가 있다. “왈츠”라는 사람의 “소망”에 대한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둥근 지붕 위에 어떤 젊은 여인이 외롭게 앉아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눈은 수건으로 싸 매여져 있다. 그래서 앞을 보지 못한다. 그 가슴에는 비파를 안고 있는데, 비파 줄은 다 끊어지고 오직 한 줄만 남아 있다. 뒤에는 희미한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앞이 안 보여도 비파 줄이 하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켤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소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또 여러 가지 줄이 끊어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하기도 하고, 믿었던 줄이 끊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소망의 줄만 있다면 능히 모든 것을 이기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두 사람이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히게 됐다. 이 두 사람은 같은 감방에 있으면서 철창을 붙들고 밖을 내다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은 언제나 하늘을 쳐다보며 시 창작에 몰두했다.
교회를 옮기는 일은 절대 쉽거나 간단한 일은 아니다. 자신이 속한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데 따르는 상실감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직장이나 다른 일로 그 지역 교회를 멀리 떠날 때는 그나마 아쉬움이 깊다. 그러나 한 지역에 계속 살면서 교회를 옮긴다는 이야기는 그 상실감을 상쇄할 만큼의 실망, 상처, 갈등이 얼룩진 선택이기 마련이다. 상처받아서 떠나고, 또 그만큼 상처를 남기고, 상처를 준 후에 떠난다. 긴 싸움 끝에 마치 이혼을 선택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 일은 가족을 바꾸는 일처럼, 가는 사람, 남는 사람, 모두에게 힘이 든다. 다른 교회에서 오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 교회는 사람들이 차가워요.” “그 목사님은 사랑이 없어요.” “말씀이 은혜가 안돼요.” “심방을 안 해요.” “장로님이 다 맘대로에요.” “신앙에 본이 될만한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새로운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요. 친구가 안돼요.” “찬송가를 안 해요. 찬양이 은혜가 안돼요.” “교인들이 너무 무례해요.” 그런데 바로 똑같은 그 이유 때문에 또 교회를 떠나간다. 믿음의 공동체에 자신은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올 때나 떠날 때나 들을 수
얼마 전 서울 명동의 유서 깊은 한 장로교회 청년부 특강을 갔다. 주제는 “기독교 세계관과 이성교제”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 안에서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 통로로 결혼을 예비하셨다. 하나님은 처음에 아담만 먼저 창조하셨으나 독처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서 여자를 만드시고 이끌어 오시니 아담에게 이러한 감정이 일어났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이것이 바로 연애상대를 만났을 때 도파민, 옥시토신, 노르에피네프린 같은 호르몬이 활성화되는 현상이다. 인간에게 이성교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짝을 만나서 “합하여 둘이 한 몸”(창 2:24)을 이루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정을 세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사명에 순종하게 하신다.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가정과 가문을 세운다. 따라서 성경은 이성교제와 결혼이 구분된 것이 아니라 이어진 한 세트의 사건이며, 선택이 아니라 사명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세워진 가정은 그 자체가 하나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그 나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