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국명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다. 우리의 국명은 대한이다. 그런데 대통령을 위시해서 많은 정치인들이 대한이란 국명을 감추고 마냥 “한반도”이니 “남쪽”이니하는 판이니 참으로 듣기에도 민망스럽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요” 못하고 “남쪽 대통령이요” 한다면 대한민국 곧 대한의 아름이 “남쪽”나라인가? 우리나라의 이름이 “남쪽”이나 “남한”이 아니다. 빈번히 대면하는 북조선의 지도자와 면담할 때 거의 언제나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빠진다. 예를 들어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자 한다. 북조선도 대한민국이란 국명은 쓰지 않고 “남쪽”이라고 하고 있다. 전에 올림픽 경기장에서도 태극기 대신에 “한국지도”를 들고 나오고, 애국가 대신에 “아리랑”을 불렀다. 물론 이렇게 하기는 북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적 외교적 문제가 깔려있다고 하더라도 대한은 대한민국이라 이름을 대고 북조선도 조선이라고 이름을 대고 이야기해야만 양자의 정체가 분명할 것 아닌가? 명칭이 불분명하면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와 외교하고 있는지 모른다. 북한 호칭도 애매하다. 이 말의 문자적 해석은 북에 있는 대한민국이란 말인데 어디 지금 그런 상태인가? 그들의 이름 그대로 조선이라 해두자. 그것이 유엔의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독일을 항복시킨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이 두 번의 미국 대통령을 지내고 월터 리드(Walter Reed) 병원에서 임종을 30분 앞둔 때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를 초청했다. 다음은 그래함 목사가 그때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병실에 들어가자 아이크(Ike) 전 대통령은 평소와 다름없는 그의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맞아 줬습니다. 임종이 거의 다 되어가자 아이크는 더 오래 같이 달라고 하면서, 자기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가는 도리에 대하여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성경을 펴고 간단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어떤 공로나 노력이나 선행으로 또는 교회를 다닌 기간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야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 후에 아이크는 말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 유언을 남기고 그는 평온히 임종을 맞이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거의 모든 등산객이 보통 보조로 걷고 있는 산책길인데 70이 넘어 보이는 한 영감은 체력장의 다름질 코스로 알고 있나 그냥 땀을 흘리며 달리고 있다. 그런데 같이 등산하던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그리 밝지는 못한 것 같다. “노인답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나 남이나 왜 그런 느낌일까. 모든 사람들이 등산 산책으로 건강을 유지하겠다는 젊은이 사이에 유독 소난장에 말 나듯이 독보적 행동을 해 보이는 그 영감상이 그리 예쁘게 보이지 아니했던 것 같다. 이런 현상을 “마지노선(Maginot line)”이라 한다. 마지노선을 독불전쟁에서 이 선을 넘어오는 적군이 있다면 그 나라는 망한다는 뜻에서 사수(死守)해야 할 최후의 보루이다. 이것 깨어지면 망한다. 노인이란 마지노선이 있다. 노인선 곧 마지노선이다. 나라 간의 전쟁에서는 물론 모든 인간의 행위에도 마지노선이 있다. 이 선을 넘으면 화(禍)가 된다. 노인에게는 노인이 지켜야 할 마지노선이 있다. 그 선 안에서 노인이어야 하지 그 선 넘어서 노인이 되랴 하면 억지로 젊은이 되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신체리듬에 대한 반역이다. 노인은 노인 체력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 독보적인 노인의 벗은 몸의 울퉁불퉁한
그 사람의 마지막 떠나는 장례식에 조문객이 모였다. 땅에서는 “이래 살다 갈 걸… 하고 하늘에서는 “그래 살다 올 걸… 하는 소리가 내 귀에는 선명하게 들린다. 땅이나 하늘에서 들려오는 이런 소리에는 그 사람의 일생이 유감스러웠다는 것을 한탄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런가? “이래 살다 갈 것”하는 유감스러운 마지막 작별인사는 어이된 셈인가? 어째서 이래 살다간 것이 어떻다는 것인가? 첫째로 한평생을 찢어지게 가난에 시달리다가 떠나가는 고인의 뒷모습이 한없이 처량하다는 것이다. 바가지 고생만 하다가 가누나. 둘째로 이래 살다 갈 것 쯧쯧하는 이유는 만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생전에 남에게 좀 베풀고 갈 것이지 어쩌면 그렇게도 인색했더냐는 것이다. 호주머니 풀지 않고 있다가 어디 가서 풀려나. 셋째로 자기에게도 좀 여유 있게 베풀고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너무도 자기에게 인색했던 그의 삶이 가련하다는 것이다. 외국 여행 한번 못하고 입맛 따라 밥 한 그릇 사먹기를 벌벌 떨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유감스러운 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그의 무신론적 생활이다. 그토록 영원 구원 전도를 했건만 고개 짓더니만 그냥 가는구나. 차차 믿는다고 미루더니만 영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선교사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는 1761년 영국의 국교도 출신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에 비국교도 기도회 모임에 출석해 말씀을 듣고 중생을 체험했다. 그간 떠돌이 구두 수선공으로 일한 청소년이었으나 1787년 8월 숫크립스교회(Sutcluffs Church)에서 26세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을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 있는 주님의 최후명령에서 접할 때마다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해외 이방인들의 영혼에 대한 강력한 연민으로 깊은 도전을 받았다. 캐리는 ‘쿡 선장의 항해’라는 책을 읽고 선교에 관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고 1791년 크립톤(Clinton)에서 부활절 연합 예배 때 해외 선교에 대한 설교를 했다. 영국 교회의 해외 선교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고 이듬해 노팅햄(Nottingham)에서 모인 연합 예배 때는 이사야 50장 23절을 가지고 “죽지 않는 설교”로 불리는 유명한 설교를 했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것을 시도하고 하나님으로부
1961년 대학시절에 나는 천문학적으로 큰 문제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일본 천문대에서 관측한 결과 지구의 자전에 10분의 1초의 착오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팽이의 법칙”에 의해 지구의 자전이 서서히 1초, 1분, 나아가 1시간 그리고 그 이상으로 늦어지다 보면 지구의 자전이 정지되고 공전에도 큰 변화를 준다. 그러나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재관측한 결과 10분의 1초도 틀림없이 자전하고 있다고 해서 사람들은 안심한 것이다. 그런데 지구의 자전이 10분의 1초도 큰 문제가 된다고 한다면, 태양이 어떻게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천지창조 후의 홍해의 도하와 같은 기적도 있지만, 이것은 지구 안에서만 일어난 기적이다. 하지만 여호수아 10장 12~14절의 내용은 지구와 태양계에 미치는 내용이다. 어떻게 태양과 달이 종일토록 중천에 머물러서 있었냐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때는 6·25전쟁 중. 장소는 강원도 어느 수복지구. 결국 한국군이 인민군의 점령지역을 탈환했다. 사기등등한 한국군은 북진하고 수복지역의 치안은 소위 치안담당반이 맡았다. 무법천지, 무정부천지 전쟁 중이라 소위 치안대장이 삼권분립(?)을 다 쥐고 주어진 지역 치안을 다스리던 때. 27세 미녀가 시체 누울 만큼 판 흙구덩이에 꿇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치안대장의 명령에 의해 총살직전에 있었다. 그때 인민군에게 복역한 수많은 사람들이 치안대원에 의해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을 당했다. 이 미모의 여인도 인민군에게 복역한 전과자라는 이유로 총살을 당해야할 처지에 놓였다. 치안대장이 물었다. “그대는 왜 복역을 했나” 흙 구덩이에 꿇어앉은 여인은 입을 열었다. “복역하고 싶어 한게 아니라오. 인민군과 보안대원 등쌀에 복역하지 않고는 당장 죽게 됐으니 살자고 복역했소.” 그리고 그녀는 이어서 또 말했다. “누가 나를 치안대에 고발한 것도 알고 있소. 그 사람의 집과 우리 집은 옛날부터 사이가 나쁘게 지냈는데 이참에 나를 죽이고자 더 과장해서 고발한 것이 틀림없소.” 그리고 여인은 말이 없었다. 이제 남은 일은 치안대장의 명령에 의해 치안대원의 발사만 남았다. 갑자기 미인
물이 0˚에서 얼음이 되고 100˚에서 끓는 현상을 우리는 생활에서 마냥 보고 지나친다. 그야 물이니까 그런 거지라고. 이런 현상은 무슨 힘에 의해 생겨나는 것일까. 저절로 얼고 저절로 끊는다는 자연주의적 사고로 만족할 수 있을까. 대개 사람들은 현상만 받아들일 뿐 그 배후는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다. 그야 전문가가 다룰 문제라고 더러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묻노니 현상이 먼저냐 현상되게 한 원리가 먼저냐? 즉 물이 늘 그러하니 그것이 원리가 되었는가? 아니면 물이 늘 그러하도록 하는 배후의 힘으로 원리가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은 원리보다 현상에 생각을 집중하고 여기서 더 나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현상을 추구해 원리 같은 것이 있노라고 결정하겠다는 것이 소위 귀납적(歸納的)방법이라 한다면, 현상 배후의 어떤 원리 혹은 법칙이 있어서 현상이 나오게 됐다고 생각하는 바가 소위 연역적(演繹的) 방법이다. 과학은 귀납적이고 철학은 양자수용적이고 신학은 연역적이라는 것이 학문의 성격에 의한다. 선원리(先原理) 후현상(後現象)은 성경적 교리이다. 세상만사가 있어서 창조주를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가 계셔서 세상만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창조론 사상이다. 현상
80고령 나의 친구들은 이미 60대에 틀니 신세를 졌다고 하는데 나는 80이 넘어서야 틀니를 넣고 다니게 됐다. 따라서 틀니와 나와의 친숙 관계는 매끄럽지 못하다. 어느 때는 틀니를 집에다가 빼어놓은 채 집을 나섰다가는 뒤돌아 와서 다시 틀니를 착용하곤 한다. 그때 틀니는 외롭게 주인을 불러도 주인은 말없이 제 가실 길 가시다가 되돌아와서 다시 그를 알아 모실 때 틀리는 외롭지 않단다. 틀니의 존재 이유는 나 아니고는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밤낮 틀리는 내 생각에 자고 깬다. 내가 입에 넣어주지 않으면 틀리는 보기도 흉측스럽고 따분하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틀니를 아주 달갑게 여기지도 않는다. 아직 그것 이용에 서투른 만큼 밤에 빼어 뒀다가 아침에 착용할 때마다 이놈의 외계물이 왜 입에 틀어 와야 하느냐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사실 착용한 지가 몇 개월밖에 안 되어서 그 틀니가 들어올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 않는다. 다른 생니들도 이질감을 느낀다. 그러나 틀니도 이런 감정들을 알지만 자기의 존재 이유가 천래(天來)의 생니 사이에 보존 역을 해야 한다는 치공 틀의 제조 목적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싫어도 들어와야 되고 미워도 다시 한 번 미움 받아도 들어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의 배를 빌려 가르치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고 해 그들이 나가 두 배 가득하게 고기를 잡았고, 또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요21:6)고 했을 때 순종했더니 153마리를 잡았다.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이 5명의 전 남편이 있었던 것과 현재 남편도 제 남편이 아닌 것을 예수님께서 아시고(요4:17~18) 지적해 그녀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는 눈을 뜨게 하시어 구원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어 3일 만에 다시 살 것을 여러 번 예언하셨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교회에서 약속한 헌금을 빼돌린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베드로는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행5:3),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행5:9)고 책망했다.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가이사랴의 빌립 전도자 집에 유할 때 네 딸도 유언자로 있었는데 아가보 선지자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될 것을 허리띠로 예언했다(행21:8~12). 바울이 배 타고 로마로 가는데 행선에 하물과 배 및 생명에도 타격이 있을 것(행2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