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창시자 존 스마이스는 처음부터 청교도 주류 교회론인 장로교주의를 반대하고, 회중교회주의와 영성주의를 강조하는 교회를 추구하였다. 그러던 중 1609년 초, 성공회와 청교도들이 충격을 느낄 일을 결행했는데, 그것은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믿음을 고백한 성인에게 침례를 실시한 일이었다. 이러한 커다란 변화의 이유는 스마이스가 가까운 곳에 있던 워터랜더 메노파교회의 침례 행습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 스마이스는 성인 침례를 이단적인 행습으로 생각했으나, 침례를 연구하면서 신자의 침례가 성서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스마이스와 게인스보로 교인들은 전에 받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신앙고백에 근거한 침례를 받기로 결정했다. 당시에는 아무도 신자의 침례를 받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스마이스는 신앙고백을 하고 스스로 자신에게 관수 형식으로 침례를 행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관수로 침례를 베풀었다. 드디어 최초의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스마이스는 1609년에 쓴 ‘짐승의 특성’(The Character of the Beast) 이라는 책에서 유아세례는 교회를 성도와 불신자가 혼재된 공동체로 만들어 적그리스도적인 교회가 되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유아들은 회심할
설교 방식과 연관하여, 본문의 문학 장르를 고려한 효율적인 전달방식을 연구하는 것은 언제나 설교자에게 연구 과제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문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손상되지 아니하고 여전히 살아있는 말씀으로 청중의 귀와 가슴에 들리게 하는 것이다. 이는 설교자로 하여금 청중은 어떤 방식으로 전할 때 잘 들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전달 방식과 연관하여 설교자가 언제나 유념할 것은 어떤 틀에 고정되지 아니하고 유연성 있게 변화를 주면서 전달 방식을 다양화시키는 것이다. 현대 문화의 특성상, 오늘날의 청중은 어떤 특정한 방식과 틀에 얽매이기보다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설교자가 이점을 고려한다면 전달 방식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2. 설교 실제 1) 시편 13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우리말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있다. 수많은 사람 중에 생전의 모습과 죽은 후의 너무나 상반되는 이름을 구약에서 찾는다면 사울 왕일 것이고 신약에서 찾는다면 예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유다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사람이나 될 정도는 유대인들에게 유다는 아주 흔한 이름이다. 그렇다고 “철수”나 “영희”처럼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 중에 왕족의 머리를 지칭한다는 면에서 유다는 권위와 영광을 표현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영광스런 자신의 이름을 배반자의 이름으로 바꿔 놓았다. 복음서 기자들은 가룟 유다를 지칭할 때 꼭 수식어로 “예수를 배반한 사람” 또는 “예수를 팔 사람”이란 별칭을 사용한다. 마태는 가룟 유다란 이름 없이 단순히 그를 “예수를 판 사람”으로 명시하기도 한다(마 26:48). 가룟 유다를 “배반자”로 규정할 때 사용한 헬라어는 “배반자”라는 명사가 아니라 분사로 되어 있다. 가룟 유다를 배반자로 규정하는 헬라어 용어는 부정과거 분사 o` paradou.j auvto,n(호 파라두스 아우톤, 그를 넘겨준 자)이거나 현재 분사 o` par
그러나 스미스의 말은 시편의 시들이 신학과 무관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의 감흥을 먼저 존중하라는 것이며 시의 무게감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들을 기독교 신학의 틀 속에 두라. 목표는 거기에 수반된 신학을 멀리서 넓게 보기 전에 본문 안으로 가까이 들어가게 하는 것이 다.” 히브리 시는 독자들을 보다 편하게 그리고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동시에 시 안에서 하나님을 노래 하고 구원자를 찬양하며 그에게 간구하는 그들의 고백 안에서 독자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하게 한다. 이처럼 히브리 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 구속의 역사를 웅변적으로 증거 하듯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다. 일례로 시편 23편에서 저자는 여호와에 집중하면서 그가 자신을 지키고 돌보시는 목자임을 노래한다. 그리고 그 목자는 자연히 생명의 목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된다(요 10:10). 4. 그리스도 중심 해석 시편의 신학적 내용은 신약의 메시지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 시편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실제로 시편 저자들의 신학적 핵심은 필연적으로 ‘주께서 다스리신다’라는 근본적인 선포와 다
옛날 중국에 진나라와 제나라가 있었습니다. 진나라는 진시왕이 통일 대업을 이룰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였으나 제나라는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당시 제나라의 농부들이 참외밭을 가꾸었는데 국경을 이웃한 진나라의 농부들도 똑같이 참외를 키웠습니다. 해마다 제나라의 농부들이 가꾼 참외는 잘 자라서 모양도 좋고 맛이 훌륭한 참외가 됐지만, 웬일인지 진나라 농부들의 참외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 진나라는 막강한 국력을 앞세워 쳐들어와 제나라 농부들의 참외밭을 뭉개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일이 해마다 지속되자 제나라 농부들은 대책을 세우기 위해 회의를 했습니다. 거듭된 회의 끝에 제나라 농부들은 밤에 몰래 진나라 참외밭에 가서 (좋은 참외가 열리도록)(달고 시원하고 맛이 있는 참외가 열리도록) 가꾸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해마다 와서 못살게 구는 적들이니 보복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제나라 농부들은 적개심을 버리고 사랑의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듬해 제나라 농부들은 밤에 몰래가서 진나라 농부들의 참외밭을 자기들의 참외밭보다 더 정성을 들여 가꾸어 놓았습니다. 마침내 진나라 참외밭에도 상품 가치가 높은 훌륭한 참외가 주렁주렁 달리자
필자는 지난 호에서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대해 한국의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중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미래적이며 장소적인 관점과 그것을 토대로 이뤄진 천당 신앙과 기복 신앙에 관해 말했다. 그리고 그런 관점과 신앙이 예수님의 말씀들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본질적인 의미를 이해하는데 많은 제약과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 주제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역동성과 현재성에 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언급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본질과 목적에 관해 그것의 역동성과 현재성과 진행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관하여 공관복음서들에서 사용된 용어들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용어들은 두 가지 곧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이다. 천국은 직역하면 “하늘들의 나라”이며 이것을 한자어로 바꾼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천국’이다. 마가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용했다. 누가는 대부분 “하나님의 나라”를 사용했으며 그밖에 다른 수식어를 사용해 “당신(하나님)의 나라”(11:2), “그(하나님)의 나라”(12:31), “그 나라”(12:32; 22:29), “내(예수)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7) 예전에 한 성도님이 수술을 받기 위해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술 전에 기도해 드리기 위해 병원에 심방을 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 수술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그분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분은 너무나 평온하고, 해 맑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얼마나 마음이 평안하고, 담대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과 근심을 제거해 주셔서 수술에 잘 임하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말씀을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어떻게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그토록 여유롭게 기도까지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않도록 보살펴 주시고,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느끼지 못하도록 성령께서 스데반의 몸과 마음을 신비하게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신문사 기자 양반이 세상을 바꾸기라도 할 것 같이 젊음과 열정을 온전히 바쳤지만 돌아온 것은 사회적 좌절이었습니다. 40대 중반에야 뒤늦게 가족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집에서는 이미 “하숙생 아빠”와 “복수하고 싶은 남편”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그 절망의 벼랑 끝에서 만난 것이 바로 “감사”였고, 수년 동안 꾸려온 “감사 아빠”와 “감사 남편”에서 얻은 선물 중 하나가 아들과의 관계 회복이었습니다. 한번은 졸업앨범에 “환한 미소”를 지은 학생이 30년 후에 보면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더 건강하고, 더 성공하고, 더 행복한 인생을 살아간다는 통계 결과를 보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들의 졸업앨범을 뒤져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숙생 아빠”로 생활하던 시절 아들의 중학교 앨범에서 “우수에 젖은 아들의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던 아들이 “감사 아빠”로 변신하고 3년이 흐른 뒤에 찍은 고등학교 졸업앨범에는 “환한 미소”를 짖고 있었습니다. 대조적인 두 사진을 목격하는 순간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아빠의 감사”가 아들의 얼굴을 바꾸고 감사하는 가장이 행복한 가정과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진수성찬 앞에서도 불평
시가서의 해석적 관점 숙련된 히브리 시인이 기록한 시편의 아름다운 시를 명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히브리 시에 담긴 독특한 시적 요소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히브리 시는 평행(parallelism)과 이미지(imagery)의 반복을 통해 압축된 문장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문학의 한 형태이다. 히브리 산문에도 평행과 이미지가 없지 않지만 히브리 시는 그것을 더욱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특징이자 산문과의 차이점이다. 1. 평행법(Parallelism) 히브리 시에는 운과 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 반면, 평행법을 이용해 시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평행법은 히브리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앞의 행에서 밝힌 사상이 다음 행에서 동일하거나 연관된 내용으로 표현되는 문학적 기교이다. 시의 행에 포함된 각 소절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 즉 소절에서 소절로 이어지는 일정한 사상의 흐름이 있는데 이러한 사상의 흐름이나 관계성이 평행이며, 이 관계성의 특징은 상응(correspondence)이다. 성경학자인 아델 베를린(Adele Berlin)은 이러한 상응성이 평행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평행은 히브리 시의 소절들 안에서 상응적 관계를
최초의 침례교회는 영국 분리파 청교도 목사 존 스마이스(John Smyth, 1570-1612)에 의해 1609년 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됐다. 스마이스는 영국 노팅엄셔 주 스터톤리 스티플(Sturton-le-Steeple)이라는 마을에서 자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링컨셔 주 게인스보로(Gainsborough)의 문법학교(grammar school)를 졸업한 후, 캠브리지대학교 신학대학인 그리스도대학(Christ’s College)에서 학사(1590)와 석사(1593)를 취득했다. 스마이스는 대학 시절 프란시스 존슨(Francis Johnson) 교수의 영향으로 청교도주의가 됐다. 존슨은 청교도 사상으로 인해 1590년에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대학에서 쫓겨났다. 그는 런던에 초대교회(Ancient Church)라는 분리파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박해를 피해 1593년에 신앙의 자유가 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피난갔다. 스마이스는 1594년에 성공회 목사로 안수 받았고, 1594년부터 1598년까지 4년 간 모교인 그리스도대학에서 강사로 봉직했다. 당시 신학교 교수는 결혼이 금지됐으나 스마이스는 결혼을 감행했고, 그로 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