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목회학을 공부하지 않은 어머니에게 먼저 목회를 배웠다. 어머니는 세 가지를 주문했다. “첫째, 설교할 때는 가끔 웃겨라. 둘째, 심방 가서는 잘 먹어라. 셋째, 상담할 때는 잘 들어줘라.” 이어서 말씀하셨다. “건강해라. 건강은 목회의 생명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어머니는 최고의 목회학 교수였다. 27년 전, 몸이 아파서 남태평양 피지섬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왔다. 그때 아내와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목회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목회는 설교, 심방, 상담, 교육….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는 목사의 삶이다. 목사의 삶에 예수가 보여야 한다. 그래야 설교할 때도 예수가 보이고, 상담할 때도 예수가 보이고, 함께 밥 먹을 때도 예수가 보인다. 예수가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이요 목회다. 신학교 다닐 때 목회학 교수님이 질문했다. “자네의 인생 목표가 무엇인가?” 소명감에 대한 열정은 펄펄 끓고 있었지만, 목표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아서 잠시 생각하다가 구체적이지 못하고 추상적인 목표를 세 가지 말씀을 드렸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목회자가 탈진하는 이유에 관해 존 샌포드는 목회자의 일이 끝이 없다는 것, 출퇴근이 없는 직업이며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 불가하며 하던 일을 무한 반복해야 하는 직이라는 것을 예로 들었다. 다섯째로 목회자는 교인들이 기대하는 일들을 끊임없이 다뤄야 한다. 월요일만 되면 핸드폰을 아예 꺼두는 목회자들이 있다. 그날만큼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 중에는 그런 목회자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월요일에 목회자가 필요한 날이 있는데 너무 목사님이 자신만 생각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거의 119대원과도 같은 것이다. 여섯째로 목회자는 매년 동일한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어딜 가나 골치 아픈 사람, 까다로운 사람, 교만한 사람 등이 있게 마련이다. 목회자는 이들을 피하거나 골라 가르칠 수 없다. 다 받아줘야 한다. 그래서 토요일 저녁만 되면 불면증에 시달리는 목회자도 있다. 다음 날 그 사람을 다시 봐야 하기 때문이다. 표정관리가 잘 될까 고민이 많아진다. 일곱째로 목회자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일하기 때문에 특히 에너지 소모가 많다. 요즘 유행하는 단어 중 “감정노동”이라는 말이 있다. 목회자야말로 감정노동에 시달리
한국의 목회자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설교와 가장 많은 예배 인도, 가장 많은 업무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학창 시절 부흥회를 다닐 적에 한 목사님이 그렇게 말한 것을 기억한다. “나는 제단에서 기도하다 죽는 게 소원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제일 사랑한 말씀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였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죽은 목회자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 문제는 가정이다. 가정이 없었다면 영광스러운 순교일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아직도 한참 일할 나이에 과로로 죽게 되면 아내와 아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이라지만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은 자동차와 같다. 장거리를 뛴 자동차는 한 번 점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점검은 고사하고 계속 매일 장거리를 뛰다 보면 갑자기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운전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고장이나 사고로 큰 위험을 당하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물론 과거 목회자들에 비해 요즘 목회자들은 건강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건강을 위해 건강보조식품 복용이나 등산 및 운동을 정기적으로 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 사실 누구도 탈진을 원해서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다 보면” “하다 보니까” 탈
중독은 크게 신체 증상인 중독(Intoxication, 약물중독)과 알코올, 마약과 같은 정신적인 중독이 문제가 되는 중독(Addiction, 의존증)을 동시에 일컫는다. 여기서는 역기능적인 가족체계 내에서의 의존증에 대한 상호작용에 관해 보고자 한다. 남편이 흡연자인 경우, 아내는 비흡연자이지만 간접흡연으로 임신 중에 아이에게 악영향을 주어 신체적으로 발달을 저해하며 조기 출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니코틴 중독자인 남편(아이들의 아버지)만이 중독자인 것이 아니라 함께 생활하는 가족이 중독에 반응하고 노출되기에 상호의존중독(相互依存中毒)에 걸렸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는 증상이 나타나는 한 사람이 아닌 가족 전체로 봐야 하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은 자신이 어렸을 적 원가족의 역기능을 자신에게 살아있는 인간 문서로 기록하여 자신의 가족에게 상처를 대물림한다. 이렇게 역기능도 계속 세대를 거쳐 유지하려는 힘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항상성이라 불렀다. 물론 순기능이 발달하였다면 순기능을 유지하려는 힘이 강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역기능을 순기능으로 바꾸는 치료와 그 과정을 필요로 한다. 역기능의 특징 중에 하나가 수치심에 기반을
우리 모두의 삶에는 여러 모양의 산과 계곡과 평지가 이어진다. 늘 좋은 일에 기뻐하고 축하만 하며 살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하고 싶고 피하고 싶어도 우리 모두가 지나가야 하는 슬픔이 존재한다. 바로 상실의 순간이다. 글에서조차 화두로 올리기 쉽지 않은 주제이다. 상실의 모양은 여러 가지다. 요즘처럼 바이러스로 일상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일도 있다. 연애하다 차일 때, 친구와 싸워서 절교할 때, 교회를 옮길 때, 사업을 접을 때 등등 다양하다. 인간으로서 모두가 지나가야 하는 깊은 상실도 있다. 아이가 자라 부모의 품을 떠날 때, 부모를 잃을 때, 꽃다운 젊은이가 쓰러져갈 때, 열정을 불태우던 직장에서 은퇴할 때와 같이 우리는 떠나보내고 떠나는 순간들을 경험한다. 어떤 상실은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준비시키며 찾아오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우리의 삶에서 귀중한 무엇인가를 통째로 뜯어낸다. 축하보다는 슬픈 소식이 많은 이 특수한 상황에 우리는 어떻게 상실의 순간을 대면해야 할까? 평소에도 자주 보고 수다 떨고 웃던 분의 갑작스럽고 황망한 소천의 소식을 들으며 장례를 준비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든 절차가 간소화된다. 장례처럼 한 사람의 인
내가 사는 집은 골목과 접한 빌라를 끼고 들어가 그 빌라 뒤쪽에 있는 4층 빌라 중에 2층이다. 창문이 지면에 닿은 지층까지 합하면 3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안방과 옆의 건넛방 모두 창을 열면 앞집 벽만 보인다. 빛은 잘 안 들어오지만 다른 층 사람들의 목소리는 앞 집 벽에 반사되어 잘 들어온다. 여름날 저녁으로 향하는 오후에는 30도를 웃도는 정오의 더운 날씨가 조금 수그러져 대부분의 집들이 창문을 열어 놓는다. 아랫집 창문도 열려 있었고 어린 딸에게 야단치는 엄마 목소리는 확성기를 입에 댄 것처럼 쩌렁쩌렁 울린다. 거의 1시간 동안 들리는 높낮이 없는 일관성 있는 소프라노 소리에도 아이들 목소리는 들리지 아니했다. 그러나 엄마의 말에 의하면 아이가 엄마에게 한 말이 무엇이었는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뭐가 무서워, 학원 선생님이 무서워? 내가 더 무서워?…누가 학원에 가지 말라 했어?…80점이 뭐야? 왜 이렇게 공부를 안 해?” 이 아이는 어제 앞집의 담과 우리 빌라 사이에 깔개를 펴고 그늘진 좁은 공간에서 친구 두 명과 함께 뒹굴며 책을 펴 놓고 놀고 있었다. 아마도 공부와 숙제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책을 펴 놓았을지도 모른다. 어쨌
목회란 무엇일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행하는 사역을 목회라 한다. 전 세계의 수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크고 작은 교회에서, 혹은 선교나 봉사직으로 섬기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저 “개념적 정의”일 뿐이다. 20세기 최고의 심리학자로 알려진 프로이트와 더불어 무의식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낸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구스타프 칼 융은 아버지가 개신교 목회자였다. 자연이 아름다운 스위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평생을 목회자로 헌신한 융의 아버지는 어린 칼 융에게 종교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아버지가 죽음을 앞 둔 어느 날 융에게 그런 말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융아!” “네! 아버지.” “너 목회가 무언지 아느냐?” “아버지 목회가 무업니까?” “목회라는 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목회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융의 아버지가 보기에 목회라는 것은 목회자가 사람의 수준을 벗어나서 완벽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인들은 목회자에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많은 것을 바란다. 설교도 잘 해야 하고, 심방도 잘 해야 하며, 목사님이 기도하시면 다 응답을 받아야 하고, 상담도 행정도
심연희 사모 미국 RTP지구촌교회 학교폭력의 희생자로서 학교 일진의 분풀이 대상으로 이유도 모르고 내내 맞으며 중고등학생 시절을 지냈던 한 개그맨의 간증을 접하게 됐다. 이렇게 맞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과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외로움, 그 폭력의 악순환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무기력감을 토로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났는지 모른다. 피해자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과 더불어 같은 나이의 어린 가해자들의 무지와 악함, 그 폭력을 대물림하고 잘못 지도했던 윗세대들, 눈에 뻔히 보이는 폭력을 방관했던 친구들과 어른들의 비겁함에 씁쓸하기만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말은 그의 부모님들이 했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맞을 만하니까 맞는 거라 하셨고, 어머니는 무조건 용서하라 하셨다. 크리스천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매번 멍과 피로 얼룩진 몸으로 집에 돌아올 때도 못난 아들을 낳은 당신 탓이라는 자책감으로 일관하셨다고 한다. 언뜻 보면 겸손하고 은혜가 많은 크리스천의 자세인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문제를 들여다보지도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비겁과 나약함이 가려져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어른들 속에서 아이는 학대와 폭력을 마치 운명처럼 받
박종화 목사 빛과사랑교회 해리 티바웃(Harry Tiebout)은 굴종(순응:compliance)과 굴복(순복:surrender)을 구분해 중독된 자신이 중독을 부인하는 것을 어떻게 깨뜨릴 수 있는지에 대하여 이해를 돕는다. 주로 어린 시절 가족의 역기능 체계에서 받은 상처로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정서중독이나 알코올, 또는 약물중독으로도 이어진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상호의존증(相互依存症)을 갖게 한다. 그러나 중독된 사람은 이러한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이 대단하다는 망상에 빠져 자기가 자신을 계속해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망가진 의지다. 역기능 체계 속에서 원래 자기가 주체로 자기를 잃고 자신보다 힘센 대상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기인해 갖게 된 죄책감과 수치심이 중독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그러나 자신은 중독을 부인하고 모든 것을 이겨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종교적으로든, 정서적이든, 약물이든 자기가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중독의 특징이다. 중독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통제하려고 했던 삶의 여러 가지에 있어서 통제하려는 시도를 멈춰야 한다. 자기 스스로 이것을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문적인 상담가로부터 자신의
새해가 되면 으레 세우는 계획이 있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기도를 더 많이 하며, 살을 빼거나 술, 담배를 끊거나 관계를 회복하거나 승진을 하거나 사업을 더 일으키고 싶다. 지난해 이맘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계획이다. 그런데 그때 마음먹었던 변화를 지속해 왔는가는 지난해를 지내며 쌓은 습관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밤에 간식을 찾는 습관은 복근을 위한 한해의 프로젝트를 금세 포기하게 한다. 쉴 때마다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습관은 새로운 것을 배워보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미뤄두게 한다. 계속 ‘나중에 하지’를 반복하는 습관은 학업이나 일을 효과를 여지없이 떨어뜨리고 성공을 방해한 다. 비꼬거나 비난하는 말의 습관은 잘 지내보려던 관계들을 악화시킨다. 작은 일상이 삶의 방향을 좌우하는 것이다. ‘습관의 힘’이라는 책에서 찰스 두히그는 MIT의 한 연구를 소개한다. 뇌의 기저핵이 손상되어 기억할 수 없는 쥐들이 어떻게 미로에서 초콜릿을 찾아내는가를 지켜봤다. T자형 미로의 왼쪽 끝에 초콜릿을 놔뒀을 때, 한동안은 초콜릿을 찾지 못했고, 냄새를 따라 찾아 헤매는 동안 두뇌활동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수백 번 다니는 동안 쥐들은 왼쪽 오른쪽 길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