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기독대에서도 이탈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1938년도 조선총독부 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의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보고문이 있다. 함북 경흥군 경흥면 동아기독교대 통장(統長) 박석홍은 작년(1937) 11월 6일 관할서에 출두해 ‘우리들은 일본제국 신민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감은 없지만, 좌담회 등에 의하여 황군이 우리들 때문에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면서 제국신민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기도를 계속하게 된 것을 깨달아 예하 신자 일동으로부터 국방헌금을 갹출했다. 이 보고서는 일제가 중일전쟁 전후 시기 동아기독대를 관심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일제는 그동안 동아기독대를 조선 기독교단의 통계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나, 중일전쟁 시기부터 포함시켜 본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1938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사무관 모리는 동아기독교회를 2263명의 교세를 가진 조선인 포교의 교파 중 가장 큰 교단으로 보고했다. 총독부가 동아기독대를 관리하는 상황은 박석홍과 경흥교회에 큰 압박이 됐을 것이다. 경흥교회처럼 동아기독대 교회들 가운데 신사참배를 찬성하는 교회들이 늘어갔고, 교단에서 신사참배 찬반논란은 갈수록 격화됐다. 이에 곤란을 느낀 김영관 목사는
1945년 2월 16일 젊은 시인 윤동주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2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본 경찰은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최근 밝혀진 바로는 생체실험 대상이 돼 의문의 주사를 맞고 죽었다고 한다. 당시 규슈국제대학에서 실험하던 생체실험은 “혈장대용 생리식염수”라는 실험이었다. 이 실험은 전쟁에서 부상당한 일본 병사들에게 수혈을 해야 하는데 혈액이 부족하니까 혈액을 대신할 약품을 개발하기 위해서 했던 실험이었는데, 산 사람의 몸에서 피를 뽑아내고 바닷물에서 추출한 생리 식염수를 주입하는 방법이었다. 이 생체실험으로 인해 윤동주가 쇼크사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 후 1948년 해방이 되고 윤동주가 죽은 지 3년이 됐을 때, 그의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판됐다. 그 시들 속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히 표현돼 있다. 그 중 감옥에서 썼던 ‘십자가’라는 시 중에는 “방금 떠오르던 해가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라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방금 떠오르는 해’는 ‘독립기운’을 말한다. 지금 나라의 광복기운이 달아오르고 있다는 것을 시로 상징한 것이다. 시인 윤동주는 감옥에서 무릎으로 조국해방을 위해 기도했던
로마가톨릭교회 성령운동의 발단 일찍이 로마가톨릭교회에서도 19세기 막바지에 접어들면서부터 개신교와 같이 새롭게 성령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이는 독일의 두 신학자 요한 아담 묄러(Johann Adam Möhler)와 마티아스 쉐벤(Matthias Scheeben)에 의해서였다. 묄러는 1825년에 저술한 ‘교회의 연합’에서 “교회는 성령께서 세우시고 생기를 부여하시는 은사집단”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쉐벤은 1870년대와 1880년대에 걸쳐 자신의 후기 저술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형성하는 성령만의 독특한 역사를 강조했다. 이렇게 묄러와 쉐벤의 저서를 통해 나타난 결과는 “은사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었다. 이같은 은사신학에 대한 로마가톨릭교회의 관심은 종교개혁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했던 천주교와 개신교의 틈바구니에서 점점 소멸되어가던 성령의 은사에 대해 새로운 가치평가를 내릴 수 있도록 이끈 획기적인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엘리나 게라의 기도 청원 로마가톨릭교회가 성령운동에 참여하게 된 중요한 요인 가운데 엘리나 게라(Elena Gera) 자매의 일화는 충격을 줬다. 그녀는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가 성령에 대해 무관심해 하는 태도에 깊은
21세기 미 복음주의 진영에서 성경의 권위와 해석학 분야에서 유명한 침례교 신학자인 도커리(David S. Dockery)는 성경의 무오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리고 있다. “모든 사실이 알려지고 원전의 성경이 작성될 당시에 발달 된 문화와 의사소통의 방식에 비춰 적절하게 해석된다면, 성경 저자에 의해 의도된 정확성의 정도에 따라 성경이 확증하는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에 관련된 모든 분야(구원과 직접 관련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에서 성경이 완벽하게 참되다는 것이(그러므로 거짓이 아님이) 밝혀질 것이다”(Christian Scripture, 64). 성경의 무오성은 하나님의 본성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은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분이다(삼하 7:28; 딛 1:2; 히 6:18). 성경의 상세한 부분까지 포함된 모든 진술문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마 5:18; 요 10:45; 딤후 3:16; 벧후 1:21) 성경은 사실과 다른 것을 확증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분이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오류가 섞인 채 전달된 것을 자신의 계시라고 주신다면 그분은 충분히 전지하지 않거나 혹은 완전히 전능한 분이 아닐 것이다. 역사적으로 성경
불멸의 작곡자 베토벤은 그의 천재적인 재능 덕분에 어릴 적부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나이 스물일곱 무렵 귓병으로 청력을 상실하면서 듣지 못하기 시작했다. 소리가 안 들린다는 것은 작곡가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그도 위대한 작곡가이기 이전에 평범한 한 인간이기에 깊은 절망감과 좌절감을 맛봤으며,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작성하고 급기야 죽을 결심까지 했다. 하지만 베토벤의 위대한 작품은 그때부터 개화되기 시작했다. 1804년 교향곡 3번 ‘영웅’, 1806년 피아노소나타 23번 ‘열정’, 1808년 교향곡 5번 ‘운명’, 1809년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 대작으로 평가받는 그의 곡들은 대부분 청력을 거의 손상한 이후 탄생했다. 불후의 명곡으로 꼽히는 교향곡 9번 ‘합창’은 거의 청력이 완전히 소멸된 시기이자 임종 3년 전인 1824년 작곡했다. 불안 가득한 나날 속에서 창작에 대한 그의 간절함은 극에 달했고, 죽음보다 더 깊었던 간절함은 장애조차 초월해 위대한 창조의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간절함 속에서 창조의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이 성경에도 등장한다. 바로 사도 바울이다. 그는 세 가지 가시를 육체에 가졌던 인물이다
이제 제2기 신오순절주의가 주장하는 성령침례에 대한 신학적인 문제로 살펴보고자 한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오순절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복음주의자들은 신학적으로 그 어떤 망설임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신오순절주의의 신학의 핵심적인 부분에 뜻하지 않은 약간의 교리적인 기형이 생성됐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양자 사이에 가로 놓인 담을 헐고 동시에 상호간의 성경적 연관성을 모색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교리상의 발전을 시도하기 원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점차 생겨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요약해본다면, 신오순절주의신학의 근복적인 요소는 신자가 기독교의 봉사를 수행하고 충분한 능력을 가져다주는 카리스마적인 은사의 풍부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회심한 이후에 성령침례를 받을 수 있도록 추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즉 중생한 이후에 주어지는 제2차적인 은혜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2의 은혜를 위한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강조는 역사적으로 감리교의 성결운동으로부터 유래되어 정통적 오순절주의에 의해 계승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신오순절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복음주의자들은 그같은 개념이 예수를 믿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절대 무오한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성경론에서 구별돼야 하는 세 가지 신학용어가 있다. 계시(revelation), 영감(inspiration), 조명(illustration). 계시는 성령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리와 자신의 피조물을 향하신 그분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예수님과 사도들/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졌다(엡 3:5; 벧전 1:11~12). 영감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언어로 오류 없이 기록되도록 성경 저자들과 성경이라는 문서를 산출하시는 과정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로 정경 66권이 완성되면서 계시와 함께 과거에 종결되었다(벧후 1:20~21; 딤후 3:16). 조명은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독자들이 바르게 이해하도록 돕는 성령님의 역사로 현재에도 계속 진행 중이다(고전 2:9~14). 성경이 오류 없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성경 이외의 그 어떤 책도 가질 수 없는 성경의 신적 저자이신 성령님의 초자연적이며 직접적인 감화와 감독이 성경의 인간 저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벧후 1:20~21). 그
이종덕이 중심이 되어 ‘포교계’ 제출을 거부한 것은 복음주의 신앙을 지키려는 것이 주된 이유였으나, 반일 민족주의적 측면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가능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포교계’ 제출 거부는 복음주의 신앙을 지키는 차원에서 이뤄졌지만, 일제에 의해 ‘포교계’ 제출이 강제되던 당시 상황에서는 항일활동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 고난을 감수하면서 일제의 주요 정책을 거부한 것은 일제의 통치에 반기를 드는 행위이고, 그것은 강제 병합된 상황에서 항일활동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대한기독교회 교인들은 ‘포교계’ 제출 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박해당할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것을 단행한 것은 일제의 부당한 통치에 항거하는 활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30년대 신사참배 반대와 박해 일제는 1930년대에 들어서 한국인들에게 신사참배를 보다 더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신사참배는 충성스러운 일본 국민 양성의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일본은 근대 천황제 실시 이후 국가주의 교육을 채택해, 학교 교육을 천황제를 뒷받침하는 주축으로 삼았다. 일본 학교들은 천황은 일본의 최고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후손이며, 신사참배는 국가에 대한 충성의 행
“신앙의 문제에서 최종적인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종교 개혁가들로 하여금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분리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루터는 독일 귀족들에게 고하는 글에서 신학적, 도덕적 오류를 범하는 교황보다는 근본이 비천한 자라도 성경의 지지를 받는 사람을 의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뜻을 전한 사라의 말 대로 해야 했고(창 21:12), 발람은 사람도 아닌 당나귀의 말을 들어야 했다(민 22:32~33). 신앙의 최종 권위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은 ‘성경’과 ‘하나님’을 동의어로 사용해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이혼에 대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고 하신 창세기 2:24의 말씀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신다(마 19:4~5). 바울은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는 출애굽기 33:19의 성경 구절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고 한다(롬 9:15).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말하셨는데 바울은 “성경이 아브라함
저는 경찰선교의 첫걸음, 한국교회 미래를 짊어질 청년선교의 요람, 중앙경찰학교 충성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침례교단의 전신인 동아기독대에서 선교사님의 전도를 받아 신앙생활을 시작한 할아버지의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6대째 주님을 섬기고 있는 신앙의 가문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저희 집안은 목회자 집안입니다. 몇 해 전 소천하신 저의 아버지도 목사(남용건 원로목사)였고, 큰형님(남태복 원로목사), 둘째 형님(남병태 목사), 저의 큰 매형(배윤조 원로목사)이 모두 침례교단 목사이며, 저의 둘째 매형(정종학, 울릉농협조합장)은 장로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해운대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원주온누리교회 담임목사를 거쳐 2001년 1월부터 현재까지 중앙경찰학교 경목실장 겸 충성교회 담임목사로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충성교회는 1988년 4월 22일, 당시 수원중앙교회 김장환 목사님과 충주 지역교회 목사님들이 연합해 세운 교회입니다. 제가 부임할 당시, 예배실이 없어서 강의실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주중에 경찰교육생들이 함께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런 열악한 상태였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