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악처로 유명하다. 소크라테스 일화 가운데 스승의 결혼생활을 잘 아는 제자가 결혼에 관하여 “꼭 결혼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결혼해라 악처를 만나면 철학자가 될 것이고, 좋은 아내를 만나면 행복할 것이다. 둘 중에 하나이기에 결혼해라.” 그러자 힘든 삶을 아는 제자이기에 “선생님은 그런 악처를 왜 버리지 않고 함께 사시는 겁니까?”라는 질문에 소크 라테스의 대답이다. “훌륭한 기수는 원래 사나운 말을 좋아하는 법이다. 내가 그것만 길들이면 세상에 못 할 것이 없다.” 어버이날 즈음에 지난해 천국에 가신 장모님을 보고 싶다는 아내와 함께 부모님을 모신 곳에 가는 길이었다. 아내의 고향인 논산을 지나가다가 옛날 아내를 만나려고 새벽에 논산역을 찾아갔던 기억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그때 그랬는지 몰라.” 농담 삼아 던진 말에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나 혼자 주님께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왜 그랬어?” 투정 섞인 목소리에 “그 결과로 예쁜 두 딸을 선물로 받지 않았느냐?” 며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의 말대로 아내는 혼자 살았어도 자신의 일을 잘하며, 더 많은 일을 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하며 살았을 것이다. 요
‘핫 플레이스(Hot Place)’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핫 플레이스’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나 장소를 말한다. 경리단길, 홍대, 문화비축기지 같이 비교적 알려진 장소를 말하기도 하고, 동네의 맛있는 빵집이나 맛집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핫 플레이스는 그냥 자연스럽게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이들의 유명세 뒤에는 플레이스 브랜딩이라는 기법이 숨어 있다. 플레이스 블랜딩이란 특정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여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장소가 단순히 기능적인 공간으로만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꼭 가고 싶은 대상이 되도록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창출하는 활동이다. 일례로 고속도로 휴게소는 여행객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장소지만, 이 휴게소에 맛집이 라는 의미가 부여되고 브랜드화 됐을 때, 여행이 아니더라도 휴게소 음식을 먹으러 방문 하는 장소로 새롭게 재탄생하게 된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이 된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이 플레이스 브랜딩에 사람들의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혹자는 반드시 사회적 거리를 지켜야 하는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오랜 기
만약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실체로 대치됐다면, 떡과 포도주의 실체는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는 부수적인 성질들 안에 존재하게 되는가? 만약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변형되는 실체의 교환이 이뤄진다면, 역으로 그리스도의 본질적 실체는 외부적으로 보이게 하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껍질(accidents)이 떡과 포도주의 껍질로도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가 되고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가 되는 오류를 인정하게 된다. 칼빈은 화체설의 이런 철학의 오류를 명확하게 지적했다. “그들은 떡과 본질이 그리스도로 변한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보는 그 백색을 그 본질과 결부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찬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여전히 하늘에 계신다고 말한다.” 화체설을 주장하는 가톨릭교회 역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러나 화체설의 성서적 근거는 주의 만찬에 대한 본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함에 있다. 아퀴나스는 주의 만찬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단죄하고 문자적 해석을 주장하길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런 점들에 대해 유의하지 않고 그들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어라 하시니 빛이 생겼고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이 창조될 때 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연발하셨는데 지금도 하나님께서 지구를 보시면서“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실까? 하는 물음표가 붙는 것을 왜일까? 현재 우리가 사는 지구는 화석연료사용으로 인한 공기 오염과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아내리고 지구의 기온은 상승하고 육식을 위해 나무숲을 베고 초지를 조성하면서 사막 화가 가속화되고 인간이 버린 쓰레기로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다. 필자는 설 연휴를 지나고 난 뒤에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쏟아져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울산제일일보에 쓰레기 줄이기 위한 범시민 운동이라도 벌이자는 글을 썼었다. 쓰레기 줄이기 운동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외식이나 매장방문은 줄고 인터넷 주문과 배달 주문이 증가하면서 택배와 배달 식품 포장용 스티로폼 박스나 포장용 비닐 쓰레기가 급증했다고 한다. 재활용 쓰레기로 분리해서 배출하지만 재활용 쓰레기 수출이 막히면서 전국에 120만 톤이상의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보도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역사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부분을 나누기 전에 우리는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 하다고 생각해서 호세아 4:6을 중심으로 우리의 현 영적 상태를 진단해 보고 있다. 1)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2)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3)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다. 4)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판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걷히는 것이다. 5)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6)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들이 넘친다. 지난 원고까지는 3번째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위의 4번째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구절 중 하나가 우리가 지금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호세아 4:6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자살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2018년 우리나라 자살률은 36개 OECD 회원국 중 1위로 하루 평균 37.5명, 연인원 1만 3670명으로 전년보다 9.7% 증가했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성장은 전통적인 가치관의 붕괴, 가족관계의 와해, 고립 감, 열등감, 소외감의 확대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약자인 서민층, 노인층, 여성의 자살률이 상대적으로 더 높게 나타나게 됐다. 성경은 자살에 대해 대체로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의 결과로 야기됐음을 시사한다. 기독교는 박해의 시기에도 고의적 순교보다는 적극적인 도피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나아가 알레스 공의회(452년)에서 자살은 ‘사탄적인 죄’로 규정했고 이후 공의회에서 자살한 사람이 장례를 치러주는 것과 자살한 사람의 헌금은 받지 않고, 교회 묘지 안장도 금해지는 조치들이 순차적으로 추가됐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교회와 개신교는 공식적으로 자살 금지 태도를 보인다.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해있기에 자살은 하나님에 대한 죄이다. 자살이 유행하는 이 시대에 교회는 사회 각층에서 나타나고 있는 자살의 위험한 현실을 직시하며 윤리적 책임성과 문제의식을 느끼
주의 만찬은 역사적 예수의 직접적인 제정명령에 의한 성서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전 11:23~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에 관한 주제 특히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연구는 성서신학자들의 관심사라기보다는 조직신학자들이나 교회사학자들의 주된 토론과 논쟁적 주제로 취급되어왔다. 물론 신약 학자들에 의하여 주의 만찬에 대한 신약성서 본문들의 의미에 대한 주석과 역사적 배경과 발전에 대한 탐구가 진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 학자들은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를 연구의 대상으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주의 만찬은 기독교 예배와 신앙고백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신학적 주제이며 또한 신약성서 본문들의 기반 위에 세워진 교회의 예배 의식과 내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신약 학자들의 해석학적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각기 다른 교회 전통에 대하여 성서해석학적 관점에서 그 신학적 의미를 재조명할 것이다. 또한 필자는 성서 해석학적 관점에서 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각기 다른 교회 전통들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주장한 견해의 장단점을 비평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가톨릭
나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다음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역사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부분을 나누기 전에 우리는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호세아 4:6을 중심으로 우리의 현 영적 상태를 진단해 보고 있다. 1)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2)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3)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돼 있다. 4)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판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걷히는 것이다. 5)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6)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들이 넘친다. 오늘은 이 중 세 번째를 나누고자 한다.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본질, 즉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들의 삶은 반드시 하나님 의 법을 버리게 돼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인 하나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태어나 평생 자녀들 뒷바라지로 살았습니다. 학교 문턱엔 가보지도 못하고 밤낮없이 밭에서, 논에서 해질 때까지 일하면서 80년 넘는 세월을 살며, 저에게는 밭이 학교였고, 호미자루가 연필이었답니다. 그런데 진도군에서 문해학교가 생겨 용기를 내어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막상 공부를 시작해보니 멋진 책상과 의자가 있는 교실이 좋았고, 내 책, 연필, 공책, 필통으로 부자가 된 것 같았습니다. 공부가 재밌기도 했지만 머리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나가는 게 더 많아 속상하기도 하고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께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못하겠다고 손사래를 치며 시작한 것이 벌써 3년이 되어 떳떳한 교육부 인정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날, 졸업생 대표로 낭독한 한 엄니 학생의 글이다. 기억하는 것보다 잊어 버리기가 쉬운 연세에 있는 분들이 학창시절에 못한 공부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늦게라도 배울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장날 장에 갔다 시간을 맞춰 달려오는 모습은 안쓰럽기도 하다. 병원에도,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하는 날에는 빠질 수 없다며 손꼽아 기다리기도 한다. 공부하는 것보다 함께 어울려 이야기하고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받아
습관은 여러 번 반복된 생각이나 행동으로 생긴 버릇이다. 이것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는 말씀처럼 어릴 때부터 가질 수 있으며 좋은 습관은 범사에 유익과 성공이 있게 한다. 반면에 나쁜 습관은 개인의 삶을 피폐케하며 국가적으로는 멸망까지 초래할 수 있다. B.C 586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패망케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지적하시길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22:21)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습관적으로 청종치 않는 나라의 백성 들은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부정부패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비참하게 패망했다. 예수님도 이 세상의 삶에서 습관이 있었다. 안식일이면 회당에 들어가셔서 늘 성경을 읽으셨고(눅4:16) 마을들을 찾아다니시며 전도하셨다(막1:38). 특히 밤이면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셔서 쉬거나 기도하셨다 (눅22:39).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읽기, 기도하기, 복음전하기, 봉사하기 등이 예수님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