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시대에는 백성들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며 불태워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수많은 짐승이 죽었고 이런 제사를 끝도 없이 드려야 했다. 그래서 제사장도 백성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제사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번거로운 일로 여기며 저는 것 병든 것을 제물로 드리며 제사를 멸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경고하셨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도 없고 끝도 없는 제사를 계속 드리며 지쳐 갈 때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예수님이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를 끝내주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예수님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셨다. 이 말씀에서 ‘영원한 속죄’
필자는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영적인 의미 곧 복음으로서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맹인 치유 사역은 단순히 육신의 맹인이 눈을 떠서 시력을 회복하는 신체적 치료라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 보다 더 심오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 맹인 치유 사역에는 영혼의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의미이다. 그래서 맹인 치유 사역들에서 사용된 핵심 동사인 “다시 보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통해 영혼의 눈이 열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고 구원에 참여하는 것으로써 영적인 의미를 알아봤다. 이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치유 선언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라는 구원의 선포가 맹인 치유 사역에 담긴 구원의 의미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의 맹인 치유 사역의 영적인 의미를 보다 더 분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이 사도행전에서 기독교인 박해에 선봉에 섰던 유대인 바리새인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극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건이다. 사울의 체험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 듣는 묵시적 체험으로 묘사됐다. 사울은 빛(빛, 큰 빛,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임하신 주님을 보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사울은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몇몇 청년들과 공원에서 만났다. 햇살도 따스했고, 공기도 상쾌했다. 게다가 모두 코로나 백신을 맞아서 마음도 아주 편했다(미국에서 목회하다 보니 성도 대부분이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 그런데도 우리 모두는 늘 그랬듯이 아주 반뜻하게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여기가 병원도 아니고 마트도 아닌데, 우리 너무 오바하는 것 아닌가?”라고 묻자 모든 청년들이 미리 이야기라도 한 듯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쓰면 허전해요.” 코로나가 사라져도 영원히 마스크는 안 벗을 태세였다. 코로나19가 세상에 등장한 지 1년 반이 지나가고 있다. 이 동안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특히 마스크는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됐다. 우리 모두는 연일 마스크가 코로나를 얼마나 잘 예방하는지에 대한 놀라운 뉴스들을 접하다 보니, ‘마스크 강박증’이라고 할 만큼, 마스크를 안 쓰면 죽을 것 같은 마음까지 드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마스크 강박증’은 코로나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믿음직한 마스크를 아주 오래 전부터 쓰고 살아 왔다. 심리학에 ‘페르소나’라는 용어가 있다. 원래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는 가면을 말하는 것
해체주의자인 데리다(Derrida)는 글을 쓰는 행위를 ‘글쓰기’로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텍스트의 의미는 또 독자의 사용에 따라서 다른 언어나 말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또 다른 단어나 말에 의해서 상치시킴으로써 이전의 의미는 현재의 독자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로 출현한다. 텍스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텍스트의 의미가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원의미를 연기하게 하는 것이다. Derrida에 있어서 텍스트의 의미는 차이와 연기를 결합한 “차연”, 즉 디페랑스의 개념이다. 하지만 해체주의 해석은 새로운 의미를 열어주기는 해도 텍스트가 지시하는 의미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기 때문에 성서해석에 접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신학자 캐빈 밴후저는 해체주의가 성서 텍스트의 의미를 “무위화” 또는 “니힐리즘”으로 이끌어갈 위험성이 있다고 비판하고, 영국의 신학자 엔서티 티슬턴은 성서라는 텍스트를 독자 자신에게만 애착을 느끼게 하는 “나르시시즘”으로 이끌어갈 위험성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에 근거하여 본 연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 그 자체를 환원시키거나 재고려해야 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이때 환
“나 미국을 쓸고 주름잡고 다녔어요.” 오래 전 미국에서 조금 생활하다 온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으면 ‘미국에서 잘 나갔나 보다.’ 생각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타행에서 그것도 머나먼 이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나마 싸들고 간 사람들이야 다르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하층 생활을 하며 생활을 해야 한다. 그 말대로 대부분 이민자들이 건물 청소를 하거나 뜨거운 스팀이 나오는 세탁소에서 빨래를 하며 일을 한다. 말 그대로 미국의 건물을 쓸고, 수 많은 옷을 다림질로 다리며 주름을 잡는 것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오신 어느 목사님께서 “미국 유학시절, 미국 음식은 그렇게 맛이 없고, 과일도 달지도 않고, 고기도 질기기만 한 줄 알았다”며 나중 집회 초청을 받아 갔을 때 “그렇게도 음식도 맛있고, 과일도 달고, 질 좋은 고기가 있는 줄 알았다”고 하신 소리를 들었다. 계층에 따라가는 식료품이 있는 미국에서 가난했던 유학시절에 싼 것만 사서 먹었다는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얼마 전 연휴에 타지에서 직장을 다니던 딸들과 함께 이야기하다 “아빠는 대학을 가지 말고 한 해 쉬라고 했으니까 용돈 안줄거야” 말하
김난도란 교수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이 책엔 사회의 구성원으로 첫 발을 내디딘 새내기들, 곧 어른 아이들에게 용기와 격려, 도전과 비전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이 있었다. 그는 천 번만큼 이나 흔들린 후에 겨우 어른이 될 수있다고 피력했으며 사회에서의 부적응, 실패, 좌절, 시련 등은 인생 여정에서 당연히 있는 것이기에 극복해야 한 다고 썼다. 어린아이와 같은 크리스천 역시 온전해지고 성장해야 한다. 이것에 대해서 에베소서 4장 13절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추구해야할 목표를 제시해줬다. 또한 장성한 크리스천이 되기까지는 시험과 장애가 있어 수 없이 흔들릴 수 있다. 사탄은 크리스천을 그냥 두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미리 말씀하시길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 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고 하셨다. 이것은 베드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함으로 예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성은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성과 관련된 죄악들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예컨대 그동안 전면에 내세우기 부담스러웠던 ‘동성애’ (homosexuality) 문제까지도 거침없이 다루는 상황이 됐다. 이렇게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동성애는 다양화되고 구체화되어 더욱 대담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화현상의한 단면으로 부상한 동성애 문제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동성애 문제를 접하면서 대중들의 관심과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단순히 문화적 현상으로만 간주할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적 관점으로 접근하여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 스스로의 책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동일한 성에게서 육체 적·감정적 사랑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동성애를 어떻게 바라볼까? 성서에서는 여섯 군데에서 동성애 행위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말은 성서가 동성애를 하나의 성적 지향으로서 분명히 진술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약성서의
2. 해석자로서의 독자 이제 한 인간존재로서의 독자는 해석적 정황에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자의 위치에 있다. 독자는 해석자다. 그는 해석자의 위치에서 텍스트와 씨름하고 작업 한다. 글을 읽는 독자이지만, 그 독자는 매우 복잡한 경험 구조를 지닌 인간존재다. 인간존재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통해서 텍스트를 관조하고 이해한다. 그래서 여러 해석자가 밝히고 있듯이, 해석은 독자의 여러 지평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하이데베거와 불트만의 “전이해”의 개념이나 가다머의 “선 입관”과 “전통”의 개념 또는 리퀘르의 “자발성과 비자발성의 의지” 개념은 독자를 순수하게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해의 출발은 이미 이전의 삶의 실존적 경험과 배경 그리고 인식적 구조의 층으로 형성되어 있는 독자가 텍스트를 다르게 이해할 가능성을 개방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독자가 해석자로서 하나의 프레임이나 구조 틀을 가지고 텍스트를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런 근거에서 독자는 일종의 작가와 같다. 주어진 텍스트를 통해서 독자는 작가가 하는 일을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으로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여 저자가 의미하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성 이러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하나씩 살펴보겠다. 첫 번째로는 ‘성(sexuality)’이다. 현대 사회의 성문화는 전통적인 가치와 규범의 성 윤리가 무너지고 퇴폐적인 문화로 퇴보했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성을 부정적 측면에서 부각하여 기독교적인 바른 이해보다는 성을 드러내지 않는 은밀한 사적 영역에 두었다. 하지만 성서에 근거한 기독교적인 성 윤리를 세상에 바르게 제시해야, 성적으로 타락하는 사회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성을 살펴보자. 구약성경적 성은 결혼과 연관되며, 사회 전체의 복지라는 관점에서 엄격한 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성은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에 관한 자유보다는 엄격한 통제와 절제가 중요한 문제로 인식됐다. 신약성경적 성은 총체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친 새로운 윤리적인 측면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성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은 육체적 쾌락이 악하며, 성관계는 종족보존을 위하여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 그 자체는 악하여 성적인 쾌락이 신령한 생활의 적으로 여겨졌다. 이제는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 영혼 우위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부분은 텍스트의 보편성과 텍스트의 개별성을 구분함으로써 기록된 텍스트의 의미를 더욱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서 해석에서 쉽게 간과한 부분은 텍스트의 보편성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텍스트의 개별성을 등한시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타난 문제는 텍스트가 “살았고 운동력”이 상실된 “닫힌 의미”로 여겼다는 것이다. 텍스트의 개별성은 성서를 읽는 독자의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삶의 정황에서 무한하고 풍부한 의미를 재생산해 내는 힘과 같다. 말하자면, 성서의 텍스트는 저자의 본래적 의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텍스트를 통해서 말을 건네는, 즉 해석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발화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나 뜻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왜 독자는 텍스트를 읽는가? 텍스트를 읽는 이유는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를 발견하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 이다. 문제는 독자가 규범이 아니라 텍스트가 규범이다. 독자는 텍스트에서 출발해야 한다. 종교개혁 시대에 개혁자들은 성서의 절대 권위에 굴복하고 어느 것이든 성서 텍스트 위에 군림할 수 없었다. 특히 마틴 루터의 경우에는 “성서가 곧 스스로 의미를 드러낸다”라는 해석적 원칙과 존 칼빈의 경우에는 “성서가 성서를 해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