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앙의 본질(핵심)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그래서 요한1서 1장 3절은 우리의 구원을, 즉 우리의 신앙을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말하고 있고, 요한1서는 여러 곳에서 그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해서 교리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그분의 성품과 의도와 뜻을 친밀하게 아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성서공회 중 하나인 United Bible Society에서 발간한 핸드북 시리즈 요한1서에서 Haas, C., Jonge, M. de와 Swellengrebel, J. L.는 요한1서에 나오는 하나님을 안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요한1서 2장 3절에 대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구절에서 ‘안다’는 동사는 ‘친밀한 교제 안에 있다 혹은 친밀한 교제를 가지다’라는 뜻이다. 즉 어떤 사람의 성품이나 의도를 친밀하게 안다는 뜻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번역은 여기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안다고 하고’라고
1981년의 미국 영화 ‘레이더스(Raiders)’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세계 영화계를 신선한 충격에 빠뜨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중 첫 작품이다. 영화제목 ‘레이더스’는 원래 ‘침략자들’이라는 뜻이지만, 영화 포스터의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아서’(Raiders of the Lost Ark)라는 제목처럼 언약궤를 찾아 나선 모험 판타지다. 해리슨 포드라는 최고의 명배우가 주연을 맡았고, 우리나라 TV에서도 여러 번 방영된 바 있다.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Ark of the Covenant)는 바벨론에 망할 때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고, 고고학 교수인 인디아나 존스 박사가 그 언약궤를 찾아 나선 것인데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언약궤를 추적하던 독일군이 법궤를 열었을 때 그 안에는 모래뿐이고, 거기서 무서운 천사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성한 궤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천사들이 궤를 지키듯이 본문에도 언약궤의 움직임에 따라 ‘하나님의 손’이 나타난다. 그 손이 노획(鹵獲)한 언약궤를 갖다둔 블레셋의 도시마다 재앙이 임한다는 말씀이 사무엘상 5장, 이 장의 중심 단어는 ‘여 호와의 궤’, ‘언약궤’다. 12절밖에 안
지난 시간은 다음 세대가 교회에서 사라진 현실을, 반면에 하나님은 오늘날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눴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 그리고 우리가 그 일에 어떻게 함께 할 것인지를 나누기 전에, 먼저 우리의 현실을 영적인 관점에서 진단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한편으로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 세대의 현 영적 상태와 관련해서 가장 적절한 성경구절이 호세아 4장 6절이라고 생각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다음 세대가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 우리 어른 세대의 영적 타락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어른 세대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 다. 옥한흠 목사님이 소천하던 해 1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에 낸 기고문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말과 정확하게 같은 말을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제목이 “교회 이렇게 무너지다니”였던 것 같다. 그 몇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힘으로 프로그램 가지
기독교 세계관의 이해 오늘날 우리는 역사상 그 어떤 때보다도 다양한 사상들 속에 둘러 싸여 있다. 한 세대가 갖는 의식 구조나 공감대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는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 즉, ‘세계관’이 형성되어 있다. 이는 여러 상황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된다. 그런데 현대 사회 내 이런 다양한 현상들 중의 많은 부분이 세속적인 세계관의 원색적인 표출로 이어지며, 기독교 신앙과 상충한다. 기독교와 대립되는 기존에 있던 세속적인 세계관으로는 크게 다섯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이신론이다. 제1원인인 초월적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나 스스로 운행하도록 버려두셨기에, 하나님은 내재하지도 않으시고 완전한 인격도 아니시며, 인간 사의 주권자나 섭리자도 아님을 말했다. 두 번째는 자연주의이다. 물질을 영원히 존재하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인간은 하나의 복잡한 기계로 인식해 인간의 이해력 역시 기계의 복잡성처럼 생각하였다. 물질의 존재 목적과 역사 과정 등도 자연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세 번째는 허무주의이다. 허무주의는 철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감정으로서 모든 가치를 부정해 인간이 의미 있는 행동을 하
필자는 이사야서 59장 9-12을 구절을 읽을 때 어떤 해석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우선 이 구절에서 필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엄하고 무서운 징벌적 책망을 넘어서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인격을 무시하고 모욕적인 험한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처럼 연상한다. 하지만 필자는나 자신에게 스스로 묻는다. 과연 그러한 의미로 읽고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당시 이 글을 쓴 저자는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을까? 저자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이 구절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하퍼스 바이블 코맨터리’의 내용을 확인했다. 왜냐하면이 구절의 의미는 주해의 도움이 필요 했기 때문이다. 주해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선지자를 통해 보여준 그들의 고난에 대한 이유가 하나님의 부재이기 때문에 이제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 애곡하고 있다. 그들 자신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를 만들었다.” 이 중 주요한 두 단어는 ‘하나님의 부재’(God’s absence)와 ‘애곡’(the lament) 이었다. 필자는 여기서 성서의 구절과 주해의 설명에도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어로 설명한 이 주해는 명사 ‘애
이전에는 주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역동적인 국면을 살펴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의 행동으로 표현됐다. 주 예수께서 행하신 치유 사역이 하나님의 그런 권능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죄들의 사함”의 선언으로 표현됐다. 중풍병자 치유 사역은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마비된 신체를 치유해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걸어가게 하시는 신체적인 치유 사역이었지만, 영적으로는 믿음으로 주 예수 앞에 나온 인간을 향하여 “죄들의 사함”을 주시는 영혼의 치유 사역이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향해 그가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통해 “주 예수는 땅에서 죄들을 사하는 권세를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죄들을 사하시고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주권적인 권능의 행동을 통해 나타났다. 주 예수의 치유 사역 속에 나타
목회현장에서 종종 듣게 되는 유머입니다. 만약 처음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말씀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어떡합니까! 무슨 이런 유머가 있습니까!”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유머에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 숨어 있습니다. 특별히 매일매일 상황이 바뀌는 환경 속에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부대키며 살아야 하는 목회 현장에서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센스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왕궁에서 각국의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이 모이는 만찬이 열렸습니다. 그때 서양의 식사 매너에 익숙하지 않는 동양인 정치인과 외교관들도 많이 초청됐습니다. 지금도 서양식 저녁식사 테이블에는 스푼, 포크, 나이프가 많이 세팅되고, 컵들도 물컵, 음료수컵 등 여러 개 놓여 있어서 제대로 교양 있게 식사하려면 여간 헷갈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100여년 전 다른 나라의 문화를 잘 모를 때는 모든 것이 이상하고 어색했을 것입니다. 그 만찬 자리도 동양에서 온 외교 사절단들에게는 이상한 것 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맛있는 음식이 나왔다면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을 축이고 식사한다고 옆에 있는 핑거볼
성서 텍스트와 성서 해석자인 독자는 이해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작용한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텍스트와 저자의 연관성에 초점이 되어 있어서 독자는 이해의 구성요소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는 독자를 해석의 구성요소로 받아들일 경우에 발생하는 텍스트의 이해와 저자의 의도가 왜곡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전통적인 해석적 논의에서 독자 (reader)가 이해의 주요 요소에서 배제됐다. 그럼에도 이해의 기술로 정의되는 해석학에서 문제가 되는 구성요소는 저자였다. 전통적으로 저자(author)는 텍스트의 생산자이면서 테스트 자체를 통제하는 입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텍스트에 선행하는 입장을 취하고 독자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독자의 위치나 자리를 이해의 구성요소로 수용할 수 없었던 저자는 결과적으로 독자를 무의식적으로 배제함으로써 텍스트와 독자를 독립적으로 구분하게 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성서해석에서 문제가 되는 주된 쟁점이 텍스트와 독자를 독립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이해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독자가 텍스트에 개입하거나 참여하는 경우에 텍
사람이 행복하고, 원활한 삶을 살아가려면 영혼육이 전반적으로 고루고루 건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몸의 한 부분이 위궤양이나 관절염, 당뇨병, 비염, 고혈압. 등으로 말미암아 불편함을 느끼거나 고통스러우면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또한 마음에 원망이나 불평, 근심, 걱정, 미움 등 영적으로 병들어 있다면 생활하는 모든 영역에서도 여간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듯이~”가 아니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늘 영육간에 건강하게 지낼 때 사람이 진정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러주신 말씀대로 잘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이 천국의 삶이 되리라 봅니다. 사람과의 관계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여러 갈등으로 말미암아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선하고, 좋은 사람만 만나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까다롭고, 힘들고, 피곤한 사람들과도 어울려 살아야 할 때도 있고 때론 이웃들을 통해서 부당하게
예수님은 종말론적 현상들 중 하나가 세계적 전염병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은 세상 끝에 있을 종말론적 현상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문자적 의미로 전달한 것보다는 상징적 그림 언어로 바꾸어 묵시문학적 환상의 틀로 바꾸어 전달했다. 요한계시록 6장에 네 번째까지의 인 심판은 서로 다른 색상들의 말과 그 말 위에 탄 자들의 환상을 통해 종말의 현존성과 임박성을 강조한다. 첫 번째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활을 들고 흰 말 탄 자는 정복을 통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자라면(6:1~2), 사람들을 죽이는 붉은 말을 탄 자는 전쟁을 상징한다(6:3~4). 말을 탄 자는 전쟁 후에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극심한 기근을 상징한다(6:5~6). 마지막으로 네 번째 청황색 말은 죽음을 상징한다(6:7~8). 네 말 탄 자들의 환상은 평화, 전쟁, 기근, 죽음이 인간의 이기적 죄악의 결과로 인간 스스로 되받은 인간재앙이 인류 역사에 일어났고 앞으로 더 극단적으로 일어날 것을 통해 이미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이 땅에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