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교부 시대의 자연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친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발견되는 바와 같이 천지창조를 시공간과 질서의 창조로 인식했기에 이전의 교부들에 비해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는 자연’에 집중했다. 물론 그의 자연 이해는 단순하지 않다. ‘삼위일체론’에서 한편으로, 그는 자연과 같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기에 그 사명을 다한 후 버려진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인간이 “선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자연을 사용하거나 개발할 수 있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이 자연을 마구잡이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는 ‘고백록’에서 인간의 원죄와 타락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이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당신을 멀리 떠나 당신을 대항해 스스로 교만해지려고 하는 모든 것은 당신을 잘못 모방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잘못 모방하는 그 행위에서 당신이 바로 모든 자연을 만드신 창조주시라는 것을 시인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든지 당신을 전혀 떠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또한 자연의 질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들의 하나님, 나는 천사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가족, 친구, 학교, 일터, 취미 그룹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간 관계의 그물망을 가지고 있다.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의 근접 공간학 (Proxemics)의 개념에 의하면, 인간관계 물리적 심리적 거리의 네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1) 친밀적 공간(1~3명, Intimate Space), (2) 개인적 공간(8~12명, Personal Space), (3) 사회적 공간(20~50명, Social Space), (4) 공적 공간(50명 이상, Public Space). 과거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을 유지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이미 익숙해 있는 친밀의 공간과 개인의 공간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편할 수 있다. 그러나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친밀의 공간과 개인의 공간 안에만 머물지 말고, 사회적 공간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복음을 통해 하나님 중심의 의미 있고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사역을 위한 핵심 그룹 혹은 창립 팀은 삶의 현장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내 교회로 데려오려는 시도보다는 그들의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고자 하는 사람을 귀하게 사용하신다. 지난 3년간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강타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14세기 중엽 코로나 바이러스와 흡사한 흑사병이 발생해서 유럽을 휩쓸었다. 얼마나 흑사병이 심하였는지 당시 유럽 인구의 1/3이상이 흑사병으로 죽었다. 이 흑사병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염병으로 기록되고 있다. 흑사병은 1347년 처음으로 발생했다. 그러더니 그 흑사병은 약 300여 년 간 주기적으로 발생하였다.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고 있는 그 때에, 독일 남쪽 바바리아 지방에 오버아마가우(Oberamagau)라는 외딴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 마을에서 살던 한 사람이 이웃 마을에 갔다가 흑사병에 감염되어 돌아왔다. 흑사병은 삽시간에 전체 마을로 번졌다.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께 흑사병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무덤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희들을 죽음의 흑사병에서 구원해 주시면 앞으로 10년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하는 연극을 만들어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 기도가 응답됐다. 기
가끔 인생의 마지막을 어떤 말로 끝낼 것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다. 아마 화내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로 인생을 끝마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왕이면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하고 다시 만나자며 삶을 마치고 싶어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평소의 언어 습관이다. 왜냐하면 그 습관이 마지막 말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본문의 앞부분은 다윗 왕의 마지막 말이다. 다윗의 찬양 7절까지 이어진 다윗의 마지막 말은 찬양이었다. 단순한 유언이 아니라 마치 자기 인생에 대한 평가 같다.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1절), 다윗의 자신의 묘비명이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또는 자신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표현을 했다. 먼저 ‘이새의 아들’이라 한 것은 족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아버지가 이새, 지금의 자신은 ‘가문의 영광’이랄까? 별 볼 일 없던 존재, 미천한 존재였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다윗을 끔찍이 미워했던 사울 왕도 아들 요나단에게 “이놈아! 이새의 아들 다윗을 없애라! 그래야 네가 왕이 될 수 있어!” ‘이새의 아들’이라고 다윗을 낮춰 불렀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가 이
[주일예배] 관심을 가지세요! 출애굽기 7:1~7, 20~25 이미지를 클릭하면 설교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주일예배] 살고도, 망하지 않으려면! 사무엘상 13:1, 5~14
[주일예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시리즈10 핑계의 산을 옮기라(눅14: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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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후회하며 뉘우치고 있는 내용이나,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내용들이 있을 수 있다. 만일 내담자가 안심을 하고 용기를 갖게 된다면 이면경 뒤에서 전화 등으로 가해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할 수도 있고 직접적으로 직면할 용기가 생기면 피해자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와 가해자와 대면하게 할 수도 있다. 이때 피해자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 더 이상 가해자가 준 고통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가해자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고 피해자 자신이 언제든지 가해자와 맞설 수 있고 원한다면 가해자를 법적인 심판에 처하도록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도 느끼게 할 수 있다. 아울러 가해자로부터 사과를 받는 것도 좋다. 그리고 가해자도 원래 과거에 누군가에 의해 상처를 입은 피해자였던 것과 그 결과로 가해자가 됐다는 것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치료의 한 과정으로 가해자를 대면하는 것이 직면에 효과적이지만 피해자의 피해를 느끼는 정도에 따라 직접적인 대면을 피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상담자는 항상 피해자를 중심으로 모든 치료계획을 세우고 상담을 진행해야 한다. 피해자들은 치유의 정도가 다른 엔카운터 그룹(Encounter
운동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인 사람은 영혼과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도 움직여야 하며 육신도 움직이도록 창조되어 있습니다. 운동과 노동은 사람에게 주어진 복이며 자신에 몸의 상태에 맞는 노동과 운동은 건강을 유지시켜 주는 활력소가 됩니다. 운동은 당뇨병, 심혈관계 질환 같은 만성병의 위험을 줄여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암 발생의 위험과 아울러 이로 인한 사망의 위험까지 줄여주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급속히 늘고 있는 암 중에 상당수가 신체활동의 저하와 관련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신체활동 증가와 운동 실천은 효과적으로 암 발생의 위험을 줄이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신체활동과 관련된 암으로 대장암, 유방암, 폐암, 갑상선암, 자궁내막암 등이 있으며 50여 편의 외국 연구들을 종합해 신체활동은 남자 30%, 여자 40% 정도의 대장암 발생률을 감소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비활동적인 사람에 비해 여가 신체활동이 활발한 남녀의 발생률이 각각 22%, 29% 정도 감소했다는 학계의 보고도 있으며, 유방암, 폐암의 경우 0.8배 정도로 신체활동이 암 발생의 위험을 낮춰줄 수 있고, 자궁내막
셋째, 지역 커뮤니티의 필요를 채워주는 플랫폼을 구축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 대 사명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것이다(마 28:19~20). 이 대사명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교회 개척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어야 한다. 제자 삼기 위해서 먼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침례을 줘야 하고,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들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 사명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반론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전에 말씀하셨던 대 계명을 생각해 보자. 대계명은 한 가지이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가지 양상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랑이다(마22:37~40).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삶의 양식이며, 신앙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지상 대사명인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일에 있어서도 이 대계명이 전제돼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자세를 가지면서, 제자 훈련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Sent One) 곧 사도(Apostle) 로서 보냄 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없더라도 일반 계시를 통해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자들(포괄주의자들)은 요한복음 14:6과 사도행전 4:12과 같은 ‘오직 예수로만’의 구원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해석을 거부한다. 이들은 두 본문이 직접적으로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의 구원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본문의 청중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전자의 구절은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후자의 구절은 베드로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한 것이다. 따라서 오직 예수님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음으로 그 분만이 구원의 길임을 인정할 수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신학적 도전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인지 들어본 적이 없거나 혹은 들었다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예수’의 신앙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포괄주의자들과 달리 우리는 요한복음 14:6과 사도행전 4:12을 기록된 각 책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오랫동안 따라다녀 자신의 정체성을 충분히 알만한 제자들이 아니라 어둠에 있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 세상 모든 죄인에게 비추이는 빛으로 오셨다(요 1
데이비드 듀 플레시스의 성령체험 데이비드 듀 플레시스는 1960년 스코틀랜드의 섬 앤드류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서 연설할 때 오순절신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즉 누군가로부터 오순절 부흥운동의 성공의 근거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 종종 던져질 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 1:8 말씀과 같이, 우리는 사도계승보다는 사도적인 능력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져왔으며, 또한 우리는 감히 이 땅에 축복의 성령이 처음 임한지 20년이 지났어도 그 가치가 퇴색되지 않고 지속됐던 것처럼, 자기의 역사적 성공이 자기의 신학적 독특성, 즉 능력 안에 계신 성령의 체험이라고 믿는다고 말하면서 오순절주의는 이러한 영적인 관점에서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의 사명을 이해한다고 주장했다. 데이비드 듀 플레시스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오순절주의가 성장하게 됐음을 설명했다. 즉 오순절주의의 이러한 성장은 선교사의 능력이나 교육 혹은 새로운 방법의 사용이 아니라, 신약성서에 나타난 사도들의 방법들을 아주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제시했다. 그는 우리가 성령침례의 축복이, 성령께서 처음 임한지 20
살려면, 질문에 답하라(사무엘상 12장 10-13, 20-22절) 안희묵 대표목사
산아 네가 무엇이냐 시리즈 9_관계의 산을 옮기라 (엡 2:12-18)최병락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