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 네 사람은 밤새도록 수고했으나 빈 배를 몰고 들어와 그물을 씻고 있을 때 갈릴리 산골 나사렛 동리에서 내려온 목수 예수의 말씀에 순종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두 배에 가득 채워 돌아온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한 후 그때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로 예수 따라 제자가 되어 3년 넘게 제자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그날부터 사명자의 훈련은 시작되었고 주님은 끝까지 참으시고 다듬어 복음의 사명을 감당케 하셨다. 이름부터 시몬에서 베드로라 고친 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의 그 위대한 신앙고백 후였으나 곧 이어 “사단아 물러가라”는 주님의 꾸중을 들었다. 예수 선생을 바라보고 물 위로 걸어간 그가 물에 빠졌듯이 주님이 잡히시던 밤, 스승을 부인한 겁쟁이로 심히 통곡하며 회개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히사 십자가에 달리실 때 사도 요한 외에는 주님의 예언대로 살려고 다 도망쳤다. 예수의 부활을 본 후에도 다른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호수에 물고기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2012년 3월입니다. 제주도에서 사역하시는 어느 한 목사님으로부터 부흥회를 해달라는 전화를 받게 됐습니다. 그래서 언제쯤 해드리길 원하는지 물어보니 6월 달로 원해서 그렇게 약속을 정했습니다. 그 후 6월이 되어 청주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해서 약속된 교회로 가보니 그 교회는 4월부터 7월까지 육지에서 목회하시는 네 분의 목사님들을 택하여 매월 부흥회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은 4개월 동안 부흥회를 통해 성도들에게 많은 은혜를 받게 하려고 육지에 계신 수많은 목사님들 중에서 네 분의 목사님들을 택한 것입니다. 목적은 부흥회며, 그러기 위해선 목사님들을 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어느 한쪽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고 택하셨다고 합니다. 택하신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하시려는 과정과 절차일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관에 있어서도 “믿음과 행함”
우리는 매주일 예수님의 명칭을 여러 가지로 부르며 듣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 헬라인들은 ‘그리스도’ 영어권에서는 ‘세이비어(Savior)’ 그리고 우리는 ‘구세주’라 부릅니다. 우리가 ‘구세주’라고 부르는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어떻게 약속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기 위해 우리는 누가의 기록에서 칭찬한 젊은 설교자 아볼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능통한 자라”(행 18:24)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기니라”(28)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받아들이게 하는 능력의 근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성령님’ 그리고 그분께서 감동하여 기록된 말씀 ‘성경’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거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리 예언되어진 약속의 ‘메시야’를 증거 하는 사명을 불안해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말씀의 일부분만 알고 전하다보니 예수께서
분명히 예배 중에 설교본문을 읽었지만 설교자가 설교 중 본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예배 중에 함께 읽은 설교본문 말씀과 전혀 다른 이야기로 설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종종 목격된다. 청중들과의 소통이라는 명분으로 성경 텍스트를 멀리하는 설교의 형태가 한국 강단 가운데 있다. 본문에 기반을 두지 않더라도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기만 하면 된다는 실용주의적 접근이 한국교회에 퍼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침례교 강단은 어떠한가? 침례교회는 성경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라야 할 가장 높은 권위로 인정한다. 한국 최초의 침례교 선교사 펜윅은 성경을 강조하는 선교 원칙이 있었고 설교에서도 이러한 원칙을 적용했다. 침례교회는 성경에 근거한 신앙을 지키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역침례교회(local baptist church)의 강단에서 얼마나 성경본문에 충실한 말씀 선포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만약 현장의 침례교회 설교가 성경본문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략 세 가지 주된 요인을 들 수 있다. 첫째, 성경이 오늘날 신자들도 여전히 따라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설교 중 설교자의 신앙과 신학이 표현된다.
군인들이 경례를 할 때는 반드시 구호를 외치게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군대에서 가장 많은 구호가 “충성”입니다. “충성”하고 큰 소리로 외치면 왠지 어디선가 새로운 힘이 불끈불끈 솟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함 없이 “충성”을 말하고 싶습니다.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또 되어서도 안됩니다(고전4:1~2). 만일 주의 일을 하고 싶다면 먼저 충성하는 태도를 갖춰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강해야 합니다. 성격이 강하라는 말이 아니라 강건하고 굳센 믿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수1:6~9). 그런데 우리 주변에 믿음이 유약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음을 봅니다. 어떤 이유로든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사탄이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또 한 가지 덕목은 “고난”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고 고난의 가시밭길 같은 게 훨씬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난이 피해가지는 않으므로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딤후2:3). 사탄은 갈수록 여러 가지 간계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굽니다. 갖
전화의 역사(歷史) 인류문명에 최초로 획기적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 불과 전기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 다음 단계의 혁신적 발명품은 아마 전화일 것이다. 멀리 있는 사람과 유 무선으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없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놀라움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전화가 처음 보급된 것은 1896년 10월 덕수궁에 100회선의 교환대를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정확하게 지금부터 120년 전이다. 그 때 전화기가 설치된 곳은 궁중에 석대, 정부 각 부처에 일곱 대씩, 평양과 인천에 두 대씩 등등이었다고 한다. 전화는 1920년대부터 사용량이 급격하게 증가해서 1921년의 통화량이 7,000건이었는데 1926년에는 1억 2,300건이 나 되었다. <이고위감>(以古爲鑑) 참조. 전화에 얽힌 일화가 많지만 그중 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 순종과 관련된 것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고종황제는 1919년에 승하하여 명성황후와 함께 홍릉에 안장됐다. 순종은 선친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매일 아침 능지기에게 전화를 걸면 능지기는 전화를 가지고 능으로 나가서 수화기를 고종의 무덤 앞에 대었다. 수화기에서는 순종의 애끓는 곡성이
웰만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벗은 나 자신이며,세상에서 가장 나쁜 벗도 나 자신이다.나를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힘도 나 자신 속에 있으며 나를 해치는 무서운 칼날도 나 자신 속에 있다. 이 두 개의 나 자신 중의 어느 나를 좇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최인호의 “인생” 중에서. 오늘은 입다에 대해 세 번째로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암몬과 싸우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입다는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사사기 11:30~31) 입다가 싸울 때에 하나님께서 암몬 자손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셔서 전쟁에 이기고 집으로 금의환향을 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 무남독녀 외동딸이 작은 북을 손에 들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을 했습니다(34절). 입다가 그것을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장탄식을 하며 괴로워하며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35절). 서원을 조심성이 없게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입다는 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한 야곱은 외사촌 동생들인 레아와 라헬을 만났는데 언니보다 다 곱고 아리따웠던 동생 라헬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기쁨으로 섬겼는데 그녀를 위해 자그만치 7년이라는 세월을 헌신합니다. 그러나 사랑했기에 며칠처럼 여겼습니다. 창세기 29:16~20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즐거우면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는 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피곤한지도 모르고 즐겁게 시간을 보냅니다. 언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릅니다. 그러나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마지 못해서 하면 시간이 더디게 가고 지루하고 힘들기가 이를데 없습니다. 실제의 시간은 동일한데 마음가짐에 따라 이렇게 다릅니다. 2016년 한 해가 정말 쏜살같이 다 지나갔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제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서 1년이 너무도 짧게 여겨집니다. 나이 탓이라기보다는 그만큼 부지런히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저같이 부족한 죄인을 사용해주신 주님의 은혜가 그저 고맙고 감사하기 만 할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야곱이 칠 년을 몇 일 같이 여겼다는 말이 무척 실감이 납니다. 그리고 즐겁게 살아온 것이 감사하기
신학대학 예과에 입학해서 교양과목 위주의 수업을 받을 때 제일 재미있었던 과목은 김영철 교수의 「경재원론」(최호진 저)이었고 제일 어려웠던 강의는 서동순 교수의 「철학개론」(김진섭 저)이었다. 김영철 교수는 한 시간 내 꼼짝하지 않고 한 자리에 서서 높낮이가 없는 음성으로 강의해서 학생들이 지루해 했지만 나는 예습도 하면서 흥미롭게 수강했다. 거기에 비해 서 교수는 출퇴근길에 일어난 이야기도 하고 가끔은 유머도 하셨지만 교재로 채택한 「철학개론」이 너무 어려워서 강의에 흥미를 잃었다. 4월의 마지막 주간 철학개론 시간에, 선생님은 다음 주에는 소풍을 가게 되어서 강의를 못해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속으로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하고 쾌재를 불렀다. 선생님은 흑판에 ‘Apple Philosophy’라고 쓰시고는 수강생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함용환(?)에게 한 번 읽어보라고 하셨다. 함용환은, 자기 말로, 미군부대에서 ‘하우스보이’를 한 일도 있었고 또 영어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애풀 필라소피’라고 똑똑하게 읽었다. 선생님은 앞자리에 앉아 있는 내게, “도군, ‘애풀 필라소피’가 무슨 뜻이지?” 하고 물으셨다. 나는, “애풀은 사과, 필로소
예전에 TV 프로그램 중 “진실게임”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말해주고 진실을 밝히는 과정을 풀며 인간 심리를 다루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 우리는 전체가 진실게임에 빠져 있는 느낌입니다. 지루하다 못해 지긋지긋하게 느끼지는 공방전이 앞으로도 한참은 더 할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마냥 감출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사실이 표면이라면 진실은 이면의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실도 중요하지만 내포하고 있는 진실을 볼 줄 알아야겠습니다. 사실을 대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사실을 두고 소리 높여 공방을 벌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세월호도 그렇고 최순실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진실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진실을 말함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정직입니다. 정직해야 진실을 보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직과 솔직은 비슷하면서도 좀 다른 뜻입니다. 어떤 일을 솔직하게 말한다고 정직한 것은 아닙니다. 한 나라의 수준은 그 국민의 정직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나라의 도덕성의
나도 이제 이런 주제를 가지고도 글을 쓰다니 필시 젊은 나이는 아닌가 보다. 하기야 어느 새 나도 반백년 인생을 지나고 있으니 그도 그럴 게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있으랴.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을 수가 있으랴. 지난 주 유독 이 생각을 더 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런 얘기까지 꼭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며칠 전인가 잠들기 전 몸을 씻고 발을 닦으려는데, 발 닦는 수건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어디선가 받은 기념 수건인데, 그 수건에 적힌 날짜가 눈에 들어온 게다. ‘1996년 12월 11일 경북함 단합대회 기념’. 순간 그것을 보고 발을 닦으며 그리 생각했다. ‘아~ 벌써 10년 전이네….’ 아마도 그때가 생생히 기억되어 그랬나 보다. ‘경북함’은 내가 해군의 12년 군목 시절 동안 잊지 못할 몇 군함들 중 하나이다. 그 어떤 배보다 자주 그 함정을 방문했었고, 자주 타기도 했으며, 심지어 해외 순항훈련까지도 그 군함을 타고서 3개월 간 세계의 바다를 누볐었다. 그러니 1996년 12월의 그날은 생생히 기억한다. 나 또한 그 단합대회에 참석하여 축하해주면서 수건 한 장도 선물로 받아왔던 일. 그러니 그 수건을 보자마자 ‘벌써 1
예수님과 유대인 랍비 니고데모와 대화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가지신 가장 중요한 관심은 그 사람이 “새롭게 태어났는가? 거듭났는가?”하는 것입니다. 21세기 한국교회도 가장 긴급하게 앉아 대화해야할 부분이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함께 앉아 대화한 그 자리에 함께 앉는 것입니다. 현대교회가 겪는 영적 공황상태의 원인은 “새로운 탄생, 거듭남”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전도자 빌리그래함 목사는 “우리 시대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상을 변화시킬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 원인은 우리 사회 곳곳에 영적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시대는 변화의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심 주제는 “새 생명의 탄생, 거듭남”입니다. 새 생명으로 거듭난 소수의 사람들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이교도 국가인 로마제국을 복음으로 정복했습니다. 돌맨 박사가 한 말은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근본적인 진리가 빠져버린 설교는 그리스도인을 위대한 삶으로 성장시키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이 경고의 말은 본질적 진리가 빠져버린 메시지로는 그 누구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일
지금 한국교회는 위기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의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을 진단하신다면 어떠한 평가를 하시겠는가? 한국교회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반추하여야 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무엇에 이끌려야 하는가? 교회는 예수를 머리로 하는 몸이다(고전 12:27; 엡 1:22~23; 4:14~16; 골 2:19). 따라서 교회는 주님의 목적과 방법에 따라 이 땅에서 주님의 사명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마 28:19~20; 엡 4:12~13; 골 1:28). 한국 침례교회 또한 머리 되시는 주님의 뜻에 따라 이끌리고 움직이는 영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서 순종의 삶을 사셨다(마 26:39; 요 17:4; 롬 5:18~19).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사명을 어떻게 이루셨는가? 예수께서 이 땅의 공생애 기간 동안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한 사역 방법들과 전했던 메시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근대설교학(modern homiletics)의 기틀을 만드는 데 공헌했던 침례교 설교학자 존 브로더스(John Broadus)는 예수 그리스
얼마전 대통령의 탄핵이 국회에서 압도적인 표로 가결됐다는 것입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 가슴이 아프고 슬펐습니다. 우린 벌써 최근에 두 분의 대통령을 탄핵시킨 기록을 남기게 됐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사상 초유의 사건일 것입니다. 2004년에 이어 12년 만에 우리는 또 한 번 대통령을 끌어내린 셈입니다. 잘잘못을 떠나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명예로운 말은 이제 우리의 것이 아닌 듯 싶습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이 지경이 되도록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 무엇을 했습니까? 국민의 혈세로 살아가면서 고작 그들이 한 것은 동네 아이들의 패싸움 같은 것만 일삼고서 이제 와서 동네북처럼 한 두 사람만 잡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쳐갑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책임을 질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한 말과 행동에 자신의 인격과 양심을 걸고 책임을 지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볼 때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미숙한 성인 아이(Adult Child)같은 지도자들이 너무도 많음을 봅니다. 정치권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미숙한 언행을 하는 사람들이 판을 치는 모습을 보
용은 봉황(鳳凰)과 더불어 상상 속의 동물이지만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는 신비한 영력을 가진 존재로 기림 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용과 관련된 어휘는 하나같이 길(吉)한 의미를 가졌다. 등용문(登龍門), 용왕(龍王), 용꿈, 용안(龍顔), 용상(龍床), 용포(龍袍)등이 있다. 용이, 이와 같이, 동양에서 추앙에 가까운 존중을 받는 것과는 달리, 서양에서는 고대로부터 악마의 상징으로 묘사됐다. 독일의 기사도 문학을 대표하는 대 서사시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저주에 걸린 반지를 가지고 악행을 일삼는 용을 죽이고 반지를 되찾은 영웅 지그프리트의 무용담과 그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며, 영국의 고전 서사시 베어울프( Beowulf)는 인간 희생제물을 요구하는 화룡(火龍)을 잡으려고 용의 동굴로 들어간 베어울프의 영웅적인 모험을 그린 이야기다. 필자가 용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최근 대통령을 탄핵이라는 막다른 골목까지 몰고 간 “최순실 게이트”와 용이 상관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공개된 미르·K스포츠 로고에는 하늘로 비상하듯 몸을 비튼 용의 형상이 있었다. ‘미르’가 우리 옛말로 용을 뜻하기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