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반신반의하던 기드온이 결정적으로 변화된 계기가 바로 사사기 7장1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적군인 미디안의 군사에게 꾸게 했던 보리떡 한 덩이 얘기 때문에 되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확신을 갖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300명의 용사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외칩니다.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15절) 기드온은 15절을 전후로 해서 전혀 딴판이 됐습니다. 그의 신앙과 삶에 분수령이자 놀라운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 사람이 급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전적으로 변화된 확신의 경험이 있습니까?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들을 세 대로 나눕니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으로 배치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각자에게 무기를 들려주는데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무기였습니다. 바로 “빈 항아리”와 “횃불”, “나팔”입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아마도 이렇게 특별한 무기는 여기 밖에 없을 것입니다. 칼이나 창과 활이 아니라 횃불과 나팔이었습니다. 이상한 무기에다 이상한 전
어떤 선교 단체가 복음전파를 소홀히 여기며, 어떤 선교사가 복음을 위해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랴만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도들의 경건하고 헌신적인 삶과 희생적 선교는 비교할 데가 없다. 이 공동체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도와 선교에 대한 열정이었던 것 같다. 1. 기도 1722년 90명의 신도들이 모라비아를 떠나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진젠도르프의 영지(領地)인 헤른후트로 이주해서 정착했고, 4년 후인 1726년에는 그 수가 300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1727년부터 24명으로 구성된 기도 모임(들)을 만들어서 남여 두 사람이 짝을 지어 자정부터 한 팀이 한 시간씩 24 시간 연도(連禱)를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이 기도가 그로부터 백년 이상 지속됐으며, 기도를 시작한 때로부터 2백년 동안 모든 대륙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사실이다. 2. 선교 모라비안 교회는 1732년에 서인도제도에 선교사를 파송한 것을 시작으로 1735년에는 그린란드와 수리남, 1737년에는 아프리카, 1740년에는 아메리카 인디언과 실론, 1742년에는 중국, 1747년에는 페르시아, 1754년에는 자메이카, 1756년에는 안티구아(Antigua)에까지 선교사
재침례교도들은 제자도를 신앙 정신의 가장 근간에 두었는데, 그들은 제자도를 첫째 그리고 근본이 되는 기독교의 핵심으로 삼았고, 제자도를 신자 개인과 공동체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 본을 보이신 것을 따라 삶을 바꿔야만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재침례교도들은 교회 타락의 원인이 제자도의 상실에 있으며 당시 교회들이 초대교회 사도들이 보여주었던 제자도의 첫 사랑의 열정을 잃어버렸다고 보면서 제자도 회복을 추구하였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제자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동료들과 그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 가족, 친구, 직장 등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빛을 발하는 것이다. 모든 선한 행위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나아가고, 선교 운동에 참여하고, 사람들의 필요들을 충족시키며 상처를 싸매주는 사랑을 실천한다. 제자도란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목적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길을 실천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공동체적 제자도를 실천한다. 멀린스가 말하는 “영혼의 역량” 개념은 인간 개인에게 하나님과 인격적인
몇 해 전에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개최된 유럽지역 선교사대회에 참석하는 동안 모라비안 교도들의 유적지 헤른후트(Herrnhut)를 방문해서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는 모라비안 교회와 수 백기에 이르는 신도들의 묘역을 탐방할 기회를 가졌다. 모라비안 운동의 지도자 진젠도르프(Nikolaus L. von Zinzendorf, 1700-60)는 작센 지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신앙심이 돈독했던 외조모 헨리에타(Henriette Gersdorf)에게 경건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열 살 때 할레대학(Univ. of Halle)에 입학해서, 후에 스페너(Philipp J. Spener, 1635-1705)의 뒤를 이어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선구자가 된 프랑케(August H. Franke, 1663-1727)와 우정을 쌓았고, 재학 중에는 다섯 명의 친구들이 “겨자씨 모임”(The Order of the Grain of Mustard)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신앙상담을 하며 선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젊은 귀족 진젠도르프는 1719년, 유럽 여행 중에 뒤셀도르프에서 “내 너를 위여 몸 주건만 너 나를 위해 무엇 주느냐”라는 각명(刻銘)이 붙은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8: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며, 저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선 먼저 애굽에서 구원 받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희 장인어른과 장모님께서 살아생전에 감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사시는 집에 감나무 한 그루를 심으셨습니다. 그 후 매년 가을이 되면 두 분께선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것을 따서 드시기도 하면서 곶감도 만들어 자녀들이 사는 집들을 방문하셔서 곶감을 나눠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턴가 이 감나무가 병이 들기 시작하면서 감들이 익기 전에 하나 둘씩 마당에 떨어지면서 여간 마당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열심히 약도 치고, 거름도 주면서 최대한 살려 보려고 노력 했지만 매년 이러한 현상이 되풀이 되는 것을 참다못해 끝내는 감나무를 톱으로 잘라버리셨습니다. 감을 먹기 위해서는 일단은 감나무를 심어야 되고, 심은 감나무는 계속적으로 감을 실하게 잘 맺혀줘야 되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선 일단 예수
저의 서재에는 특별히 나무상자에 보관해서 위급한 순간, 이 한권의 책만은 꼭 가지고 나가야 할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 동아기독교를 탄압하며 성경을 몰수하고 불태울 때도 빼앗기지 않고 자손에게 물려주신 “원산번역”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1980년 선친이신 고 이진팔 목사님의 지인께서 한주간만 빌려가서 보고 돌려드리겠다고 하신 그 약속을 믿고 빌려드렸는데 십수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천신만고 끝에 돌려받았지만 이미 책은 많이 상해있었고 성경은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원산번역”으로 회람되다가 주인에게 돌아왔습니다. 이 책이 돌아오던 날 얼마나 기뻤는지 지금도 가슴이 설렙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 경험, 실천을 통해 진리의 말씀인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성경은 물질주의와 세속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 적용되며 능력으로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책을 성경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어떤 오류도 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온 그분들의 신앙과 경험, 그리고 분명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고부동한
침례교회에서의 징계는 실족한 교인에게 온전한 교제로의 회복으로 이끌기 위함과 교회와 주변 문화와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하기 위함이며, 교회가 세상에서 수행하는 증거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게메이지는 권징을 신자들을 양육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보면서, 죄를 범한 자를 바로잡고 참된 신앙으로 이끌기 위하여 그리고 교회의 순결성과 성스러움을 지키기 위하여 권징을 행한다고 했다. 권징은 일시적으로 혹은 영구적으로 교회회원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징계를 행하기 전 죄를 범한 자를 회개로 인도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4) 전교인사역자 정신의 실천 전신자제사장직에 관하여 성경은 여러 시제를 사용하여 제시하고 있다. 출애굽기 19장에서는 미래시제로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했고(5~6절), 요한계시록에서는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라고 했으며(1:6), 베드로전서에서는 ‘제사장이다’라고 한다(2:9). 그런데 신자의 제사장직에 대하여 성경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를 사용한다. 즉 “제사장들”인 것이다. 이것은 신자의 제사장직분이 신자 개개인의 개별적인 과업으로 여기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지혜와 계시의 성령 사도 바울은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이 하나님의 영 곧 성령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을 여러 가지로 제시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만세전에 감춰졌던 비밀인데,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자녀들과 일꾼들에게 오직 성령으로 계시하셨다는 것을 강조해 제시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에 담긴 죄사함과 의로움과 구속과 속량 등 복음에 담긴 모든 것들을 오직 성령으로 그의 종들에게 계시로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에 의한 계시의 역사가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의 중심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다(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그들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에 관해서는 지난 호에서 다뤘다. 사도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를 계속해서 제시한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엡 1:18). “마음의 눈”이란 지난 호에서 간단히 설명한 대로 ‘영혼’(영과 혼으로 구성됨)이라 부르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가리킨다. 우리가
인간은 희망하는 존재이다(Homo Esperans). 지금 우리나라는 짙은 안개에 둘러싸인 형편과도 같습니다. 가시거리가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을 만큼 대형충돌사고가 예견되는 모습입니다. 지난해 2월 11일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대형 추돌사고가 인천공항 가는 길인 영종대교에서 있었습니다. 자그만치 106중 추돌사고 입니다. 세 명이 죽고 129명이 부상을 당한 끔찍한 사고였는데 주원인이 안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지금 상황이 그 때와도 같습니다. 버스와 자동차가 마구 뒤엉켜서 아수라장이 된 것처럼 수습이 난감해보이는 사방이 꽉 막힌 것 같은 심히 어려운 형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날마다 지켜보는 국민들은 불안하고 착잡하기만 합니다. 거기에다가 이러한 현실을 대처하는 당자자들과 관계자들의 안일하고 무능한 태도를 보면서 국민들은 한심해 하고 더욱 분노하고 있습니다. 작금의 우리나라를 뒤덮고 있는 감정은 하나같이 억울함과 배신감과 허탈감이 주는 분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철부지 어린아이들까지도 손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동서남북 사방이 높은 장벽에 가로막힌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답답하고 막막하
“최상급의 용기는 분별력이다”-세익스피어 사사기에 보면 세 번째 사사로 등장하는 인물이 “삼갈”입니다. 열 두명의 사사 가운데 그에 대한 기록은 단 한 줄로 끝나는 것을 볼 때 그는 미미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소개할 게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삿3:31). 그런데 왜 성경은 그에 대한 기록을 한 줄에 불과하지만 남겨 놓았습니까? 그것은 그를 통해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분명한 교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중요한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딤후3:16~17). 삼갈은 소 모는 자였습니다. 일개 평범한 농부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쓰셨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붙잡아 쓰시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원리는 동일합니다. 별 볼일 없는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큰 일을 할 수가 있음을 삼갈을 통해 보여주십니다(고전1:27). 우리 눈에 보기에는 연약해 보이는 지체도 더 요긴하고 아름답게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고전12:21~23). 그러므로 누구도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피어슨 아더 피어슨(Arthur T. Pierson, 1837~1911)이라는 한 위대한 인물과 또 그가 잠시 한국을 방문한 것을 인연으로 이 땅에 남긴 신앙의 유산의 일면을 상고하고자 한다. 생애와 교우관계 피어슨은 뉴욕 태생으로서 당대의 부흥사 무디, 최고의 설교자 스펄전, 백화점 왕 와나메이커(John Wanamaker) 등과 같은 해에 태어났으며; 버마의 침례교 선교사 아드니럼 저드슨(Adoniram Judson), 최초의 중국선교사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er) 및 고아의 아버지요 기도의 사람이었던 조지 뮬러(George Mueller) 같은 지도자들과 친분을 가졌다. 피어슨은 스펄전 사후, 런던 메트로폴리탄 터버너클 교회(뉴파크 침례교회의 신축 성전)로부터 설교 목사로 초빙 받고 런던에 체류하는 동안(1891~93) 스펄전의 아들 제임스로부터 침례를 권유 받고 귀국 후 1896년에 침례를 받고, 그 일로 북장로교 필라델피아 노회로부터 잠시 면직처분을 받기도 했다. 학자로서, 설교자로서, 그리고 편집인으로서의 그의 생애를 볼 때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신념의 사람이었다. (조상열, 「피어슨기념성경학원」). 활약과 업적
모세가 40년간 광야에서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애굽으로 돌아왔을 때에 히브리 노예들은 엄청난 기대와 흥분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해방과 자유 그리고 약속의 새 땅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벗어난 그 순간 그들 앞에 전개된 환경은 그들이 가졌던 비전을 충족시켜주는 땅이 아니라 백성들이 경험하게 된 곳은 텅 빈 광야와 끝없이 펼쳐진 사막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약속과 비전에 엄청난 괴리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광야에 나온 백성들은 자기들이 떠나온 애굽을 회상해 볼 때, 비록 그들이 그곳에서 노예로 살았지만 애굽 땅은 최소한 먹고 마실 것, 그리고 입고 살아갈 집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는 그 순간부터 백성들에게 다시는 애굽 땅을 기억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애굽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제나 달콤한 기억을 회상하도록 유혹했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전을 주었습니다. 이 땅만 벗어나면 새로운 곳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비전입니다. 그리고 탁월한 지도자 모세가
기독교한국침례교 총회도 총회 규약 전문에서 “침례교회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정신에 따라 생활 속에서 복음을 실천하고 또 지상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성령님의 교통하심 아래 서로 협력하면서 천국 확장 사업을 공통 임무로 여긴다고 밝히고 있다. 19세기 미국의 감리교회는 순회 목회자들이 말에서 내려 정착된 목회자들이 되었을 때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20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남침례교에는 비록 변변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사례금도 제대로 받지 않는 설교자들이 오염되지 않은 ‘옛날의 복음’(old-time gospel)을 설교함으로 부흥의 전기를 마련했다. 남침례교회들은 분파형에서 교회형으로 변형되지 않았다. 즉 지역에 안주하고 정적인 형태의 사역이 아니라 전통적인 견해들을 고수하면서도 역동성을 잃지 않았으며, 교회의 권한이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교회회중에게 있다는 믿음 그리고 열정적인 사역자들의 목회 등이 그 성장 원인으로 분석된다. 미국 남침례교는 교회들의 연합된 복음전도와 선교 사업의 활발한 전개를 위해서 협동선교방식을 채택하였다. 협동프로그램(cooperative program)은 주님께서 분부하신 지상사명의 성취를
“최상급의 용기는 분별력이다”-세익스피어 사사기에 보면 세 번째 사사로 등장하는 인물이 “삼갈”입니다. 열 두명의 사사 가운데 그에 대한 기록은 단 한 줄로 끝나는 것을 볼 때 그는 미미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소개할 게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삿3:31). 그런데 왜 성경은 그에 대한 기록을 한 줄에 불과하지만 남겨 놓았습니까? 그것은 그를 통해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분명한 교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중요한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딤후3:16~17). 삼갈은 소 모는 자였습니다. 일개 평범한 농부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쓰셨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붙잡아 쓰시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원리는 동일합니다. 별 볼일 없는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큰 일을 할 수가 있음을 삼갈을 통해 보여주십니다(고전1:27). 우리 눈에 보기에는 연약해 보이는 지체도 더 요긴하고 아름답게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고전12:21~23). 그러므로 누구도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 라우센부쉬는 로체스터침례신학교를 졸업하고 적지 않은 재산을 가지고 “지옥의 부엌”(Hell’s Kitchen)이라고 불리던 뉴욕 서부지역의 빈민가에 들어가서 목회를 시작했다. 그는 당시의 미국교회가 오직 영혼 구원만 외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복음은 사회적 구원을 동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로체스터침례신학교의 교수 재직 시 “사회복음 신학”을 펴내어 “사회복음”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버나드 램(Bernard Ramm, 1916-1992). 램은 이스턴침례신학교(EBTS)를 졸업한 후 모교와 로스앤젤리스침례신학교 및 아메리칸침례신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한국에서 출판된 그의 저술로는, 프로테스탄트 성경해석의 교과서로 불리는 “성경해석학”, “과학과 신학의 대화”, “복음주의 신학의 흐름”(말씀사) 등이 있다. 그는 널리 알려진 역사변증학자이다. 에드워드 카넬(Edward J. Carnell). 카넬은 침례교 목사로서 오켄가(Harold J. Okenga)에 이어 패서디나의 풀러신학교(FTS) 2대 총장을 역임했다. 한국에서 출판된 그의 저술로는 “기독교변증학”과 “정통주의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