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빌려온 도끼머리가 물에 빠졌을 때,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도끼를 떠오르게 했다. (왕하6:5~7). 홀톤 박사(Dr. Holton)의 설교에 대학교 2학년을 넘는 시기의 나에게 기적에 대한 회의의 그림자가 드리우니 작은 의심의 불씨는 퍼져갔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천지창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바다 위를 걸어오심 등의 기적, 성령강림으로 사도행전의 기적 역사를 무조건 받아 믿은 나에게 성경 속의 기적을 믿지 못하게 되던 차에 하루는 선명한 꿈을 꿨다. 하늘로서 흰 보자기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보자기가 내려와 내 앞에 각양각색의 꿈틀거리는 그림들은 싸버리고 사라지고 말았다. 대학교 3학년 때 모든 성경의 의심은 사라지고 신학교에 입학해 1964년 3월 8일 도안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됐다. 기적(奇蹟, Miracle) 또는 이적(異蹟)이란 일반적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거나 생각할 수 없는 신기한 일, 종교적으로 신의 능력이 일어나며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기적, 이적, 표적, 기사와 같은 말은 많은 종류의 현상들을 포함한다. 기적은 물질세계에 있어서 분명히 하나의 자연법칙을 배제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2019년은 말콤 C. 펜윅(Malcolm C. Fenwick) 한국선교 130주년이 되는 축복과 감사의 해이다. 놀라운 것은 펜윅의 46년 선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가 ‘북방선교’라는 사실이다. 펜윅은 한반도의 북쪽 끝자락에 있는 세 곳의 ‘변방 지역’인 북한의 함경북도, 중국의 만주, 러시아의 시베리아(연해주)가 서로 만나는 곳에서 ‘변방선교’의 꽃을 피웠다. 그는 ‘함경도-만주-시베리아’라는 삼각편대의 북방선교를 동아기독교(침례교)의 선교정책으로 삼아 후원교회도 없이 단신의 몸으로 동아기독교회 가운데 약 80%의 교회를 북방선교에 투입했고, 이러한 과감한 추진의 결과는 놀라운 결실을 가져왔다. 이 때문에 그를 ‘북방선교의 대가’라 부르게 됐다. 1940년대 동아기독교의 교세를 보면 한반도에 100개(남한 40개, 북한 60개), 만주에 100개, 시베리아에 47개, 내몽고에 최소한 3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북방선교(함경도-만주-시베리아)에 가담한 교회는 무려 78%나 되었다. 무엇보다 동아기독교의 북방선교는 ‘3C’ 전략을 통해 성공했는데 ‘3C’란 헌신(commitment), 순회전도(circuit evangelism), 교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일명 탕자의 비유의 주인공은 작은 아들도 큰 아들도 아닌 아버지이다. 자식을 향한 애절한 아버지의 모습은 백지에 도장처럼 선명하게 찍힌 하나님의 심정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보면 또한 보고 만질 수 없는 하늘 아버지의 모습(형상)이 투영되어 있음을 보고, 아버지의 성품을 통해 인간의 생각과 경험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기막힌 사랑이 우리에게 스며들어 온다. 그럼에도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 상은 우리가 원하는 아버지 상과는 사뭇 다르다. 어린 자녀가 원하는 아버지는 위기의 순간마다 구출해 주는 힘센 슈퍼맨(Superman)이나 언제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멕가이버(MacGyver)이다. 그러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우리의 예상을 빗겨간다. 그는 초인적 영웅도 권위적인 아버지도 그저 평범한 아버지도 아닌 무력하고 나약하고 무능한 한 아버지에 불과하다.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 아버지 상과는 더욱 멀어 보이는 듯하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물려받을 수 있는 유산을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재산을 분배해 줬다. 작은 아들은 몇 날이 안 되어 아버지의 재산을 현금화하여 도주
“판”은 주로 난장판 할 때 쓰는 접미어이다. 모든 행사에 “판”이란 말이 붙지만 좀 난잡스럽고 소란스러운 행사에 “판”이란 접미어가 잘 붙는다. 싸움한판, 씨름한판, 윷놀이한판, 시장판 할 때 그 속에는 경쟁심과 투쟁심이 발동한다. “판”이라하면 좀 어지럽고 안정감이 없는 뉘앙스를 풍긴다. “폭”은 “판”과는 정반대의 개념을 말해준다. 그림 한 “폭” 치마 “폭” “폭신폭신” “폭신하다”(be soft cushionary) 할 때의 “폭”이란 말은 안정감과 정서가 고요히 흐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엄마 품에 폭신하게 잠든 아이의 얼굴이 예쁘다. “판”과 “폭”에 대한 한국 고유적 언어 개념을 내가 정확하게 구별했는지 여부는 모른다. 단지 언어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을 원색적으로 말해본 것이다. 나는 어느 날 30여명의 성도가 모이는 작은 교회 주일예배에 참여했었다. 두 시간의 예배시간 중 고요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관한 예배였다. 장고, 징, 드럼 이름 모를 악기가 연주되고 고성으로 불러 재끼는 찬송가는 차라리 소음 같았다. 입당하는 순간 조용히 기도할 틈도 없다. 솥에 넣는 콩을 볶듯 박죽으로 돌려대는 데에는 그냥 견딜 콩알 낱알은 하나도 없었다. 설교단에
초등학교 4학년때 외사촌 전근술이 전해준 공자와 석가의 만화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 다음에 갖다 준 만화책을 읽었는데 예수 아기가 마리아 처녀에게서 탄생한 것과 십자가에 옷을 벗긴 채 죽은 예수가 어찌 3일만에 다시 살아났으며 풍랑치는 바다 위를 걸어갔는가? 그 외의 많은 기적도 어린 나이에도 믿어지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성지합과 부정모혈로 임신하고 출생하는데 어떻게 처녀의 몸에서 탄생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처녀에게서 탄생한 사건은 생물학적 또는 신학적인 문제는 될지 몰라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빠져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모든 인류를 죄악에서 구속하기 위해서 죄 없으신 구세주로 성육신(Incarnation)하셔야만 됐다. 이상근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창조의 하나님께서 그의 제2의 창조인 인류 구속을 위해서, 그 자신이 인간으로 성육신하여 오셨다는 경이롭고도 전무후무한 사건의 성격을 인정할 때, 그 방법으로서의 처녀 탄생은 문제가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당연한 것을 느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8:46)라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셨다. 신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것이 많다 해도 인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 소포클레스 저(著) 천병희 역(譯) ‘소포클레스 비극’(단국대학교출판부, 10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김지하 시인은 ‘두타산’에서 인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 / 산이 산을 그리워하던가 / 된장이 된장을 그리워하던가 / 양파가 양파를 그리워하던가 / 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 / 이것은 절대 지상 철학이다.” 이 시를 듣자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은 이렇게 화답했다고 합니다. “산이 산을 무서워하던가 / 된장이 된장을 무서워하던가 / 양파가 양파를 무서워하던가 / 사람만이 사람을 무서워한다…” 옛 어른들의 이야기입니다. “옛날부터 밤길을 가다가 짐승을 만나면 훈기(薰氣)가 있는데, 사람을 만나면 한기(寒氣)가 느껴진다.” 참 무서운 건 짐승도 귀신도 아니라 사람이라는 겁니다. 너무나 아이러니합니다. 사람만큼 그리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또 사람만큼 무서운 것도 없습니다. 제일 아름다운 것도 인간이고, 제일 무서운 것도 인간입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 두 가지 사실에 놀랍니다. 첫째는, 이렇게 멋진 사람이 있다니. 둘째는, 이런 괴물이 있다니. 하나님이 인간과
80을 훨씬 넘도록 살아오면서도 지금까지 나는 전혀 가난을 모르고 부(富)하게 살아왔다. 살아온 과거를 곰곰이 되돌아봐도 가난하다는 생각 없이 오직 부한 생각으로 살아왔었다. 그러나 단 하룻밤 지독하게 가난했던 밤이 있었다. 가난 공포의 밤이었다. 그 밤은 치명적인 가난의 하룻밤이었다. 이 하룻밤을 제외하고는 가난하다고 느껴 본적이 없다. 최후 절명적인 가난의 그 하룻밤은 어떤 밤이었던가를 회상해봤다. 나는 1960년도 아무런 외부 보조도 없이 강릉소재 관동대학교에 만학의 문을 열고 들어갔었고 그때 이미 식구는 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가족이었다. 그날 밤은 공포의 밤이었다. 내일 아침끼니가 없이 밤을 보내야하는 밤이었다. 두 아이는 밥 달라고 할 것인데 빈 숟가락을 내어 놓아야할 아침이다. 나는 아내에게 철학적인 질문을 했다. “여보, 가난이란 무엇이요?” 아내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내일 아침끼니 걱정뿐이다. 자꾸만 답을 요구하는 나에게 아내는 “시끄럽소 마.”그것뿐이었다. 나는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지금이 가난을 체험적으로 정의해야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자문했다. “가난이란 무엇인가?(what is the poverty?)” 가난은 단순히 기분이 나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1서 4:18). 얼마 전, 강화임마누엘 농아인교회에 초청받아 갔다. 교회개척 30주년을 맞아 설교부탁을 받았다. 30년 전 교회개척예배에 축사순서를 맡았고 그 후 10년마다 초청되어 네 번째 갔는데 남다른 감회가 있었다. 듣지도 말도 못하는 한국인 농아를 사랑한 구미꼬 처녀는 가문도 좋고 공부도 신학까지 잘 했고 인물도 좋아 얼마든지 일본인 신랑을 선택 할 수 있었지만 한국의 농아인 이두형 청년을 “에로스 사랑”으로 결혼하고 남편과 같은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50여명의 농아영혼들을 위한 사역을 정말 즐겁게 충성 헌신하는 “아가페 사랑”으로 승화하고 있었다. 30년 전 일본인 구미꼬는 농아교회가 개척을 요청해 도와줬고, 서울지방회에 다른 몇 농아교회와 함께 가입시켰고, 총회에도 가입시켜 준 일이 있었다. 한국인 농아청년을 데리고 일본에 가서 부모에게 소개하니 기가 차고 놀라서 분노한 부모는 3일간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나 계속 꿇어앉은 청년에게 “정말 내 딸이 자네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두형
“꽃피는 날들, 우린 기쁨을 탕진해 버렸다. 그러하니 꽃 지는 이 날에, 그 기쁜 흔적들 남겨 쓸쓸함에 보험 들어야 함을 잊었다. 꽃피고 꽃 지는 일, 모두 한 가지에 달린 작은 떨림들인 것을 어찌 해마다 이리도 속아 버리는가.” 이상국 저(著) ‘옛 시 속에 숨은 인문학’(슬로래비, 20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속아도 좋아 저 꽃을 보면은” “속아도 좋아 내 자식을 보면” “친구의 사랑은 믿어 주는 것이고, 부모의 사랑은 속아 주는 사랑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식들의 말에 부모님처럼 잘 속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식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그대로 믿는 사람이 부모님입니다. 자식에 대한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류영모 저(著) ‘은혜의 영성으로 살다’(와웸버플, 68쪽)에 보면 어머니를 멋지게(?) 속인 사건이 나옵니다. “아마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어머니를 멋지게 속였다. 용돈이 필요해서 ‘영어 사전’을 산다고 돈을 받았다. 그 다음 날에는 ‘Dictionary’를 산다고 돈을 받았다. 또 다음 날에는 ‘Concise’를 산다고 돈을 받았다. 책 한권을 사면서 세 번씩이나 어머니의 주머니를 긁어냈다. 그
진도 백동마을에 밝혀졌던 십자가의 불빛이 몇 달 전부터 꺼졌다. 마을에 들어오면 논밭으로 가득한 시골에 깜깜한 암흑의 모습을 보며 “주여 십자가의 불빛이 다시 밝혀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게 된다. 백동교회 예배를 드렸던 건물에 열쇠가 채워지고 건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십자가의 불빛마저 밝힐 수 없는 됐다. 그러나 매일 저녁 기도를 멈출 수 없어 넓은 공간이 있는 집에서 마가 다락방의 모습으로 기도하며, 교인들에 의해 옆 땅에 건물을 새로 지을 계획도 세워보지만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인가를 구하고 있다. 진도에는 어느 정도 규모만 되면 마을마다 교회가 세워져 있다. 비록 제칠일안식일 교단이 개신교보다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는 마을도 있지만 그 후에 세워진 개신교회들이 마을 교회로 자리하고 있다. 어느 마을에서는 자기 마을만 교회가 없다며 교회를 세우게 됐다고도 한다. 백동마을은 진도로 들어와 세월호 사건 때 알려진 팽목항이라고 하는 진도항을 가기 5분 전쯤에 위치한 곳이다. 어느 땐 밤늦게도 차들이 오고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밤새도록 십자가의 불을 밝혀 두었었다. 혹이라도 낙심한 영혼이 십자가의 불빛을 보고 마음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런 일이 있은 후, 다음 날 새벽에도 똑같은 일이 되풀이됐습니다. 처음 경험했던 바로 전날보다는 덜 놀랬지만 그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시계를 보니 어제보다 20분이 더 이른 1시 20분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저의 몸 상태를 잘 아는 저로서는 이런 일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 위에 예수와 함께 서 있었던 놀라운 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 불속에 던져짐을 당했는데도 타지 않고 불속에서 거닐던 이해하기 힘든 그 몸, 세상의 지식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몸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날도 이성을 가다듬고 알람이 울리기까지 30분이 더 남아서 그냥 잠을 자는 쪽으로 결정하고 잤습니다. 그리고 1시 50분 알람 소리에 일어났을 때는 30분 전의 몸과 완전히 다른 평상시 몸 상태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기도하러 본당으로 올라가서 기도 전에 나름대로 혼자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일이 연이어 이틀 동안 일어나는 일이 우연한 일치고는 너무나 이상한 것 같아 만약 내일 또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때는 시계를 먼저 보지 말고 옷을 다 입고 기도
예수님은 세상 집권자들에 대해 그들의 보편적 정체를 서슴지 않고 발표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마 20:25) 집권자의 범주 안에 왕이나 대통령을 넣자. 이들은 백성을 자기 입맛대로 주물린다고 했다. 왕이나 대통령 밑에 있는 신하나 장관들은 백성위에 권세를 부린다고 했다. 저들은 군림하고 행패 부린다(Dominion over the people and authority upon the people). 가까이 아르헨티나에서 생긴 집권자의 예를 보기로 하자. 그 나라의 집권자의 정치 철학이 페론주의(peronism)였다. 후안 페론(1895-1974)이 그의 아내 에바페론(1919-1952)과 함께 두 번 대통령까지 하면서 온갖 부정으로 국민 위에 군림하다가 1955년 군부 쿠데타로 추방됐다. 겉으로는 자선사업 및 여성참정권 인정 등으로 인가를 얻었으나 그의 실재는 아주 달랐다. “모든 의사 결정은 대통령인 페론을 통해야 했어요. 그래서 정당이나 의회 정치가 발전하지 않았어요. 부정부패 추문도 끊이지 않았어요. 페론 자신도 집권 기간 동안 금
지구종말 시계는 어디까지 왔는가? 많은 정보 중에 우주적 징조를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져서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24:39) 태양의 흑점과 폭풍이 지구에 끼치는 영향 및 별들과 소행성이 외계로부터 지구에 날아와 끼치는 결과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천문학자들도 말한다. 지구 자체 내의 재앙도 주님은 예언하셨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24:7~8) 삼한사온이 사라진 기후변화, 지각균열, 집중호우, 싱크홀, 태풍과 천재지변으로 화산폭발과 지진 해일 쓰나미, 멕시코 코르도바에 내린 주먹 만한 우박, 미국 오대호에 덮친 얼음 쓰나미, 시베리아의 메탄가스 폭발, 이상의 지구 자연재해와 이상기온을 살펴본다. 지난번 네팔의 지진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위력의 25배였다고 말했고, 또 불의 고리로 동시에 일어난 일본의 구마모토 지진과 남미의 에콰도르 지진은 환태평양판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들이 만든 생화학무기, 초지능과 인공지능 로봇 곧 지능폭발 등의 4차원의 세계화는 다니엘의
필자는 침례교회가 독자적 교단으로 존재하게 된 원인이자 침례교 정체성의 근간인 신약성경적 교회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지난 두 번의 글을 통해 신약성경적 교회관 중 신자의 침례, 중생자 회원, 엄격한 치리 전통 등에 대해 설명했다. 이번 호에서는 상징주의 성례신학, 회중주의, 개교회주의 등을 살펴볼 것이다. 1. 상징으로서의 성례 침례교회는 교회의식(성례)으로 침례와 주의 만찬 두 가지 의식만 인정한다. 그리고 침례와 주의 만찬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며, 따라서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상징적 의식으로 믿는다. 침례교회는 대표적인 반(反)가톨릭주의 교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성례를 통해 주입된다는 가톨릭 성례주의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성례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매개체 혹은 구원의 방도라는 다른 개신교단들의 사상도 인정하지 않는다. 침례교회는 구원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얻게 되므로, 성례는 구원과 관련이 없는 상징적 의미만을 가진다고 믿는다. 침례교회는 침례는 신자가 죄에 대해 죽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하며,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고 믿는다. 주의 만찬은 또한 그리스도
필자는 요한복음에서 ‘인자’(사람의 아들) 칭호가 나오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한 요한의 신학적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호에서는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에 나오는 인자 구절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하여 알아봤다. 인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속의 경륜 속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독생자이시다. 인자는 또한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장대에 매단 것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인자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시다. 이번 호에서는 오병이어 표적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다시 찾아온 무리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에 나오는 인자 말씀을 통해 제시되는 신학적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병이어 표적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다시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반가운 인사말에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들이 그를 찾아온 목적 곧 그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