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에 파란이 없는 것은 여인에게 곡선이 없는 것과 같다. 천하에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곡선이지만. 죽은 것들은 모두 뻣뻣하다. 자연계는 곡선을 좋아한다. 연기와 같이 피어오르는 안개, 뭉실뭉실 솜 같은 구름, 담을 넘어 삐죽 고개를 내민 꽃가지, 구불구불한 시내… 반면에 인조물은 직선을 좋아한다.” 임어당 저(著) 김영수 역(譯)“여인의 향기”(아이필드, 13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건축예술의 거장 안토니 가우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신이 만든 선이다.” 니체 또한 “진리는 모두 곡선”이라고 했습니다. 직선’은 ‘곡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에서 나옵니다. 산 능선에서 고요하고 은근하게 이어지는 어머니의 눈썹과 같은 곡선을 보십시오. 꽃은 모두 곡선이고 난초는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의 귀는 곡선으로 생겼기 때문에 직선의 언어보다는 곡선의 노래가 더 잘 들어옵니다. 나무도 그러합니다.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나무가 더 멋스럽습니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는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습니다. 새들도 곧은 가지보다 굽은 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고, 함
생전 처음 명동에 간 나는 양장점과 구두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를 외계인처럼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이 어떤 진열장에 걸려 있는 흰색 원피스를 가리키며 입어 보겠다고 했다. 마침 그 가게 앞에는 내가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높은 문턱이 있어서, 나는 그냥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문 밖에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니, 아주 아름다운 중년 여인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동생을 반겼다. 그런데 동생을 탈의실로 안내한 후 무심히 돌아서던 그녀가 문에 기대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보고는 흠칫 놀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나중에 와요. 손님 있는 거 안 보여요?” 그제나 이제나 눈치 없기로 소문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이번에는 한 옥타브 더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중에 오라는 말 안 들려요? 지금은 동전이 없다구요!” 순간 그 소리를 들은 동생이 옷을 입다 말고 탈의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뭐라고 그랬어요, 지금. 우리 언니를 뭘로 보는 거냐구요!” 나는 그제야 주인 여자가 나를 가게 앞에서 구걸하는 거지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
지난 전국사모회 제12차 총회와 교육수련회가 6월 3~5일 부산 해운대 글로리 콘도에서 열려 폐회설교 부탁을 받고 처음으로 동참하게 됐는데 200여명 넘는 사모님들이 참석했다. 돌이켜보니 2년전 총회 주소록을 받고 교단 전체교세가 없어 주소록에서 대충 헤아려봤더니 115지방회의 4810교회에 목회자 수는 6226명으로 기억됐는데 따져보니 평균 30:1 비율로 200여명이 참석했었다. 듣자니 지난번 교단 홀사모 위로회는 40여명 중에 30여명이 참석했다고 들었는데, 이번 사모회는 좋은 강사진과 알찬 진행으로 영적 은혜를 많이 받은 집회에 소수로 모여 아쉬움이 남는다는 참석자들의 얘기를 들었다. 새로운 집행부는 명년에도 갑절로 참석토록 행사위주의 진행보다 열매맺는 영적 집회가 되도록 더욱 잘 준비하기를 기대해 본다. 엄부자모란 말이 있는데 아버지는 엄중하고 어머니는 자애롭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모님은 사모님(師母任)? 사모(事母)님? 사(思)모님? 무슨 뜻인지? 목사의 어머님, 스승 같은 어머님? 일하는 어머님? 사모하는 어머니란 뜻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어떤 사모는 목사가 설교를 길게 하면 뒷쪽에 앉았다가 일어나서 손으로 X표를 하는가하면 노골적으로 설교가 뭐
“마음이 설레지 않는 옷을 입고 행복할까? 설레지 않는 책들을 쌓아둔다고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절대 착용하지 않을 장신구를 갖고 있는 것으로 행복한 순간이 찾아올까?(중략) 마음이 설레는 물건만으로 채워진 자신의 공간과 생활을 상상해 보자. 그것이 바로 자신이 누리고 싶은 이상적인 생활이 아닐까? 마음이 설레는 물건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과감히 버리자. 그 순간부터 당신에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다.” 곤도 마리에 저(著) 홍성민 역(譯)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더난출판, 58~5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정리의 여왕으로 불리우는 일본의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통쾌한 선언을 합니다. 그녀는 두근거리지 않는 것들에 둘러싸여 많은 에너지를 빼앗긴다고 하며, 두근거림이 없는 물건들을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그 이후에는 좋아하는 것들로 삶이 채워지는 체험을 합니다. 인생의 고통은 얻지 못해서가 아니라 버리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승리자는 많은 것을 얻은 자가 아니라, 의미 없는 것을 버린 자입니다. 어리석은 새는 반짝이는 것을 무엇이든 주워 모으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주워온 유리 조각 쇳조각들로 둥지가 엉망이
율법의 복은 조건부 복이다. “…행하면…” “…순종하면…” 등 사람 편에서 어떤 자세를 취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주사라고 했다. 물론 이말 속에는 “…행하지 않으면…복을 안주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를 쏟아붓는다고 했다(신28장). 이에 비해 복음의 복은 조건이 없다. 조건이 있다면 그 조건은 하나님이 충족시켜 놓은 조건이다(요일 3:16, 요일 4:10).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의 모든 것에 눈을 감으시고 복을 주었다. 눈 감으신 것이 아니라 눈을 뜨셨지만 우리의 초라한 모습을 보지 못하셨으니 곧 우리의 허물과 죄를 간과 하셨다는 것이니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들의 허물과 죄 위에 보혈 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구약 율법이 주는 조건부 복을 나열해 보자. 성읍에서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신28:3), 온갖 인생과 짐승의 소생이 복을 받고(신28:4),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신28:5),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신28:6), 적이 한길로 침입했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혼줄나게 쫓겨 가고(신28:7), 꾸어 줄지언정 주지 않고(신28:12), 남의 머리가 될지 언정 꼬리가 안 되고 위에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으면 인격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다.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은 인격의 사대요소이므로 우리는 십자가로 심사언행(心思言行)을 삼간 후 예수의 부활로 새로운 인격의 변화로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의 위대한 신앙과 선교의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여기서 사람은 무엇보다 첫째로 마음을 지켜야 한다. 사람은 마음의 바탕에서 생각이 떠오르며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말한 대로 행동하게 되므로 “심사언행”이라 본다. 하와가 마귀의 유혹으로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쳐다보니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마음에 먹고 싶은 생각대로 따먹고 아담도 함께 범죄케 했다. 무엇보다 우선 심령이 변화돼야 한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7~38)라고 첫 번째 계명을 말씀하셨고, 바울사도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히3:8)라고 권면했다. 다윗 왕은 궁궐에서 건
기독교한국침례회 원로목사회 위문잔치 모임이 교역자복지회(회장 황인정 목사) 주관으로 지난 4월 말 2박 3일 일정으로 가평 필그림하우스에서 있었다. 연세가 70, 80, 90세가 된 200여 원로목사님 내외분들이 모였다. 모든 프로그램이 부담 없이 휴식처럼 되어 있지만 그래도 한 프로그램만은 예배 중심과 설교자의 말씀 전하는 시간이었다. 마침내 강사가 등단했다. 오시느라고 수고하셨다는 예의 인사와 간단한 자기소개가 끝난 뒤 바로 말씀선포로 직행했다. 주제는 “천로역정에 나타난 기독교 7대 영성”이었다. 그 자리에 참여한 나는 순간 ‘아차’했다. 언제 천국 갈지도 모를 목회 노년의 노 목사 부부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주제를 유인물로 해서 전한다는 것이 노 목사들에게는 부적절한 내용이 아니겠느냐는 나 나름대로의 제법 재치있는 판단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가령 노년까지 살아오시기에 어떤 수고가 있었느냐니 혹은 이젠 노년에 편안히 쉬시고 하늘소망 가지시라고 하면 노 목사 부부에게 어울릴 것 같은데 강의 내용은 딴판이었다. 천로역정 기독교 7대 영성을 유인물에 있는 대로 한 자 한 구도 빠지지 않고 설명해나갔다. 이 강사는 노년 목사라도 복음 선포자로 완주(完走)해야 한
사람은 만물 중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창2:22)라고 말씀하셨다. 천지창조 다음으로 하신 기적은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사람의 창조이다. 흙을 주물러서 남자인 아담을 만들고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 하와를 만드셨다. 남녀를 만든 재료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말씀하셨다. 1950년대 러시아에서 생화학자들이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해 엄청난 재원을 들여 인체의 구성요소를 합성하여 사람의 육체 모양은 만들었으나 살려낼 수는 없어 생명은 연소(燃燒)에 있다고 믿고 불꽃 속에 있는 생명을 코로 불어넣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많은 재원만 낭비하고 결국 실패했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a living soul, 生靈, 창2:7)이 됐다. 2004년 12월 6일 타임지에서 ‘우주의 수수께끼’(Cosmic Conundrum)라는
동내에서도 소문난 가정이 있다. 몇 십 년을 싸우며 칼부림도 나고 작은 마을 사람들이 다 듣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드디어 몇 달 전부터는 변호사에게도 여러 번 갔고 끝내는 법원 민원실까지 가서 서류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연세가 칠십을 넘기신 분들이시다. 진도에 내려와 전도 대상자로 지목하고 기도하던 사람들이었다. 선교지와 같은 마을에서 전도의 문을 열기 위해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는 분들을 지목하고 기도했던 것이다. 지난 달부터 더 심해서 이제 끝장이라는 상황에 우리 부부가 알게 되고 늦은 밤까지 찾아가기도 하고 찾아 오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땐 서로 숨기고 각자 찾아와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힘들면 끝내라고 말한다며 내일은 결정하겠다고까지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을 전해주고 싶다며 한번 도전해 보자고 울기도 하고 애걸했다. 성경의 하나님을 소개하며 시간이 흘러 두 분 모두 나중 더 힘이 빠졌을 때를 생각하고 이겨 보자고 당부를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고비를 넘기고 나서 지금은 만날 때 마다 “어떠시냐?”고 넌지시 물으면 미소를 지으시며 “좋아요.” 대답을 듣는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분에겐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신학대학교 동기로 졸업한 뒤 서울에서 이웃 지역에 각각 교회를 개척해 목회를 시작했다. 그런데 몇 년이 안되어서 선배 목사님의 친구가 갑자기 미국으로 이민목회를 떠나버렸다. 그럴 사정이나 이유를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기에 그땐 궁금하기도 했고 몹시 섭섭함도 있었다고 말해 줬다. 세월이 지난 후 선배 목사님은 미국에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늦게나마 왜 이민목회를 떠났는지 물어봤다. 친구는 잠시 망설이더니 “자네 때문이었지”라고 충격적인 대답을 주더라는 것이다. 동시에 개척교회를 시작했지만 친구가 섬기는 교회는 별로 부흥이 없는 반면에 선배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선 계속 좋은 소식만 들려왔었다. 이에 친구끼리 자꾸 비교가 되고 열등감이 깊어지고 스트레스를 받음으로 선택한 것이 이민목회였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많지 않은 교인이지만 다른 목회자와 비교할 것 없이 목회를 하니 평안하고 행복하다고 알려주더란다. 목회를 하면서 선배 목사님의 친구처럼 다른 목회자나 다른 교회를 상대로 비교하다가 시험에 들거나 실망에 빠진 경험은 없는가? 특히 목회를 좀 더 잘해보겠다고 어떤 세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 행복한 직장, 행복한 사회를 꿈꾼다. 상담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고 싶어서 왔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느껴지는 우울감, 실패감, 불안감에서 벗어나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다는 것이다. 상담을 오기 전에 그들은 이미 행복하기 위한 시도들을 해왔다. 미친 듯이 일도 해보고,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이나 마약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일으키는 문제들이 싫어서 모든 사람들과 담을 쌓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오기도 한다. 이혼을 하고 현재의 관계를 끝내기도 한다. 그동안 겪었던 우울감을 없애버리기 위해 약도 먹는다. 문제를 없애고 행복을 추구하는 한 방법이다. 교회를 옮겨 오는 사람들도 옮겨 가는 사람들도 있던 교회의 고질적 문제에서 해방되고 싶어한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비로소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은퇴하신 목사님 사모님께서 드디어 힘겨웠던 목회에서 해방됐다고 너무나 기뻐하며 꽤 오랫동안 교회 근처에는 발도 들이지 않는 모습도 본 적이 있다. 한국 사람도 한국교회도 다 지긋지긋하다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내심 내게는 언제나 저런 날이 올까 부러운 적도 있다.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문
전깃줄에 참새 열 마리가 있었습니다. 포수가 총알 한방으로 다 사냥하려 했는데 열 번째 참새만 죽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참새가 “앗, 총알이다”하며 피했습니다. 두 번째 참새도 “총알!”하며 피했습니다. 그런데 아홉 번째 참새가 “앗, 콩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열 번째 참새가 입을 쩍 벌리며 “아~~”하다가 죽었습니다. 우리 옛말에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 안 그런 척 하면서 더 염장질하는 사람 말입니다. 중간에서 살짝 말 한마디 바꿈으로 천국이 지옥으로 바뀝니다. ‘서울시 체육회’를 중간에서 잘못 옮기면 ‘서울 시체 육회’가 됩니다. ‘부산시 장애인 복지관’은 ‘부산시장 애인 복지관’이 되고 ‘희망 의상실’은 ‘희망의 상실’이 됩니다. ‘당신은 무지개 같아요.’ 라는 말을 살짝 꼬으면 ‘당신은 무지 개 같아요’가 됩니다. 사탄과 사탄에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합니다. 왜 우리들은 참소하고 험담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을 좋아할까요? 그 이유는 험담과 불평이 죄로 인해서 오염된 우리의 성품에 만족을 주기에 그러합니다. 험담하고 불평하면 만족이 생깁니다. 어느 정도 위로도 받고, 기쁨을
또한 ‘동시적’이라 함은 중생이 우리 안에서 회개와 믿음이 완성될 때 완성되고, 회개와 믿음도 중생이 완성된 때에 완성된다는 뜻이다. 멀린스는 대그나 보이스와 같이 이 믿음은 오직 은혜를 인하여 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구속을 확보해 주는 공로적인 활동이 될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했다. 이처럼 멀린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 관점에서 중생의 조건을 회개와 믿음으로 규정했다. 카너는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을 통해 중생의 조건을 제시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소생시키는 행위를 통해 발생한 중생이 믿음보다 앞선다고 주장한 반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구원의 조건인 믿음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카너는 믿음과 중생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영적 체험의 두 국면으로 규정한 후에, 인간은 믿음에 의해 중생하지만(갈 3:26; 요 1:12~13), 이 믿음은 하나의 중생적인 행위측면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카너는 구원의 순서가 “회개와 믿음을 통해 체험하는 죄 용서, 칭의, 화해, 양자, 중생, 그리고 성화”로 전개되는 하나의 실재에 대한 다른 묘사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카너는 믿음이란 파산한 죄인이 하나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 나오는 로고스의 화육과 화육하신 로고스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다루는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존재성을 제시한다(1:14, 18). 요한은 영원한 신성의 창조주인 로고스가 역사상의 한 구체적 인간이 되어 그들 가운데 함께 거주하셨던 사실을 제시하고 그 속에서 그 분의 유일한 존재성을 특별한 용어를 통해 표현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a).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말씀이 ‘육신’ 곧 ‘인간’이 된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신성의 존재가 인성의 존재로 변형된 것을 말한다. 그것은 또 그 영원한 신성의 존재가 살과 피를 가진 인성의 존재가 되어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온 것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 ‘육신’이란 단어는 아주 드물게 나오는데, 신체 곧 살과 피를 가진 인간 존재라는 중립적 의미로 사용된다. 사도 바울도 그의 기독론적 성찰에서 화육과 관련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롬 1:3);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다(롬 8:3);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셨다(딤전 3:16). 이러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불평불만만 늘어놓으며 보내는 사람에겐 불행한 하루가 되고, 감사하는 사람에겐 행복한 하루가 된다. 자주 들어 귀에 익은 ‘감사’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입만 열면 불평하고 비판하며 심지어는 욕이 입에 붙은 사람도 있다. 감사한 마음이 없고 불평불만이 가득하면 감사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불평불만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시계의 배터리가 다 닳으면 시계바늘이 몇 번 째깍째깍하다가 딸깍 멈추듯이 우리 인생도 어느 날 정해진 시간을 다 사용하고 나면 숨이 째깍 멈추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만큼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처럼 정해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가족에 대해, 직장 상사나 사장에 대해, 정부에 대해 늘 불평불만을 하며 불행한 시간만 보내다가 인생의 시계가 멈춰버린다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인가? 필자의 주변에도 30~40대의 젊은이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있어서 참으로 인생은 내일 일어날 일을 모르고 산다는 것을 절감한다. 우리의 인생이 생각보다 짧은 인생일 수도 있으니 매사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