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숍 고르(Bishop Gore)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상(非常)한 것을 하도록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日常的)인 것을 비상하게 잘하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은 저 멀리에 있는 큰 것을 취하기 위해 눈앞 발밑에 있는 것을 소홀히 한다. 사람들은 큰 것을 취해 놓으면 작은 것을 저절로 취해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눈앞 곧 발밑에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점점 더 저 멀리 큰 것을 갖도록 질서를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을 하늘 양식 구하는 것 못지않게 귀한 것으로 생각하셔서 우선 일용할 빵을 구하라고 주기도문에서 가르치셨다. 건강은 늙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 시절에 특별히 유의해야만 얻는 것이라고 했다. 너무 멀리 그리고 큰 것을 취하려다가 눈앞의 작은 것에 대한 사랑을 잊는다. 하나님은 작은 것부터 시작하여 큰 것으로 우리에게 주셨다. 율법을 주시고 나중에 실재를 주셨다. 구약을 주시고 신약을 주셨다. 강한 사자라도 연약한 토끼 한 마리 사냥에는 전력투구한다고 하지 않나. 영문학자의 꿈을 가진 희망자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기 전에 ABC 알파벳부터 배워야 함이 순서가 아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운 지점은 신이 자신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내가 이제까지 읽은 모든 책과 문장을 통틀어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와 프로이드와 마르크스 등의 저작을 통틀어, 가장 무서우면서도 창의적인 선언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였다. 그건 마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처럼 거대하고 담대한 문장이었다. 흑암을 가르고 나타난 빛, 태초를 명령한 스스로 있는 자, 나는 그 문장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김지수 저(著)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페이지원, 85쪽)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첫 문장은 그 이후 모든 이야기를 끌고 가는 기관차입니다. 가슴을 쩌렁쩌렁 울리는 천둥 같은 첫 문장이 있습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 날개)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그만 돛단배로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여든날 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어니스트 헤밍웨이, 바다와 노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거북한 꿈에서 깨어나면서, 자신이 침대에서 괴물 같은 벌레로 바뀐 것을 발견했다.”(프란츠 카프카, 변신) 그러나 그 어떤 첫
사람들은 열심히 일 하는데 만 관심이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 잘한다고 칭찬하고 쉬는 것을 노는 것으로 보고 부정적이다 보니 쉬는 것을 무시한다. 기업들도 사원들을 열심히 일시키는 방법은 연구하고 경쟁을 시키고 보상을 제공하지만 잘 쉬는 법은 연구하지도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주5일제 근무를 법적으로 정하고 시행하는 것도 건전한 소비를 유발해 관광산업을 발전시키고 경제를 살리기 위한 것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쉼을 통해 국민들의 건강도 관리하고 삶의 질을 높이며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쉬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잘 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야한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보살피고 상대하느라 식사할 겨를도 없이 일한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고 하셨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6:31) 예수님은 제자들을 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쉬도록 하시고 예수님도 쉬는 시간을 가지셨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 가사
필자는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 칭호가 나오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요한의 기독론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을 살펴보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도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표현하는 가장 중심적 칭호인 동시에, 요한의 구원론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통로와도 직결된 것으로 제시된다(요20:31).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나사로 부활 사건에서 두 번 나오는데, 먼저 이 사건의 목적을 알려주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으로(요11:4) 또한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한 여성 제자 마르다의 고백에 나온다(요11:27).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듦에 관한 소식을 들으시고는 이틀을 더 머무르신 후에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후에 나사로의 장례 현장에 가셨다. 요한은 나사로 이야기에서도 다른 사건들의 묘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등장인물 사이의 대화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전달한다. 이 사건의 중심적 국면의 묘사에서도 먼저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의 핵심적 국면이 제시된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부활을 기대하는 마르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은 마지막 날 부활에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생활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사색하지 않고 검색을 합니다. 숙제도 검색으로 하고, 친구와 밥 먹을 곳도 검색으로 찾고, 검색하지 않으면 쇼핑도 사랑도 못합니다. 그러나 저녁노을을 보는 감동, 새가 날아가는 경이로움, 마른 가지에서 꽃이 피는 기적을 검색해 보세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뛰는 심장을 심전도로 측정할 수 없듯이 죽음의 슬픔 삶의 기쁨을 검색해 보세요. 지난 여름,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손을 잡고 해변을 달리던 때의 그 바다를 검색해 보세요. 구글의 동그라미가 무한으로 이어져도, 검색으로는 찾을 수 없는 세상이 있습니다.” 이어령 저(著) 이어령의 “80초 생각나누기 ‘길을 묻다’”(시공미디어, 129~13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최고의 인터넷 검색 사이트 구글의 로고는 무한을 상징하는 ‘∞’의 연속입니다. 무한대로 펼쳐있는 정보의 바다에서 헤엄치라는 의미입니다. 머리와 가슴보다는 엄지와 검지! 스마트폰과 컴퓨터가 생활 그 자체인 요즘 세대는 머리와 가슴으로 ‘사색’하지 않고, 엄지와 검지로 ‘검색’을 합니다. 친구와 밥 먹을 곳도 검색하고, 쇼핑과 숙제도 검색합니다. 심지어는 목회자들도 주님을 깊이 묵상하기보다는 검색으
요즘 들어 왜 그리도 내 앞에서 눈물 보이는 성도가 많은지 모르겠다. 최근 몇 주간, 전화 또는 대면으로, 남녀를 불문하고, 그 소중한 눈물을 여과 없이 흘려 보이셨다. 이에 그 눈물들의 결을 따라 내 눈물도 함께 흘렸다. 그렇다면 대체 그 의미는 뭘까? 문득 내 지난 과거의 두 장면이 떠오른다. 한 번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날짜는 6월 6일 현충일. 그날은 고등부 야외예배가 있던 날, 난 총무로서 그 행사의 기획과 진행을 다 도맡았다. 게다가 다음날 7일은 시험까지 있어 5일 밤은 공부하느라 완전히 꼬박 새웠다. 그래서인지 행사를 끝내고 부산역에서 버스를 타고 청학동 집으로 오는 길은 완전히 녹초 그 자체. 그러더니 갑자기 주르륵 코피가 흘렀다. 처음엔 대수롭잖게 여겼지만, 곧 쌍코피로까지 심각해지자, 손수건으로 겨우 틀어막으며 어서 집에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난 정류장에 내렸고, 쏜살같이 집을 향해 달렸다. 대문 앞에 도착해서는 초인종을 있는대로 누르며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자 놀라 뛰어나온 어머니. 그렇게 난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고, 참았던 눈물이 터지면서 곧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나중에 깨어보니 부산 침례병원 응급실. 그제야 정신이 차려져
V. 본문 설명을 위한 기술 알렌 박사는 본문 설명 방법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본문 주해만으로는 청중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며 자신들의 본문 설명이 약한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본문 주해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루한 주해(본문 설명)가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본문 연구 후에 습득된 연구 자료를 설득력 있고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효과적으로 본문을 설명할 것인가? 필자는 효과적인 본문 설명을 위해서 다음의 열 가지 기술(수사적 질문, 정의, 비교·대조, 분석, 시청각 설명, 논증, 재진술, 인용, 스토리텔링, 실물 설명)을 제안한다. 본문의 내용과 청중의 상황 등을 고려해 아래의 기술들을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 1. 수사적 질문 수사적 기술은 청중들의 관심을 끌고 설득하는 기술이다. 수사적 질문은 청중에게 질문함으로써 설교자가 말하려는 부분에 대해 청중이 직접 생각하게 하므로 그들로 하여금 담화에 초대하도록 한다. 따라서 수사적 질문은 설교자가 본문에서 설명하는 주제에 대하여 청중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할 수 있다. 2. 정의 정의는 단어 의미의 “한계”를 정
“사흘 굶어 도적질 안할 사람 없다.” “뭐니 뭐니 해도 우선 먹어야 산다.”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 먹는다.” 등 어려서부터 들어온 말이 많다. 무얼 먹느냐? 왜 먹나? 언제 먹는가? 얼마나 먹고 어떻게 먹는가? 입으로 먹는 음식에서 인생살이에 먹는다는 뜻은 함축적인 뉘앙스를 의미한다. 탐식 호식 걸식이 있는가 하면 금식 절식 단식 등이 있다. 많이 먹어 배불러 죽는가 하면 못 먹어 배고파 굶어 죽는다. 먹는 음식은 죽고 사는 것과 우선적 관계를 갖는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신 후 원수 마귀의 세 가지 시험 중에 첫 번째가 먹는 시험으로 원초적인 시험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 지금도 인생이 겪는 근본적인 유혹의 시험으로 살아온 지난 세월에서나 수십 년 신앙생활과 특히 지금까지 55년 목회현장에서 겪은 식욕의 시험은 헤아릴 수 없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고 유혹한 첫 번째 시험은 빵에서 돈과 재물, 물질과 재정의 소유욕 시험으로 연결된다. 사단은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금단의 열매 선악과로 유혹하여 범죄케 한 경험으로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에게도 똑같은 먹는 것
“자기에게 쓸모 있는 책을 정독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첩경이다. 그런데 좋은 책인지, 쓸모 있는 책인지는 대체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 결국 많은 책을 읽어 보는 수밖에 없다. 쓸모 있는 책, 좋은 책을 고르는 탁월한 안목은 ‘많이, 그리고 골고루’ 읽지 않고는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독(多讀)의 비효율성은 다독이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단언할 만큼 많은 책을 읽어본 사람만 주장할 수 있다.” 임사라 저(著) ‘내 아이를 책의 바다로 이끄는 법’(비룡소, 2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에머슨은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 것을 아는 자가 아니라 쓸모 있는 것을 아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진리는 책에도 적용됩니다. 자기에게 쓸모 있는 책을 정독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첩경입니다. 그런데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쓸모 있는 책인지는 결국 많은 책을 읽어봐야 압니다. 5세기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에 유협이 쓴 ‘문심조룡(文心雕龍)’은 동양을 대표하는 최고 최대의 문학이론서입니다. 소설가 이문열도 초년 시절 ‘문심조룡’을 자신의 문학 수원지(水源池)라고 소개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문심조룡에는 독서에 대한 좋은 권면이 있습니다. “천 개의 곡조를 다룬 후에야 음악을
어느 신앙 월간지에서 헨리 그루버의 ‘세상을 걷는 중보 기도자’라고 하는 글에서 “현 미국을 이끌어 가는 70대, 그들은 성장시기에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고 추수가 끝난 들판에 남겨진 곡식을 거두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판매한 돈으로 용돈을 벌었던 이들이 국가를 이끌어 가고 있다”며, “그때에는 곳곳마다 부흥회가 열렸고 성령이 부어졌고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안타까운 하소연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10여 년을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점점 줄어들고 있는 젊은 세대의 신앙인들로 인해 마음 아파했던 생각이 났다. 그런 와중에도 근근하게 신앙을 지켜 나가려고 애를 쓰는 노년층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킨다면 기근의 때의 어려움은 축복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킨다면 재앙이 축복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그루버는 역전의 하나님을 소개한다. 영적으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가난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모습과 한국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헬조선이라는 말까지 남발하면서 나라를 비판하고, 개독교라는 소리로 교회를 손가락질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 왕의 꿈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했다. 열왕기상 3장 9절에 보면 그때 솔로몬은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하고 구했다. 그의 이런 간구함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고 지혜와 총명뿐만이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주겠다고 하셨다. 솔로몬의 간구가 왜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을까?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다. 성경은 여러 면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전해준다. 신명기 32장 4절엔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라고 모세는 노래했다. 시편 33장 5절엔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하시는 것에는, 뜻과 일하심에는, 세계를 판단하고 심판하심에는 반드시 공의가 있다. 이런 하나님은 인간들에게도 공의가 있길 원하시는데 특히 재판관들에게 더욱 그렇다. 레위기 19장 15절엔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어릴 적부터 재미있게 보아왔던 미국의 인기 있는 가족 시트콤의 주인공이 많은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의 가해자로 떠오르면서 사회 곳곳에서 숨겨져 왔던 성폭력의 실태들이 속속히 드러나고 있다. 이미 국내에서도 문단, 연극계, 연예계뿐만이 아니라 교계에서 벌어진 성폭력이 고발되고 있다. 사회의 저명인사들에게 당했던 성폭력 희생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Me Too’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성폭력의 대상이 됐던 아픔을 평생 지우려 애쓰면서 그늘 속으로 숨어버렸던 여성들이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또 다른 차원의 피해를 입을까 봐 주저앉아 입을 다물었던 그들이 일어나고 있다. 가해자가 누구였는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상담소에서 만났던 수많은 여성들에게 성추행과 성폭행의 경험이 있다. 남성들이 겪은 성폭력의 실태도 만만치 않다. 심리검사를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성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여성들을 찾는 것이 드물 정도로 심각하다. 이 여성들에게 있어 골목에서 튀어나온 바바리맨이나 숨을 못 쉬도록 승객들로 꽉 찬 버스 안에서 어디선가 자신을 더듬는 손처럼 자잘한 사건들은 충격적이고 부정적인
해마다 기독교한국침례회 연차총회 시에 발간되는 의사자료집에는 <총회규약>이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이 “침례교회의 이상과 주장”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설하셨고 친히 머리가 되시며 그 입법자이다. 2. 교회의 교리와 생활에 대한 유일하고 권위 있는 표준은 성경뿐이다. 3. 교회의 의식은 침례와 주의 만찬으로서 상징적 기념일뿐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 4. 교회의 직분은 목사와 집사로서 이들은 교회를 섬기는 이들이다. 5. 교회의 정체는 민주정치로서 행정만 할뿐 입법은 하지 않는다. 6. 교회의 회원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의 모임으로 구성된다. 7. 교회 회원의 의무는 신앙고백으로 침례를 받고 신약성서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8. 모든 교회는 행정적으로 독립적이나 복음전도 사업은 협동한다. 9. 교회와 국가는 상호 분리되어 있다. 10.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이다. 또한 최근 3~4년 전까지 침례신학대학교 교직원용 수첩이 발간되었는데, “우리 대학교의 신앙과 주장”이라는 일종의 신앙고백이 게재되고 있었습니다: 1. 성경 :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오류 없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성령을 받아 모신 우리의 지상과업인 예수님의 지상명령, 최후명령이자 최상의 분부인 유언의 말씀은 가장 긴급한 일이다. 이는 바로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고 온 세상을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구령!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 중의 기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사56:9~10)라고 질타했다. 교회와 각 개인의 구원받은 성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광대의 소리로 들어선 결코 안 된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나 불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을 구원해내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요1:39) 그리고 안드레는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요1:41)하고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께 오니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베드로)라 하리라”(요1:42)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 하여
“책을 읽는다고 하자. 책의 저자(著者)는 독자에게 있어서는 타자(他者)이다. 타자는 나를 넘어서는 영역, 즉 ‘다름’의 세계이다. 타자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독자는 독서를 통해 타자의 견해를 수용하든지, 거부하든지 아니면 일부 수용하게 된다. 독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법을 길러간다. 독서를 통한 타자와의 만남, 타자와의 그 치열한 생각의 전투를 통해 독자는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한재욱 저(著) ‘인문학을 하나님께’(규장, 3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독서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 중 하나입니다. 독서는 생각하는 힘을 길러 줍니다. 독서를 하는 중에 저자(= 타자, 他者)의 주장이 너무나 강력하고 감동적이어서 나에게 전적으로 수용되면 카프카가 말하듯이 책은 ‘도끼’ 가 되고, 니체의 표현에 의하면 ‘망치’가 되어 나를 깨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줍니다. 도끼와 망치 같은 책을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이렇듯 독서는 편견과 아집이라는 거대한 감옥을 쪼개고 새로운 집을 짓도록 해 줍니다.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의문을 품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 속에, 상상력을 주고 창의력을 주고, 수많은 대리 경험을 하게 합니다.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