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경은 이날의 집회로 인해 1907년 평양의 장대현교회를 비롯해 전국에 있는 한국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조짐을 보여줬다고 적었다. 나아가 길선주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승리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성령 충만임을 가르쳤고 이를 받을 수 있는 대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성신을 받는 것이 세 층이 있으니 첫째는 성신의 인도함 받고, 둘째는 성신의 감동함을 받고, 셋째는 성신의 충만함을 받으니 그런즉 성신의 인도함을 받은 후에야 성신의 감동함을 받고, 성신의 감동함을 받은 후에 성신의 충만함을 받나니, 성신을 충만히 받는 방식은 여섯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명을 순종함이니 … 둘째는 형제자매가 마음을 합함이니 … 셋째는 겸손함이니 … 넷째는 마음이 조용함이니 … 다섯째는 주의 일을 위하여 힘쓰는 가운데 성신의 권능을 충만히 받는 것이니 … 여섯째는 간절히 기도함이니, 주 가라사대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라 하였느니라. 이에 박용규 교수는 길선주가 제시한 성령 충만함을 얻는 방책이 사도행전 1~2장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에 근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그가 지식적으로 이 원리를 얻은 것이 아니라, 몸소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고, 또
군선교!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선교, 그러나 그 선교를 하는 이들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산다는 사실을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섭리 가운데 2006년 강원도 고성으로 사역을 보내신 주님! 왜? 이 먼 곳까지 나를 보내셨을까?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어떤 사역을 하라고 보내셨나? 먼저는 구성교회를 세우라는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전도해 교회의 자리가 가득 찰 무렵 주님은 22사단에서 사역하시는 군 선교사 목사님의 요청으로 한 부대 교회를 맡아 이중 사역을 하게 하셨습니다. 지나고 보면 이 또한 주님이 하셨음을 느낍니다. 시골교회를 사역하면서 군부대교회까지 맡아서 사역하다 보니 때로는 군부대 교회로 들어가는 선교비가 시골교회 재정의 50%를 차지할 정도까지 섬기게 됐습니다. 왜 그렇게 미련하게 군부대 교회를 섬겼을까? 그렇게 섬긴다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제가 군부대 교회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 보니 군부대 교회야말로 이 나라와 이 민족에게 가장 큰 희망이요 소망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장병을 살려야 우리 교회가 살고 우리 교회가 살아야 이 나라가 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시골교회 사역,
1905년 11월 19일 교단 연합 구국기도회 대한기독교회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로교, 감리교와 함께 구국기도회를 공동 개최하고, 전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하루 한 시간 나라를 위해 기도할 것을 촉구했다. 1905년 11월 19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광고와 기도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長老會와 浸禮會와 美美會에셔 公同 聯合會를 團結야 祈天永命의 主旨로 獨一 無二 시고 全智全能신 造物主大主宰上帝耶和華케 爲國祈禱를 虔恭至誠으로 日日 設行다 其日日誦 禱 全文이 如左더라.… 祈禱時間은 每日申時(午後三時와 四時)오 祈禱文이 如左니 萬王의 王이신 하나님이시여 우리 韓國이 罪惡으로 沈淪에 드럿스 오직 하나님 밧게 빌 업사와 우리가 一時에 祈禱오니 韓國을 불샹히 녁이시 耶利 未亞와 以賽亞와 但以理의 自己나라 爲야 懇求을드르심 갓치 韓國올 救援사 全國人民으로 自己罪를 悔改고다 天國百姓이 되어 나라이하나임의 永遠 保護밧아 地球上에 獨立國이 確實케야쥬심을 耶穌의 일홈으로 비나니다.…” 위 기도문의 내용은 국가가 멸망에 처한 때 예레미야, 이사야, 다니엘이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했듯이, 한국 기독교인들도 회개하
폴링은 강경 출신 포목장사꾼 지병석을 전도해 1895년 여름 한강에서 침례를 베풀었고, 지병석의 권고를 받아들여 충청도로 선교지를 옮기기로 했다. 폴링은 강경과 공주에 선교 본부를 마련했고, 1896년 2월 9일에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교회를 세웠다. 1896년 4월 프레더릭 스테드맨(Frederick W. Steadman), 새디 에클스(Sadie Ackles), 알마 엘머(Arma Ellmer) 등 제2진 엘라씽선교사들이 내한하여 가세했다. 서울 내자동 선교 본부는 미남감리교 선교부에 매각했고, 감리교 선교부는 그곳에서 1898년 10월 배화학당을 시작했다. 씽 집사가 1900년 사망한 후 상속인들은 선교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 결과 엘라씽선교회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1901년 4월 한국선교를 종료하고, 펜윅에게 재산과 사역을 이양했다. 1906년에 이르러 전국에 31개의 교회들이 존재했고, 교회들은 그해 10월 6일 강경교회에서 제1차 대화회(총회)를 개최하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했다. 대한기독교회는 교단명을 여러 차례 바꿨다. 일본이 “대한”이라는 단어를 문제 삼자, 1921년 “동아기독교회”로 변경했다. 1933년에 ‘성별된 무리’를 뜻하는
길선주의 성령운동 이와 같이 초기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은 길선주에 의해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나게 됐다. 장대현교회는 1907년 1월에 북한 전역에 있는 열정적인 기독교인들을 모아 한 주간의 특별연차수양회를 가졌다. 1907년 1월 8일 주일 밤에 약 1500명의 신도들이 모여 마지막 집회를 갖고 있었지만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자, 이에 초조해진 길선주가 안타까워하며 간구했을 때 갑자기 성령의 뜨거운 불을 체험하였다. 내용인즉은 그가 자신의 친구 미망인의 재산 100달러를 사취했음에 대한 회개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수양회에 축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라고 외치며 눈물로 죄를 고백했다. 그러자 다른 성도들도 밤새도록 눈물로 회개하며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고, 무려 저녁 7시에 시작한 집회가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지속됐다. 요나단 고포트(Jonathan Goforth)는 이날의 놀라운 체험에 대하여 “이는 인간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해 주신 것”이라고 표현했다.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
그루뎀(Wayne Grudem)은 세 가지 유익을 언급한다. 첫째, 글로 기록된 성경은 다음 세대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비언어적 방식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보존할 수 있다. 그렇기에 모세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기록된 율법을 통해 그분을 경외하고 그분께 순종할 것을 요구했다(신31:11~13; 수 1:8). 둘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독자로 하여금 반복된 연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더 나은 이해와 더 온전한 순종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요 5:39; 딤후 2:15 참조). 셋째, 기록된 책으로서의 성경은 꿈이나 환상 혹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억이나 구전 전통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이후에도 특별 계시가 추가적으로 주어지고 있는가? 앞서 살펴보았듯, 특별 계시의 핵심 내용은 구속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와 구속받은 백성들에 대한 그분의 최종 계획에 대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뤄진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들의 연합에 대한 최종 계시의 책인 요한계시록이 정경의 마지막에 위치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전신인 대한기독교회는 일제강점기 교단 창설자 말콤 펜윅 선교사의 비정치적 신학의 영향으로 초교파적 항일운동에 소극적이었다. 교단은 민족주의에 기초한 독립운동이나 항일활동을 전개하지 않았으나, 친일을 결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반대로 성경적 진리와 복음주의 신앙을 지키는 과정에서 일제의 통치에 저항했고, 결과적으로 항일활동을 실행했다. 대한기독교회는 애국주의를 표방했으며, 일제의 통치가 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침해하는 경우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항거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는, 1)을사늑약 체결 직후인 1905년 11월 19일 장로교, 감리교와 함께 교단 연합구국기도회를 개최했고, 2)1906년 펜윅 작사의 애국가를 교인들에게 보급했으며, 3)1916년 「포교계」 제출을 거부해 수난을 당했고, 4)1930년대 신사참배를 지속적으로 반대해 박해를 받았으며, 5)1940년대 교단 폐쇄를 불사하면서도 예수 재림과 천년왕국 신앙을 고수했다.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전신인 대한기독교회는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대표적인 한국침례교 역사가 허긴 박사는 대한기독교회는 선교사 말콤 펜윅의 영향으로 1905년 을사
특별 계시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이 아닌 특별한 대상에게 일반 계시에서 얻을 수 없는 자신과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특별한 내용을 특별한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내신 진리를 의미한다. 특별 계시의 대상은 하나님의 선택된 언약 백성으로서 구약 시대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멜기세덱과 욥)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이었으며 신약 시대에는 교회의 성도들이다. 특별 계시의 내용으로는 자연과 인간의 양심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과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분의 형벌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한 죄사함과 칭의, 성령의 중생과 내주하심, 교회와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것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그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들의 소원대로 아버지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만 가능하다(마 11: 27; 요 17:3, 6~8, 23~25).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힌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베드로의 인간적 통찰력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임을 지적하셨다(마 16:17).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성부와 완전
아래 그림은 정체되어 있고, 점점 쇠퇴해 가는 교회는 기존의 형식화와 제도화에서 벗어나, 2단계의 무브먼트의 동력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무브먼트로의 회복은 단순한 개선이나 보완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뿌리로부터 완전히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된다. 스티브 애디슨은 사역(Ministry)과 무브먼트(Movements)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역은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 목표를 이루는 것이라면, 무브먼트는 내가 누군가를 도와 그로 하여금 목표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말씀으로 돌아가고, 성령으로 돌아가고, 사명(Mission)으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코로나19가 시작되던 2020년, 북미에서는 그 전부터 계속 증가하던 문닫는 교회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게 됐다. 30만개의 교회 중에서 앞으로 18개월 이내에 6만개의 교회들이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내다 봤고,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위기 속에서 교회가 점점 쇠퇴하고, 급기야 소멸되기 전에, 무브먼트를 회복해, 다시 부흥의 길을 가게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듯이, 무너진 성벽이 다시 회복되듯이 우리의 교회도 다시 회복되기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사의 회개 미국에서 1906년에 윌리엄 시무어에 의해 로스엔젤레스 아주사 거리(Azusa Street) 부흥집회에서 본격적으로 성령의 불길이 타올랐던 시기에, 한국은 1907년도에 평양에서 영적 대각성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어려운 나라 중 하나였다. 불교와 샤머니즘의 뿌리 깊은 전통 가운데서 외부 문화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한국 땅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1784년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서였다. 1866년 대원군 집권 당시에는 그 핍박이 극에 달해 약 8000명의 천주교 주교와 신부 그리고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했다. 최초의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선교사들이 인천 항구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천주교가 들어온 지 약 100년이 지난 후였다. 1884년에 장로교 선교사인 호레이스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나란히 한국 땅에 발을 디디게 됐다. 두 선교사는 모두 학생 자발운동 출신으로 같은 배를 타고 한국에 온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 선교사로서 이들보다 먼저 한국에 도착했으나 일찍이 순교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1865년에 영국 웨일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