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 다 돼가는 오늘 대전에서는 눈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이른바 ‘꽃샘추위’일진데 벚꽃위에 무심하게 내리는 눈이 가관이라 한컷을 남겼다. 파르르 떨다 못해 코 빠진 벚꽃잎이 봄바람에 흩날려보지도 못하고 때 모르는 진눈깨비에 애처롭게 부대끼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한라산의 때 아닌 눈꽃모습이 보인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아침마다 옷장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코트를 입을까, 봄 재킷을 입을까? 뭐, 마음이야 무겁고 두꺼운, 무엇보다 너무 입어서 지겨운 코트 대신에 가볍고 화사한 봄 재킷을 입고 싶지만, 섣부른 선택은 감기를 자초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꽃샘 때문이다. 예쁜 이름에 속으면 곤란해진다.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 이런 무시무시한 속담까지 있을 정도니까. 어쩌다가 거를 법도 한데 꽃샘추위는 꾸어다 해도 한다고 할 정도로 꽃이 필 무렵에는 꽃샘이, 잎이 필 무렵에는 잎샘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특히나 춘분 즈음에 꽃샘은 겨울 못지않게 매섭고 차기로 유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꽃샘바람의 실체는 소소리바람이다. ‘소소리’가 본래 ‘회오리’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어떤 시인이 ‘성깔 남은 바람’이라고 표현했던 시구가 절묘하게 느껴진다
결과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질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지고 하나님께 원망과 불만을 토하지 말자.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시대의 뛰어난 주인공이 되라. 혼인잔치 집에 손님이 되지 말라. 구경꾼도 되지 말라. 뒷일이나 처리하는 자도 되지 말라. 다만 그 집에 주인공이 돼야 한다. (시31:15)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음을 알자.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참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거짓되고 허망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추잡한 인생을 살지 말아야 한다. 알차고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텅빈 인생, 공허한 인생을 살이 말아야 한다.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인생,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바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버려야할 것들이 있다. 무기력한 사람은 생의 의욕이 없다. 적극적인 정신과 능동적 자세가 부족하다. 썩은 물고기가 탁류에 떠내려가듯이 인생을 무의도식 속에서 힘없이 살아간다. 그리스도인들은 맑은 눈과 기쁘고 환한 얼굴로 정열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또한 무관심한 사람은 삶의 목표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 무사안일 속에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의 대하여 열의가 없고 성의가 없다면, 불성실한 태도로
지난 주간에 성도님 한 분이 대전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서 성도 몇 분과 함께 심방을 다녀왔다. 심방을 다녀 온 후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환자의 상태가 나빠서가 아니고 함께 다녀오신 성도님 한 분 때문이었다. 그 분은 왕복 두 시간 반 동안 말씀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원래 평소에도 말씀이 없으셨던 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가 나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 성도님은 치매가 진행 중인 분이셨던 것이다. 육 개월 전에도 서울을 다녀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사이 치매가 더 진행된 것 같았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셔서 찬송가도 열심히 부르곤 해서 그 정도까지 진행되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는데 말씀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어쩌다 한 번씩 미소 짓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가만히 생각해보니 요 근래 그 분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배 끝나고 나가면서 나에게나 다른 성도들에게 건네던 인사말을 그냥 웃음으로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이 없어진다는 것은 치매의 대표적 증상 중의 하나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분은 우리 교회에서 그야말로 ‘기둥 같은’ 일꾼이었다. 그런데 삼 년여 전부
인생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가지고 한 번뿐인 생애를 보다 확고한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보람 있는 인생과 행복한 생애를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목표도 서있지 않고 삶의 자세도 확립되지 않을 때 보람 있는 인생을 살 수 없다. 세상은 너무나 급속히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반석위에 세운 집처럼 든든히 서 있어야 한다. 결단코 붕괴되지 않는다. 뿌리가 약한 나무는 바람에 쉽게 쓰러진다. 믿음이 깊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에 바람에 흔들린다. 말씀에 깊이가 없는 자, 기도의 깊이와 영교가 깊지 못할 때 육신의 바람에 넘어진다. 힘없는 집은 폭풍에 무너진다.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기도로 강한 자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불능하시다. 그러나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강하고 모진 바람이 몰아 처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진 환란과 시험 속에서도 만세반석처럼, 뿌리 깊은 나무처럼 늠름하게 서야 한다. 긍정적인 사고와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야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살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다. 기쁜 노래를 부르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며칠 전 국제선 항공에서 모기업의 임원이 승무원을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SNS에 퍼지면서 일파만파가 되었고 결국 그 임원은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사건은 지난 15일 인천공항을 출발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대한항공 국제선 항공기 안에서 벌어졌다. 대한항공에 따르면 당시 비즈니스석에 탑승한 포스코에너지 상무급 임원 A씨가 기내 서비스 등을 문제 삼아 여승무원에게 폭행을 행사했다. 이 사건이 20일 일부 언론에 보도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당시 상황을 정리한 것으로 추정되는 카카오톡 화면 갈무리 자료가 퍼지면서 파문이 확산됐다. 이 자료에 따르면 A씨는 탑승하자마자 자신의 옆자리가 비어있지 않은 것을 문제 삼기 시작해 아침식사 메뉴, 기내 온도 등 줄기차게 불만을 제기했다. 심지어 식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따로 삼각 김밥과 라면을 주문해놓고 라면이 제대로 익지 않았다며 수차례 다시 끓여오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급기야 A씨는 두 번째 식사 서비스 과정에서 읽고 있던 잡지책 모서리로 여승무원 눈두덩이 쪽을 때렸다. 그러나 기내 사무장이 가격 사실을 확인하려들자 자기가 책을 들고 있었는데 승무원이 와서 부딪혔다며 폭행 사실을 부인했다. 이 같은 일은
자기 길을 가는 사람도 처음부터 자기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다양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파란만장한 삶과 절치부심의 고뇌 끝에 자기 길을 찾은 것이다. 내가 걸어가는 길 ‘My Way’는 내 이야기 ‘My Story’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만의 고유한 역사(My History)를 축적해 나갈 때 생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방탕하게 시작해 방도에 이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나의 길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할 일은 대책 없이 ‘방탕(放蕩)’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방탕’은 방만(放漫), 방자(放恣)와 친구 사이다. 다시 말해서 가까운 사이라는 뜻이다. 맺고 끊는 데가 없이 제멋대로 풀어져 생활하는 ‘방만’이 ‘방탕’을 부채질 한다. ‘방탕’은 자만과 교만을 수준을 넘어 오만방자한 상태로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욕망을 쫓아 생활을 하는 것이다. ‘방탕’을 어느 정도 경험한 사람이 만나는 6방 시리즈 중에 두 번째 방은 바로 ‘방랑’이다. ‘방랑’은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표류(漂流)나 유랑(流浪)이다. 뚜렷한 목적의식 없는 떠돌이 생활이기에 그 끝도 쉽게 보이지 않는다. ‘방랑’은 방류
소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하 포차법)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4월 19일부로 법안을 발의한 3명의 국회위원 중 2명이 철회 의사를 밝혔음에도 현재 포차법과 관련한 논란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포차법은 분명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문제 즉, 기독교와 반기독교, 또는 기독교 내부의 대립으로 몰고 가려는 일련의 흐름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철회한 두 의원은 철회 이유를 법안의 문제점보다는 기독교의 집요하고도 악의적인 반대운동 때문이라고 밝혔고, 두 의원의 법안을 하나로 합쳐서 다시 발의하기로 했다. 일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 또한 ‘성경에는 동성애를 죄라 말하지 않는다’,‘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동성애 때문이 아니다’, ‘다른 종교에 구원이 없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 다시 논의해 봐야 한다는 기독교 내부의 목소리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등의 이유로 이 법안의 조속한 제정을 지속적으로 촉구하고 있는 실정이며, 법안을 발의한 의원들의 철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 법안을 반드시 올해 안에 국회에 상정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어 소위 포차법 논란은 앞으로 점점 더 가열될 것으로 보
아프리카 발톱개구리는 세상이 물과 진흙이라 생각한다. 팔마토게코 도마뱀은 세상이 모래와 이슬이라고 알고 있다. 북극 여우는 이 세상이 눈과 얼음 그리고 동굴이라고 믿고 있다. 만약에 아프리카 발톱 개구리와 팔마토게코 도마뱀과 북극 여우가 만나서 ‘이 세상이 무엇이냐’라는 주제로 공방을 펼친다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팔마토게코 도마뱀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살아온 세상을 설명한다고 해도, 또 북극 여우가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해도 자신이 보고 듣고 느껴온 세상을 벗어나기란 좀처럼 쉽지가 않아서 아마도 결론이라는 것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세상밖에는 알지 못하니까. 그것을 기준으로 설명하고 듣고 느끼면서 상상할 수 밖에 없을 테니까.어쩌면 갈등이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아무도 속임수를 쓰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진 것뿐인데 그런데도 갈등은 시작되고 싸움은 벌어질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서만 안다. 그러니까 내가 ‘안다’라고 믿고 있는 건 그냥 ‘내가 아는 것’만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내가 아는 것’만 ‘아는 것’이 옳지 못하다면 우리들의
옛날 어느 고을에 시어머니의 등살에 못살겠다는 며느리가 집안 아저씨께 자기의 고충을 하소연했다. 아저씨는 며느리에게 약을 몇첩 지어주면서, “이 약을 달여 드리면 시어머니의 수명이 단축될 것이니 마지막으로 공을 들여 모셔 보라”고 말하며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돌아온 며느리는 열심히 달여 드렸고 아저씨가 일러준 대로 공손히 받들면서 공양을 했다.그런데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시어머니는 더욱 건강해졌고 며느리의 변한 모습을 보고 온 동네에 다니면서 며느리 애기를 했다. 들려오는 소식은 늘 며느리를 칭찬하는 말 뿐이었다. 예전과는 달리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즐거워진 며느리는 다시 아저씨를 찾아갔다. “우리 시어머니가 더 오래 사셔야겠어요”하며 이번에는 보약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랬더니 아저씨는 사실 지난 번에 준 그 약이 바로 보약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무서운 병을 앓고 있는 한 여 성도가 있었다. 그 성도는 병을 고치기 위해 여러 병원을 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방간 목사님이 물었다. “누구를 심하게 미워하고 있습니까?” 그제서야 심한 통곡을 하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목사님 사실 저는 제 남편을 죽이고 싶을만큼 미워합니다. 미워하면 기도가 막히는 것을
몇 주 전 결혼 주례를 하면서 남다른 느낌이 들었다. 신랑과 신부가 입장하는 장면을 보면서 신랑이 입장하는 순서에는 하객들이 별 반응이 없다. 웃기도 하고 가벼운 조크를 하기도하는 것이 다였지만 신부가 입장하는 순서에는 사뭇 달랐다. 갑자기 신랑에게 비추이지 않던 조명이 켜지고 음악이 흘러나오고 하객들의 뜨거운 박수와 함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주님 구원사역 완성하시는 날 주님 나라 혼인잔치에 참예하게 될 신부된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며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아! 이게 교회구로구나! 신랑 되신 예수님 자신보다도 신부된 교회를 더 아름답게 세우시고 싶어 하시는 주님 의 마음을 묵상하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큰 기쁨이 샘처럼 솟아오른다.작금에 한국교회를 말할 때 위기라고 말한다. 교인 수에서도 부흥은 안 되고 오히려 정체에서 수직으로 급감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목회자 자신들도 많이 의기소침해 있다. 신학교를 졸업한 전도사들도 교회개척은 꿈도 꾸지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는 것을 주변에서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마음의 추스르고 믿음의 눈으로 교회를 보자. 이 우주의 역사는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