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신경)들 가운데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은 정확하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 어떤 공의회(종교회의)에서 결정됐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위에 언급된 신조들의 영향을 받아 4~5세기경에 형성되기 시작했고 약 8세기 중반 경에 그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열두제자들이 한 문장씩 진술했던 것들을 모아서 사도신경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신경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주장은 문헌적 역사적 증거가 전혀 없는 전설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유럽의 북방지역으로부터 남하한 야만인들(Barbarians)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서, 사도신경은 그들에게 기독교신앙을 요약해서 가르치는데 있어서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중세시대에 로마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성경이었던 “라틴 벌게이트”(Latin Vulgate)를 직접 읽을 수 없었던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사도신경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기독교복음의 내용을 잘 요약해 주고 있기 때문에 당시 성도들의 신앙과 신앙생활에 좋은 안내자 역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장 5절의 말씀입니다.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거리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마구 말하지 않고 마구 행동하지 않는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제주도에 가보면 엉성해 보이는 구멍 숭숭한 돌담들이 있습니다. 이 돌담은 거센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바로 구멍의 간격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좋은 간격이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 간격으로 바람이 지나갈 때 늘 신선합니다. 지구가 태양을 사랑한다고 하여 뛰어든다면, 달이 지구가 좋다고 달려와 안긴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별빛이 고운 것은 그 빛이 아주 멀리서,아주 오래 전에 출발해 지금의 우리 눈에 닿았기 때문입니다. 별이 지척에 있었다면 우리는 그것이 한갓 돌멩이에 불과하다고 업신여겼을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거리가 있을 때 보게 됩니다. 건축물의 기둥들도 서로 좋은 거리를 두며 세워져 벽과 지붕을 받치고 있습니다. 별과 별 사이에도, 꽃과 꽃 사이에도, 나무와 나무 사이에도 간격이 있어 서로 자라듯이 당신과 나 사이의 ‘아름다운 거리’가 아름다움을 만듭니다. 칼릴 지브란은
세상 사람들의 죄의 기준은 자신들이 만든 법을 기준으로 합니다. 이 법을 지키면 선이 되고, 어기면 죄가 됩니다. 즉, 법을 지키면 의인이 되고 법을 어기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제정하신 법을 기준으로 하여 볼 때면 가장 낮은 차원의 선인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이 정당성을 근거로 제정한 법이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 사례로, 이 지구상에는 동성애를 합법화로 규정해 놓은 나라가 24개국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 보기에는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는 큰 죄로 여겨지는 것도 있습니다. 2018년 봄에 있었던 일입니다. 서울에서 KTX를 타고 천안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변호사 출신 국회의원과 함께 동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법대에 들어가기도 어려운데 그는 엄청난 과정 속에 변호사가 됐고, 또한 현재 국회의원직을 맡아 일하고 있는 그가 새삼 달리 보였습니다. 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전문성이 있는 그였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법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서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
그렇다면 한국 침례교회의 설교는 어떠한가? 한국 침례교회는 성경을 신앙생활의 최우선으로 하는 신앙고백이 있다. 하지만 강대상에서 그날 예배 중 봉독한 성경 본문 말씀을 얼마나 진지하고 효과적으로 설명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침례교회의 성경중심의 신앙전통을 유지하고, 본문 설명이 설교 중 잘 되지 않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본문이 이끄는 설교(Text-driven Preaching)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힘쓰는 설교 운동이다. 강해설교와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동의어이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청중들이 본문 밖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안내하는 설교이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본문에 더욱 충실한 설교를 지향하므로 본문 설명을 더욱 강조한다. 그렇다면 본문이 이끄는 설교가 위에서 제기된 현대 설교에서 본문 설명을 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하여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 위에서 제기된 설교 중 본문 설명이 잘 되지 않은 두 가지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결점을 제시한다. 첫째로,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성경의 충분성에 대한 확신이 있다.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교 설교대학원 학장인 데이빗 알
특별히 노인목회는 영혼구원을 목표로 하는 동시에 지역과 주민들에게 봉사와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영적인 필요를 공급하는 사역으로 진행돼야 한다. 노인목회는 궁극적으로 기도와 말씀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우며 목회적인 노력을 통해 영적 필요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인도되도록 영적공급을 제공하는 사역이 돼야 한다. 노인목회는 신앙훈련을 통해 영적 필요를 제공하며 여기에 더해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인생을 회고하고 정리하며 죽음에 대한 의미와 경험에 대처하도록 도와야 한다. 인생을 평가하고 점검하며 보완함을 통해 조금 더 만족스러운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우며 나아가 죽음을 초월하는 삶의 소망을 제시해 생활의 방향성을 긍정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교회는 노인사역을 통해 인생을 통합하도록 도우며 구원의 확신과 영생의 소망을 제시하고 죽음에 대비해 현세를 살아가도록 인도하며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의 삶과 천국의 소망을 연결시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 3) 인생을 재설계를 위한 재교육 최윤식은 고령화가 몰고 올 한국교회의 위기를 예측하며, 은퇴 후 새로운 삶의 목표를 설계하는 일의 중요성을 교회가 인지하는데
침례교인들(Baptists, Baptist Christians)에게 붙여져 있는 몇 가지 별명들이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그 책의 사람들”(People of The Book)이라고 불립니다. 물론 여기서 “그 책”은 성경책을 의미합니다. 구·신약 성경 66권을 신앙과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권위로 여기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침례교회들이 밀집해 있는 미국의 남부와 남서부 지역을 “Bible Belt”(성경대, 聖經帶)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20세기 중반기에 크게 활약했던 침례교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설교 중에 “성경이 말씀하기를”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침례교인들은 성경을 “오류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권위”로 믿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의 핵심구호였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문자 그대로 충실하게 믿는 것이지요. “그 책의 사람들”이라는 말과 밀접하게 연관된 또 다른 별명은 “신앙고백들의 사람들”(People of the Confessions)이라는 말입니다. 침례교역사에서 침례교인들은 많은 신앙고백들을 작성하고 채택해 발표했습니다. 영국과 미
“흔들리는 풀잎이 / 내게 시 한 구절을 준다 / 하늘이 안 무너지는 건 / 우리들 때문이에요, 하고 / 풀잎들은 / 그 푸른 빛을 다해 흔들림을 다해 / 광채나는 목소리를 뿜어 올린다 / 내 눈을 두 방울 큰 이슬로 만든다.” 정현종 님의 시 ‘광채나는 목소리로 풀잎은’입니다. 하늘이 안 무너지는 건 철인(哲人)들의 고매함 때문이 아니라, 여린 풀잎들이 그 푸른 빛을 다하고, 흔들림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질서 있게 유영하는 것은, 지구를 떠받치고 있다는 거인(巨人) 아틀라스의 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여린 풀잎같은 당신이 이름 없고 빛도 없는 곳에서 쏟고 있는 사랑의 섬김 때문입니다. 시인 안도현님의 시 ‘외로울 땐 외로워하자’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여름날 산과 들이 온통 푸르름으로 가득 차게 되는 까닭은 아주 작은 풀잎 하나,아주 작은 나뭇잎 한 장이 푸르름을 손 안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날 눈 덮인 들판이 따뜻한 이불처럼 보이는 것은, 아주 작은 눈송이들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어깨를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조화롭게 이루고 있는 것은 거창하게 큰 것들이 아니라, 한 포기 풀,한 그루 나무,한
어떻게 교회를 생명력 있게 할 것인가? 어떠한 교회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 탈봇 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을 가르치는 게리 멕킨토시 박사는 건전하고 생명력 있는 교회 성장을 위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최대한 헌신하고 믿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정적으로 소통하는 교회는 성경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는 건강한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인도하심을 분명하게 따르기 위해서 주의 몸 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적으로 건실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생명력 있는 메시지로 채워진 설교가 영적 공동체 가운데 선포돼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말씀이다. 따라서 주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공급을 받고 가르침을 따를 때 영적 생명력이 나타나게 된다(시1:1~3; 사55:11; 요5:39; 행20:32; 살전2:13; 딤후3:16~17; 벧전1:23; 벧후1:2~4; 히4:
3) 공경과 섬김의 대상 성경은 노인의 삶과 희생을 존중하며 공경할 것을 가르치는데 노인에 대한 공경은 가정(출 20:12)에서 시작돼 사회 전반(레 19:32)으로 확대되는 명령으로 설명한다. 성경은 가정과 교회가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유산을 물려받으며 성장했기에 그들의 수고를 기억하며 사랑과 존경의 대상으로 섬길 것을 강조한다. 인간의 노화가 인생에 있어서 필연적인 과정임을 감안할 때 생물학적으로 노인의 시기는 기억력이 감소되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쇠약해지는 상실의 시기이기에 보호와 돌봄의 필요한 대상으로 간주해야 한다. 신앙공동체는 노인이 육체적, 정서적인 변화에 두려움을 경험하며 사회로부터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지하고 지혜와 축복의 전달자로서 노인의 삶의 가치를 존중하는 동시에 그들에 대한 관심과 책임을 당부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연약한 자들과 어려움에 놓인 이들을 돌보는 사명은 성경 전반에 나타난 사상이며 대표적으로 과부나 노약자에 대한 섬김과 공경은 신앙의 기본자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딤전 5:3~4). 이와 같이 성경은 신앙공동체에 노인을 돌보는 사역이 일임되어 있음을 가르친다. 또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도우
“그가 길거리 악사 차림으로 워싱턴 시 랑팡 플라자 역에서 연주했다. 바흐의 샤콘 D단조와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등, 여러 사람들이 좋아할 곡만을 45분간이나 연주했다. 1097명이 그의 앞을 지나갔지만 7명만이 잠시 서서 경청해 주었고, 단 한 명만이 그를 알아봐 주었을 뿐이다. 그의 발밑에 놓아둔 상자엔 고작 32달러가 들어 있었다.” 신문에 소개된 죠수아 벨의 일화입니다. 분당 1500 달러를 웃도는 개런티, 200 달러의 입장료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죠수아 벨. 그러나 랑팡 역에서는 그저 싸구려 거리의 악사일 뿐이었습니다. “용유천수조하희 (龍游淺水遭蝦戱) 호락평양피견기 (虎落平陽被犬欺)” (용이 개천에서 놀면 새우의 조롱을 받고,호랑이가 평지에 가면 개한테 속는다) ‘서유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용이 개천에서 놀면 새우가 맞먹자고 장난칩니다. 호랑이가 평지에 가면 개가 그를 사촌 형님 쯤으로 생각합니다. 천하의 용(龍)과 호랑이라도 자기를 알아주지 못하는 곳에 있으면 험한 꼴을 당합니다. “귀 명창이 있어야 명창(名唱)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가는 대가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날 때 잠룡(潛龍)에서 벗어나 비로소 승천하는 용
그렇다면 한국 침례교회의 설교는 어떠한가? 한국 침례교회는 성경을 신앙생활의 최우선으로 하는 신앙고백이 있다. 하지만 강대상에서 그날 예배 중 봉독한 성경 본문 말씀을 얼마나 진지하고 효과적으로 설명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침례교회의 성경중심의 신앙전통을 유지하고, 본문 설명이 설교 중 잘 되지 않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힘쓰는 설교 운동이다. 강해설교와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동의어이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청중들이 본문 밖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안내하는 설교이다.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본문에 더욱 충실한 설교를 지향하므로 본문 설명을 더욱 강조한다. 그렇다면 본문이 이끄는 설교가 위에서 제기된 현대 설교에서 본문 설명을 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하여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 위에서 제기된 설교 중 본문 설명이 잘 되지 않은 두 가지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결점을 제시한다. 첫째로, 본문이 이끄는 설교는 성경의 충분성에 대한 확신이 있다. 사우스웨스턴 침례신학교 설교대학원 학장인 데이빗 알렌 박사는 “본문이 이끄는 설교의 가장 중
특히 우리나라 평신도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자기주도적 성향이 그리 강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개인과 상황에 따라 페다고지와 안드라고지의 원리를 융통성 있게 조합하여 접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4. 평신도의 자기주도적 학습 성경적 교회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구현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특히 교회 구성원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이 성경적 교회관에 대한 확신을 해야 교회가 올바로 세워져 갈 수 있다. 결국 성경에서 멀어진 잘못된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의 시작은 성경적 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실로 평신도신학의 구현을 위한 실천과 행동은 성경적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확신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이 어려운 과제를 위해 평신도들은 자기주도적 노력을 치열하게 해야 할 것이다. 옥한흠을 비롯한 많은 선각자가 평신도를 ‘깨우는’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평신도들이 스스로 잠에서 ‘깨어나는’ 노력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특히 성경적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배움의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성인교육에서는 학습의 자발성을 하나의 대원칙으로 강조하고 있다. 자기주도적 학습자로서 성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입니다. 짧은 문장으로 긴 울림을 주는 시입니다. 1991년 이후 서울 광화문의 교보생명 본사 건물에 걸린 ‘광화문 글판’ 가운데 사람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가까이 자세히 그리고 깊고 오래 가야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습니다. ‘만남’이 있고 ‘스침’이 있습니다. 만남이 깊어지지 않고 인격의 변화가 없을 때, 만남은 스침이 됩니다. 음식을 씹지 않으면 소화 불량에 걸리고, 글도 음미하지 않으면 그저 의미 없는 낱말의 나열일 뿐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당신이 대상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것이다.”(If your photograph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 수 많은 광고 카피로도 쓰이고 있는 이 고백은 전설적인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의 사진 철학입니다. 그는 포토저널리스트로서 그 시대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담아내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대상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는 1954년 41세의 나이로 인도차이나전을 취재
교단 총회로부터 목회 근속 30년 공로패를 받았다. 나로선 그것이 감사했고, 또한 한 교회에서 30년 넘게 목회했다는 게 매우 자랑스러웠다. 전도사로 개척교회를 시작했을 때 선배 목사님이 10년을 인내하면서 목회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라며 열심히 하라고 권면해줬을 때 그렇게 오랫동안은 할 자신감이 없었다. 예전의 교편생활을 뒤돌아보니 전근을 자주 다녔었다. 심한 방랑벽 탓으로 1년, 2년, 심지어는 부임한지 6개월 만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겠다고 신청서를 제출한 적도 있었다. 그랬더니 교직원 회의석상에서 교장으로부터 호되게 책망을 받았다. 옛날엔 머슴도 남의 집에서 3년은 일해주고 옮기는데 교사가 교육관이 얼마나 잘못 됐기에 6개월만에 전근가겠다고 경거망동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교장이 전근 신청서를 받아주지 않음으로 그 학교에서 4년 6개월을 근무했다. 내가 한 교회에서 30년 넘게 목회할 수 있었음은 부흥 성장이 잘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온갖 어려움과 시련이 계속됐다. 그 중에 이런 일례로 개척한지 3년이 지나니 구역모임이 4개나 생겨났다. 더 열심히 하면 교인 수도 늘어나고 직분자들도 더 많이 세워질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어느 무렵
대부분 노인들만 있는 시골에서, 매일 학교를 마치고 센터에 오는 29명의 아이들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지역아동센터라는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아동들이 대부분 가정 형편과 처지가 열악한 아동들이다. 그래도 핵가족 시대에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며 어느 땐 웃기도 하고, 어느 땐 서로 사소한 다툼으로 얼굴을 붉히기도 하지만 공동체 생활을 익혀 나가며 밝게 웃는 모습에 함께 행복하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는 아동에게 “그럼 계속 같이 생활할 수 없어”라고 꾸지람을 했다. 그런데 대뜸 “그럼 나 안 올 테니 내 밥 값 줘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 말에 할 말을 잃고 멍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아이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집에서 부모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을 테고, 그것이 말로 나온 것일 것이다. 자기가 빠지면 밥 값이 남으니 달라는 말이다. 아동이 빠지면 식비도 청구할 수 없다는 생각은 못한 것이다. 오래 전 목회를 하며 교회 건물과 교회 마당을 일주일에 하루만 사용하는 것이 안타까워 시작한 것이 아동복지시설이었다. 매일 아이들이 교회 마당에서 놀고 교회 건물을 사용하게 되고 그러면서 아이들을 만나는 기회가 되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