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회의 시작과 관련해서 여러 많은 해석과 주장들이 있었지만 우리 교단에서 대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학설은 크게 3가지로 보고 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세우신 신약교회가 최초의 침례교회였다는 계승설과 영국 청교도 가운데 분리파들이 성경연구를 통해 시작했다는 영국 청교도 분리파 후예설, 마지막으로 침례교회를 세운 영국인들이 재침례교회의 신앙과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세운 재침례교 영향설이다. 이와 관련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지만 이를 통해 침례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해 온 것은 사실이다. 이번에 발간된 세계 침례교회사(김용국 저,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37000원)는 침례교회의 뿌리와 함께 침례교회의 역사를 영국과 미국, 유럽대륙, 한국을 중심으로 비중있게 다뤘다. 이에 본보는 침신대 김용국 교수(사진·신학과)에게 이번 책에 대한 궁금한 점을 들어봤다. ◇세계 침례교회에 대해 어려운 일을 하셨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정리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 “과찬의 말씀이지만 칭찬을 해주시니 힘이 납니다. 이번 책을 출판한 것은 신학교 교재로 사용하는 것과 동시에 침례교 목회자에게 침례교회 역사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여겨 집필하게 됐습니다.” ◇ 침
1950년대에 초등학교에서는 회충 제거 약을 무료로 공급해 줬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변변치 못한 영양섭취에 그놈의 회충이 갉아먹으니 아이들의 얼굴은 거의 노랑 색깔이었다. 그때 학생들에게 나눠주신 알약은 대게 5개 정도였다. 저녁은 굶고 밤에 회충약 5개를 다 먹고 아침에 회충이 몇 마리가 나왔는지 담임선생님에게 필히 보고케 했다. 홍길동? 6마리요. 김춘배? 4마리요. 박석태? 10마리요. 권혁봉 2마리요. 출석부를 보고 호명하고 결과 보고를 듣는 장면이 일제말엽 잔재 군국주의 시대의 끝머리임이 틀림없다. 학생들은 약간 창피스럽게도 여겨지지만 어떤 경우에는 많이 나왔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내 경우엔 어머님의 의학 지식이 문제였다. 어머님은 회충이란 놈이 배 안에 있어서 식욕을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그놈이 밥 먹자고 하니 식욕이 당겨서 밥을 많이 먹게 되는데 만약 회충이 싹 죽어 없어지면 식욕감퇴가 된다는 것이 어머님의 의학지식이었다. 그러니 회충 한 마리 정도는 둬야만 식욕도 당기고 또 그놈이 씨를 퍼트려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참으로 우습고 가엾은 어머님의 의학지식에 따라 나는 5개 중 1개의 알약은 먹지 않았다. 이런 의학지식은 나의 어머니뿐만 아니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라고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서신 서두에 말씀했다. 옛날 읽은 십자가의 글이 떠오른다. 영국 에딘버러(Edinburgh)시의 프린스 거리에 있는 어떤 예술품 가게에 한 신사가 십자가의 그림 앞에 움직이지 않았다. 십자가의 그림을 보며 움직이지 않는 것은 십자가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바람에 그에게 치밀어오는 고통을 감내하며 참고 있었다. 그 때 한 거지 아이가 옆에 서서 지켜보며 십자가의 예수님에 대하여 얘기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사람은 예수님이고 죄 없이 양손과 양발에 대못으로 박히고 머리엔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고 있지요! 그 앞에서 눈물로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와 여인들이 함께 있지요. 죄 없으신 예수는 나를 위해 돌아가셨고 여기 모인 우리들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지요!” 듣고 있던 신사는 감격에 찬 거지의 차분한 얘기에 큰 깨달음을 받고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게 된 후에 복음의 증인이 됐다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3절 전반부 평행하는 구절의 처음 두 단어는 동일하다. 마소라 본문의 첫 단어인 ‘바티흐바드’(וַתִּכְבַּד)는 그 동사 원형의 뜻이 ‘무겁다’이고, 두 번째 단어인 ‘밀하마’(מִלְחָמָה)는 그 뜻이 ‘싸움’이다. 연구자가 직역에 가까운 번역을 하자면 “싸움이 버거웠다”로 볼 수 있다. 위 대부분의 번역도 서로 간에 크게 벗어나지 않은 번역을 하고 있다: “치열해지다”, “격렬해지다”. “press hard upon”, “grow fierce”, “go sore against”, “go hard against”, “wurden hart gegen.” 다만 개역개정의 “패전하다”는 지나치게 의역한 경우다. NRSV의 “press hard upon”이 연구자의 사역과 가장 가까운 번역이다. 세 번째 단어에서는 ‘사울’앞에 붙는 전치사에 차이가 보인다. 사무엘상 31장 3절에서는 ‘엘’(אֶל), ‘~에게’이며, 역대상 10장 3절에서는 ‘알’(עַל), ‘~맞서(against)/ ~위에(upon)’이다. 사울에게 닥친 싸움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뉘앙스의 세밀한 차이를 살리자면, 전자는 “싸움이 사울에게 버거웠다”, 후자
마지막으로 기술의 결합과 정보통신에 의한 영향력이 인간의 본질적 모습과 정체성에 어떠한 결과를 미칠지 주목하며 지속적인 담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에서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발전은 우리에게 편리함과 효율성을 증가시키는 순기능을 감당하는데 반해 정보와 기술을 소유한 집단에 의한 왜곡현상과 빠르고 복잡한 기술의 변화에 동참하지 못하거나 소외됨으로 인해 발생하는 정서적, 정신적 문제의 위험을 동반하는 역기능이 나타난다. 4차 산업혁명의 기술 중심주의 행동양식은 기계적으로 산술화된 모델을 인간의 행동방식과 삶에 적용시키려는 시도에서 그 위험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가치와 역량을 삶의 총체적인 관점에 근거해 판단하기보다는 조직이 정해놓은 기계적인 산출근거에 의해 평가해 기계와 같이 획일적으로 동기화함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목적과 추구하는 가치와 상치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기술의 활용과 발전은 사람이 수단이 되어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아야 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을 위한 성경적 의미의 수단과 연결될 때 그 가치와 의미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발달은 인류 역사의 진보에 기여하는 목적을 추구
상담사로서 매년 자격증 재발급을 위해 들어야 하는 과목 중 하나가 윤리학(ethics)이다. 상담을 하면서 옳고 그른 것도 구분을 못해서 매년 수업을 반복해야 하는가, 이 재미없는 과목을 굳이 또 들어야 하는가 투덜대기도 한다. 하지만 해를 거듭해 갈수록 윤리적 삶의 강조가 상담과 사역에 얼마나 중요한지 통감하곤 한다. 아주 약간의 판단 착오가 내담자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도 있고, 잠깐의 느슨함이 법정 싸움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담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목회자에게도 마찬가지의 윤리 강령이 적용된다. 돕고자 하는 선한 의도로 시작된 상담이 자칫하면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기본윤리는 물론 성경이 기준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주님 앞에 어떤 모습이 바른가는 우리를 디자인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정확한 기준을 제공한다. 그래서 윤리학은 이미 말씀에 뿌리를 둔다. 하지만 상담의 윤리강령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상황에 조금 더 구체적이고 법률적인 틀을 제공한다. 상담의 윤리학에서 가장 강조되는 원리 중 하나는 비밀유지(confidentiality)의 원칙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같지만 비밀
요한의 인자 기독론(5)에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비판하는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상황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변호하기 위해 하신 인자 말씀에 담긴 의미를 살펴봤다. 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죄 가운데서 태어나서 죄 가운데서 죽고 멸망하는 존재라는 것과 그들은 인자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야 예수님이 바로 그 인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이번에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마감하는 상황에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사건과 관련해 하신 예수님의 인자 말씀의 의미를 살펴본다. 헬라인들이 찾아왔다는 제자들의 보고를 받은 예수님은 그의 사역의 궁극적 국면 곧 그의 죽음을 언급하는 기회로 삼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 예수님은 헬라인들의 요청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 대신 그것에 의해 촉발된 상황에 관한 신학적 해석을 제시한다. 예수님이 그들의 요청을 거절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헬라인들에게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의 길을 통과해 가셔야 한다(11:24). 지금까지 예수님은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해오셨다(2:4
아내와 나는 요사이 사사기서를 시작하는 아침 QT를 하고 있었다. 본문을 읽고 약간의 해설을 나눈 뒤 기도로 들어갔다. 내가 처음 시작한 기도는 아래와 같았다.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나라가 극히 위험한 상태에 놓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마치 태풍 앞에 흔들리는 촛불 같습니다. 이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제발 보호해 주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기도 중인데 아내가 막무가내로 덤벼들었다. “왜 촛불을 보호해 달라는 거요, 촛불은 꺼져야 돼요.” 나는 당황했다. 기도 도중에 이거 무슨 변이냐 싶어서 눈을 뜨고 아내를 바라봤다. “예수 이름으로 이만 기도드립니다.”라는 마무리도 못한 채 나는 아내에게 “왜 촛불이 꺼져야만 되나요.”라고 하니 아내가 서슴지 않고 말을 받았다. “광화문에 가보세요. 태극기와 촛불이 싸우지 않소.” 나는 아내의 첫 발언에 아차 이거 시사 문제구나 하고 느꼈다. 평상시 이미 알고 있지만 아내는 소위 우파에 속하는 국민의 한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나는 좌파에 속한 국민의 한 사람도 아니지만. 아내는 나의 오늘 기도가 썩 잘못된 것이라는 자기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아내는 촛불은 좌파들의 상징이고 그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의 이 말씀을 대학 시절에 세상사와 인류 역사로 살펴볼 때, 납득이 잘 되지 않는 메시야 예수의 말씀이었다. 이 세상의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나 학생들이나 직장인들과 정치인이나 모든 사람들 중에 우선 나부터 섬기기에 대접받기를 마땅하게 좋아하며 기뻐하지 않았든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아와서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는가?”로 물으니 그들은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소서”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주님 곁에 가장 가까이 섬겼기에 좌우에 앉는 자리를 요구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알지 못하는구나. 나의 좌우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고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는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대답하셨다. 이러한 대화를 들은 열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을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나의 주일 설교에 대해서 시시콜콜 따지는 교인이 있었다. 어느 주일에는 “목사님은 외국에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줄 아는데 어떻게 외국 얘기를 합니까?” 황 집사의 당돌한 질문에 기분이 나빴지만 절제하며 이렇게 응수해줬다. “그러니 집사님이 나를 외국 구경시켜주면 되잖아요. 덕분에 국제선 여객기 타봅시다” 그 다음 주일 중소기업의 상무이지만 비교적 경제적인 형편이 좋았던 그가 ‘목회자 외국 여행 헌금’을 150만원 해줬다. 그 돈으로 첫 번째 여행을 했던 곳이 이스라엘이었다. 나는 목회자들의 적당한 국, 내외 여행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행을 함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으며 그것을 여러 면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구약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목회자나 직분자들의 경우엔 흔히들 말하는 이스라엘 성지 순례는 필수적인 코스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선배인 B 목사님의 경우 모처럼 이스라엘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한다. 평신도로 교회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남자 집사님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단호히 “이 상황에선 여행을 해선 안되죠”라고 반대하더라는 것이었다. ‘이 상황’이란 그 동
마스크 전쟁이라고 하듯이 마스크 하나 더 사려고 줄을 서야 하는 모습이 씁쓸하다. 꼭 필요하다면 모르지만, 없으면 불안한 마음에 몇 개라도 여분을 소유하려고 하는 마음이라면 더 많은 것을 나누지는 못하는 대신에 작은 섬김의 시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긴장하게 만들고 있는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이상한 말까지 생겨났다. 그렇지 않아도 점점 개인주의로 가고 있는 시대에 이제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려야 하는 일까지 생겨 더욱 외로워지고 있다. 도시도 마찬가지겠지만 농어촌의 시골에서 연세가 드신 분들에게 마을회관은 자녀들 집보다 더 좋고 포근한 곳이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마을회관의 문을 닫고 모일 수 없게 됐다. 매일 회관에 모여 이야기도 하고 텔레비전도 보다 때가 되면 식사를 같이하는 곳이다. 가족들이 있으면 어쩔 수 없이라도 챙겨 드시겠지만, 집에 혼자 있으면 귀찮아서라도 건너 뛰거나 대충 드실 텐데 같이 모여 수다를 떨며 한끼라도 거뜬하게 드시는 곳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모일 수 없이 되어 안타까움을 주는 때에 교회에서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식사하실 수 있도록 섬김의 기회를 만들었다. 교회가 있는 마을에
까다롭고, 힘든 사람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 11:16) 행복할 것만 같았던 결혼 초기의 삶은 예상을 뒤집고 가시밭길을 동행하는 듯했습니다. 각자가 선호하는 음식의 차이점부터 시작해서 서로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거기에다가 개성들은 얼마나 강한지 늘 전시 상태를 방불케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죽하면 당시에 잠언 21장 9절에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라는 말씀이 은혜가 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에 저는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던지라 그때를 회상해 보면 생존 자체가 기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기에 믿음으로 어렵사리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직 사는 길은 “앞으로 돌격” 외에는 답이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학업과 물질은 둘째 문제였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가정의 화목이 우선인 듯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안에서 그 해답을 찾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이 맺어주신 배우자이기에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하나님께선 함께 주셨을
마지막으로 4차 산업혁명시대의 기술과 문명에 적응한 이들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요구에 기울이고 이들의 필요에 대한 자료를 모아 사역에 접목하는 목회전략이 요구된다. 3) 연결과 융합에 대한 전략 4차 산업혁명의 혁신적인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발달은 인간과 사물의 연결을 지속시킬 것이며 산업의 전반에 걸친 영역으로 확대돼 1차, 2차, 3차 산업과의 융합을 이루며 더욱 광범위하게 일어날 것이다. 기술과 정보를 통해 사람과 사물의 융합이 이뤄지고 연결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협력과 소통이 요구되는 4차 산업혁명의 상황에서 급변하는 영향력이 교회에 미칠 현실을 고려할 때 교회는 연결과 융합의 문제에 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다양한 이들이 공존하는 교회는 변화를 교회에 접목할 때 발생 가능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성경의 원리에 입각한 소통문화와 방법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며 협력을 통해 융합에 대한 논의를 이뤄나가야 할 것이다. 기대되는 융합의 과정은 대형교회의 전략을 모방하고 답습하는 형태가 아닌 물적, 인적자원의 풍부하고 목회에 대한 자료가 다양한 대형교회 전략과 세심함과 창조적 정신이 강한 개척교회의 특성이 조화를 이루는
성경의 여러 책들 가운데에는 서로 간에 ‘평행’(平行, paralleled) 혹은 ‘공관’(共觀, synoptic) 하는 본문들이 있다. 어떤 사건이나 어록이 한 책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책에도 같이 등장하는 경우, 그 본문들을 평행 혹은 공관 본문들이라 일컫는다. 아마도 성서 독자들에게 ‘공관복음’이라는 용어가 익숙할 것이다.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 중,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서가 서로 매우 유사한 평행 본문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세 권을 공관복음서(Synoptic Gospels) 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 세권은 같은 역사적 자료나 전승에서 비롯됐거나 이들을 공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관복음서의 평행 본문들 간에 쉽게 보이는 것처럼, 평행 본문이라고 하여 꼭 서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작아도 분명한 차이가 보이기 때문에, 이런 변이는 성서 독자들과 연구자들의 탐구 대상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장 3절)라는 구절은, 평행 본문인 누가복음에서는 “심령”(마음)이라는 단어가 빠진 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누가복음 6장 20절)로 적혀있다. 이런 차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개별적인
최근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박쥐로부터 발생한 눈에 보이지 않는 크기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하면 입에서 10만 개나 튀어나오고, 보통으로 말해도 수만개나 나온다고 한다. 이것이 공기 중에 떠돌고 있어도 20분간은 죽지 않는다고 했다. 떠돌던 침의 균인 코로나가 호흡기로 들어가면 거기서 감염원이 됨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공간엔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종말 예언을 하신 말씀 중에 온역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다.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12) 유대인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Josephus)의 사기에도 예루살렘의 함락 이전에도 실제로 기근과 온역이 있었다고 했다. 역사 속에서 지난 1238년에 발생해 유럽을 휩쓴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1/3까지 감염되어 7500만의 사상자를 낸 비극의 역사가 떠오른다. 유럽교회가 앞장 서서 저들의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회복한 것처럼, 오늘 먼저 나와 우리도 통곡하며 금식하며 회개하고 기도하여 이 온역의 환란을 극복해야 하겠다. “환난날에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