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대성당 앞에 한 눈 먼 거지 소녀가 있었습니다. ‘저는 눈이 멀었습니다. 한 푼 주십시오’라고 적힌 푯말을 들고 적선을 했지만, 다들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어떤 남자가 다가와서 그 푯말에다 몇 마디를 써주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소녀에게 돈을 주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그가 써 넣은 문장은 이러했습니다. “저는 당신들이 볼 수 있는 이 아름다운 봄을 보지 못합니다.” 눈 먼 거지 소녀에게 다가가 문구를 고쳐준 사람은 프랑스 시인 로제 카이유였습니다. “저는 눈이 멀었습니다. 한 푼 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봄을 저는 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공감의 시였습니다. 구름은 바람이 움직이고, 사람은 사랑과 공감이 움직입니다. 아무리 옳은 것, 좋은 것이라도 공감 있게 표현하지 못하면, 사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견해가 일치할 때보다 공감할 때 가장 따뜻함을 느낍니다. 공감은 힘이고 능력입니다. 세계적인 사회학자 제레미 리프킨도 ‘공감의 시대’에서 21세기에 있어서 최고의 강자는 ‘공감의 능력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먼저 낮아지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을 낮추어 사람의 형상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6~7)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낮추시고 우리를 찾아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했고 우리 마음에 예수를 영접하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었다. 우리가 낮아져야 세상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며 빛으로 살 수 있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예수님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자기를 낮추시고 우리에게 오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 살려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에서 영광 받는 삶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인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영광 받으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멸시를 받게 됐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이웃교회에 소속해 있는 K집사라는 이가 시의원 선거에 세 번째 출마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가 다니는 교회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들과 뭔가 갈등이 있는 상태였다. 한 지역에서 독보적으로 부흥하고 교인들이 열정을 갖고 지나치게 활동하는 교회는 이웃 교회들에게 피해(?)를 주기 쉬운데 바로 그런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K집사를 지지해주고 지인들에게 소개를 해준 데는 까닭이 있다. 우선, 어느 교회의 교인인가를 떠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였다. 로마서 12장 1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하셨는데 두 번 출마해서 두 번 낙선한 그의 실망과 아픔이 나에게도 조금은 느껴졌었다. 지방 자치를 위한 선거 때마다 타종교인들은 연속으로 당선되는데 그리스도인으로 유일한 후보자였던 그만이 떨어지니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갖게 됐다. 그리스도인 당선자가 나오길 바라면서 지지해 줬는데 그것이 약간의 보탬이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세 번째 도전에서 당선인이 됐다. 다음으로 내가 그를 지지해준 것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지역의 관공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정치계, 법조계, 언론계, 교육계 등에서 많이 진출해
인류 역사상 지금보다 풍요로운 시대는 없었다. 지금은 지나온 시절보다 훨씬 더 나아지다 못해 흘러넘친다.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많다. 한 해 우리나라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이 1조원 든다고 한다. 이를 경제적 가치 손실로 보면 그 금액이 25조원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삶이 이렇게 편리해지고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각박하다. 그래서 오늘날 가장 흔한 질병은 바로 우울증이요, 신경 쇠약증이다. 지금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우울증 환자가 더 많이 속출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노력한 만큼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지쳐 있고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 세계에서는 결혼해서 자녀를 갖는 것보다 더 많은 스펙을 가지려고 한다. 그래야 이 불안한 시대를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편안한 삶, 멋진 삶을 추구하고, 꿈꾸지만 그것이 가능할까? 보이는 세상은 신기루와 같다. 한 순간의 즐거움은 얻을 수 있지만 금방 허무감이 몰려온다. 사람들은 쾌락이 자신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부하거나 포기하지 못하고 열심히 취하려고 한다
반면에 2세대는 1세대보다는 복음에 대한 희생과 헌신이 좀 떨어지지만 현지 언어에 능숙하고, 현지 문화와 충돌이 거의 없다. 소명만 분명하다면 훌륭한 영적 자원이 될 수 있는데 바울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렇다면 재만 동아기독교의 북방선교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로 재만 동아기독교는 이주자들에게 ‘세상의 꿈’보다는 ‘하나님 꿈’을 실현시키는데 탁월했다. 대다수 디아스포라들은 타국에 와서 성공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사업, 학업, 예술 등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재만 디아스포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20세기 초반 만주로 이주 온 한인들은 생활고(35.8%), 금전난(16.4%), 경제적 어려움(14.9%) 등 96.9%가 경제적 이유 때문에 이주했다. 한마디로 ‘세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이주했다. 하지만 펜윅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꿈’, 즉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세상의 꿈’을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일깨워줬다. 실제로 펜윅은 1906년 대한기독교회를 창설한 후 바로 그 다음해에 직접 간도를 방문해 순회하다가 이곳에서 최성업, 이종근, 이종만, 장진규에게 복음을 전해 예수를 영접토록 한
침례교회는 영국 분리파 청교도들이 세운 교회이다. 영국침례교회는 그리스도가 전 인류의 죄를 위해 속죄했다고 믿는 일반침례교회와 택함 받은 사람만을 위해 속죄했다고 믿는 특수침례교회의 두 교회로 시작됐다. 일반침례교회는 1609년에, 특수침례교회는 1633년에 시작됐다. 일반침례교회의 창시자 존 스마이스(John Smyth, 1570~1612)는 성공회 목사였는데, 그는 성공회-청교도-분리파 청교도-침례교로 변화를 거치면서 침례교회를 창시하게 됐다. 이번에는 침례교회 출현의 먼 배경이 되는 성공회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성공회(영국국교회)는 영국 왕 헨리 8세(1509-1547)가 부인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로 가톨릭교회를 탈퇴해 개신교회가 된 교회이다. 가톨릭교회에서 결혼은 7성례 중 하나였으므로 결혼과 관련된 문제는 세속법원이 아닌 교회법원이 관장했으며, 국왕의 결혼은 교황청 법원이 직접 다뤘다. 캐서린은 원래 헨리의 형 아더 왕자의 부인이었다. 아더는 결혼한 지 5개월 만에 죽었고, 헨리는 정치적 이유로 형수와 결혼하게 됐다. 형수와의 결혼은 근친혼에 해당되어 교회법에 금지된 것이었으나, 영국과 스페인 왕가의 압력으로 승인됐다. 결혼은 그러나 불행했다. 두
1944년 9월 일제때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5학년 외사촌 누나가 시킨대로 “니시하라 히대하루”(西原永春)라고 일본 선생이 부르거든 일어나서 “하이(예)”라고 대답해서 일학년에 입학했으나 일본글 배우기가 싫어서 공부는 안하고 울릉도 바닷가에 우럭잡이로 시간을 보내어 통지표는 맨 뒤에서 2등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의 손양원 목사같은 하천풍원(가가와 도요히꼬) 선생의 전기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고베 시장의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서러움 속에 자라면서 폐병으로 고생했다. 소년 시절 고뇌 속에 길을 가다가 지하에서 들려오던 찬송 소리에 이끌려 선교사가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크리스천이 됐다. 그가 회개한 말씀, 은혜받은 말씀은 산상보훈 가운데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라(마 6:25, 34)는 예수님의 따뜻하고 낙천적인 말씀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어두운 일본 세상을 밝힌 사랑의 빛이 됐다. 내가 읽은 가장 감동을 주는 그의 두 책 “사선을 넘어”와 “사랑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은 그의 참된 인격과 삶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의 사랑의 일화는 매우 많다. 그는 버린 바 된 창녀와 결혼했고
비숍 고르(Bishop Gore)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상(非常)한 것을 하도록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日常的)인 것을 비상하게 잘 하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은 저 멀리에 있는 큰 것을 취하기 위해 눈 앞 발밑에 있는 것을 소홀히 한다. 사람들은 큰 것을 취해 놓으면 작은 것을 저절로 취해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눈 앞 곧 발밑에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점점 더 저 멀리 큰 것을 갖도록 질서를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을 하늘 양식 구하는 것 못지않게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셔서 우선 일용할 빵을 구하라고 주기도문에서 가르치셨다. 건강은 늙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시절에 각별히 유의해야만 얻는 것이라고 했다. 너무 멀리 그리고 큰 것을 취하려다가 눈앞의 작은 것에 대한 사랑을 잊는다. 하나님은 작은 것부터 시작해 큰 것으로 우리에게 주셨다. 율법을 주시고 나중에 실재를 주셨다. 구약을 주시고 신약을 주셨다. 강한 사자라도 연약한 토끼 한 마리 사냥에는 전력투구한다고 하지 않나. 영문학자의 꿈을 가진 희망자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기 전에 ABC 알파벳부터 배워야 함이 순서가
“‘이거 사실이 아니지요?’ 나는 아저씨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을 절망적인 심정으로 지켜봤다. ‘그러니까 전부 다 사실은 아니지요?’ 한참 만에 대답을 들었다. ‘사실이 전부는 아니야.’ ‘그러니까 사실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거지요?’” 정유정 저(著) 《7년의 밤》(은행나무, 23-2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사실과 진실은 다릅니다. 우리는 ‘사실’로 ‘진실’을 숨기며 자위하고 쾌재를 부르며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랄 왕 아베멜렉 앞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합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주목하자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 속에 아브라함은 쫄장부가 된 것입니다. 사라가 누이인 것은 사실입니다. 사라는 이복 누이였습니다(창20:12). 그런데 그 상황에서 누이라고 해야 했을까요? 당연히 아내라고 했어야 합니다. 누이라고 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실’이 아닙니다. 거짓말이 아닌 사실을 말했지만 진실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에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죄성이 가득한 우리 인간은 쉽사리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사실’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진실’입니
“정주영 회장님이시네요.” “뉘신가요?” “여기 중구에 살고 있는 사람인데, 회장님의 지금 연세는 어떻게 되셨어요?” “남의 나이는 알아 뭐하려고 물어?” “매우 건강하게 보여서 물었지요.” “올해 일흔넷이 되었네.” 이때 롯데호텔 로비 이곳저곳에서 비서와 경호원으로 보이는 5~6명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나를 붙잡아 일으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정회장을 모시고 승강기로 갔다. 복음전도도 못하고 어떨결에 갖고 있던 전도지마저 주지 못했다. 거무스레한 얼굴에 크고 작거나 검고 옅은 색깔의 검버섯 열 개 정도의 정 회장 얼굴이 가끔 떠오르는 것은 30초 가까운 구령의 기회를 놓친 나의 잘못을 후회하고 또 천국에서 그 싱긋이 웃으시던 정주영씨를 다시 만나지 못할 때의 나의 뉘우침이랴! 올해 내 나이 84세가 되니 옛날 만나서 전도를 못한 정회장이 별세하셨다고 전해 들은 그 나이가 됐구나! ‘오늘은 구정 설 명절이니 가족들과 시간 보내며 쉬어보자’하고 비스듬히 침대에 눕는데 10여년전에 쓴 ‘기적을 믿는가’라는 제목의 책 결론 부분에서 게으르고 가련한 미국 산골 농부가 “아예 편히 놀아요(Just play'd it safe!)”라는 해학적 얘기가 떠올랐다. 무너진 오
나무교회는 몇 그루 나무들이 연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하늘을 치솟고 있는 모습의 교회다. 그 교회에는 유명한 재벌이 있어 헌금도 놀랄만큼하고 또 기도대장이 있어 기도 왕이란 칭호를 지닌 권사도 있고 해마다 선교여행을 떠나는 선교대왕 장로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연합체는 이루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가 자기의 위치와 임무가 다른 이와는 별개의 특별한 것이라고 자만한다. 수많은 달란트(Talent) 수재들이 모였건만 제각기 흔들리고 또 쓰러진다. 나무교회는 나무개개의 교회다. 이쯤 설명하면 숲교회의 모습은 알만할 것이다. 숲교회의 특징은 각양각생의 나무들의 연합 그리고 동등체력 무리를 이루었나니 그것을 우리는 숲이라 한다. 숲은 나무들로 구성됐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자기의 나무됨을 잃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서 결국은 하나의 나무나 또는 그냥 나무들의 복수가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에도 멋진 숲을 이룬다. 숲에 관한 어떤 시인의 명시가 생각난다. 숲 정희성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
‘정신의 갈등은 삶의 표현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활동이 있고 꿈이 있습니다. 착각은 커트라인도 없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만 공상이나 야망의 끝을 누가 보았습니까? 역사는 끊임없는 미래의 추구이고 사람은 그 드라마의 주인공입니다. 구속사적 견지로서는 하나님을 향한 인류의 여로인바 가장 어려운 학문(하나님)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것이 신학이요, 가장 쉬운 학문(사랑)을 가장 어렵게 설명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신학의 근본, 다시 말하면 생활의 기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최고의 무지 또는 가장 큰 죄목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7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대부로 추앙받으면서, 포부도 당당하게 “성경은 100년 후에는 다 없어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며 무신론을 제창했던 볼테르(Voltare)에게 얽힌 웃지 못할 일화가 있습니다. 볼테르가 미국에 강연 초청을 받아 배를 타고 가던 중 도중에 배가 파선해 우연이라고 할까 어느 가난한 상인과 함께 널빤지 하나를 붙들고 허우적거리며 구조를 기다렸으나 거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상인은 파도 속에서도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볼테르에게는 무척 가소로운 일이었으나 상황이 급박해진 나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마다 마음이 있고 우리의 육체는 마음에 의해 움직인다. 국어사전에는 마음을 감정이나 생각 기억 따위가 깃들이거나 생겨나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에 어떤 감정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에 따라 말과 행동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삶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사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다. 성경에는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라고 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더 깊은 종교심을 갖기 위해 심산유곡에서 세상 줄을 끊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심신을 수련하는 사람도 있다. 일반인들은 기독교도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 생각하지만 기독교는 도를 닦고 마음을 수련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 본질이다. 물론 기독교인들도 성경을 연구하고 깊은 기도를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를 열심히 해 체험을 하고 은혜가 충만해도 말씀
산정현교회의 조만식 장로는 일제시대 때 독립 운동가, 정치인, 한 때는 교육자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평생 한복을 입었는데 그것은 어린 딸과의 약속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딸을 안으려 하니 어린 딸이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그 시대는 주로 한복을 입었는데 양복 입은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남으로 무섭고 놀랐던 모양이다. 그는 딸에게 “울지 마라 아가야, 이제부터 아버지는 한복만 입겠다”고 약속했는데 그것을 평생 지켰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한복의 불편한 점을 고쳐 소매와 바지통을 줄이고, 옷고름 대신에 단추들을 달았는데, 단추 모양이 각각 다를 뿐더러 상징하는 것이 있었다. 첫째 단추는 ‘오산학교’를, 둘째는 모교인 ‘숭실학교’를, 셋째는 ‘기독교 청년회’를, 넷째는 ‘교회’를, 다섯째는 ‘조국과 민족’을 새긴 것이라고 했다. 그가 평생을 살면서 무엇에 관심을 가졌으며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봉사했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곧 나라의 주권은 일본에게 빼앗겼지만 우리의 학교와 교회, 나라를 위해서 항상 기도하며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시대 때 대제사장의 복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것들을 부착했다. 곧 호마노 2개의
해가 바뀌는 시간에 뉴욕의 한 택시 기사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어느 뉴욕의 노란색 택시 기사는 여느 때와 같이 콜택시 요청을 받고 해당 주소로 차를 몰고 갔다. 도착해서 경적을 울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또 한 번 경적을 울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이 손님이 그 날 교대 전 마지막 콜이었기에 그는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포기하고 차를 돌릴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일단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노쇠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손님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마침내 문이 열렸고, 적어도 90살 이상 돼 보이시는 작고 연로하신 할머니 한 분이 문가에 서 계셨다. 손에는 작은 여행 가방을 들고 계셨다. 문이 열린 틈으로 집안이 살짝 보였는데, 깜짝 놀랐다. 집 안에는 사람 산 흔적이 싹 지워진 듯했다. 모든 가구는 천으로 덮여 있었고, 휑한 벽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단지 사진과 기념품이 가득 찬 상자 하나만 구석에 놓여 있었다. “기사 양반, 내 여행 가방 좀 차로 옮겨줄래요? 부탁해요.” 할머니의 요청대로 가방을 받아 들고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돌아가 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