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한국교회의 향후 10년은 한국교회의 침체 기간이 30년이 경과하는 시기이다. 한 세대 동안 갈등과 현실 유지에 매달려 오고 있는 상황이 된다. 한국교회의 80%에 가까운 교회는 작은 교회들이다. 침체가 장기화 될 경우에 닥칠 위험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작은 교회가 무너지고, 교인들은 노령화가 되면서 자립이 어려워지고 다음세대를 준비할 여력이 상실 되게 된다. 앞으로 10년은 한국교회가 위기와 기회가 복잡하게 공존하는 미래에 직면 할 수 있고, 몰락과 부흥의 갈림 길이 될 수 있다. 2010년 통계청의 인구센서스 자료를 기반으로 저출산, 고령화의 파급, 한국교회의 위기 요소들을 고려 할 때에 2050년에는 한국교회 교인 숫자가 500~600만 명으로 감소 할 수 있고, 그 중에 60~70%는 55세 이상 은퇴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21세기는 대형교회들도 많을 것이지만, 작은 교회가 부각되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작고 강한 교회’운동이 일어나고 있고 이미 전개되고 있다. 작고 강한 교회의 시대이다. 한국교회의 80%에 가까운 교회는 작은 교회들이다. 작은 교회가 강하게 되는 일은 하나님의 사역이 활기차고, 교회의 침체를 막고, 다
목회자의 성경적 모델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부모인 목회자에 대해 살펴보겠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않다고 하며,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아버지임을 진술했다(고전 4:15). 1. 목회자는 새신자를 복음으로 낳아야 한다.사도 바울이 자신을 아버지라고 피력한 근거는 복음으로써 그들을 낳았기 때문이었다(고전 4:15). 복음으로 낳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증거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거듭나는 영생의 길로 인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도록 안내해줬다는 말이다. 물론 모든 신자들이 다 목회자를 통해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목회자 입장에서 목회의 출발을 복음전도사역으로 삼아야 함을 일깨워 주는 말씀이다. 목회는 기존의 영혼들을 돌보는 사역 이전에 잃었던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 영혼을 구원으로 안내하기 위한 목회자의 심정적 고통은 해산의 수고에 비유된다. 바울은 자기 형제된 백성의 구원을 위해 큰 근심과 마음의 고통이 있었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의 엠마오 현현 사건과 제자들에게 현현한 사건을 통해 부활의 예수를 알아보는 길과 함께 부활의 존재성 곧 부활의 존재는 신체를 벗어난 영 혹은 영혼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의 살과 뼈를 포함하여 나사렛 예수 전인의 부활이라는 몸의 부활 개념을 제시했다. 누가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담긴 구원사적 의미를 부활하신 예수의 말씀을 통해 제시한다. 누가는 부활 현현 사건의 절정에서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구원자인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약속(예언)의 성취이며 나아가 그 구원을 만민에게 전파하기 위한 출발점과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부각시킨다.누가는 먼저 공생애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의 중심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내)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 24:44). 여기서 예수의 말씀의 핵심적 의미는 ‘성취하다’(plhro,w)라는 동사와 필연성을 나타내는 조동사(dei/)를 통해 표현된다. 누가는 ‘성취하다’라는 동사를 하나
나라는 여럿이나 땅은 하나며 통치자는 여럿이나 백성은 하나다. 세상은 한 사람으로 시작된 인류가 하나의 땅 위에서 하나의 이상을 추구하며 사는 곳이다. 제한된 땅을 여러 민족이 나누어 가지기 때문에 욕심 많은 사람들은 흔히 땅의 경계를 침범한다. 비옥한 제 땅보다 척박한 남의 땅이 더 좋아 보이고, 자기 마을 개울에서 잡은 붕어보다 이웃 마을 연못에서 잡힌 송사리가 더 실해 보인다. 모두가 욕심 때문이다.이 욕심 때문에 인류는 제국주의라는 약육강식의 암흑시대를 통과해야 했다. 안타까운 것은, 제국주의 시대에는, 힘센 자만 살아남을 자격이 있다는 다윈의 적자생존(適者生存)사상과 세상은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소위 자연선택 사상과 니체 같은 정신 나간 철학자의 초인(超人) 사상이 인류의 정신세계를 제압해버렸다는 사실이다.이와 같은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나라들은 큰 배와 무기를 만들어 가까이는 이웃 나라, 멀리는 대양을 건너 다른 대륙까지 침공해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붙잡아 착취하고 살육하고 집에서 기르는 소나 말처럼 시장에 내다 팔기까지 했다. 그들은 자신들은 초인이라고 판단하고, 약자(약소국가)는 자연선택을 받지 못한 피조물로 비인간화 해버렸
목회자는 어떤 존재인가? 목회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사역해야 하는지에 대한 입장정리가 필요하다. 목회자의 모델은 그런 자화상에 대한 모형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델을 생각하면서 목회자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정리해본다.목회자는 종의 모델을 가져야 한다. 종이란 우선 주인의 소유물로서 주인의 뜻을 따라 움직이고 주인의 의향을 성취하기 위해 일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불러 쓰시는 모든 사람을 종이라고 했다. 아브람도(시105:42), 모세도(신34:5), 여호수아도(삿2:8), 다윗도(겔34:24), 선지자들도(단9:10), 이스라엘 백성이(렘30:10) 하나님의 종이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불러 쓰시면 이방인이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종이다(렘 25:9). 예수님은 스스로를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말씀하셨고(막10:45), 제자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있었다(행3:13), 사도 요한도(계1:1), 사도 바울도 거듭 거듭 스스로를 종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 나라의 종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의 몸인 교회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하는 종이다.
입다라는 사람은 드보라나, 바락이나, 기드온과 같이 영적으로 무장하여 통쾌한 승리와 온전한 구원을 이뤘던 일반적인 사사들과는 사뭇 다른 점이 많은 사사이다. 사사기11:1을 통해서 그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길르앗지파 중에 길르앗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있었는데, 이 남자가 기생과 바람을 피워서 낳은 아들이 입다라는 설명이다. 율법에 의하면 사생자는 거룩하게 구별된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가 없다. 본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친과 모친의 죄로 인해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라 하겠다. 부친의 상속에서도 제외되었다. 사사기11:2은 “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하시는 말씀으로 그가 당한 불이익을 밝히고 있다. 온갖 멸시와 구박 속에서 자라난 입다는 결국 자기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돕’ 땅에 가서 살았다. 돕 땅은 가나안땅이 아니라 길르앗 북쪽 변방에 있는 현재의 시리아, 즉 수리아의 땅
목회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목회가 달라지기 때문에 목회자의 모델을 잘 세우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야 한다. 나는 신학교 재학시절 어느날 기숙사에서 큐티 하는 중 구약 느헤미야를 읽다가 에스라를 “학사겸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구절을 발견하고 감동을 받아 쪽지에 “나는 학사겸 제사장 이명희다.”라고 써서 책상 앞에 붙여놓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어떤 목회자가 되어야 할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범죄해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징치하심으로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 백성과 동행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일깨우고 회복시키고자 했던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파수꾼”으로 부르시는 장면을 두 번 씩이나 기록해주었다(겔 3장, 33장). 이것은 파수꾼 사명이 거듭 거듭 확인돼야 할 중요한 사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특히 에스겔 3장 17절을 보면서 목회자의 파수꾼 모델을 거듭 확인해야 한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시려고 파수꾼을 세우신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불순종 가운데 빠져 사로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기 위하여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누가는 엠마오 부활현현 사건을 통해(눅 24:13-35) 자기 시대의 기독교인들을 향해 그들이 믿고 있는 부활의 예수를 인격적으로 알아보고 체험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그는 이어서 부활의 예수께서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서 현현한 사건을 통해(24:36-43) 예수의 부활을 육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헬라인들의 대중적 신앙에 근거한 영혼불멸적인 이해를 비판하고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존재 전체 곧 그의 육신과 영혼 전부를 포함하여 전인의 부활인 것을 변증적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특히 고린도전서 15장과 고린도후서 5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부활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누가는 이러한 헬라주의적 부활관을 비판하면서 예수의 부활을 몸(신체와 영혼 전체)의 부활이라는 의미로 예수의 말씀을 통해 제시한다: “내 손과 내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39). 여기서도 예수의 말씀은 두 가지로 몸의 부활을 제시한다. 첫째는 예수의 살아난 존재를 보고 그의 부활의 의미를 깨달으라는 말씀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한
적어도 40대 이상의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연탄에 대한 추억하나쯤 없는 이는 없다. 가슴 아픈 아련한 추억이 몇 개는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연탄은 ‘부와 가난의 상징’이었다는 점이다. 우리 집은 그럴만한 형편이 못되어 그저 두세 장씩 새끼줄 꿰어 몇 묶음 사두는 게 고작인데, 누구네 집은 겨우내 쓰고도 남을 연탄을 수북이 쌓아둔 것을 보면 솔직히 너무 부럽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다. 연탄 한 번 갈라치면 코를 막고 얼굴 돌리던 일들, 그 22개 구멍 다 맞추느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다가 그만 가스까지 마셔 머리 핑 돌던 일들. 때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연탄불 다 꺼뜨려 번개탄 사다가 다시 지피던 일들, 그게 안되면 나중에 어머니 돌아오시면 혼날까봐 결국 옆집에라도 가서 급히 밑불 빌려 채워놓던 일도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밤에 잠들기 전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가스배출기 켜놓는 일. 방으로 통하는 부엌문은 닫고 밖으로 통하는 부엌문은 반드시 열어두는 일. 연탄구멍도 한두 개 정도만 열어두어야 한다. 연탄을 막 갈았을 때 열어둔 모든 구멍을 깜빡하고 못 닫으면 그날 밤은 타죽을 정도로 방만 뜨겁다. 그 불은 다음날 새벽까지 못 간다. 멀쩡한 장
누가는 엠마오 현현 사건을 통해 누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그들이 지금도 살아계신다고 믿고 있는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고 듣고 만날 수 있는가에 관하여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예언의 말씀들을 마음에 믿어야 한다. 둘째는 모세의 율법과 모든 선지자들과 모든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에 대하여 부활의 주님께서 직접 설명해주시는 감동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셋째는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마음에 영접한 신자들이 개인적으로든지 혹은 공동체적으로든지(누가는 공동체적 체험을 강조) 그와 함께 떡을 떼며 교제하는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는 영적인 체험에 이르게 된다. 누가는 이와 같이 최초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는 가운데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확인하고 나아가 부활하신 예수의 현존을 체험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부각시켰다.누가는 엠마로로 가던 두 제자의 개인적인 체험을 길게 제시한 후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서 부활의 예수께서 현현하신 사건을 제시한다(눅 24:36~43). 이 사건에서도 엠마오 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의 존재성을 다루는 누가의 부활신학이 독특하게 제
송나라 시인 도연명은: “소년은 쉬이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도다. 마당가 연못은 아직 봄꿈에서 깨어나지도 못했는데 댓돌 위에서는 벌써 낙엽 구르는 소리가 들리도다” 하며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했다영국의 시성 윌리엄 워즈워드는, 그의 시, 무지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는 명구를 남겼고, 동시대의 단명한 시인 쉘리는, 서풍에 부치는 노래에서, “겨울이 깊으면 봄이 멀지 않으리(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라는 시구로 세월의 무상함을 각각 노래했다. 이런 싯구(詩句)는 일견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인생은 쉬 늙어 그대도 곧 한 잎 낙엽 같이 떨어질 것이니 세월을 아끼라는 경고이다. 노인은 목회계획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오늘의 한국사회에는 급격히 증가한 노령 인구가 이미 사회적 문제로 부각 되어있다. 국가가 이 문제에 대해 노심초사하며 연이어 대책을 내놓는 반면에 교회는 비교적 무관심해 보인다. 거창한 교단적 대책을 내놓으려 하지 말고 목회자 각자가 자신의 목회계획 속에 노인 문제를 포함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노인과
목회자의 목회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위임하신 과업을 성취하도록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사역하는 것이다. 우리는 목회의 본질과 목회의 다섯 가지 주요한 목표에 대하여 알아봤다. 그러면 이러한 목회를 이루기 위한 목회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1) 목회자의 책임목회자의 책임은 복음을 증거 하여 교회를 이루고,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에 전념하여 성도들로 봉사의 일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성장시키고, 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유지하게 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성장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목회자는 불신자를 찾아 복음을 증거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며, 기독교 진리를 가르치고, 회중예배를 준비하고 인도하고 침례, 주의 만찬, 등 의식을 집례하고, 사람들을 방문하고 상담하며, 교회의 행정적인 업무를 관장하고, 교회의 여러 기관들의 활동을 지휘 감독하며 교회의 대외적 활동을 담당한다. 2) 목회자의 상징적 역할목회자는 상징적인 역할의 사명을 띠고 있다.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예수님을 기억나게 하는 자로서, 성령님의 도구로서, 개 교회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하나님께서 근심하신다’ 하는 표현은 조금 우리들에게 어색하게 다가올 수 있는 말씀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슬픈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구절들이 꽤 많이 있다. 인간과 유사한 감정적인 느낌을 공유하신다는 점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도 기쁨과 슬픔과 노여움과 아픔을 포함한 희로애락의 감정을 직접 느끼신다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밝히고 있다.창세기6:6에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는 구절이 나온다. 원죄와 함께 태어난 사람들은 날 때부터 악하여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들까지도 악한 것뿐이었다. 하나님께서 근심하시며 탄식하실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사람을 창조한 사실 자체를 후회하시며 탄식하셨다. 창세기 6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근심’은 대 홍수의 심판을 야기했던 무서운 근심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그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이제 다시는 무서운 심판을 받지 아니 할 온전한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
사역자란 사역하는 사람이다. 사역이란 말 그대로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고, 일할 일꾼을 찾고 계시며, 일하러 내 보내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리고 때가 됐을 때 제자들을 일하도록 내보내셨다. 주님에 의해 일하도록 보냄을 받은 일꾼을 사도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일꾼들의 하는 일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역자, 즉 사도적 일꾼(apostolic worker)으로 세워져야 한다. 사역자는 예를 들면 삶의 목적과 의미를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맞춰 사는 사람이다. 목회자들이 대표적인 사역자이고, 안수집사, 교회학교 교사, 각 기관의 핵심적 임원진, 목장사역의 목자 등을 일컫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감동하심 가운데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쓰면서 육신에 속한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신자가 많았던 고린도교회를 일깨우며 일으켜 세우고자 했던 자신과 아볼로 같은 일꾼들을 세 가지 명칭으로 불렀다. 1) 사역자(고전 3:5). 사도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 같은 일꾼을 사역자라고 했다. 사역자는 주님께서 주로 말씀 사역을 위하여 세우신 일꾼이다. 복음을 전하고, 새신자를 양육하고, 신앙
“컬처(문화)”라는 말을 재미있게 사용하는 한 선배가 있다. 그는 어색한 경우에 맞닥뜨릴 때는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하지 않고, “컬처가 달라서” 하고 말해서 경직된 분위기를 풀고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 알다시피 현대인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여러 대륙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육자, 또는 넓은 의미에서 문화인 또는 교양인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거나 주장을 세우기에 앞서 반드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필자는 해외에 머무른 몇 년 동안 종종 인도인 가정에 식사 초대를 받은 일이 있었다. 음식은 대게 쌀밥과 닭고기에 커리를 끼얹어 먹는 것이었다. 그들은, 수저를 사용하지 않고 오른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다. 그 집 주부는 자신들이 손으로 음식 먹는 것을 약간 미안해하며 변명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수저를 사용하거나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거나 또는 손을 사용하는 것은 음식을 먹는 방법일 뿐이다. 나는, 그 집 주부에게, 우리나라에서도 삶은 감자나 옥수수, 쌈, 수박, 과자, 오징어, 떡 등 손으로 먹는 음식이 많다고 설명해 줬다. 또한 그들이 살고 있는 미국 역시 그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