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중앙교회가 품은 비전은 건강한 교회, 건강한 목회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면서 제가 역점을 둔 것은 바로 건강한 성도와 가정, 교회였습니다. 온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강력한 십자가의 군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끊임없이 훈련하고 가르치며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온 성도들이 강력한 하나님의 군사로 세워지게 되었으며 담임목사의 목회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십자가의 군사가 되었습니다.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도와 기도로 무장된 건강하고 튼튼한 믿음의 교회가 바로 경기중앙교회입니다.” 경기도 평택시 서정역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경기중앙교회(안도엽 목사). 전철역과 인근 재래시장, 농협 하나로마트, 초등학교와 아파트단지까지 교회 주변의 다양한 인프라는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교회를 찾게 된다. 경기중앙교회 또한 지역사회를 위한 헌신과 봉사, 전도의 동력은 식을 줄 모르고 복음의 열정으로 지역 복음화에 힘쓰고 있다. 이 모든 에너지는 바로 안도엽 목사의 특별한 목회관에서 시작됐다. 강력한 부르심…시련과 역경의 연속 안도엽 목사는 불신앙의 가정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목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와 대학원을 다닐 때까지 집안의 도움을 일체 받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 집을 지키는 개들만이 주변의 차량에 반응하며 짖어대는 마을에 태양광 지붕을 올린 교회가 있다. 교회 입구에 들어서면 교회 마당을 지키는 개들이 손님을 반겨주고 교회 외부 스피커에서는 찬양과 함께 방문자를 환영해준다. 어느 덧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나온 죽림교회 김일하 목사는 스마트폰 하나로 교회의 음향을 컨트롤하며 기자를 맞이했다. 김 목사는 “나와 아내가 거의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모든 시설을 스마트화 시킨 상태이다. 새벽예배 시간이 되면 알아서 교회 본당의 불이 켜지고 전기 난방기가 돌아간다. 이른 새벽 은은한 새벽공기에 맞춰 반주기의 찬양이 시간에 따라 흘러나온다. 대부분의 전기 제품이기 때문에 전기료가 걱정되지만 우리의 든든한 태양광 전기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교회 지붕도 사역을 위해 쓰여진다 죽림교회 지붕에는 태양광 패널들이 설치돼 있다. 태양광을 통해 전력을 생산하고 생산된 전력을 교회에서 사용하고 한국전력에 판매한다. 정부 보조를 받고 설치했지만 적잖은 비용이 들어간다. 김일하 목사도 울릉도 출신으로 경북 포항과 충남 서산에서 23년을 사역하고 7년 전에 죽림교회로 부임했다. 워낙 오래된 교회 건물과 사택이
“장애라는 신체적인 정신적인 불편함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복음 안에, 믿음 안에 차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 또한 신체적인 불편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랑의교회 김상호 목사는 그동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일에 헌신해 왔다. 1994년 7월 16일 대전에서 사랑의교회를 개척한 김 목사는 특수목회가 아닌 일반목회로 목회의 첫 발을 내딛었다. 김상호 목사는 “처음부터 특수목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목회자로 모두가 잃어버린 양이라는 생각으로 사역을 감당했고 제가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장애인 사역을 목회에 추가하며 이뤄진 일”이라며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고 양육하고 불편한 이들을 돌보는 사역에 매진해 왔다”고 설명했다. 사랑의교회가 단독으로 특수 사역을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재정적인 형편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단법인 수레바퀴재활문화진흥회를 알게 됐다. 척수손상을 입은 이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정과 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해 홍이석 목사를 통해 세워진 수레바퀴재활문화진흥회는 김상호 목사가 추구했던 목회 협력 사역에 귀한 도전이
“끊임없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상처와 아픔을 보듬어 안아주면서 이게 바로 그 분이 우리를 향한 진정한 복음이며 사랑이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교회는 자랑하고 내세우는 곳이 아닌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서 묵묵히 예수님을 몸과 마음으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목회자 자녀가 가지는 갈등 중에 하나는 부모님의 목회 소명을 바라보며 ‘나도 그 길을 걸을 수 있을까?’이다. 유성훈 목사도 부친의 목회 사역을 묵묵히 지켜보며 ‘나는 이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진 목회자 자녀였다. 시골교회의 담임목회자로 섬겼던 부친의 곁에는 항상 물질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다. 성공해서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싶은 마음으로 일반 대학(음악대학)을 진학하고 새로운 길을 준비했던 유 목사는 어머니의 권유로 마지못해 참석한 연세중앙교회 흰돌산 수양관에서 사도 바울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됐다. 강단 정면으로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 예수님의 형상을 보게 된 유성훈 목사는 그 자리에 꼬꾸라지며 회개의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아버지 목사님의 크신 은혜를 외면하고 그 은혜를 모르는 자식이었다는 마음으로 회개한 그는 일반대학을 마치고 신학도의 길을 걷게 됐다. 이어 경기도 광명시 다사랑교회에서 유상채 목사와
“홍성교회는 빛의 자녀로 사회와 예배, 가정, 통일, 열방과 환경을 향한 선한 이웃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DNA를 간직한 공동체로서 교회와 성도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내며 성도들과 두 손 꼭 잡고 걷고 싶습니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 1954년 한 가정집에서 시작한 홍성교회가 교회 창립 69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홍성지역의 낮고 소외된 이들을 향해 나눔과 섬김, 사랑을 실천해온 홍성교회는 현재 2013년 최윤종 목사가 사역하고 있다. 특별히 본인의 고향 모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최윤종 목사는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와 지역사회를 품는 마음으로 10년의 시간을 보냈다. ‘행복한 성도’ ‘영향력 있는 공동체’를 꿈꾸며 홍성교회는 △사회 속에서의 선한 이웃 △예배 세움 선한 이웃 △가정 세움 선한 이웃 △북한을 품고 복음통일을 사는 선한 이웃 △열방과 환경선교를 살아가는 선한 이웃으로 나아가고 있다. 최윤종 목사는 “지방에 위치한 평범한 교회이지만 예수님에 초점을 맞추고 복음 중심의 사역에 뜨겁게 사역하고 있다”며 “모든 사역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교회의 기초가 되는 말씀사역과 다음세대를 양육하며 세우는 사역이 소중하지 않을까
붉은 황토빛 논밭이 시원스레 펼쳐진 상하면을 지나 삼광교회(윤보열 목사)는 40여년을 그곳에서 소금으로, 빛으로 서 있었다. 1983년 4월, 김범일 전도사는 이곳에서 주님의 목회를 생활로 실천하며 시작했다. 정말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주민들을 계몽하며 땀과 눈물로 목회하기를 수십년, 그동안 교회는 대내외적으로 역량을 갖추며 든든해졌고 하나님은 이제 그 바탕 위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성장과 성숙의 장으로 이끌기 위해 2014년 1월 2대 담임목사로 윤보열 목사를 이곳으로 부르셨다. 9월의 맑은 가을날 지역사회에서 사람을 세우고 지역을 섬기며 목회하고 있는 윤보열 목사를 만났다. ● 간단한 목사님 소개를 해주세요. 고향인 전남 해남에서 6세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공군 부사관으로 9년 6개월을 근무하며 성경공부 하던 중 23세 때 말씀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반석교회(이근영 목사)와 오산중앙교회(이평화 목사)를 섬겼고, 남원강복교회를 개척해 목회한 후 김제 회성교회에서 15년을 목회하고 삼광교회에서 9년째 목회하고 있습니다. 출생부터 여기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걸음걸음 은혜와 축복의 여정이었음을 고백하게 되며
농촌교회가 가지고 있는 한계는 지역 인구 감소에 따른 성도들의 이동이었다. 성숙한 성도를 세우며 교회를 건강하게 성장시키고 있지만 도시로 삶의 터전을 떠나거나 진학과 학업 등의 이유로 떠나는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생기면서 교회 성장 동력이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1987년에 창립한 원남제일교회도 교회 초기에는 100여 명이 넘는 성도들과 수십명의 다음세대들이 예배하며 전도하고 매일 저녁 모임을 통해 생동감 있는 교회였다. 1999년에 3대 원남제일교회에 부임한 최원석 목사도 성도 중심의 교회 사역을 전개하며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시켰지만 진학과 결혼, 취업으로 성도들이 대도시로 이동하게 되면서 교회 성장은 쉽지 않은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최원석 목사는 “성도들과 함께 매일 기도하고 예배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강조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터전을 떠나는 이들을 보면서 목회의 최대 위기의 순간임을 직면하게 됐다”며 “뚜렷한 방법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보다 철저하게 교회 중심의 삶을 강조하며 흔들리지 않은 신앙관을 세워줬다”고 설명했다. 교회 사역의 변화 ‘그
꿈과사랑의교회(구, 충무침례교회)는 경상남도 통영시 서호동에서 60여년 전 미남침례교 선교부와 침례교단 총회의 협력으로 충무침례교회라는 이름으로 지역 복음화의 등불을 처음 내디뎠다. 당시 선교사와 경남지역의 전도인들이 지역의 젊은이들과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열매들을 맺었던 젊은 청년들과 학생들이 지금까지 교회의 귀한 직분을 장로로, 권사로 감당하며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고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섬기고 있다. 북신동 시절 꿈과사랑의교회는 북신동으로 성전을 건축 이전했다. 당시 영적 지도력을 겸비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교회는 점차 성장해 나갔다. 주일이면 주일학교, 중고등부, 청장년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며, 함께 동고동락했다. 주일에는 교회에 아침부터 모여 저녁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찬송과 기도가 끊이질 않았다. 이러한 밑바탕을 통해 교회는 점차 역동적으로 성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죽림 시대 교회가 점점 성장해가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향해 부흥의 열망과 새성전의 꿈과 세계선교와 다음세대를 세우라고 명령하셨다. 당시에 김동곤 장로는 교회의 죽림시대를 열망하면서 먼저 건축헌금을 약정하고 성전부지를 계약했다. 그는 성전부지에 무릎을 꿇
사회적기업 밀알모션베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7월, 금촌역에서 차로 약 10분거리에 위치한 밀알모션베드 공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열방교회 담임목사이자 밀알모션베드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김면식 목사의 사업체이자 사역의 현장이다. 밀알모션베드는 식약청에 의료용가구제조업으로 등록되어 의료용전동침대를 전문으로 제작 판매하는 사회적기업이다. 직원의 평균 연령은 62세로 시니어들의 노후 생계를 돕는 한편, 이를 통해 복음 전파의 화수분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시니어들이 아무래도 의료용 침대이다보니 일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김면식 목사는 초보자도 쉽게 일을 할 수 있도록 OEM방식(위탁생산)과 OJT방식(현장생산을 도입해 직원들이 서로 조금씩 가르치며, 조립하고 완성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 밀알모션베드에서 생산한 의료용 침대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병원용 침대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케어할 수 있도록 고안된 가정용병원침대 혹은 병원용가정침대를 특화시켜 소비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등 여가생활을 하기에 편하며 움직이기 힘든 임산부, 노약자, 환자들에게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 있어 가정용, 병원용, 요양원, 프리미엄
늘푸른교회는 1985년 6월7일 탄생했다. 우리는 늘푸른교회를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 “시,심,나”(SISIMNA)라고 불렀다. 나는 교회개척보다는 학교를 세워 다음세대를 교회세대로 세우는 교육목회를 꿈꾸고 있었다. 학교사역을 준비하던 중에 학교 사역을 하고 있는 선배 목사님의 보면서 “학교 속에 교회인가, 교회 속에 학교인가?”를 고민하게 됐고, 학교 속에 교회가 아니라, 교회 속에 학교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 교회가 먼저다. 교회를 세우자. 결심이 서자 아내의 동의를 얻고, 2살 된 아들과 1년 동안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다. 광야를 지나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낯선 사랑 살고 있던 집의 전세금으로 조그만 상가 2층을 얻었다, 교회 안에 사택을 마련했다. 사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어린 아들과 꿈 많은 소녀 같았던 아내에게 미안했다. 나는 내가 개척하면 금방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개척예배 후 1년 동안 새 신자가 1명도 없었다. 나중에는 양식이 없었다. 어느 주일 날 예배 중에 아내가 쓰러졌다, 서둘러 예배를 마감하고 가까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나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시는 분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