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0장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요셉의 생애는 실로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머나먼 외국 땅에 종으로 팔려 와서 눈물어린 삶을 견디고 하나님의 섭리로 총리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던 요셉. 그가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53년간을 애굽에서 살다가 110세에 죽었습니다(22절, 26절). 주님을 닮은 삶을 살았던 요셉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막을 내리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의 위대한 족장들의 시대도 마무리 됩니다. 위대한 신앙의 영웅들로 가득 찬 창세기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살아내며 보여주었던 요셉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납니다. 그의 마지막은 아버지 야곱처럼 성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장례는 소박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이 그에게 마지막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했습니다. 미이라형태로 처리되어 관에 모셔진 그의 유해는 그의 간곡한 유언대로 훗날 출애굽할 때 함께 떠나서 그가 언약을 받고 늘 바라보았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올라가게 됩니다(24~25절). 요셉은 비록 애굽에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b.660?BC)가 창설한 고대 종교의 하나로서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숭배한다. 조로아스터교를 배화교(拜火敎)라고 하는 것은 불을 숭배하기 때문이 아니라, 제물(祭物)에 불꽃과 냄새를 피우는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1. 창시자와 교세 조로아스터의 본명은 자라투스트라(Spitama Zarathustra)이며, ‘조로아스터’는 그리스식 발음이다. 그의 출생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동부 국경의 옥수스 강 유역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으나 전승에 따르면 그는 열두 살에 집을 떠나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신화 속의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의 천사장과 다섯 천사로부터 8년 동안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77세에 자연사했다. 조로아스터교는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시대(Sasanian Empire, 224-651)에는 잠시 국교가 되기도 했으나 중동 지역에 이슬람교가 들어가면서 교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오늘날은 인도의 뭄바이, 이란, 아제르바이잔 등지에 15만여 신도가 남아 있다고 한다. 2. 주요 교리 사산 왕조 때 만들어진 경전 아베스타(Avesta)에는 유일신 사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르고 애굽으로 돌아온 요셉의 형제들은 불안하고 두려워했습니다(창50:14). 그것은 40년 전에 자기들이 요셉에게 저지를 악한 일에 대해(창37:18~28) 요셉이 복수를 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들먹이며 용서해달라고 엎드려 빌었습니다(창50:16~18). 그런데 형들의 기우와는 달리 요셉은 형들에게 놀라운 관용을 베풀고 용서를 했습니다(창50:19~21). 요셉도 인간인데 왜 형들의 한 짓이 밉지 않았겠습니까? 40년 전에 요셉을 죽이려고 깊은 웅덩이에 빠뜨릴 때 요셉이 매달리며 살려달라고 애걸을 했건만 몰인정하게 죽음의 구덩이에 빠뜨렸던 형들이 아닙니까?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는 그 날을 생각할 때마다 치가 떨리는 사건인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섭리였음을 깨달으면서 형들을 도구로 쓰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임을 알고(창45:5)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관용을 베풀 수가 있었습니다. 혹시 지금 우리도 어떤 일이나 사건으로 말미암아 가슴에 박힌 상처와 고통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아픔
우연히 눈에 들어온 ‘품’이라는 단어가 참 재밌다. 특별히 ‘품’자로 끝나는 말들 몇 개를 연결시켜보니 복음의 핵심들도 발견된다. 생각해보자. 사실 우리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그분의 ‘작품’이 아니던가? 이 우주의 그 어떤 피조물보다 완벽하게 디자인되어 창조된 ‘작품’이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심히도 좋아하셨다. 그래서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다스리라 정복하라” 맘껏 축복도 해주셨고, 그에 맞는 지혜도 듬뿍 주셨다. 하지만 인간은 그 은혜를 망각하고 사탄의 꾐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면서 ‘폐품’이 되었다. 위대한 ‘작품’에서 쓸모없는 ‘폐품’으로 전락했다. 하나님 주신 소중한 권세들도 다 잃어버렸다. 세상을 다스리긴 커녕 세상에 굴복하며 사는 존재, 예배할 줄도, 순종할 줄도 모르는 연약하고 무능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자 인간은 자구노력(自救勞力)을 시작했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끌어올리려 애쓰기 시작했다. 인간의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문명을 발전시켰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상품’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고매한 지식을 더더 함양하고, 멋진 외모를 더더 추구하며, 기술과 능력을 더더 개발함으로써 자신의 효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기반을 든든히 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난 받을 일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부한 자(Rich)”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한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富)라는 용어는 성경적 의미와 세속적 의미를 달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 부를 복의 기준으로 이해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부유함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경고의 말씀은 디모데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물질이 가진 부정적 측면을 끊임없이 경고해 주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누구나 “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많이 가지든 아니면 적게 가지든 물질을 소유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유한 물질로 무엇을 위해 사용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한 그 물질은 결산의 날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재물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물질을 사용했는지 그 결과로 영원한 세계를 위한 터를 쌓는 일이 됨을 말
네 복음서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이적기사를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통계가 나온다: 1)기사에 필요한 단어의 수 마태복음 157 마가복음194 누가복음153 요한복음190 2)공관복음에 나오는 공통적인 단어의 수 : 53 3)요한복음에 나오는 공통적인 단어의 수 : 8 4)서로 같은 확률 마가와 마태59% 마태와 누가44% 마가와 누가40% 마태와 요한8.5% 마가와 요한8.5% 누가와 요한6.5% 위의 비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요한복음의 기사는 명확히 독립적인 기사이다. 요한복음은 꼭 필요한 단어만을 사용하고 있고 물고기라는 헬라어가 전혀 다른 언어이다. 그리고 공관복음은 서로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 2) 역사적 해석 복음서에 관한 역사적 해석은 저자와 그의 수신자, 역사-문화적 배경, 그리고 저술 목적과 동기 등의 측면에서 설교자로 하여금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청한다. 네 복음서들은, 다른 저자들에 의해, 각기 다른 역사-문화적 배경을 가진 수신자들을 위해 기록되었으며, 독특한 계제(occasion)와 목적을 가진다. 이와 같은 상이점들의 불빛 안에서, 설교자는 복음서들이 매우 유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음을 파악한다. 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1-23) 21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 “주여 주여” 한다고 즉, 예수를 믿는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답니다. 다만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 즉,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만 천국에 들어가고, 반대로 마귀를 기쁘게 하는 자는 지옥에 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분명히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한 행악자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면 위의 “주여 주여”는 예수를 진짜로 믿는 사람이 아닐까요? 예수님께 “주여 주여”라고 고백한 사람들이 진짜로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심
기독교 미래학자들(Futurologists)은 하나같이 교회의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말합니다. 동의하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초원에 있는 사자는 스스로 보호하는 힘이 있다.”는 말을 믿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정의가 무엇일까요? 바울 사도는 교회를 정의하기를 “진리의 기둥과 터(The pillar and foundation of the truth)”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진리를 선포해야할 이유는 바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며 터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은 모든 시대를 초월해서 변할 수 없는 교회만의 표식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진리를 선포해야 하는 사명을 단 한 순간도 쉬어서 안 됩니다. 최근 한국교회가 교회마다 특성화 하려는 시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밥 퍼주는 일, 집 지어주는 일, 이주노동자들을 돌아보는 일 수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증거 해서 15명에게 침례를 베푼 일은 자랑스럽습니다.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며 격려 받아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이 땅에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교회
‘베리칩(veri chip)’은 사람이나 동물의 생물학적 신상정보(DNA)와 병력(病歷) 등을 열여섯 자리 수자로 고유번호화해서 인체에 주입하는 ‘확인용 칩(verification chip)’이다. 이 칩에 저장된 정보는 무선 송수신 식별장치(RFID, 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로 스캔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군인이 패용(佩用)하는 인식표(군번)와 연구대상 야생동물의 몸에 심는 위치 추적 장치가 발달된 형태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 장치는 미국의 베리칩 바이오 회사가 제작해서 2001년에 발표했고, 2004년에는 미국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인체에 심을 수 있도록 허가 받은 바 있다. 2009년에 베리칩 회사가 다른 회사와 합병하면서 현재는 회사와 제품명이 ‘파지티브 아이디(PositiveID)’로 변경되었다. 베리칩에 대한 의혹과 진실 베리칩은 단순한 용도에 비해 많은 의혹을 받아왔다. 주요 의혹의 내용은: 1) 2010년 3월 미국 의회가 통과시킨 ‘건강보험개혁법’에는 전 국민에게 강제로 베리칩을 이식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으며, 이를 위해 미국 정부는 2015년까지는 준비기간, 2016년은 유예기간, 2017년부터는 강제
2. 구약 역사서 설교를 위한 석의적 관점 만일 설교자가 구약성경의 역사서 본문으로 설교하고자 한다면 그는 성경 전체의 문학장르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다양한 말씀 앞에 직면하게 된다. 구약역사서 안에는 열일곱 권의 책이 포함되고 이는 성경 전체의 40퍼센트에 이르는 분량이다. 그에 비해서 예언서는 약 22퍼센트에 해당되고 신약의 복음서는 10퍼센트 가량이며, 서신서는 약 8퍼센트 가량이다. 1) 이야기 형식 흔히 구약의 역사서를 이야기 문학(narrative literature)으로 분류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체 서술형식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역사서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보고문, 족보, 목록 등 다양한 문학유형이 포함되어 있다. 이야기(narrative)는 플롯구조(plot structure)를 가지며 대체로 등장인물과 함께 전개된다. 이야기의 길이는 다양하다. 예를 들어 에훗에 관한 기사는 모두 합쳐 19절 밖에 되지 않는 반면(삿 3:12~20), 다윗에 관한 이야기는 사무엘상의 절반과 사무엘하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역사서가 제공하는 인물 중심 이야기에는 영웅적인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비극적 주인공의 이야기도 포함된다. 특히 이스
창세기 45장 1~2절에는 시종들 앞에서 체면을 가리지 않고 방성대곡하는 요셉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바로의 궁전에도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내어 울었습니다(에트 콜로 삐브키). 왜 요셉은 그렇게 울었습니까? 지나날 형들에게 당했던 기억에 억울해서도 아니고 과거를 회상하며 서러워서 운 것도 아닙니다. 식량을 구하러 온 자기 형들이 자기가 요셉인줄은 상상도 못하고 자기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뉘우치는 모습 때문에 감사와 용서하는 마음이 같이 어우러져 울었던 것입니다. 대암학자로 잘 알려진 이병욱 박사는 “눈물은 하나님이 주신 천연 항암제”라고 하면서 눈물 예찬론을 펼쳤습니다. 미국의 생화학자 빌 프레이는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몸 속에서 카테콜아민이라는 호르몬이 다량 분비가 되는데 몸을 해롭게 하는 독소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나 용서나 사랑 등의 감정을 담아 진정으로 눈물을 흘릴 때 몸 안에 나쁜 물질이 빠져 나감으로 독소가 제거된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리내어 운다면 아마도 웬만한 병들은 다 고침을 받을 것이라 믿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유일한 피붙이인 베냐민을 자기 곁에다 두고 싶어서 방법을 고안했는데 여기에 형들이 모르고 당했습니
기원과 목적 프리메이슨은 free(자유)+mason(석공)의 합성어로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스위스에서 조직된 석공 기술자들의 조합, 즉 ‘길드(gild)’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단체는 회원들끼리만 기술을 공유하고 조합회원 밖에 사람들에게는 폐쇄적이었던 일종의 비밀 결사였다. 2. 활동과 회원 이 조직은 집회 장소를 뜻하는 ‘롯지(lodge)’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롯지는 1717년 런던에서 처음 설립되었고, 1773년 프랑스에서는 그랑 토리앙(Grand Orient)이 결성되어 유럽 각 지역으로 퍼져나갔으며 라틴 아메리카와 인도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일부 국가에까지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부터 이 단체의 성격이 단순한 석공기술자들의 결사에서 종교와 정치 및 문화 예술 분야에서 사회개혁과 통합을 지향하는 것으로 변화된 것 같다. 프리메이슨이 계몽주의에 호응하여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자 교권수호를 위해 계몽주의 탄압의 선봉에 서있던 로마가톨릭교회와의 대립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프리메이슨은 교회의 박해를 받는 과정에서 예수회의 일원이 되어 개신교와의 전략적 싸움에 알맞도록 재조직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지난 호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존재론의 측면에서 알아보았다. 바울은 성령을 존재론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혹은 “주의 영”으로 표현한다. 그는 또 “하나님의 영”이 거주하시는 것과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것을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표현한다. 바울은 성령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밀접하게 연결시켜 표현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을 직접적으로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독자적이면서도 동시에 연합적인 역할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교훈들이 토대가 되어 고대 교회사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발전되었다. 이번 호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역할 면에서 살펴보려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직접적으로 오시어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할을 통해 표현하다. 먼저 성령은 “생명의 영”(롬 8:2) 혹은 “살려주는 영”(고전 15:45)으로 표현된다. 성령은 “생명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인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준다: “
결혼하기 전까지는 메마른 체구에 남들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최강 노안의 소유자로 신학생과 전도사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몸이 좀 불면서 체격이 커지고 표정이 딱딱한 외양에 몇몇 사람이 소위 “조직”같아 보인다는 얘길 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목으로 임관을 해서는 짧은 머리에 큰 체격, 위협적인 표정과 검은 양복 탓에 더욱 “조직”스러워졌고 구태여 부인하지 않으면서 한동안 “모 월드” 홈피 제목도 “조직 목사의 미니 홈피”로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외양은 제 목회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무섭고 기대하기 힘든 인상을 강렬하게 주고는, 능력은 부족해도 최선을 다하는 목회와 서툴러도 지속적인 섬김의 노력들이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부정적인 인상을 상쇄해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임기가 끝나서 교회를 옮길 때면 그래도 헤어지기 섭섭한 관계들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잘 하던 말이 “배 목사를 목자라고 부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대표기도를 할 때나 대화 중에 “우리 교회의 목자이신 배 목사님”이라는 말을 간혹 하는데, 이게 듣기가 굉장히 송구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솔직히 그 수준
성경은 우리의 대적 마귀의 공격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강한지 이 사실을 알고 경계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 역사와 또 개인의 삶과 경험에서 영적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는 존재가 실존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며 충돌하는 마귀와 싸우는 영적전투의 전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6장의 결론 부분에 와서 다시 한 번 새로운 도전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상과 내면의 삶에서 마귀의 도전을 극복하고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갈등이란 삶이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갈등을 이겨내기 위해 강력한 힘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영적 삶의 경험이 마귀를 대적하며 승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만약 바울사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은 영적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의 가르침은 허공을 가르는 메아리에 불과하며 청각장애인이 “베토벤의 교향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