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이러다 말겠지 했다. 조금 지나고 나서는 두려웠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면서 두려움은 원인 모를 짜증을 유발했다. 그러다가 이제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예배마저 제대로 드리기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영혼이 메말라가고 일상은 가라앉아 버렸다. 원인도 알 수 없고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만든 현실이다. 의학자들에 따르면 코로나19는 생물이 아닌 단백질 분자라고 한다. 단순한 단백질 분자가 세포 등에 흡착되면 변형되어 공격인자와 중폭세포로 전환된다는데 이렇듯 미미한 존재의 출현에도 맥없이 무너지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이처럼 연약하면서도 그동안 우리는 의학과 과학의 발달을 맹신하며 자신만만해 왔다. 그 무모한 자신감이 이번 사태를 악화시킨 원인일 수도 있다. 이 정도쯤이면 괜찮겠지하는 안일함으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책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엄청난 현실을 하루하루 살아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예배를 자유롭게, 마음껏 드리지 못하는 상황 앞에서 예배의 소중함과 자유의 고마움을 깨닫고 있다. 만남이 제한되면서 인연의 소중함도 함께 알게 됐다. 언제나
온 나라가 코로나 19바이러스로 공포와 답답함에 싸여있는 참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모르는 불안감, 언제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불확실성에 대한 무서움이 모두의 마음을 어렵게 한다. 예기치 않았던 질병이나 재해가 다가올 때 우리는 사람의 힘으로 저항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는 자각에 놀라곤 한다. 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면서 인공지능의 능력에 의지해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던 기대감과 들뜸이 얼마나 허망하고 공허한 것인가를 새삼 깨달으며 인간의 한계를 뼈아프게 실감하게 된다. 이런 자각이 하나님 앞으로 갈 수밖에 없는 가난한 마음을 만들어야 하는데 사람들의 가슴은 더 얼어붙는 것은 현대인의 오만함의 결과일 수도 있다. 현대인들은 개인의 인권이라는 미명 아래 절대 주권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절대적 존재에 대해 탐구하고 인지하려는 노력조차 포기하는 듯하다. 인간의 극히 제한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전부라고 믿으며 오만과 편견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기막힌 현실이 만들어 내는 폐해 중 하나가 알 수 없는 바이러스의 공격일 수 있다. 21세기 첨단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교만함에 비해 우리가 미개하고 불편했
조금 긴 휴식의 시간이 주어지는 연휴나 휴가기간에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인지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고 그 시간속의 자신과 마주할 때가 많이 있다. 이번 설 연휴도 예외 없이 그렇게 과거 속의 나와의 해후를 한다. 지난 시간 속에 나는 웃고 있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눈물 그렁한 모습일 때가 더 많은 것은 아직도 내면은 성장기이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위로도 해 보지만 마음 한켠에는 찬바람이 분다. 언제부터인가 나를 포함한 인간관계를 바라볼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생각이 모두들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연민의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불쌍하고 안쓰럽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일상 속에서 부대끼는 많은 어려움, 그로 인한 고민과 갈등을 겪는 나자신에 대한 가여움도 있지만, 그보다 그렇게 어려움을 주는 대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클 때도 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은 또 얼마나 어렵고 무거울까하는 생각이 들면 미움이나 원망보다는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연약한 모습으로 방황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아주 오랜만에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
한해를 새로 맞이하고 기대와 각오로 그 첫날을 시작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며칠을 남겨두고 있다. 새해를 맞고 또 때가 되면 그 해를 보내는 것이 습관이 되어 해가 바뀌는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 연말연시가 되면 나를 돌아보고 새로운 꿈을 꾸려는 노력을 위한 결심을 하기도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해의 마지막이 왔고 나의 과거의 시간들과 이별을 해야만 한다. 내가 살아낸 한해, 나의 모든 것을 함께 한 과거 시간들을 잘 보내주고 새로운 시작과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마음을 비워야 할 시기가 바로 연말연시인 것 같다. 한해의 맨 끝자락에서 듣고 싶은 음악, 문득 하이든의 기적교향곡을 떠올리게 된다. 교향곡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프란츠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은 고전교향곡의 형식과 구조를 완성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과 같은 후세의 작곡가들에게 창작의 방향을 제시한 선생의 역할을 한 작곡가이기도 한 하이든이 서양음악사에 남긴 의미는 매우 크
2019년도 어느새 절반이 다 지나가고 또 한 달이 훌쩍 지나가려고 한다. 시간이 야속하리만큼 빠르다고, 세월이 속절없이 지나간다며 아쉬워하기도 아깝다. 이렇듯 우리들의 시간은 제한적이고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을 깨달을 때 마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가를 상기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하는 것보다 망각하기가 더 쉬운 참 고약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길이 인생이란 말을 수없이 되뇌이면서도 깨어있는 순간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그렇게 갖게 된 것을 더 움켜쥐기 위해 온갖 억지를 부리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주위를 돌아보고 또 나를 돌아보면 더 많이 가지려고, 그렇게 쟁취한 기득권을 더 오래 유지하려는 욕망의 늪에서 헤어나오기란 그리 쉽지 않은 모양이다. 머리로는 다 알면서도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에는 아둔하리만큼 더디고 힘드니 말이다. 더 심각한 것은 나는 되지만 남은 안된다는 식의 사고, 한번 내 것이면 영원히 내 것이라는 억지가 우리 사회를, 또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멍들게 하고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적절한 때 놓을 줄도 알고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할 줄도 알고 남의 성취와 성공을 정당한 노력의 대가라
꽤 오래전에 발표된 우리나라 대중가요 가사 중에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표현이 있다.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들었던 노래가사였는데 새삼 공감하게 되고 다시 곱씹게 되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미완성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 어느 것 하나 분명하고 딱 잘라 완결하지 못하고 늘 고민하고 씨름하면서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들이 미완성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타인의 연약한 부분을 미완의 모습으로 받아주기보다 비난하고 지적한다. 그러다가도 나의 불안정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 타인의 약함을 더 강조하고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너와 내가 누구도 예외 없이 지금의 모습이 미완성인 것을 인정한다면 이런 갈등이 조금은 완화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음악에도 미완성의 작품은 존재하는데 완결되지 못했다고 해서 음악적 가치나 아름다움이 덜하지는 않다.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데 작곡가가 끝까지 완성하지 않았지만 그 음악이 주는 감동은 다른 명곡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이 작품의 내면적 감동은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인 교향악단의 단골 레퍼토리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가
벚꽃이 만개하고 여기 저기 울긋불긋 이름 모를 들꽃들도 차가운 땅을 녹이며 솟아올라 제각기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치장하는 계절이 바로 봄이다. 어찌 보면 봄은 가장 여린 듯 한 계절이지만 또 가장 강인한 계절인 것 같다. 이제 막 새로운 싹을 틔운 모습은 한없이 연약하지만, 그러나 그 작은 싹으로 태어나기까지는 많은 몸부림이 있기 때문이다. 한 겨울 내내 꽁꽁 얼어붙었던 땅이 녹기를 고대하며 안간힘으로 씨앗을 깨고 차가운 땅에 작은 뿌리를 내리고 땅 밖으로 고개를 내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력을 다한 노력 끝에 다시 생명으로 태어나고 또 더러는 꽃까지 피우는 자연을 보며 순종의 열매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배우게 된다. 자연은 이토록 순종으로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지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들의 삶은 그다지 아름답다고만은 할 수 없음이 부끄럽고 안타까운 봄이다. 자신의 이익이 없으면 실패라고 하고 본인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불통이라 하며 규범을 무시하고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그것을 진리라고, 정의라고 부르짖기도 한다. 패배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보다 타인을 향해 무자비한 독설을 내뱉는 것이
“신의 축복인가? 악마의 저주인가?” 제노바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1782년10월 27일~1840년5월 27일)를 설명할 때 수식어처럼 붙는 말입니다. 파가니니는 어떻게 이런 극단의 수식어를 갖게 되었을까요? ‘뮤지컬 파가니니’는 대전예술의전당과 HG컬쳐가 공동으로 기획한 것으로 2018년 12월 21~25일까지 대전예술의전당 앙상블홀에서 초연한 작품입니다. 저는 그 작품의 연습실부터 리허설, 본 공연까지 사진으로 기록하며 배우들과 공연 전 함께 기도하며 가장 가까이서 작품을 지켜봤습니다. 작품 중 당시 교회권력(성당)이 파가니니에 대한 세상의 소문에 대한 부담으로 그의 시신 매장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며 교회는 왜 그렇게 할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파가니니는 당대의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지만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오해와 시인 하이네의 ‘파가니니의 발에 사슬이 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는 말로 인해 악마의 연주자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1840년 5월 27일, 니콜로 파가가니가 숨을 거둔 후 그의 아들 아킬레가 아버지를 제노바의 교회에 매장하려 하지만 주교가 그에 대한 평판으로
가슴 가득 큰 희망을 가지고 새롭게 한해를 시작했지만 희망은 희미해지고 팍팍한 현실 앞에서 무거움을 느끼는 이들이 많은 달이 2월이라고 한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따스한 봄날을 기다리는 길목인 듯한 2월이지만 한파보다 더 매서운 추위를 느낀다고도 한다. 그만큼 환경도, 경제도 답답하고 삶 자체가 움츠러들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쉽지 않은 일상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 하는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섭리와 주권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되뇌게 된다. 우리는 평안하고 안락할 때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은혜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치고 힘든 상황이 오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있는가, 혹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지난날 경험한 은혜는 까맣게 잊고 그저 낙담하고 불평하기 일쑤다. 그러나 그 상황을 한 걸음 물러나서 보면 이 또한 은혜이며 축복의 통로임을 발견하게 된다. 어려움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고, 고난을 헤쳐 가는 과정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말씀을 현실적으로 체험
2019년 새해를 시작하고 이제는 날짜를 기입하는 것에 적응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제는 새해라고 하기 조금 어색한 시기가 됐나보다. 그래도 1월 한 달간은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설렘과 기대감을 갖는 것이 올해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어 1월 한 달 만이라도 새로운 마음, 새로운 생각, 그리고 새로운 각오로 살아야 할 것 같다. 새해에 대한 기대와 각오를 다짐하고 응원하기 위해서일까? 1월이 오면 특별히 많아지는 행사가 신년음악회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다양한 음악회들이다. 그래서 해마다 신년음악회에서 연주되는 음악들을 살펴보면 그 연주회가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신년음악회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음악이 바로 스트라우스의 월츠곡들이다. 아름다운 선율과 우아하고 고상한 왈츠 리듬이 주는 편안한 경쾌함이 새해의 기운과 닮아 있어서인 듯해서인지 지난 반세기 동안 각 연주단체들이 즐겨 연주하는 단골 레퍼토리가 됐다. 빈 왈츠의 전통과 대중화를 만들어낸 스트라우스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있다. 바로 아버지 요한 스트라우스와 아들인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이다. 이 두 부자는 대를 이어 비엔나 왈츠의 부활과 부흥을
클래식 음악 문헌 가운데에는 특정 계절을 위한 음악들이 간혹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음악, 호두까기인형이 대표적인 예이고 헨델의 메시아 또한 성탄시즌에 집중적으로 연주되는 음악이다. 그러나 정작 이 음악들을 작곡한 작곡가들은 딱히 성탄음악이라고 특정 짓거나 계절을 크게 의식하고 이 작품들은 만든 것은 아니다. 다만 연주자들이 그들의 시각에서 이 작품들의 연주시기를 성탄시즌에 집중한 것이 유례가 되어 크리스마스 때에 연주되는 음악들로 제한해 두었다. 그러나 작곡가 자신이 계절을 염두에 두고 작곡된 음악들도 다수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비발디의 사계이다. 관현악 모음곡 형식의 음악들이 이 작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마다 세 악장으로 구성된 음악으로 묶여져 있다. 이 음악들은 계절을 시작할 때마다 자주 연주되고 또 방송 매체에서도 계절을 알리는 공식적인 음악으로 자주 전파를 타곤 한다. 이번 가을에도 비발디의 “가을”은 이 짧고 아쉬운 계절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음악이다. 17세기 이탈리아의 작곡가였던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는 빨간 머리 사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성직자였지만 사역보다는
(1)예배가 예배되게 하기 위해 앞선 글에서 필자는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것에, 그리고 예배도 시대와 관계없이 기획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과연 기획이 왜 필요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 첫 번째의 이유는 ‘예배가 예배되게 하기 위함’이다.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가 있다. 그 중에서 어떤 정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예배철학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필자는 그 중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싶다. 어떤 만남이든 소중하지 않은 만남은 없다. 더욱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소중하지 않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만남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필자도 아내와의 결혼 전 교제하던 시간을 생각해보면 그 시간을 얼마나 최선을 다해 준비했느냐에 따라서 아내의 반응이 달랐던 것을 기억한다. 이 밖에도 누군가와의 만남을 준비할 때, 우리는 그 만남을 잘 준비해야한다. 그 만남이 지나가는 한 번의 만남이 아니라 만날수록 더 깊어지길 원한다면, 만날수록 더욱 지루하고 진부한 만남이 아니라 만날수록 더 새로워지길 원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기대한다면 말이다. 예배는 이와 비교할
주일 오후에 스코틀랜드 출신 헨리 라이트(Henry Lyte) 목사는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영국 브릭스햄의 바닷가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는 지금의 산책이 이곳에서의 마지막 산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질환을 앓던 라이트 목사는 갯바람을 쐬면 건강이 회복될까 해서 30세였을 때, 이곳으로 옮겨와 작은 교회를 맡았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나도 그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의사는 그가 영국을 떠나 따뜻한 이탈리아로 이주할 것을 권했다. 라이트 목사는 그날 오전 주일예배에서 자신과 20년 넘게 함께해온 교회에서 마지막 성찬식을 행했다. 그의 마지막 설교는 들릴 듯 말 듯 힘이 없었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죽음을 맡기고 우리가 맞게 될 엄숙한 시간을 준비하기를 바랍니다”라며 설교를 마쳤을 때 모두가 진한 감동을 받았다. 예배가 끝나고 그는 20여 년간 걸어온 친숙한 바닷가에서 마지막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 오랜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이제 이탈리아에 가면 친구 한 명 없는 낯선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삶과 죽음 그 어디
‘예배’와 ‘기획’이라는 단어는 어찌보면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기획’은 뭔가 인간적인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역사를 뒤돌아보면 이 세상도 하나님의 철저한 섭리(또다른 표현으로는 기획)속에 만들어졌으며, 성경에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 아닐까? 조금 돌려 생각해보면 우리가 매주 지키는 교회력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신앙을 중심으로 구성된 좋은 기획 프로그램이 아닐까?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드렸던 ‘회당’ 예배와 ‘성막’예배에서도 예배에 대한 정해진 순서와 내용이 있었다. 모든 것을 정확히 다 알 수는 없지만 그것에는 다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다. 지금의 ‘큐시트’라는 형태가 없었을 뿐, 당시의 예배에 대한 신학적 관점에 따른 예배 순서에 그에 관련된 준비가 있었다. 지금도 그 어떤 교회이든 ‘주보’를 보면 예배의 순서와 예배 시작시간이 있다. 그리고 각 순서에 따른 직관적, 또는 암묵적으로라도 할당된 시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의 만찬을 할 때면 집례자와 분잔, 분병에 따른 위치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정해진 동선으로 움직이며 분잔과 분병을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더위도 때가 되면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자연의 순리가 참 고마운 여름의 끝자락이다. 이제는 제법 가을을 예감할 수 있는 바람과 함께 그렇게 치열했던 여름이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다. 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우리들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마음을 가다듬고 싶을 때 함께 할 수 있는 음악을 찾아보다가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의 피아노 음악을 다시 만났다. 27세의 청년 슈만이 음악으로 표현한 삶의 환상과 현실에 대한 진술이 담긴 환상소곡집 작품 12번은 피아노 소리를 아름다운 시적 서정으로 표현한 8곡의 주옥같은 소품들을 모아놓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슈만이 사랑하는 연인 클라라를, 그녀의 아버지이자 슈만의 스승이었던 비크씨의 극심한 반대로 서로를 보지 못하는 시기에 작곡된 음악으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몽상적인 이상주의자와 다소 냉소적이지만 열정을 가진 작곡가의 양면적 내면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이 음악은 슈만의 음악적 미학이 농축되어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각 곡에 제목이 붙어 있는 전형적인 낭만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세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