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12:19~20) 어리석은 부자는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손 안에 속해있음을 몰랐다. “모든 영혼이 다 네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18:4).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라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3~14). 하루살이 인생이 좋다. 어제는 지나갔으니 다시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내일 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므로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오늘 뿐이다. 사람은 내일 일을 자랑할 수 없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부르시면 돌아가야 한다. 지난 주
1979년 함라교회를 시작으로 원당교회, 세종선한목자교회(전 연기교회)에서 40여년 동안의 목회사역을 마치니 지나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과 은혜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40여년간의 목회를 되돌아보니 아름답게 열매를 맺은 사역도 있지만 아쉬운 삶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름답게 열매 맺은 공동목회 사역 사역을 마무리할 계획으로 10여년 전부터 공동목회를 꿈꾸었다. 후임목사 선정을 두고 담임목사와 성도 간에 분란을 겪고 있는 주변의 여러 교회들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었다. 교회 안에서 보살핌과 섬김보다 통치와 군림이 우선하고 상호 배려와 공경보다 조직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던 기존의 교회 환경을 관계중심인 가정교회체제로 바꾸고자 공동목회를 계획했다. 검증되지 않은 무모한 도전이요, 별 탈 없이 해오던 목회에 괜한 생채기를 낼 뿐이라는 주변의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지만 나 자신의 유익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으로 성도들을 설득하며 시작했다. 몇 후임자를 초빙해서 공동목회 취지와 구체적인 방법과 일정을 제시했지만, 공동목회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떠났다. 그러던 중 다행스럽게도 지금의 후임 목사님과
부부유별(夫婦有別)이란 말은 동양의 오륜에 나타나는 말이다. 부부간에는 구별이 있다는 사상이다. 그것은 사람됨과 함의 차이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부부무별(夫婦無別)의 시대가 되고 말았다. 끝까지 부부유별의 사상을 지켜야만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임무이기도 하다. 어떻게 부부유별이 된단 말인가. 우선 신체적 생리적 차이 때문에 구별된다. 성전환이란 요상한 수술도 있다 하지만 날 때부터 신체구조가 달라서 여자가 아이를 낳았지 남자가 낳은 경우는 아직 한 번도 없다. 부부유별을 버리고 부부무별이 된 오늘이기에 남자가 남자끼리 부끄러운 일을 하고 또 여자가 여자끼리 부끄러운 일을 하니 이것을 동성연애라 하던가? 피조물도 자웅유별(雌雄有別)이다. 암컷끼리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수컷끼리 또 부끄러운 일을 안 한다. 거미 곤충만 보더라도 암컷은 몸집이 크고 수컷은 몸집이 작은데 이놈들은 암수가 알아서 짝놀음하고 수컷이 암컷에게 잡아먹히고 나중에 암컷이 무수한 알을 배출한다고 한다. 사람이 거미 앞에 부끄럽게 된 세상이다. 성경도 일찍 경고한 바 있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아이고! 화산댁, 아들 낳아 반갑네요!” 두각댁이라는 이웃 할머니는 새끼줄에 고추가 달린 금기를 보고도 무례하게 들어와 어머니께 축하인사를 했다. 당시 부모님은 종교가 달랐다. 부친의 증조부께서도 유도(유교)를 신봉했고, 그 후손도 계속 유학을 배우고 살아오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무속종교와 불교를 믿어 왔다.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실 때 ‘객귀’를 물리친다고 마당에 십자가 표시를 긋고 칼을 한복판에 꽂아두기도 하셨으며, 부엌 부뚜막 위에 찬물과 표주박에 쌀을 넣어놓고 조상신을 섬기셨다. 동생들을 낳으셨을 때는 ‘삼신’에게 정수를 떠 식사판 위에 놓고 빌기도 하셨다. 물건을 옮길 때도 조심하고 이사를 할 때도 ‘손 없는 날’ 과 방향을 택하셨다. 그 외에도 어떤 일을 할 때에 귀신이 무서워서 점을 치기도 하시고, 집에 늘 드나드는 여승 양남댁에게 묻기도 하셨다. 그날 두각댁이 왔다간 후 아이는 젖도 먹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잠도 안 자고 계속 울기만 했다. 소위 불신자와 무당의 말로 “부정을
살다 보니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왜 이 일이 나에게만 생기는 거야?” 생각될 때가 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걸음마다 생각지 못한 일들이 생겨날 때마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소리다. 진도는 대한민국의 땅끝마을이라는 곳보다 더 땅 끝에 위치해 있다. 막혀 있던 동내 분들과도 소통을 하기 시작하고 귀농자로서의 생활도 적응해 가려고 할 때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겼다. 이년 반 전 전임자가 주님께 가시면서 아들 이름으로 바꾸어 놓은 예배당을 갑자기 부동산에 매매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30여 년을 동내 교회로 자리하고 있던 예배당이 없어져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전임자가 병환으로 폐허가 된 듯했던 예배당에 이제 몇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하게 되고 동내의 교회로서 살아나려는 찰나에, 근처 바닷가의 개발 계획으로 도로 계획이 생긴다고 하니 터무니없는 금액을 못 주면 부동산에 내 놓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는 몇 교인들이지만 함께 작정하고 기도하며 부르짖게 됐다. 그러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반문이 생겨났다. 그때 그렇게도 보았던 말씀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기도의 열쇠로 주신 예레미야 33장 3
껌값이란 말이 있다. 껌을 사는데 드는 돈이며, 또한 시중에 파는 간식성 먹거리 중에서 값이 가장 싼 것이기에 무언가 하찮고 적게 들어가는 비용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데 씹다가 뱉어버린 껌은 쓸모나 값이 있겠는가? 미국 시애틀 어느 골목벽엔 기상천외한 관광지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껌을 씹다가 뱉어서 벽에 붙여놓음으로 생긴 것이다. 그곳을 방문하면 역겨운 냄새가 고약하지만 뭔가 재밌고 흥미로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씹다가 뱉은 껌의 값에 대한 놀라운 기사도 있다. 영국 매체 스포츠 바이블은 알렉스 퍼거슨이란 사람이 씹은 껌을 경매에 내놓았는데 5억 8000만원에 낙찰됐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알렉스 퍼거슨은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 축구감독으로 긴장해소를 위해 1500회 축구 경기에서 3000개의 껌을 씹었다고 한다. 특히 2013년 5월 19일 은퇴 마지막 경기에서 껌을 씹다가 뱉은 것을 한 팬이 주워서 장식장에 보관해왔다. 그러다가 ‘알렉스 퍼거슨 경의 마지막 껌’이란 문구를 적어 경매에 내놓았는데 그것이 일반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고가로 낙찰된 것이다. 껌값이라 하지만 껌을 누가 언제 무슨 용도로 이용했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짐을 알려주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한지라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삼하 5:18~19) 블레셋은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세력이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기 전에 제거하고자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에 능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하나님께 질문하여 그분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일반적인 성도들 같았으면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무슨 “전쟁에 나갈까요? 말까요?”라는 질문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조건 군사를 소집하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나갔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으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늘 의지하며 살았던 삶이 몸에 베여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새벽 기도 시간에 두 번째로 많은 비중을 두는 부분은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데 둡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 외에 또한 저와 함께 계신 성령님의 지시를 늘 따르며 살아가는 데 온
“예전에는 심장 박동수를 빠르게 하는 사람이 좋았다. 요즘에는 심장 박동수를 느리게 하는 사람이 좋아졌다.” 노수봉 저(著) “뜨끈뜨끈 광고 회사인의 메모장”(북클라우드, 96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이 있고, 가슴을 잔잔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 다 좋고 필요하지만, 후자에 대한 평가절하가 많았습니다.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람은 깃발을 꽂게끔 돕지만, 가슴을 잔잔하게 하는 사람은 ‘풍경’을 보게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청미래, 280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으면서 본다고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기차가 좋은 것은 ‘앞’을 보여주지 않고 ‘옆’ 풍경을 보여주며 생각에 잠기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자주 그림에서 떨어져 그 대상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야 사물의 형상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풍경을 본다는 것입니다. 들숨 뿐 아니라 날숨이 있어야 호흡을 하듯이, 일 뿐만이 아니라 창조적인 안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 높이 날아 보기를 원합니다. 더 넓게 보기 위해서 더 높이 떠오르시기를 바랍니다. 더 깊이 보기 위해서 뚫어지게 쳐다보기를 원합니다. 한반도 창공을 높이 떠올라 지구를 통찰해 봅시다. 러시아의 흰 곰이 얼음 구멍에서 먹이를 찾아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남쪽의 섬에서는 물개가 먹이를 찾아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저 태평양 넘어 독수리가 언제 보았느냐는 듯이 자기 먹을 것만을 찾고 있습니다. 높이 떠올라 더 높이 떠올라 서쪽을 보세요. 수 만년 묵은 고목나무가 새순이 돋아났습니다. 동남아를 쳐다보세요. 야자수 그늘이 점점 사라지고 고목나무의 새순이 그늘을 이루고 있습니다. 날개를 활짝 펴고 한반도 위 창공에 떠올라 보세요. 휴전선 토막한 땅 속에 두더지가 먹을 것을 찾아 남진하다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땅 위로 올라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래의 지도자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교육, 종교 등 미래의 지도자는 세계 속에서 국가관을 일깨워주고 한국인의 민족혼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이제는 양떼를 어느 곳으로 인도할 것입니까? 산 좋고 물 좋은 곳,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곳이 어디인가?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
미래를 명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또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거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래 볼 수 없는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다면 또한 할 수도 없습니다. 눈이 먼 소경은 아무도 인도할 수 없습니다. 혹시 인도한다 할지라도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질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지도자란 과거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현실은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어야 하며, 미래를 정확하게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과거와 현실과 미래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미래의 지도자입니다. 만약에 과거와 현실과 미래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얘기할 수 없다거나 내다 볼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아무도 인도할 수 없는 소경과 같습니다. 소경은 인도자가 될 수도 없고 길가는 나그네에게 이정표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듯이 앞을 내다볼 줄 아는 능력도 없는 사람이 길가는 이들에게 이 말 저 말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데 사흘길이 되는 길을 떠나라고 재촉하는 지도자도 있습니다. 빗자루 들고 마당 쓸러 나가는 사람에게 마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나타난 영광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독생자’로 번역된 단어(‘모노게네스’)는 본래 “단 하나의” 혹은 ‘유일무이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다. 요한은 예수의 존재의 특별한 성격 곧 하나님과 유일한 관계를 가진 존재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다(1:18; 3:16, 18). “아버지의 독생자” 혹은 “하나님의 독생자”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세상의 어느 누구도 혹은 세상의 어떤 존재도 가질 수 없는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관계의 존재 곧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의 존재이셨으며, 화육하셨고, 죽으셨으며, 부활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아들의 신비한 연합이 완결되셨으며, 이제는 보혜사 성령의 존재로 그의 제자들에게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독생자라는 용어에서 중간에 위치한 ‘생’은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의 출생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출생한 것은 동정녀 출생의 신학에서 부각된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요한은 동정녀 출생의 신학과는 다른 화육의 신학을 부각시킨다. 화육의 신학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중생과 칭의의 동시성 개념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신분을 제공하여 의롭게 만드는 칭의와 새 생명 곧 새로운 본성을 부여하는 중생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롬5:18; 요5:24). 이처럼 카너는 ‘의롭게 만드는’ 칭의의 경험적 측면을 통해 중생과의 관계를 설명했다. 반면에 무디는 중생의 당연한 결과로서 칭의가 발생하지만, 이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 관계라고 간략하게 표명했다. 2. 중생과 성화와의 관계 대그는 중생을 성화와 연결하여 설명하기를 선호했다. 이는 그가 중생과 성화의 행위가 지속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중생한 자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과 육신의 소욕 사이의 지속적인 적대행위를 증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갈5:17). 그래서 대그는 중생과 성화의 시작을 동시적인 것으로 파악했다(빌2:13). 보이스는 대그와 달리 중생이 성화보다 선행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가 중생을 성화보다 앞선 것으로 보는 이유는 사람이 중생을 통해 새로운 본성을 획득해야만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중생과 성화가 본성적으로 하나의 변화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같은 강조는 중생과 성화 모두가 시작부터
이사준비에 참 바빴다. 전세든 우리 예사랑교회 장소를 옮겨야 한다. 어디로 옮길 것인가? 노영식 목사님의 세 번 초청으로 청계산 기도원에서 장기 금식기도 중 서울 말죽거리 개척을 중단하고 부산에 내려갔더니 동래구 거제동 남문구 길가 2층에 10여명 모이는 교회에 부임해 그 후 7번이나 개척 교회당 이사를 옮긴 후 사직동 중앙교회당을 건축한 70년대의 기억이 새롭구나! 서울교회에 와서는 사택을 7번 이사한 경험도 떠올랐다. 침례교 전국여성선교연합회 건물수리 관계로 예사랑교회는 수원역 화서로 옮기도록 기도와 답사 끝에 50여 평 남짓한 이층으로 계약하고 7월 초에 이사해 새로운 복음전도의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둔 수난주간 마지막 세 예화 중(마25장)에 열 처녀의 비유를 오늘 설교 준비하면서 떠오른 기름준비의 말씀이 나의 심령을 두드렸다. 교회당 이사준비로 몇 주간 깊이 생각하고 이사준비하고 실행하는데 준비처럼 나와 성도들의 천국 이사준비는 어떤가? 천국과 지옥의 실존에 이어 천국 소망에 대해 설교했고, 기름 준비 없이 깜박거리는 등불만 들고 기다리는 교인들이 있어 이는 오늘의 우리가 아닌가? 세상의 돌아가는 종말적 징조는 너무나 농후한데
율법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해보라고 하고, 신약은 할 수 없는 일인데 해보라하지 않는다 (Law would tell us something even though it was impossible for us to do. Gaspel would not tell us to do something if it were impossible to do.). 구약율법은 우리에게 못 올라갈 나무에 올라가 보라고 말하고 신약의 복음은 못 올라갈 나무라면 아예 올라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율법은 “너는 안된다”라는 것을 가르친다. 복음은 “너는 된다”라는 것을 가르친다. 복음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복음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실천과 에베소서 5장21~33절의 부부생활의 성공을 이뤄낼 수 있으니까 해보라고 한 것이다. 율법은 안 되는 줄 알면서 시켜본 것이고 신약은 되는 줄 알기에 해보라는 것이다. 어째서 복음은 이렇게 할 수 있었는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 율
사람을 위해 돈을 만들었는데 돈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됩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이 있는데 너무 좋은 옷을 입으니 내가 옷을 보호하게 됩니다. 사람이 살려고 집이 있는데 집이 너무 좋고 집안에 비싼 게 너무 많으니 사람이 집을 지키는 개가 됩니다. 이런 것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어느 순간 거꾸로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니까 의미의 노예가 되고 행복하지 못한 겁니다.전도(顚倒)는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거꾸로 보는 것이고 몽상(夢想)은 헛된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꿈인 줄을 모르고 현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① 많은 것을 곁에 두고 다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이상한 현대인(現代人) ② 미래의 노후 대책 때문에 오늘을 행복(幸福)하게 살지 못하는 희귀병에 걸린 현대인(現代人) ③ 나누면 행복(幸福)이 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알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현대인(現代人) ④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현대인(現代人) ⑤ 늘 행복(幸福)을 곁에 두고도 다른 곳을 해매며 찾아다니다가 일찍 지쳐버린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