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주의자인 데리다(Derrida)는 글을 쓰는 행위를 ‘글쓰기’로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텍스트의 의미는 또 독자의 사용에 따라서 다른 언어나 말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또 다른 단어나 말에 의해서 상치시킴으로써 이전의 의미는 현재의 독자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로 출현한다. 텍스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텍스트의 의미가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원의미를 연기하게 하는 것이다. Derrida에 있어서 텍스트의 의미는 차이와 연기를 결합한 “차연”, 즉 디페랑스의 개념이다. 하지만 해체주의 해석은 새로운 의미를 열어주기는 해도 텍스트가 지시하는 의미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기 때문에 성서해석에 접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신학자 캐빈 밴후저는 해체주의가 성서 텍스트의 의미를 “무위화” 또는 “니힐리즘”으로 이끌어갈 위험성이 있다고 비판하고, 영국의 신학자 엔서티 티슬턴은 성서라는 텍스트를 독자 자신에게만 애착을 느끼게 하는 “나르시시즘”으로 이끌어갈 위험성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에 근거하여 본 연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 그 자체를 환원시키거나 재고려해야 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이때 환
“나 미국을 쓸고 주름잡고 다녔어요.” 오래 전 미국에서 조금 생활하다 온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으면 ‘미국에서 잘 나갔나 보다.’ 생각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타행에서 그것도 머나먼 이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나마 싸들고 간 사람들이야 다르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하층 생활을 하며 생활을 해야 한다. 그 말대로 대부분 이민자들이 건물 청소를 하거나 뜨거운 스팀이 나오는 세탁소에서 빨래를 하며 일을 한다. 말 그대로 미국의 건물을 쓸고, 수 많은 옷을 다림질로 다리며 주름을 잡는 것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오신 어느 목사님께서 “미국 유학시절, 미국 음식은 그렇게 맛이 없고, 과일도 달지도 않고, 고기도 질기기만 한 줄 알았다”며 나중 집회 초청을 받아 갔을 때 “그렇게도 음식도 맛있고, 과일도 달고, 질 좋은 고기가 있는 줄 알았다”고 하신 소리를 들었다. 계층에 따라가는 식료품이 있는 미국에서 가난했던 유학시절에 싼 것만 사서 먹었다는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얼마 전 연휴에 타지에서 직장을 다니던 딸들과 함께 이야기하다 “아빠는 대학을 가지 말고 한 해 쉬라고 했으니까 용돈 안줄거야” 말하
김난도란 교수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이 책엔 사회의 구성원으로 첫 발을 내디딘 새내기들, 곧 어른 아이들에게 용기와 격려, 도전과 비전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이 있었다. 그는 천 번만큼 이나 흔들린 후에 겨우 어른이 될 수있다고 피력했으며 사회에서의 부적응, 실패, 좌절, 시련 등은 인생 여정에서 당연히 있는 것이기에 극복해야 한 다고 썼다. 어린아이와 같은 크리스천 역시 온전해지고 성장해야 한다. 이것에 대해서 에베소서 4장 13절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추구해야할 목표를 제시해줬다. 또한 장성한 크리스천이 되기까지는 시험과 장애가 있어 수 없이 흔들릴 수 있다. 사탄은 크리스천을 그냥 두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미리 말씀하시길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 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고 하셨다. 이것은 베드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함으로 예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성은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성과 관련된 죄악들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예컨대 그동안 전면에 내세우기 부담스러웠던 ‘동성애’ (homosexuality) 문제까지도 거침없이 다루는 상황이 됐다. 이렇게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동성애는 다양화되고 구체화되어 더욱 대담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화현상의한 단면으로 부상한 동성애 문제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동성애 문제를 접하면서 대중들의 관심과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단순히 문화적 현상으로만 간주할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적 관점으로 접근하여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 스스로의 책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동일한 성에게서 육체 적·감정적 사랑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동성애를 어떻게 바라볼까? 성서에서는 여섯 군데에서 동성애 행위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말은 성서가 동성애를 하나의 성적 지향으로서 분명히 진술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약성서의
2. 해석자로서의 독자 이제 한 인간존재로서의 독자는 해석적 정황에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자의 위치에 있다. 독자는 해석자다. 그는 해석자의 위치에서 텍스트와 씨름하고 작업 한다. 글을 읽는 독자이지만, 그 독자는 매우 복잡한 경험 구조를 지닌 인간존재다. 인간존재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통해서 텍스트를 관조하고 이해한다. 그래서 여러 해석자가 밝히고 있듯이, 해석은 독자의 여러 지평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하이데베거와 불트만의 “전이해”의 개념이나 가다머의 “선 입관”과 “전통”의 개념 또는 리퀘르의 “자발성과 비자발성의 의지” 개념은 독자를 순수하게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해의 출발은 이미 이전의 삶의 실존적 경험과 배경 그리고 인식적 구조의 층으로 형성되어 있는 독자가 텍스트를 다르게 이해할 가능성을 개방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독자가 해석자로서 하나의 프레임이나 구조 틀을 가지고 텍스트를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런 근거에서 독자는 일종의 작가와 같다. 주어진 텍스트를 통해서 독자는 작가가 하는 일을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으로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여 저자가 의미하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성 이러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하나씩 살펴보겠다. 첫 번째로는 ‘성(sexuality)’이다. 현대 사회의 성문화는 전통적인 가치와 규범의 성 윤리가 무너지고 퇴폐적인 문화로 퇴보했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성을 부정적 측면에서 부각하여 기독교적인 바른 이해보다는 성을 드러내지 않는 은밀한 사적 영역에 두었다. 하지만 성서에 근거한 기독교적인 성 윤리를 세상에 바르게 제시해야, 성적으로 타락하는 사회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성을 살펴보자. 구약성경적 성은 결혼과 연관되며, 사회 전체의 복지라는 관점에서 엄격한 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성은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에 관한 자유보다는 엄격한 통제와 절제가 중요한 문제로 인식됐다. 신약성경적 성은 총체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친 새로운 윤리적인 측면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성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은 육체적 쾌락이 악하며, 성관계는 종족보존을 위하여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 그 자체는 악하여 성적인 쾌락이 신령한 생활의 적으로 여겨졌다. 이제는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 영혼 우위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부분은 텍스트의 보편성과 텍스트의 개별성을 구분함으로써 기록된 텍스트의 의미를 더욱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서 해석에서 쉽게 간과한 부분은 텍스트의 보편성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텍스트의 개별성을 등한시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타난 문제는 텍스트가 “살았고 운동력”이 상실된 “닫힌 의미”로 여겼다는 것이다. 텍스트의 개별성은 성서를 읽는 독자의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삶의 정황에서 무한하고 풍부한 의미를 재생산해 내는 힘과 같다. 말하자면, 성서의 텍스트는 저자의 본래적 의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텍스트를 통해서 말을 건네는, 즉 해석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발화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나 뜻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왜 독자는 텍스트를 읽는가? 텍스트를 읽는 이유는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를 발견하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 이다. 문제는 독자가 규범이 아니라 텍스트가 규범이다. 독자는 텍스트에서 출발해야 한다. 종교개혁 시대에 개혁자들은 성서의 절대 권위에 굴복하고 어느 것이든 성서 텍스트 위에 군림할 수 없었다. 특히 마틴 루터의 경우에는 “성서가 곧 스스로 의미를 드러낸다”라는 해석적 원칙과 존 칼빈의 경우에는 “성서가 성서를 해석한
우리 신앙의 본질(핵심)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그래서 요한1서 1장 3절은 우리의 구원을, 즉 우리의 신앙을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말하고 있고, 요한1서는 여러 곳에서 그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해서 교리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그분의 성품과 의도와 뜻을 친밀하게 아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성서공회 중 하나인 United Bible Society에서 발간한 핸드북 시리즈 요한1서에서 Haas, C., Jonge, M. de와 Swellengrebel, J. L.는 요한1서에 나오는 하나님을 안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요한1서 2장 3절에 대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구절에서 ‘안다’는 동사는 ‘친밀한 교제 안에 있다 혹은 친밀한 교제를 가지다’라는 뜻이다. 즉 어떤 사람의 성품이나 의도를 친밀하게 안다는 뜻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번역은 여기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안다고 하고’라고
1981년의 미국 영화 ‘레이더스(Raiders)’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세계 영화계를 신선한 충격에 빠뜨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중 첫 작품이다. 영화제목 ‘레이더스’는 원래 ‘침략자들’이라는 뜻이지만, 영화 포스터의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아서’(Raiders of the Lost Ark)라는 제목처럼 언약궤를 찾아 나선 모험 판타지다. 해리슨 포드라는 최고의 명배우가 주연을 맡았고, 우리나라 TV에서도 여러 번 방영된 바 있다.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Ark of the Covenant)는 바벨론에 망할 때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고, 고고학 교수인 인디아나 존스 박사가 그 언약궤를 찾아 나선 것인데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언약궤를 추적하던 독일군이 법궤를 열었을 때 그 안에는 모래뿐이고, 거기서 무서운 천사들이 쏟아져 나와 이 신성한 궤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천사들이 궤를 지키듯이 본문에도 언약궤의 움직임에 따라 ‘하나님의 손’이 나타난다. 그 손이 노획(鹵獲)한 언약궤를 갖다둔 블레셋의 도시마다 재앙이 임한다는 말씀이 사무엘상 5장, 이 장의 중심 단어는 ‘여 호와의 궤’, ‘언약궤’다. 12절밖에 안
지난 시간은 다음 세대가 교회에서 사라진 현실을, 반면에 하나님은 오늘날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작정하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눴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 그리고 우리가 그 일에 어떻게 함께 할 것인지를 나누기 전에, 먼저 우리의 현실을 영적인 관점에서 진단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한편으로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 세대의 현 영적 상태와 관련해서 가장 적절한 성경구절이 호세아 4장 6절이라고 생각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다음 세대가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 우리 어른 세대의 영적 타락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어른 세대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 다. 옥한흠 목사님이 소천하던 해 1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에 낸 기고문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말과 정확하게 같은 말을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제목이 “교회 이렇게 무너지다니”였던 것 같다. 그 몇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힘으로 프로그램 가지
기독교 세계관의 이해 오늘날 우리는 역사상 그 어떤 때보다도 다양한 사상들 속에 둘러 싸여 있다. 한 세대가 갖는 의식 구조나 공감대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는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 즉, ‘세계관’이 형성되어 있다. 이는 여러 상황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된다. 그런데 현대 사회 내 이런 다양한 현상들 중의 많은 부분이 세속적인 세계관의 원색적인 표출로 이어지며, 기독교 신앙과 상충한다. 기독교와 대립되는 기존에 있던 세속적인 세계관으로는 크게 다섯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이신론이다. 제1원인인 초월적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나 스스로 운행하도록 버려두셨기에, 하나님은 내재하지도 않으시고 완전한 인격도 아니시며, 인간 사의 주권자나 섭리자도 아님을 말했다. 두 번째는 자연주의이다. 물질을 영원히 존재하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인간은 하나의 복잡한 기계로 인식해 인간의 이해력 역시 기계의 복잡성처럼 생각하였다. 물질의 존재 목적과 역사 과정 등도 자연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세 번째는 허무주의이다. 허무주의는 철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감정으로서 모든 가치를 부정해 인간이 의미 있는 행동을 하
필자는 이사야서 59장 9-12을 구절을 읽을 때 어떤 해석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우선 이 구절에서 필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엄하고 무서운 징벌적 책망을 넘어서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인격을 무시하고 모욕적인 험한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처럼 연상한다. 하지만 필자는나 자신에게 스스로 묻는다. 과연 그러한 의미로 읽고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당시 이 글을 쓴 저자는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을까? 저자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이 구절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하퍼스 바이블 코맨터리’의 내용을 확인했다. 왜냐하면이 구절의 의미는 주해의 도움이 필요 했기 때문이다. 주해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선지자를 통해 보여준 그들의 고난에 대한 이유가 하나님의 부재이기 때문에 이제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 애곡하고 있다. 그들 자신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를 만들었다.” 이 중 주요한 두 단어는 ‘하나님의 부재’(God’s absence)와 ‘애곡’(the lament) 이었다. 필자는 여기서 성서의 구절과 주해의 설명에도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어로 설명한 이 주해는 명사 ‘애
이전에는 주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역동적인 국면을 살펴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의 행동으로 표현됐다. 주 예수께서 행하신 치유 사역이 하나님의 그런 권능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죄들의 사함”의 선언으로 표현됐다. 중풍병자 치유 사역은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마비된 신체를 치유해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걸어가게 하시는 신체적인 치유 사역이었지만, 영적으로는 믿음으로 주 예수 앞에 나온 인간을 향하여 “죄들의 사함”을 주시는 영혼의 치유 사역이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향해 그가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통해 “주 예수는 땅에서 죄들을 사하는 권세를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죄들을 사하시고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주권적인 권능의 행동을 통해 나타났다. 주 예수의 치유 사역 속에 나타
목회현장에서 종종 듣게 되는 유머입니다. 만약 처음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말씀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어떡합니까! 무슨 이런 유머가 있습니까!”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유머에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 숨어 있습니다. 특별히 매일매일 상황이 바뀌는 환경 속에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부대키며 살아야 하는 목회 현장에서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센스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왕궁에서 각국의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이 모이는 만찬이 열렸습니다. 그때 서양의 식사 매너에 익숙하지 않는 동양인 정치인과 외교관들도 많이 초청됐습니다. 지금도 서양식 저녁식사 테이블에는 스푼, 포크, 나이프가 많이 세팅되고, 컵들도 물컵, 음료수컵 등 여러 개 놓여 있어서 제대로 교양 있게 식사하려면 여간 헷갈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100여년 전 다른 나라의 문화를 잘 모를 때는 모든 것이 이상하고 어색했을 것입니다. 그 만찬 자리도 동양에서 온 외교 사절단들에게는 이상한 것 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맛있는 음식이 나왔다면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을 축이고 식사한다고 옆에 있는 핑거볼
성서 텍스트와 성서 해석자인 독자는 이해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작용한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텍스트와 저자의 연관성에 초점이 되어 있어서 독자는 이해의 구성요소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는 독자를 해석의 구성요소로 받아들일 경우에 발생하는 텍스트의 이해와 저자의 의도가 왜곡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전통적인 해석적 논의에서 독자 (reader)가 이해의 주요 요소에서 배제됐다. 그럼에도 이해의 기술로 정의되는 해석학에서 문제가 되는 구성요소는 저자였다. 전통적으로 저자(author)는 텍스트의 생산자이면서 테스트 자체를 통제하는 입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텍스트에 선행하는 입장을 취하고 독자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독자의 위치나 자리를 이해의 구성요소로 수용할 수 없었던 저자는 결과적으로 독자를 무의식적으로 배제함으로써 텍스트와 독자를 독립적으로 구분하게 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성서해석에서 문제가 되는 주된 쟁점이 텍스트와 독자를 독립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이해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독자가 텍스트에 개입하거나 참여하는 경우에 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