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이은하 노래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사랑은 영원한 것/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희미한 기억속에서도/ 그리움은 남는 것/나는 너를 사랑하네/ 아직도 너 하나 만을/ 나는 너를 기다리네/ 아직도 잊지를 못하고/ 언제 언제까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사랑은 영원한 것/ 나는 너를 사랑하네/ 아직도 너 하나 만을/ 나는 너를 기다리네/ 아직도 잊지를 못하고/ 언제 언제까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사랑은 영원한 것 옛 애인이자 첫 애인을 못 잊어 평생 홀로 사는 남녀누구라면 의당 위의 노랫말은 백번 읊어도 좋고 좋은 가사일 것이다. 그런데 위의 노랫말을 이제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남녀 그 누군가가 계속 읊조린다면 단연코 잘못된 행세일 것이다. 지금 자기 짝이 엄연히 있는데도 옛날의 이루지 못한 짝 생각을 지닌다면 지금의 짝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 아니라 “이제는 그대는 내 사랑 아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짝이 있는 그 누구든 남녀가 “아직도 너 하나만을, 나는 너를 기다리네”하면 못쓸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부정(不淨)
한 사람이 빌려온 도끼머리가 물에 빠졌을 때,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도끼를 떠오르게 했다. (왕하6:5~7). 홀톤 박사(Dr. Holton)의 설교에 대학교 2학년을 넘는 시기의 나에게 기적에 대한 회의의 그림자가 드리우니 작은 의심의 불씨는 퍼져갔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천지창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바다 위를 걸어오심 등의 기적, 성령강림으로 사도행전의 기적 역사를 무조건 받아 믿은 나에게 성경 속의 기적을 믿지 못하게 되던 차에 하루는 선명한 꿈을 꿨다. 하늘로서 흰 보자기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보자기가 내려와 내 앞에 각양각색의 꿈틀거리는 그림들은 싸버리고 사라지고 말았다. 대학교 3학년 때 모든 성경의 의심은 사라지고 신학교에 입학해 1964년 3월 8일 도안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됐다. 기적(奇蹟, Miracle) 또는 이적(異蹟)이란 일반적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거나 생각할 수 없는 신기한 일, 종교적으로 신의 능력이 일어나며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기적, 이적, 표적, 기사와 같은 말은 많은 종류의 현상들을 포함한다. 기적은 물질세계에 있어서 분명히 하나의 자연법칙을 배제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판”은 주로 난장판 할 때 쓰는 접미어이다. 모든 행사에 “판”이란 말이 붙지만 좀 난잡스럽고 소란스러운 행사에 “판”이란 접미어가 잘 붙는다. 싸움한판, 씨름한판, 윷놀이한판, 시장판 할 때 그 속에는 경쟁심과 투쟁심이 발동한다. “판”이라하면 좀 어지럽고 안정감이 없는 뉘앙스를 풍긴다. “폭”은 “판”과는 정반대의 개념을 말해준다. 그림 한 “폭” 치마 “폭” “폭신폭신” “폭신하다”(be soft cushionary) 할 때의 “폭”이란 말은 안정감과 정서가 고요히 흐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엄마 품에 폭신하게 잠든 아이의 얼굴이 예쁘다. “판”과 “폭”에 대한 한국 고유적 언어 개념을 내가 정확하게 구별했는지 여부는 모른다. 단지 언어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을 원색적으로 말해본 것이다. 나는 어느 날 30여명의 성도가 모이는 작은 교회 주일예배에 참여했었다. 두 시간의 예배시간 중 고요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관한 예배였다. 장고, 징, 드럼 이름 모를 악기가 연주되고 고성으로 불러 재끼는 찬송가는 차라리 소음 같았다. 입당하는 순간 조용히 기도할 틈도 없다. 솥에 넣는 콩을 볶듯 박죽으로 돌려대는 데에는 그냥 견딜 콩알 낱알은 하나도 없었다. 설교단에
초등학교 4학년때 외사촌 전근술이 전해준 공자와 석가의 만화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 다음에 갖다 준 만화책을 읽었는데 예수 아기가 마리아 처녀에게서 탄생한 것과 십자가에 옷을 벗긴 채 죽은 예수가 어찌 3일만에 다시 살아났으며 풍랑치는 바다 위를 걸어갔는가? 그 외의 많은 기적도 어린 나이에도 믿어지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성지합과 부정모혈로 임신하고 출생하는데 어떻게 처녀의 몸에서 탄생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처녀에게서 탄생한 사건은 생물학적 또는 신학적인 문제는 될지 몰라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빠져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모든 인류를 죄악에서 구속하기 위해서 죄 없으신 구세주로 성육신(Incarnation)하셔야만 됐다. 이상근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창조의 하나님께서 그의 제2의 창조인 인류 구속을 위해서, 그 자신이 인간으로 성육신하여 오셨다는 경이롭고도 전무후무한 사건의 성격을 인정할 때, 그 방법으로서의 처녀 탄생은 문제가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당연한 것을 느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8:46)라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셨다. 신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80을 훨씬 넘도록 살아오면서도 지금까지 나는 전혀 가난을 모르고 부(富)하게 살아왔다. 살아온 과거를 곰곰이 되돌아봐도 가난하다는 생각 없이 오직 부한 생각으로 살아왔었다. 그러나 단 하룻밤 지독하게 가난했던 밤이 있었다. 가난 공포의 밤이었다. 그 밤은 치명적인 가난의 하룻밤이었다. 이 하룻밤을 제외하고는 가난하다고 느껴 본적이 없다. 최후 절명적인 가난의 그 하룻밤은 어떤 밤이었던가를 회상해봤다. 나는 1960년도 아무런 외부 보조도 없이 강릉소재 관동대학교에 만학의 문을 열고 들어갔었고 그때 이미 식구는 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가족이었다. 그날 밤은 공포의 밤이었다. 내일 아침끼니가 없이 밤을 보내야하는 밤이었다. 두 아이는 밥 달라고 할 것인데 빈 숟가락을 내어 놓아야할 아침이다. 나는 아내에게 철학적인 질문을 했다. “여보, 가난이란 무엇이요?” 아내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내일 아침끼니 걱정뿐이다. 자꾸만 답을 요구하는 나에게 아내는 “시끄럽소 마.”그것뿐이었다. 나는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지금이 가난을 체험적으로 정의해야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자문했다. “가난이란 무엇인가?(what is the poverty?)” 가난은 단순히 기분이 나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1서 4:18). 얼마 전, 강화임마누엘 농아인교회에 초청받아 갔다. 교회개척 30주년을 맞아 설교부탁을 받았다. 30년 전 교회개척예배에 축사순서를 맡았고 그 후 10년마다 초청되어 네 번째 갔는데 남다른 감회가 있었다. 듣지도 말도 못하는 한국인 농아를 사랑한 구미꼬 처녀는 가문도 좋고 공부도 신학까지 잘 했고 인물도 좋아 얼마든지 일본인 신랑을 선택 할 수 있었지만 한국의 농아인 이두형 청년을 “에로스 사랑”으로 결혼하고 남편과 같은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50여명의 농아영혼들을 위한 사역을 정말 즐겁게 충성 헌신하는 “아가페 사랑”으로 승화하고 있었다. 30년 전 일본인 구미꼬는 농아교회가 개척을 요청해 도와줬고, 서울지방회에 다른 몇 농아교회와 함께 가입시켰고, 총회에도 가입시켜 준 일이 있었다. 한국인 농아청년을 데리고 일본에 가서 부모에게 소개하니 기가 차고 놀라서 분노한 부모는 3일간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나 계속 꿇어앉은 청년에게 “정말 내 딸이 자네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두형
예수님은 세상 집권자들에 대해 그들의 보편적 정체를 서슴지 않고 발표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마 20:25) 집권자의 범주 안에 왕이나 대통령을 넣자. 이들은 백성을 자기 입맛대로 주물린다고 했다. 왕이나 대통령 밑에 있는 신하나 장관들은 백성위에 권세를 부린다고 했다. 저들은 군림하고 행패 부린다(Dominion over the people and authority upon the people). 가까이 아르헨티나에서 생긴 집권자의 예를 보기로 하자. 그 나라의 집권자의 정치 철학이 페론주의(peronism)였다. 후안 페론(1895-1974)이 그의 아내 에바페론(1919-1952)과 함께 두 번 대통령까지 하면서 온갖 부정으로 국민 위에 군림하다가 1955년 군부 쿠데타로 추방됐다. 겉으로는 자선사업 및 여성참정권 인정 등으로 인가를 얻었으나 그의 실재는 아주 달랐다. “모든 의사 결정은 대통령인 페론을 통해야 했어요. 그래서 정당이나 의회 정치가 발전하지 않았어요. 부정부패 추문도 끊이지 않았어요. 페론 자신도 집권 기간 동안 금
지구종말 시계는 어디까지 왔는가? 많은 정보 중에 우주적 징조를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져서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24:39) 태양의 흑점과 폭풍이 지구에 끼치는 영향 및 별들과 소행성이 외계로부터 지구에 날아와 끼치는 결과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천문학자들도 말한다. 지구 자체 내의 재앙도 주님은 예언하셨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24:7~8) 삼한사온이 사라진 기후변화, 지각균열, 집중호우, 싱크홀, 태풍과 천재지변으로 화산폭발과 지진 해일 쓰나미, 멕시코 코르도바에 내린 주먹 만한 우박, 미국 오대호에 덮친 얼음 쓰나미, 시베리아의 메탄가스 폭발, 이상의 지구 자연재해와 이상기온을 살펴본다. 지난번 네팔의 지진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위력의 25배였다고 말했고, 또 불의 고리로 동시에 일어난 일본의 구마모토 지진과 남미의 에콰도르 지진은 환태평양판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들이 만든 생화학무기, 초지능과 인공지능 로봇 곧 지능폭발 등의 4차원의 세계화는 다니엘의
복음은 복된 소리다. 그것은 기쁜 소리다. 듣기에 복된 음성이다. 복된 소리는 생기를 돋게 하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약진케 한다. 세상에도 기쁜 소리가 많다. “당신 병은 암이 아닙니다.” “당신은 합격했습니다.”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빛이 한 푼도 없게 되었습니다.” “재판결과 무죄입니다” “당신 아드님은 유괴에서 풀려났습니다.” “탄광에서 일주일 만에 구출됐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무엇인가? 세상복음과 성경복음은 그 내용이 다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는 복음하면서도 그 내용엔 무지하다. 선교사를 파송할 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난다고 하지 율법을 전하기 위해 떠난다는 말은 현장에서 들어 본적이 없다. 오직 복음! 입에는 복음을 달고 살지만 진작 그 복음의 핵심엔 무지하다니까. 일하지 않았는데도 일했다고 간주(看做)해주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악한 일을 했는데도 악한일 하지 아니했다하고 선한일은 한바가 없는데도 선한 일을 했다고 하며 도무
30년전 10월 16일이 가까워지면서 10여일 가까이 눈물과 회오에서 각별한 참회의 시간에 30년을 뒤돌아보니 서울교회 유치원 화재사건으로 화재현장에서 먼저 간 최성희에 이어서 병상에서 6일 동안 김지수 양상윤 하이얀 진세실과 라누리 도합 6명이 비명으로 떠났고, 3~4도 화상어린이 박호용 김민숙 박성희 전효민 김지영 라하나 윤희 등 7명은 4년간 미국까지 데리고 가서 치료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회고록을 쓴다면 책 한권이 모자라지만 주님의 선하심을 기술하고자 한다. 꿈자리가 너무도 어수선해서 잡몽 실몽 허몽인가? 악몽이 아니면 영몽인가? 어렸을 때 부친이 다섯 가지로 가르쳐주신 꿈 해몽을 생각하다가 시간이 되어 모든 사역자들이 교회에 모였을 때 꿈자리가 너무 안 좋으니 다음 주로 연기하자고 말했더니 S전도사를 위시해서 모두가 이미 계획한대로 하자고 고집해서 출발했다. 그날은 월요일이라 목회자는 쉬는 날이지만 1990년 새해 목회계획을 세우고 기도하기 위해 설악산 기도원으로 가고 있었는데 인재대교를 건너기전 교회의 유치원에 화재가 나서 인명피해도 있다는 전화에 급히 돌아섰다.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 저희 유치원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계속
거의 세계인은 물론 우리 한국 사람도 우간다 나라에 대해서 그리 많이 알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오래 전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우간다의 아름다움을 “아프리카의 진주”라고 했었다. 영화 ‘타잔’의 배경이기도 한 우간다는 조그마한 빙하 지대에서 열대 지역까지 품고 있는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로 국토의 1/6 이상이 호수로 이루어져 있는 천혜의 자연을 보유한 아름다운 나라이다. 코끼리와 하마와 사자 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산과 숲에는 고릴라와 침팬지 그리고 1,000여종이 넘는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담수호인 빅토리아 호수와 우간다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방문한다는 아름다운 분요니…. (밀알 2017년 봄호 Vol.57 P.30에서 인용) 우간다의 자연환경은 그렇거니와 나라의 구성은 어떤 것인가. 부간다(Buganda) 왕국으로부터 우간다는 아프리카 중앙 동부에 있는 나라로, 19세기 강력했던 부간다(Buganda) 왕국으로부터 유래했다. 정식 명칭은 우간다 공화국(Republic of Uganda)이며, 수도는 캄팔라(Kampala)이다. 14, 15세기경 오늘날의 국민을 이루고 있는 부족들이 중앙아
윌리엄 브랜함(Branham) 부흥사는 놀라운 신유 부흥사로 한 번은 집회를 시작하기 전에 농아를 먼저 강단 앞에 세우고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된 귀신아 떠나가라.”고 명령해 즉시 고침을 받게 됐다. 이것을 보고 오스본(T. L. Osborne) 목사는 크게 은혜받아 변화됐다고 한다. 그에게 은혜받은 큰 종을 영적 아들로 두긴 했으나 브랜함 목사 자신은 진리로부터 떠난 어떤 교리를 전개했다. 1963년대에 그는 요한계시록 11장에 있는 ‘두 증인 중의 하나’가 자신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했다. 이로 인해 그는 극단적인 논쟁에 휘말렸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비이기적인 사람으로 남는다는 것이 때로는 어렵다. 오늘날 한국교회나 세계적으로 마지막 때에 출현한 이단경계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1965년 12월 신유부흥사 브랜함은 애리조나로 가는 십자로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음주운전하는 차에 그의 차 앞부분을 부딪히는 사고를 당해 며칠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운명했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가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 한 무리는 브랜함이 하나님이 될 것이고 처녀에게서 다시 탄생할 것이라고 믿
내 나이 10세 때인가 보다. 큰 개 한 마리를 키우는 증외갓집에 자주 다녔다. 물론 그때는 매어놓지 않고 풀어놓고 개를 키우는 때였다. 그런데 나는 이 개를 무서워했다. 그 개만 보면 그 자리에 부동자세로 섰다. 어느 날 이놈의 개는 나에게 덤벼들어 나의 종아리를 물어 제켰다. 피가 났다. 나는 공포와 아픔에 질려 울었다. 외숙모라는 아줌마가 담담하게 말한다. “괜찮다. 우리 개는 착하다.” 착하긴 뭘 착해. 이미 나를 물어 제켰는데. 종아리에 피가 나는데. 외숙모라는 아줌마는 그냥 개를 저리 가라고 워리워리 하고는 나에게 와서 된장을 발라 주면서 괜찮을 것이라 할 뿐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개에 그 외숙모 아주머니구나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동네 또래 아이들과 함께 그 집을 지나가노라면 이놈의 고약스러운 개는 달려와서 그 많은 아이들 중에 굳이 나를 지목하여 짖어 재기고 그리고 또 물어 재긴다. 환난의 순간이었다. 이러기를 몇 차례 겪었다. 10대 아이인 내 마음 속에는 복수심이 생겼다. 두고 보라. 이 세상의 모든 개들은 나의 적이다. 그땐 집에서 키우던 개를 아무 생각 없이 요리해 먹는 것이 세풍(世風)이었다. 사돈이 오는 등 귀빈
바울 사도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고 증거했다. 그리고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증거했다. 사도 바울의 삶은 정확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고 순교한 제자의 삶이었다. 탄생과 부활이 하나님의 전적인 구속 섭리의 예정으로 이뤄졌다면,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해 자기의 멍에를 지신 예수님께서 자원하 신 것이다. 십자가는 인류 역사의 분수령을 이루는 장엄한 광경이요, 기적이며, 인류역사는 이 갈보리 십자가의 빛 아래 조명돼야 한다. 에릭 사우어(Eric Sauer) 박사는 “구약은 약속과 대망이요, 신약은 성취요 완성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전투에 대비해서 군대를 배치시키는 것이며, 신약은 십자가 위에서 고난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라고 말
“소설을 쓰다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날밤’을 근사하게 표현하고 싶어서 ‘꽃잠’이라고 표기했다(중략). 음식점에서 ‘꽃등심’을 불판에 구워 먹을 때는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꽃을 불판에 올리면 안 되니까. 첫사랑을 꽃사랑이라고 하면 더 풋풋할 것 같고 하기 싫은 공부를 꽃공부라고 하면 덜 지겨울 것 같기도 하다.” 김홍신 저(著) ‘하루 사용 설명서’(해냄, 6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어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말을 꼽으라면 ‘꽃’이라고 말합니다. 한글 중에 제일 꽃을 닮은 글자는 ‘꽃’이라는 글자입니다. 꽃은 하나님의 미소,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의 선물입니다. 보는 이가 없다 해도 들꽃은 피고, 그리움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 해도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슬픈 단어에 ‘꽃’이라는 말을 붙이면 한결 가벼워지고 부드러워집니다. 꽃아픔, 꽃갈등, 꽃싸움, 꽃미움, 꽃두려움, 꽃열등감, 꽃질투, 꽃욕, 꽃이별, 꽃슬픔, 꽃고독, 꽃분노, 꽃외로움… 심지어 돼지 앞에 꽃을 붙이면 꽃돼지가 되어 이쁜 돼지를 연상케 합니다. 시인은 ‘꽃등심’을 불판에 구워 먹을 때 미안한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고 합니다. 꽃을 불판에 올리면 안 되니까. 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