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양로원에 사역하는 김익수 목사 따라 약속대로 15분 설교를 마쳤는데 휠체어에 앉은 어르신네들의 반수쯤 비스듬히 기대어 졸고 있었다. 예배 후 2층에 올라가니 침상에 누운 90세 전후의 노인들이 음식을 못 먹고 링겔에만 의지해 연명하며 신음하는 소리가 구슬프게 들렸다. 인생은 生老病死라고 어려서부터 들었으나 에녹,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 천수를 누린 사도 요한을 위시한 다른 사도들처럼 장렬한 순교의 삶이 떠올랐다. 응급환자실을 방문했을 때 그들의 신음소리가 노래처럼 흘러나옴을 듣고 환자들의 마지막을 감지할 때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주 왕하 5장의 나아만의 설교를 하면서 교만을 내리고 겸손히 요단강에 7번 목욕해 어린 아이의 살같이 문둥병의 치유 받은 기적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순종해 실행한 그의 믿음과 순종의 열매였음같이 지금도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믿음과 순종이라 생각되어 아래의 말씀을 나누게 된다. 지난 50여년 목회사역 가운데 나의 병고를 돌이켜 보면서 병자들의 고통과 슬픔, 낙망과 죽음의 그림자에 신음하는 모습에 동정과 불쌍히 여김이 저절로 발산되고 어떻게 저들을 치료하고 주님의 기적의 능
살아갈수록 좀 불편한 것이 아주 편하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고 이 사실을 타인들에게 일종의 진리나 되는 것처럼 말해 주고 싶었다. 우리의 생활에 불편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못 가졌기에 불편하기보다는 가졌기에 더 불편하다는 것이다. 어느 스님이 말했던가. 그건 누가 말했던 상관없다. 무엇을 가졌기에 부자(富者)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안 가졌기에 부자가 된다는 것인데 듣기에 따라 알쏭달쏭하다. 그러나 성경이 이 말의 의미를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그렇다. 풍부한 소유보다 풍성한 자기가 돼야 하는 것이겠다. 법정 스님의 말이다. 또 이런 말의 정확한 해명은 성경이 말하고 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나에게는 우선 스마트폰이 없다.
침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기 전 한 주간 먼저 신학교에 와서 기숙사에서 아래의 성경을 읽다가 충격적인 말씀으로 받아 문 닫으려는 도안교회에 자원해 목회를 시작하게 됐다.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 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56:9~12) 성문 앞 네 문둥이는 벤하닷이 거느린 아람군대의 사마리아 성 포위로 진퇴양난이요, 사면초가에 놓였다.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 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지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지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 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왕하7:3~4) 그들이 일어나 죽기를 각오하고 아람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8~10) 근래에 와서 인터넷을 통해 “십일조를 내지 말라”는 설교를 몇 번 살펴보면서 혹시 이단자들이 아닌가? 오래전 십일조를 안내면 도둑놈이라 설교한 전 목사와 나아가 지옥간다고 소리친 윤 목사를 이단이라고 해서 한기총 이대위원장때 교정한 일이 있었는데 십일조 때문에 상처를 입은 일이 있어서인가? 어떤 교회처럼 재정 관리를 정직하교 효율적이며 투명하게 하지 않는 교회에 대한 반감에서인가? 퇴직금을 100억, 200억을 받는다는 대형교회 목사들에 대한 역반응에서인가?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이 말씀을 나누게 됐다. 필자는 6·25전란 휴전 후 54년 대구영남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대구에 하나뿐인 전란 중에 부산에 있던 래이(이대복) 선교사가
나는 서제 벽에 무식하게 굵은 대목을 몇 개 박아 놓고 외출에서 돌아와서 거기에다가 외투나 가벼운 겉옷을 걸어 놓는다. 아내는 이따금씩 서재에 들러 보기 흉하게도 이런 못에다가 옷을 걸어 놓느냐고 거의 짜증스럽게도 훌훌 걷어서 다른 방에 갖다 버린다(?). 스탠드 옷걸이를 비치하면 될 것을 왜 그러느냐고? 언젠가 나도 모르게 대못을 벽에 박아 놓은 것이 있어서 그냥 쓰고 있는 것뿐이다. 자주 아내가 촌스러운 영감쟁이라고 놀려대도 끄덕 없이 지내는 이 노인의 무의미한 고집이라 할까? 그런데 어느 날 책에서 눈을 떼고 바라보니 못과 외투가 벽에 걸려 있는 것이 새삼스럽게 돋보이는 것이다. 나는 순간 자문(自問)해 봤다. 왜 나는 아내가 그토록 못마땅한 옷걸이 행세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라까? 그리고 더 깊은 실제문제로 나아갔다. 못이 거기 있어 옷을 거는 거냐? 옷이 있어서 못에 거는 거냐? 가령 외투 옷이 있었다 하더라도 벽에 못이 박혀 있지 아니했더라면 거기에 걸려 있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그렇다. 그런거다. 나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발견한 나의 지혜에 스스로 감동(?)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편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리 외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불가사의해 저의 좁은 식견으론 표현 불가능한 졸필이지만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인류 구속의 놀라운 섭리는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신비중의 가장 큰 신비요 기적 중에 최상의 기적이며 하나님의 사랑 중에 지극한 사랑의 극치요 인간으로선 정말 전무후무한 역사적 사건이었으니, 예언된 “오리라 한 엘리야”로 마지막 선지자 침례 요한은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는 예수를 미리 내다보듯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주전 800여 년 전 이사야 선지자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도 53:7) 라는 예언의 성취를 증거했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의 범죄인 원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인 예수께서 십자가에 들림으로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을 언약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1,2상)라고 엄명한 말씀은 주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 혹은 최후명령처럼 바울 사도의 유언이요 최후명령으로 때를 얻든 못 얻든 영혼구령을 명령했다. 선전종이와 공짜 이발 해방 후 우리 마을엔 이발소가 없었다. 고모부 댁에 가서 이발을 몇 번 했는데 당시 이발 기계는 두 손으로 머리를 깎는데 기계 이빨이 여러 개가 빠진 오래된 기계라서 머리털이 잘 깎이지 않아 전진후퇴를 할 때면 머리가 아파서 여러 번 울곤 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가위로 머리를 깎아주셔서 학교에 갔더니 동무들이 “머리칼을 소가 뜯어먹었다!”고 놀려댔다. 토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노란종이를 아무 말 없이 뿌리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동무들의 말은 “예수쟁이”가 예수 믿으라고 하는 “선전종이”(전도지)라 했다. 교회에 안 다니는 우리들은 놀려댔다. 어떤 때는 “예수를 믿지 말고 나를 믿어라!”고 골목대장인 내가 먼저 소리치면 아이들도 작은 막대기를 흔들고 나를 따라 하기도 했다. 그런데
1950년도를 전해서 우리나라에는 거지떼들이란 무리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고난과 6·25 전쟁의 전란에서 생겨난 동냥패들의 모임이 거지떼들이었다. 나는 그때 십대 청소년으로 그 거지떼의 모습을 유달리 새겨보는 지혜를 가졌다고 할까! 나는 그들의 삶의 조직과 패턴을 자세히 검토한 것 같다. 그들에게는 일정한 조직의 패턴이 있었다. 보통 10여명의 거지들이 한 떼가 되어 동냥을 하고 다녔다. 그들은 어느 동네 누구네 집에 길사(吉事)나 장례일이나 제삿날을 꼼꼼히 기억했다가 그 날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가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지만 당당히 동참한다. 그들의 조직을 자세히 보면 거기에는 왕거지 대장이 있고, 규율을 지키는 규율부장이 있고, 재무(?)를 관리하는 재무부장이 있고, 동네마다 길사흉사 등 대사가 있는 가구의 일시 주소를 챙기는 섭외부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여기 부장이라고 한 것은 내가 지금 임의로 붙인 이름이지만 직분만은 꼭 그런 것 같다. 가령 섭외부장이 어느 집 잔치집에 들어간다. 다른 거지 양반들은 잔치집에 얼씬도 못하고 저 동네 한 모퉁이 보이지 않는 곳에 조용히 좌정하고 오직 섭외부장 한 사람이 잔치집에 들어가서 거지 인원보고와 거지 모인
얼마 전 기고한 니버(Niebuhr) 교수의 “사랑과 법”에 이어 어릴 적에 들은 도둑을 용서한 노인의 얘기이다. 도회지에 나가 살던 아들이 설을 쇠러 시골집에 내려왔다. 떠나 있을 땐 그리운 고향집이었지만 막상 돌아와 보니 한시라도 견디기 힘들었다. 집 벽에서 나는 황토 냄새가 너무 역겨웠다. 어디선가 된장 내처럼 쾨쾨한 냄새도 콧속을 후비고 들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문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문틈으로 밖을 내다 본 그는 깜짝 놀랐다. 머리끝이 쭈뼛 선것은 도둑이었다. 다행히 손에는 흉기가 들려 있지 않았다. 살금살금 부엌을 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도둑의 등 뒤로 날쌔게 달려들어 도둑을 땅바닥에 메어쳤다. 그리고 제 허리띠를 풀어서 도둑의 두 팔을 꽁꽁 묶었다. 온 식구가 깨고 아버지 영감도 달려 나왔다. 영감의 손에는 지게작대기가 쥐어져 있었다. 성깔이 불같은 노인 영감은 다짜고짜 말 한마디 없이 작대기를 휘둘렀다. 그런데 그 지게작대기가 아들의 등판에 철썩 올라붙었다. 영감이 너무 흥분한 나머지 도둑을 때린다는 것이 실수로 아들을 때린 거라고 다들 생각했다. 아들이 종아리를 싸쥐고 있는데 김 노인의 작대기가 재차 아들에게로 겨누어졌다
시골 사는 남동생이 억척같이 살아서 땅 깨나 좀 사고 소도 수 십 마리가 되는 등 그 동네에서 1호 거부(?)라 할까? 또 그 옆에 살고 있는 그의 누님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동생은 몸을 기계처럼 쓴다는 것이다. 기계에도 윤활유가 있어야 돌아가는데 그 동생은 자기 몸 보신도 모른 채 일만 한다고 안타까워 못살겠다고 오빠인 나에게 호소해왔다. 그 동생도 환갑을 지난 나이에 농사일을 하기 때문에 조로(早老)현상이 보였다. 옆에서 보던 그의 누님이 제발 편하게 살고 건강 유의해서 먹고 자고 쉬라 해도 소 귀에 경 읽기란다. 그런데 그의 누님, 나에게 여동생이지만 그가 내리는 남동생의 여생은 모두 그럴 듯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그가 뼈 빠지게, 눈 들어가게 노동해서 한 푼 모은 것이 결국 자식 입에 들어가고 자기 입에는 알사탕 한 개도 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안되기를 일단 기대하고기도를 드렸다. 시골 남동생 이야기를 하다가 서울에 있는 나를 생각해 봤다. 나도 똑같은 코멘트를 받아야 마땅하다. 폭염 속에 오늘도 30도가 넘는 기온을 기록한 것을 보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 그냥 노목(老牧)이 아니라 지금도 강의, 집필, 상담을 하고 있는 청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을 어찌 시험할 수 있는가? 더욱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경망한 불경죄요 저주받을 일인데, 예수님도 마귀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신6:16)는 구약 성서의 말씀을 인용해 꾸짖어 승리하셨다. 그런데 말라기 선지자는 어째서 감히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하셨는가? 1967년 8월 무더위 속에 춘천 기독교 연합성회가 열렸다. 나는 오전에는 죽림동성경교회에서, 오후에는 동부교회 연합집회에서 통역을 맡았다. 그런데 미국 전도단을 서울에서 안내해 온 목사님이 젊고 발음이 좋은 교인과 목사님을 선정해 오전 예배에 먼저 데리고 가셨고, 72세의 노인과 더 나이 많은 분을 나에게 남겨 두셨다. 그 당시 나는 사복 군인으로서 춘천 군인 복지센터 관장으로 봉사하며 춘천침례교회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72세의 노인 이름은 찰스 이 내쉬(Charles Nash) 집사였다. 그는 미국 오순절
꽃과 똥이 다르듯이 나비와 똥파리는 다르다. 나비가 똥을 싫어함과 똥파리가 꽃을 싫어함은 그 속에 싫어하는 혼(魂)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나비가 꽃을 좋아하고 똥파리는 똥을 좋아하는 것도 그 속에 좋아하는 혼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동양사상에서 그것을 하늘이 명해준바 타고난 성품이라고 했다. 즉 성(性)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나비보고 똥에 앉으라 하던지 똥파리보고 꽃에 앉으라 해도 그 놈들이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속에 있는 혼의 다름 때문이다. 그 혼의 문제는 성의 문제이다. 나비는 똥을 피하고 똥파리는 꽃을 피하는 것은 똥과 꽃의 문제가 아니라 그놈들의 혼성의 문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을 찬송가 소리가 어떤 유행가보다도 듣기에 좋지만 불신자들은 그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말씀이 달고 오묘한 말씀이지만 불신자들에게는 무슨 주문이냐고 귀를 막는다. 그리스도인에는 진리의 영이 계셔서 진리를 좋아한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그러나 세상은 그 진리의 영을 받을 수가
첫 번째 재판이 끝나니 독방에서 합방으로 옮겨졌다. 74년 3월 10일 처음 독방에 들어왔을 때 고독감에다 환멸을 느껴 누구와 말 할 사람을 찾아봤다. 건너편의 죄수들과 통방도 시도했으나 경비가 삼엄해 여의치 않았다. 사람인(人)자는 막대기 두 개가 서로 기대어 있는 것으로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대화하는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임을 독방신세에서 절감했던 터였으나 4개월간 독방과 합방 4개월간 성경을 17독하고 50여권의 책을 읽고 9사 상하층 건물 200명의 수감자들에게 전도하고 기도하며 묵상하다보니 오히려 독방생활이 매우 친숙해졌다. 그런데 첫 번 재판이 끝나자 한 평도 안되는 방에 합방해 들어가니 먼저 들어온 5명 중 ‘감방장’ 길봉수 씨는 ‘감방규율’인 안철용 씨와 의논해 나의 자리를 마련해주고 ‘좌상’이라 불렀다. 나는 좌상이 무엇인지 모른 채 6명이 첫날을 지내는데 당시엔 긴급조치 아래 많은 죄수가 들어와서 용신하기조차 어렵고 밤에는 새우잠이나 앉아서 자는 형편이 되니 오히려 외로웠지만 독방생활이 당장 그리워졌다. 온갖 종류의 죄수들이 한 방에 모였고 무더운 여름 고약한 땀 냄새, 코고는 소리, 몸부림, 잠꼬대, 이를 가는 소리
옛날 어르신들께서 젊은이를 보고 던지는 한탄스러운 말이 있다. “이 식충아, 그것도 못하느냐? 이 식충아, 그러면 어떻하노?” 너무도 한심스러운 젊은이의 행동을 목격하고 답답해서 던진 어른들의 말이었다. 마땅히 생각해야 할 생각을 못하고,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못하는 젊은이들을 보고 밥만 먹어치우는 벌레들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밥 먹어 치우는 벌레라고? 그게 식충(食蟲)이다. 말하자면 밥값을 못 하는 사람들에 대한 모독적인 호칭이다. 식충인간은 입으로 넘어간 밥에 부끄러운 인생살의 주역들이다. 밥을 먹었으며 밥값을 하라는 것. 불교의 수행 중에 매끼마다 밥그릇을 향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는지 자성하는 관례가 있다고도 한다. 식충인간들은 밥값을 못하는 인간 일뿐만 아니라 한편 밥 찾아 하루 하루를 보내는 삶이 그들 삶의 전부라는 것이다. 평생 사는 것이 밥을 구하는 일, 그리고 그 밥을 먹고 배설하는 일, 그게 식충인간의 삶의 전부이다. 벌고 떠 벌어도 밥값에 다 들어가는 수입을 엥겔계수가 높다고 하는데 정말 작은 수입 때문에 밥 타령하는 것도 인간의 비극이고 엥겔계수 걱정 안해도 될 사람이 밥 타령하면서 사는 것은 더욱 비극이다. 이래저래 밥 밖에 아무
한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대전지방회와 지방회지원 담당 서달수(Cloyes Starnes) 선교사가 협의해 핍박이 심하고 부흥이 안되는 도안교회(현 서머나교회)가 문닫게 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선교부에서 후원해 세운 농촌교회지만 문을 닫게 된다는 말은 신학도가 된 나에겐 충격이었다. 개학 전 남보다 먼저 신학교 기숙사에 와서 성경을 한 주간 읽으면서 성령 충만을 체험한 나는 견딜 수없는 주님의 부르심이 있었다. 1964년 3월 8일 주일, 계룡에서 버스를 타고 유성에 내려 10리길 되는 도안리로 걸어가 찾아가 교회당 청소를 하고 11시가 되니 교인들이 모여왔다. 남자는 이교성 청년 한분이고, 나머지는 박용금 박세순 두 여집사와 병이 있어 나온 자매, 이제자와 김용분 여청년, 그리고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감금례와 박병순으로 도합 8명이었다. 저녁예배를 마치고 돌아올 때 박용금 집사가 가제수건에 싸준 계란 두 개를 사례로 받아 도안교회 전임자요 동방인인 최한원 전도사와 이튿날 나눠 밥에 비벼 먹었다. 그 다음 주일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과 함께 나오니 기다렸다는 듯 아래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에게 굽실굽실 모여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