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아침 일찍 동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설교차 청주로 향하는 나의 가방 속에는 아내가 정성들여 싸준 아침식용품이 들어있다. 이른 새벽 떠나는 길이기에 집에서 조반을 들 수가 없어 아내가 늘 그렇게 아침을 챙겨준다. 고맙기 그지없다. 가방을 열고 아침식용품을 열어보니 떡조각, 과일조각 등이 있었고 플라스틱 물병엔 커피가 있었다. 떡조각을 꺼내 먹고 커피 한 모금을 넘기는 순간 이건 커피가 아니라고 확인했다. 원래 나는 집에서 모닝커피랑 손님대접 커피랑 내가 손수 커피콩을 갈아서 적당한 온수에 내려 먹는 커피 매니아요 또 약간은 전문가이다. 따라서 아내가 커피를 끊이는 일은 거의 없다 싶어 내가 끓여주는 커피의 소량을 아내가 즐기긴 한다. 그런데 오늘 아침 커피는 아내의 솜씨였다. 아내는 어제 밤에 인스턴트커피를 끊여서 식혀 두었다가 플라스틱 병에 넣어뒀는데 그것은 아침에 서둘지 말라고 잔뜩 편의를 본다는 심산으로 선심커피를 탄 것인데 그 인스턴트커피는 이미 오래 전에 어느 구석에 박혀 둔 것이었다.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어제 밤에 알고 있었다. 그건 커피가 아닌데! 밤새워 뒀다가 먹는 커피맛? 그건 커피가 아닌데, 그럼 왜 아내가 싸주는 커피를 마다하지 않고
“우리 아내는 이미 여기 없어요. 이미 하늘 아버지에게 갔고 몸만 이 땅에 남아있어요!” 최희준(Jones)선교사는 최희신 선교사 임종시(2014년 3월 18일) 자녀들에게 위로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지난 주일(4월 9일 오후) 그도 88세로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천국에 입성했다는 소식에 추모의 글을 싣는다. 일찍이 최희준 선교사는 미국 텍사스 주 남단 멕시코 연안의 겔베스톤(Gelvestone)이란 작은 섬에서 출생하고 자라나 6·25 전란 직전에 군인으로 대한민국에 와서 병역의무를 마치면서 한국의 연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소명으로 신학공부를 한 후 1957년 최희신 사모와 함께 한국 선교사로 나오셨다. 음대생 출신인 사모님은 오르간 반주로 진흥원 음악부와 서울교회 반주로 오랫동안 봉사했고, 최희준 선교사는 신학교 교수와 교회진흥원에 이어 교회개척과 성장 및 선교회장을 역임하면서 38년 동안 이 땅에서 봉사하시다가 1995년 은퇴하시고 본국으로 귀국하셨다. 1998년 한국침례교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가 BWA 90대회 후 두 번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7만여 침례교성도가 운집한 가운데 최희준, 최희신 선교사 부부는 “내 인생 여정 끝내어” 찬양으로 청중들의 심
나는 어릴 적에 왜 흑인들은 백인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노예 신세로 마치 가축 취급을 받아야 했는지 그리스인으로서 의아해했다. 한참 뒤에야 왜 그런지 이유를 알았을때는 너무 늦은 감마저 들었다. 여기서 신학적 설명은 잠시 보류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지금도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흑인은 무기가 없었고 백인은 총검 무기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현실적 이유다. 총검으로 무장한 백인은 전혀 무기가 없는 흑인의 저항엔 그냥 총질을 했던 것이었다. 백인은 살생무기를 지녔고 흑인은 그게 없었다. 흑인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노예로 살 수 밖에 없었다. 사람보다 몇 배 더 힘이 센 맹수는 또 포수에게 왜 꼼짝도 못한 채 사냥당하고 있는가? 그 대답도 간단하다. 맹수는 무기가 없고 포수는 사냥총을 지녔기 때문이다. 맹수는 겨우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을 가졌으나 총알 앞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최근 슬픈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때 왜 차지철은 김재규란 사람에 의해 대통령도 서거당하고 자기도 죽게 됐던가? 그 이유도 간단하다. 그 때 김재규는 권총을 차고 있었고 차지철은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고 식탁에 앉았던 것이다. 대통령을 보호해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 예배당 지붕에 왜 더하기 막대기를 붙여놓았나? 아버지의 달램과 명령에 못 이겨 처음 교회당 또는 그 당시 말로 예배당, 예수당에 갔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고, 예배당 안에 들어가니 또 강대상 뒤에도 더하기 막대기를 다듬어 붙여놓았었다. 몇 년 전 절간에 갔을 때는 번쩍거리는 부처상과 차림이 엄숙했는데, 교회당은 초가집이 옆에 붙은 함석집에 자그만 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951년 8월 3일이었다. 나중에 물었더니 더하기 막대기는 예수가 달려죽은 십자가를 말한다고 했다. 그제야 3년 전 만화책에서 본 예수가 가시를 머리에 쓰고 머리를 앞으로 넘어뜨리고 나무장대에 두 손에 발도 대못에 박혀 처참하게 죽는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5학년 배석문 선생님은 야소교는 서양종교이니 교회당에 나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세상에 예수쟁이들은 나무장대에 매달려 죽은 예수가 그 무슨 큰 자랑이라도 되는지 십자가를 붙여놓았는가 생각했었고 어린 소견으로 불쌍하게 죽은 예수를 뭣 때문에 믿는단 말인가? 그 후 작은 모시게 동리에 갔더니 장로교회는 종각대 꼭대기에다 십자가를 붙여
아내가 나의 두 달 약을 처방받아 오노라면 꽤나 호주머니 돈이 많이 나간다. 언제나 지정된 병원에서 처방받고 지정된 약국에서 약을 사온다. 오늘도 아내의 심부름 비슷하게 약을 타 오는 것이 나의 오늘 일부이다. 늘 가던 약국이라 약사들과 직원들이 익히 나를 알아본다. 약을 조제하는 동안 나는 많은 사람들 틈에 끼여 앉아서 약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약국에서 언니뻘 되는 직원이 나와 눈을 마주치고 계산대 앞으로 오라기에 갔더니, 그녀가 따끈한 광동탕 한 병을 넘겨줬다. 나는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굳이 나에게 시선을 던지고 유독 특별히 이 광동탕 한 병을 주는가 말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뚜껑을 열고 조심스럽게 광동탕 한 병을 비웠다. 광동탕을 비운 나는 스스로 생각했다. 그녀가 특별히 이 광동탕을 내게만 주는 이유가 뭔가? 그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이 약국의 단골손님 중의 단골이요 또 고액의 약을 사는 손님이요, 외모(?)도 노인치고는 괜찮은 편이요, 주고받은 간단한 대화에도 엘리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 한 번 잘나고 볼 판이다. 나는 잔뜩 잘난 체하고 있었다. 좋게 보면 자부심이요 나쁘게 보면 교만이 아닐까
“여보시요, 2000년 동안 죽고 썩어 냄새나는 송장이 다시 살아난 일이 세상에 한번이라도 있었어요? 그런데 어찌 부활을 믿어요?” 당황하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선생님, 저도 어릴 때인데도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는 믿기지가 않았지요. 그런데 예수님만이 살아나 부활하셨으니 오히려 저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요!” 그는 내가 금년에 새로 만들어 돌리는 “인생의 결단과 도전”이라는 제목의 전도지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주자마자 어떤 사연인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반감으로 소리쳤다. 대화 중 그가 서울대 법대를 나온 엘리트의 합리적 사고에서 나온 저항인가 생각하고, “만일 죽은 사람을 살아있다고 사기치고 기만하는 사이비 종교라면 저 같은 사람도 그런 거짓 종교를 60년이 넘도록 어떻게 믿어왔겠어요! 성경에서 예수의 부활을 못 믿는 것보다 선생님의 말씀대로라면 부활하지 않고 죽은 예수를 부활했다고 믿는 오늘 세상에 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우매한 교인들이 얼마나 더 가련한 인생들이겠어요!” 지난달에는 대구 라온제나 호텔에서 500여명 모인 동창회원들에게 나눠준 전도지에 반응이 좋았고, 지난 50년 넘게 수많은 사람에게 전도를 했지만 그렇게 격분에 모멸스런 말은
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 서울 살고 있는 나는 시골 어머님을 서울로 모시고 오곤 했다. 농촌에서 농사일 만으로 살아가시는 어머님이 서울 나들이 차 아들집을 오시자면 일단 서울역까지 기차로 오시고 거기서 내가 마중을 나가서 모시고 집까지 온다. 영업용 택시를 타고 남산 순환도로를 드라이브한다. 어머님은 빽빽하게 들어찬 집과 건물, 그리고 수많은 차의 운행, 또 거리의 사람들을 보시고는 걱정이 태산 같다. “아들, 서울 사람들은 무엇해서 먹고 사나?” 어머님이 보시기에는 논도, 밭도, 산도, 들도 없는 이 황량한 시멘트 벽돌 건물 속에 개미떼처럼 우글거리고 사는 서울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쌀이랑 콩이랑 생산해서 먹고 사느냐는 것이 걱정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때 우리를 태우고 가던 택시 운전기사가 태연스럽게 말했다. “서울 사람들은 사람이 사람을 뜯어먹고 살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동물계의 먹이 사슬세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약한 놈은 강한 놈의 밥이 된다는 논리이다. 육식동물인 사자나 호랑이, 치타는 다른 약한 동물을 먹잇감으로 알고 사냥을 한다. 육식동물의 번식은 약하고 그 동
오래전 읽은 신앙 간증을 사순절이 되면 가끔 떠오른다. 미국 일리노이즈주에 60세가 넘는 할머니가 이상한 병이 걸려 통증이 멈추지 않았고 사지도 맘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에 대한 감사가 넘쳤다. 두 손을 전혀 쓸 수 없게 되었고 오른손 엄지손가락 하나만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 한손가락으로 감사하고 기뻐했다. 막대기에 두 갈래의 포크를 묶어두고 그것으로 안경을 쓰면서도, 빨대로 차를 마시며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성경을 읽는 형편이었지만, “나는 사람들에게도 감사를 자랑할 이유가 너무 많아요”했다.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매우 단순하게 대답했다. “내 모든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를 받았지요. 이것이 놀라운 은혜가 아닌가요? 나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평안히 누워있을 수가 있죠. 또 언젠가 나를 부르실 때에 기쁘게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으며,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학교 공부엔 취미를 못 붙이고 만화책에 관심이 많을 때에 하루는 외사촌인 전근술이 또 만화책을 가져다 줬다. 이미 공자와 석가모니 만화책은 읽은 터인데 이번엔 제목이 “예수그리스도”였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서당
결론적으로 말하면 단체는 행사하고 교회는 예배한다. 그러니까 기독교단체는 행사를 하기 위해 모이고 개교회는 예배하기 위해 모인다. 초교파대집회에 참여한 자리에서 황당한 광경을 목도했다. 그 대회에는 참여한 순서담당자들이 무려 20여명이나 됐다. 이런저런 직함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그리고 이런저런 체면예우 때문에 그러다 보니 순서담당자가 늘어난 것이었다. 자기교회 담임목사의 순서 아마 기도로 생각난다 - 가 끝나자 그 많은 청중 ·성도라기보다는 청중 혹은 단순히 대중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가운데서 한 무리의 청중이 우르르 그 장소를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어린 시절 두 발이 빠져나간 아이의 머리털 빠진 곳과 같았다. 네 목사의 순사가 남았으면 네 들은 남아 있으라, 우리 목사의 순서는 끝났으니 이 자리를 떠난다 묘한지고! 몇 사람의 설교자도 설교원고를 써와서 읽고 기도하는 사람도 기도문을 써가지고 와서 한자 한자 실수없이 또박또박 읽는다. 혹시라도 실어(失語)하면 안되니까, 실수하면 입장 곤란하니까 누구 앞에서 그렇다는 건가? 청중 앞에서 말이다. 청중 앞에서 인기없는 설교, 청중 앞에서 횡설수설하는 기도, 그것은 인
스타린과 밀로반 조셉 스타린(Joseph Stalin)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로 야만적 구타로 아들을 괴롭혔으나, 어머니는 헌신적 세탁부로 일하면서 가사를 이끌었고 아들이 훌륭한 성직자가 되기를 희원해 조지아의 고리(Gori)에 있는 희랍정교회 소속의 티프리스(Tiflis) 신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청년 스타린은 당시의 칼 마르크스의 서적을 읽으면서 조지아 지하 혁명당 조직에 가담하고 소련 사회주의당의 볼세비키 당원이 된 후 당의 총장이 됐다가 레닌(Lenin)의 사후 전권을 장악한 독재자가 됐고, 영국과 미국의 합세로 히틀러(Hitler)의 러시아 침공을 막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엔 냉전(Cold War)의 주역이 됐으니, 어머니의 소원인 성직자가 아닌 그의 정권장악과 독제통치하에 수천만의 살인마로 변할 줄이야!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밀로반 딜라스(Milovan Dilas)는 공산주의의 탄압에 대해 거리낌 없는 저항자가 되기 전에는 한 때 옛 유고슬라비아의 고위 공산주의자였다. 밀로반은 20대 초반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반정부 활동으로 투옥됐는데, 감옥 하수구를 통해 공산당 서적을 감옥 안으로 밀반입하는 아주 혐
에드워드 페이슨(Edward Payson)은 지난 세기의 유명한 설교자이다. 어느 폭우가 내리는 주일 찾아온 단 한 사람의 청중을 앞에 놓고 설교를 했다. 몇 달이나 설교 후에 그의 유일한 청중인 한 사람은 목사님을 찾아와 말했다. “예배를 통해 나는 구세주에게 인도함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목사님은 언제나 ”죄와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셨지요. 나는 당신이 주목하는 사람이 또 다른 누구인가 왔나 해서 뒤를 돌아보았으나 거기에는 언제나 아무도 없었지요. 모든 말씀이 유독히 나 한 사람을 두고 똑같은 말씀을 하셨으니 그것이 나 자신의 양심과 심령에 와 닿았지요!”라고 고백했다. Payson 설교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영혼은 선교사이며 그리스도 없는 모든 영혼은 선교지의 전도 대상자(prospector)와 같다”고 말했다. 닉슨의 한 사람 세계교도소선교대회가 한국에서 열렸을 때 당시 기독교한국침례회의 교도소선교회장과 서울구치소 선교회장으로 미국 측 척 콜손 회장과 깊은 교제와 대화를 나눴다.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Water Gate)사건으로 탄핵에 오른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고 또 그 하야가 순조롭게 이뤄진 것은 바로 국무장관이었던 척 콜슨이 모든 죄를
오병이어로 축사기도하여 5,000명을 배불리 먹이고 남은 떡 12광주리를 거둔 것을 본 무리는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5)에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임금노릇하고 싶어 못 견디고 안달이 나서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임금하기 싫어서 환호하는 군중을 뒤로하고 혼자 산으로 숨으신 분이 계셨다.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강림하신 것을 보이셨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천뢰의 음성이 있었다. 복음사역 준비로 40일간 광야에서 금식기도를 마치실 때 마귀는 굶주림을 알고 빵의 시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때 천사의 보호, 셋째로 그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주리라고 유혹했으나,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꾸짖고,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명령하여 세 가지 시험을 다 이기셨다. 돌아보면 역사 속에서 인생은 예수께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을 늘 받아왔었다. 먹어야 사는 빵 곧 음식의 시험으로 세종대왕도 식위민천(食爲民天)이라 했으니 “음식은 백성에게 하늘처럼 위하라” 곧 국태민안은 바로 백성들
“권력에의 의지”곧 욕망은 동물세계와 생물세계에서 생존경쟁, 약육강식 및 적자생존으로 인간에게도 그 추구하는 여러 가지 욕구 가운데 우위를 차지한다. 동양의 사상인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에서 보듯이 잘못은 이치에 지고 이치에 맞다 해도 법을 이길 수 없으나 법도 권력 앞에선 꼬리를 내리고, 권력의 총검이 아무리 세더라도 하늘을 찔러 이길 수 없다는 천(天) 사상이 흘러왔다. 천명과 천운이 없는 최고의 권세는 역사 속에 초개같이 함몰되고 말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최인식 체육선생은 가끔 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학생들에게 복창을 시켰는데 “동해의 나폴레옹이 되라!”고 하셨다. 나폴레옹은 1769년 지중해의 이탈리아반도 서쪽 콜시카 섬의 아작키오에서 태어났고 파리로 진출해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난세에 군사령관을 지냈다. 그 시대는 루이 14세가 절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보정치로 “짐은 곧 국가”라며 “태양왕”으로 신적 숭배와 백성을 가렴주구와 고혈착취로 자기가 사는 베르사유 궁전 건립에 재정을 쓰고 백성들은 신분계급의 갈등과 빈부차에 치솟는 빵값의 식량난에 허덕이는데, 기마경기, 불꽃놀이, 콘서트 연극과 무용 및 사치와 향락으로 보내다 80세에 죽고, 루이 15
“요사이는 그놈의 돈타령 TV뉴스는 보기 싫어! 돈이 권력과 사돈이 되어 대통령도 탄핵에 올랐는데 그래도 대통령 해먹겠다고 머리 쳐들고 거들먹거리는 인간들이 10명도 넘으니!” 전철 경로석에 앉다보면 오고가는 여론의 얘기 중에 튀어나온 말인데, 나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돈, 돈, 그놈의 돈타령 세상인가? 하는 말이 새롭게 떠올랐다. 지난번 칼럼에서도 날라온 벙어리 선거 돈이라도 불의의 재물이라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되지 않기 위해 과감하게 던져버린 돈 얘기를 했는데 그래도 지나고 보니 복음과 구제를 위한 선한 사역에 쓰지 않은 회오가 남는다고 했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1~2) 1974년 말 긴급조치 하에 8개월 옥고에서 나오니 도저히 지역사회에선 평판이 나빠 목회를 할 수 없었다. 1975년 8월 한 달간 기도와 금식기도를 하고 시내를 뒤지며 새로운 목회지를 찾다가 가까운 안락동으로 정하고 전세금을 신문지에 싸들고 버스를 타고 이사벨 여고를 지나서 동래 가는 다리를 건너는데 갑자기 시끄럽게 들리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는 말씀대로 목회한 존 모리슨(John Morison)의 안수식이 끝난 직후에 이웃의 목사가 방문해 “목사님은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건강의 한도를 넘지 않도록 조심하셔야지요”라고 충고했다. “염려 마십시오. 게으른 목회자가 오히려 먼저 천국 간답니다”라고 응수로 대답했다. 그런데 6개월 후에 그 목사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에 찾았더니 “당신이 전에 나에게 한 말을 기억하세요?” 모리슨은 더듬으며 “아, 하지만 그런 건 생각지 마세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때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아직 낮 일때 일을 부지런히 하십시오. 일할 수 없는 밤이 지금 나에게 다가오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한 후 임종에 임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6:6) “여기 70세 되신 어르신네는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어서 “80세 되신 분은 손들어 보세요” 또 아무도 없었다. 설교 후 예배가 끝난 뒤에 나를 포천 양로원에 초청한 김익수 목사와 원장에게 물었더니 여기 요양원에 있는 80명은 거의 90세 되신 분들로 계신다고 했다. 반수는 침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