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도적 신앙을 살라”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전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 종교개혁자가 남긴 말이다. 윗테베르그 대학교에 의해 장례식이 거행되었을 때, 장례사에서 그는“성서럽게 살아나 복음의 빛을 회복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2017년이면 종교 개혁 500주년이 되는데 2년이 남았다.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동시에 우리도 그러한 천국의 사신들을 사랑해야 하고 교계의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을 엿보면서 그런 사도적 삶이 요구되는 종말적 시대에 살고 있음을 예감하고 재삼 경각해야 할 때이다. 동시대에 영국 침례교 창시자이면서 침례교 지도자로서 첫 번 침례자인 존 스미스(John Smith)는 그가 알았던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유를 즐기기 위해 자기의 조국을 떠날 수 없었다.1611년 악화된 건강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개혁한 교회에 의해서 파문되지 않고 1612년에 소천했다. 그와 동역자인 토마스 헬웨이스(Thomas Helways) 역시 그의 처자를 뒤로 하고 암스테르담으로 피했다. 확실한 위험이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와 그의 추종자 12인 침례교인은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그곳에서 뉴게이트(Newgate) 감옥에 투옥되어
일본 강점기에 살았던 우리들은 모두 불행했다. 그들에게 빼앗기고 찢긴 나머지 만주로 일본으로 모두 먹고 살기위해 우리 조상들은 고향산천을 등졌다. 나의 아버님도 일본 오사카로 가서 살았다. 공부도 못했고 기술도 없는 아버님이라 그냥 막노동으로 연명하고 계셨다. 나의 어머님은 그냥 고향땅에 떨어뜨리고 단신으로 일본 가셨던 아버지. 일본 가신지 3년이 되어도 아버님은 소식이 없는지라 할머니도 어머니도 궁금했었고,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오사카에서 막노동하고 계신다는 것인데, 무슨 용기가 그리 대단하셨던지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시는 어머님이 예천에서 부산으로 내려가셔서 거기서 연락선을 타고 오사카로 가서 아버님을 찾아내시고야 말았던 행운(?)을 맞이하셨다.내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어머님의 일본 외출로 인함이었다. 1937년 드디어 나는 일본땅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 자라면서 본 아버님 어머님의 관계는 물과 불의 관계 같았다. 두 어른들의 성격은 양극단이었다. 아버님은 느리고 어머님은 빠르고. 아버지는 태평이고 어머님은 조급하고. 그들이 80을 넘어까지 사셨으나 늘 으르렁거리는 삶을 사셨다.내가 태어난 것은 어머님이 아버님 곁에 가셨다는 사실과 무정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곳에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목사님, 그간 한국에서 일해 모은 돈으로 이상한 꾀임에 빠져 복덕방을 소개받아 한국에 땅을 사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땅값이 의심스러워요”라고 교회에 나온지 한 달도 안된 김봉선 자매가 물었다. 저는 주일이라 식사하고 나오면서 들은 말이라서“먼저 소개소에 찾아가 꼼꼼히 확인하시고 의심스러우면 다른 복덕방에 가서 재확인한 후에 연락해 주세요”라고 했다.이튿날 중국서 같이 온 이웃과 먼저 의논한 결과 사기꾼에 걸린 것 같아서 다시 찾으려니 돈은 이미 이상한 소개소에 넘어갔는데 안된다는 것이라 했다. 아내에게 잘 알아보라 해서 잘 아는 경찰관을 대동하고 3인이 함께 유령회사같은 소개소에 찾아가 마침 계약서 도장을 안찍은 상태라 즉시 현장에서 도로 찾아 본인 통장에 입금시켰다고 했다.지난 추수감사 주일에 재무집사는 김 자매가 십일조를 300만원 넘게 내었다고 해서 금주에 교회 앞에 간증하도록 했다. “세상에 중국서 돈벌로 한국 와서 뼈빠지게 번 돈을 교회에다 십일조인지 헌
이제야 하나님 앞에 내가 진짜 죄인이고 그 정도가 얼마나 악랄하였는지 실상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래도 나는 믿지 않는 자들과 비교하여 조금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번 토요찬양 예배와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내가 완전히 벌거벗겨졌다. 어찌 들으면 비슷한 예배였지만 내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예배였다. 부활책자를 수정하면서 진행된 예배와 그로 말미암아 내게 전적인 회개의 역사가 일어남에 대해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올린다.지금에서 돌아보니 나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엄청난 사건을 어쩌면 그저 뉴스 기사로 치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냥 역사책 보듯이 끝났는지 모른다. 조금 더 확실히 말하자면, 악랄함의 온상에 앉아있었던 것이다.조금은 과장된 것 같이 보이지만 감정이 메마른 자의 믿음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표현한 것이다. 완전히 주인의 마음을 모르는 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 말이다. 역사를 믿는 것이지 나를 위해 부활하신 주인이신 예수님의 마음…. 그 사랑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는지 모른다. 결국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악랄한 자다. 예수님과 마음으로 교제가 되지 않는 자, 바
어떤 물을 마셔야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미네랄이 문제(?)이다. 사람들은 공기와 땅 속에서 검출되는 미네랄이 모두 무기 미네랄 (inorganic minerals)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무기 미네랄은 유기 분자(organic molecules)로 구조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인체가 흡수할 수 없다. 인체가 흡수할 수 있는 유일한 미네랄은 유기 미네랄 (organic minerals)이다. 유기 미네랄을 제외한 다른 모든 미네랄은 인체에 해로운 것이며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문제점이 있는데 사람들은 무기 미네랄이 거의 모든 노화성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마시는 물에는 무기 미네랄이 많이 들어있다는 것이다.모든 물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물은 적어도 아홉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어떤 물은 동맥경화를 일으키고, 담석과 신장결석을 형성하고, 노화현상을 앞당기기도 하며 수많은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종류의 물은 이와 반대되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인체의 조직으로 흡수되는 물도 있고 조직에서 배설되는 물도 있다. 이 아홉 가지의 물은 경수(hard water), 생수(raw wate
호리라고 하는 영국 사람이 자기 집의 벽에 늘 걸려 있던 유화(油畵) 한 장을 떼내서 먼지와 더러움을 씻어 달라고 그림 가게에 보냈다. 그 그림은 조상 때부터 전해 내려오던 벽의 장식품이었다. 그림 가게에서는 그 그림을 받아서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면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토마스 개인스버그(Thomas Gainsburg)라는 영국의 18세기 미술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인 “푸른 소년”(Blue Boy)의 원판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선조때부터 의미 없이 벽에 걸쳐 있던 그림 한 장이 100만불 짜리의 값있는 것임을 연락받은 호리는 얼마나 놀랐겠는가! 상상 못한 놀라운 축복의 소식에 그가 얼마나 기뻐했겠는지 오늘 우리도 상상하고도 남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천하고 혐오스런 싸구려로 보아 넘긴 십자가의 나사렛 목수, 그런데 십자가상의 그 예수가 그리스도와 생명의 구주되심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가? 우리 인생이 싸구려 인생이 아니라 한 없이 고귀하고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을 예수 안에서 발견했다면 우리의 태도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우리는 그분을 존귀하게 모시고 자랑하며 증거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면 다른 사람의 영혼
신앙생활에서 인내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은 인내와 함께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측정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과 교회와 관계에서 인내로서만 측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인내란 불가분적(不可分的) 관계입니다. 인내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표식이며, 어떤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의 신앙과 지속적인 믿음의 표시입니다.박해와 유혹, 그리고 율법주의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떠나 돌아서려는 연약한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굳게 잡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본문은 반복 반복해서 인내의 신앙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굳게 잡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특권의 사람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은 오직 제사장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제사장의 권리와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가끔 성공한 목사, 전도사, 선교사 또는 목회자란 말을 들어왔다. 그런데 그 성공이 무엇이며 누굴 가리키고 있는가? 자기 공(功)을 세운 성공자가 될 때 어떤 결과를 낳는가? 교인 숫자, 교회당 건물의 크기, 목사의 인기의 고도 등등을 가리켜 성공한 목사라고 불리우는가? 60년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대흥교회에 출석하며 4년간 여러 가지로 봉사해 왔는데 신학교 교장 도월태 선교사는 주일 예배 전 성경공부를 인도하셨다. 침례교회에는 목사와 집사(행6:1~6)의 두 직분 밖에 없다고 가르쳤고, 목사는 곧 장로이며(벧전5:1) 감독자(딛1:7)이며 하나님의 청지기(廳直이)라고 했다. 교회의 장로들을 감독자로 삼고 교회를 치게 (보살피게) 하셨다고 했다. 교인만 청지기 직분(Stewardship)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인 목사도 바로 교회의 청지기라고 가르쳤다. 오랜 세월 동안 목회를 하면서 그때 배운대로 주님의 청지기로서 사명을 다짐해 왔다. 서울교회에 왔을 때 육군대령 안수집사가 자기의 명함에 사무처리회 의장이란 직명을 기록한 것을 보고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떠올랐는데, 한번은 저를 보고 “목사님 군대에서 제대할 때 계급이 무엇이었느냐?”고 해서 “원주
내가 사는 아파트 동에 유난스럽게 키가 큰 남정과 외모도 그만그만한 부인 부부를 엘리베이터를 타노라면 가끔 그 안에서 만나게 된다. 사실 나는 이 아파트 동이 세워지는 20여 년 전 해부터 입주했기에 이 아파트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면 사람들로 하여금 인사를 꼭하도록 교육하는 도덕선생과도 같다. 이 삭막한 세상살이에 노인다운 처신일 것이다.나는 이 키다리 미모 부부에게도 일찍 내가 목사라는 신분을 밝히며 인사를 청했었다. 그래도 만날 때마다 무반응 무표정이기에 나는 나의 경력을 자세하게 일러 주기도 했다. 신학교에서 교수도 했고 은퇴하고서는 개척교회도 했고 지금은 프리랜스로 설교하러 다니고 등. 그래도 그 키다리 미모 부부는 자기들과는 아무상관도 없다는 듯 했다. 만날 때마다 가볍게 끄덕이면 될 인사가 없기는 여전했다. 참 희한한 사람들이군. 그들은 50대 전 반 같은 나이를 먹은 듯했다. 나는 그들의 마음속을 알 길이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동네 교회에서 특별집회가 있기에 나는 참여했었다. 예배 전 찬양시간이 있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키다리 남정이 유난히 큰 키에 또 고음으로 손뼉을 치면서 찬양그
지난 2001년 3월 30일 밤 비행기로 처음 베트남에 왔습니다. 무지 더운 작은 방 하나에 아빠랑, 엄마랑, 저랑 천장 선풍기 하나로 3월의 베트남을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못 써본 에어컨이 한이 됐는지 이제는 에어컨 없이 1분도 못 버티는 몸이 됐습니다. 52 Giai phong. 베트남 첫 집 주소. 말 한마디 못 하던 시절 누가 뭘 물어봐도 제 대답은 항상 “남므이 하이 야이 펑”이었습니다. 아빠가 학교까지 빼 먹으며 날 데리고 선교지를 다니셨습니다. 이유는 통역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는 몇 명인지, 교회는 얼마나 됐는지, 그것도 모자라 신학교 수업 통역까지…. 피아노도 못 치는데 반주도 맡기셨습니다. 어려운 단조 곡은 하지 말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주일마다 반주도 아빠 박자도, 매주 엉망이었습니다. 무슨 정신으로 예배를 드렸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습니다.랭귀지 학비가 없어서 중국산 오토바이를 한 대 구입해서 한인회 광고비 받으러 다니며 한 달에 100불을 벌어 등록금을 마련했습니다. 툭하면 고장나는 중국산 오토바이로 꽁화 초입부터 황화탐까지 걸어서 끌고 다니기도 하고, 씨클로랑 부딪혀 무릎이 다 까지고 비오는 날에는 속옷까지 흠뻑 젖어서 감기
형제들의 종이 되지 못했던 나는 주님께 굴복한 주님의 종이 아니었습니다.지난 10월 29일 목요일 춘천한마음교회(김성로 목사) 새벽 예배를 인도한 최경훈 형제의 간증에 “공동체에 판단 정죄와 굴복의 말씀이 선포되면서, 하나님 앞에서 난 고개를 들 수 없었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김성로 목사님이 한마음 공동체에 선포하신 말씀들 중에 자주 ‘판단 정죄하는 영’에 대하여 경고하신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것이 작은 교회의 인도자들 중에 교만의 영이 들어간 이들이 있어서 그들이 다른 작은 교회들이나 그들의 인도자들에 대해 판단 정죄하는 것에 대한 경고인 것으로 이해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경훈 형제의 간증을 통해 그것이 인도자들이 자기들의 작은 교회들 내의 멤버들에 대해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에 관한 경고였음을 알게 됨과 동시에 곧바로 그것이 나 자신의 목회와 연결되어 버렸습니다. 내가 바로 내 양무리에 대하여 그러한 판단과 정죄의 영으로 행한 것이 그대로 내 심령에 폭로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뽕짝 찬양 사역을 하시는 구자억 목사님이 떠올랐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지방회의 어떤 목사님이 구자억 목사님의 찬양 동영상을 내게 보내 주셨습니다. 전에 한 번 본
남의 설교가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설교도 가끔 추락하려고 하는 위기를 맞는다. 목회 현역에서 떠나온 나는 프리랜서 설교자로서 은퇴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나는 설교가 모처모일 모장소에서 추락하려하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 내가 긴장했고 재빨리 추락직전고도를 높여 비행하는 것을 체험했다.그 사례를 말하면 이렇다. 나는 매주 월요일 모회사 30분 아침 경건 예배를 수년간 인도하고 있다. 내가 그 회사 아침경건예배를 인도할 때 선언하는 설교는 처음부터 복음주의적 십자가 설교를 하기로 작정했었다. 30여명의 사원 중 몇 사람만 교인이 되고 그 외 모두는 아직 불신자인 회사원 앞이지만 조금도 나의 설교의 색깔이나 질을 낮추지 않고 기성교회 성도를 앞에서 하는 그것처럼 했었다. 때로는 나도 놀랐던 사실이었다. 그것은 예수의 예자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도 성경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전했다는 것이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일단 잘 순응하고 경청하며 이해해 주더라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이 회사원 앞에서 초두 설교한 것을 그대로 기신자들의 교회나 신학생 그리고 교역자들의 모임에서 행해도 통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내가 지금 추락하는 설교를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냄새나는 송장을 앞에 두고 드린 감사의 기도는 기적을 일으켰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1:41~42)욥은 가산도, 종들도, 자녀들도 모두 하루아침에 잃었을 때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1:21)하고, 전신이 악창으로 고생할 때 아내의 저주에 대답하기를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2:10)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시험하신 후에 “갑절의 축복”(욥42:10)을 더하셨다.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 ‘감옥문’을 열기 위해서 그들은 무엇을 했던가? 지진으로 ‘기적문’이 열리기 전에 찬미의 제사가 있었고 ‘
교회 성도 내외분의 차를 타고 결혼식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자매가 뒷좌석에 앉은 나와 아내를 되돌아보면서 하는 말이 이 에세이의 제목 그것이었다. 아마 이 자매는 목회 끝 판에 돈 때문에 얽히고설킨 목사의 결말을 가슴 아프게 보았던 것 같다.이 자매는 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우리는 권목사님은 참 목사 신줄 압니다. 그 연세에 지금 돈이 없지 않습니까?”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일체의 빚이 없고 추위와 더위를 막아 줄 내 아파트가 있고 쌀독에 쌀이 있고 김치 냉장고에 김치가 있고 은행에 커피 값 정도의 충분한 돈도 있으니까. 이 정도에 이르지 못한 은퇴 동역자도 꽤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나다. 그래서나는그자매에게재빨리응수했다“. 나는돈이 있는데요.”라고. 이 말을 듣던 그 자매는 웃으면서 하는 말을 들어보소.“ 목사님, 그건 돈이 아니고 생계비입니다.”그래서 나는 돈과 생계비는 다른 것인가라고 잠시 경제학적 개념에 혼란을 겪었다.나도 원칙적으로 은퇴 목사님들이 쪽박을 들고 동냥하는 생활을 해야만 성공한 목회자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돈 없는 가난한 목
민봉수(O. K. Bozeman) 선교사는 한 때는 가구 점원이었고 건축사로 한국에 왔을 때는 1959년이었고 6.25전란 후에 고통당하는 한국 백성들의 소식에 평신도 선교사로 자원해 오셨다. 그의 아내 바바라(Barbara)선교사는 음악을 잘했고 부부애는 특별했다고 이번에 나온 둘째딸 로라 매이(Raura May) 자매가 간증했다.한국 선교 33년 후 65세로 은퇴하신 민봉수 선교사는 매일 아침 운동하며 건강하던 부친은 어느 날 몸이 좀 이상하다고 방에 들어가 침상에서 조용히 1991년 소천하셨고 사모님은 오랫동안 치매질병을 이기며 2010년 88세에 소천하셨다고 했다.금번 일행과 총회에 들렀을 때 딸 로라는 울먹이며 어머니의 사랑을 간증했다. 자매복지원을 운영해온 방호선 원장과 얘기를 나누던 중 이혼모나 미혼모를 받아 돌보시던 방원장이 딸려온 네 살짜리 남자 고아를 소개하며 입양을 권하자 둘째 딸인 바바라의 승인없이 받았고 나중에 양자로 추천했는데 바바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사랑에 이끌려 양자로 삼았다.그후 인도네시아에 근무하던 바바라의 남편이 한국에 와 집안에 있는 한국인 아이를 보고 놀라 물었을 때 어머니가 양자로 받으라고 해서 받게 된 경위를 설명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