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의 의지”곧 욕망은 동물세계와 생물세계에서 생존경쟁, 약육강식 및 적자생존으로 인간에게도 그 추구하는 여러 가지 욕구 가운데 우위를 차지한다. 동양의 사상인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에서 보듯이 잘못은 이치에 지고 이치에 맞다 해도 법을 이길 수 없으나 법도 권력 앞에선 꼬리를 내리고, 권력의 총검이 아무리 세더라도 하늘을 찔러 이길 수 없다는 천(天) 사상이 흘러왔다. 천명과 천운이 없는 최고의 권세는 역사 속에 초개같이 함몰되고 말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최인식 체육선생은 가끔 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학생들에게 복창을 시켰는데 “동해의 나폴레옹이 되라!”고 하셨다. 나폴레옹은 1769년 지중해의 이탈리아반도 서쪽 콜시카 섬의 아작키오에서 태어났고 파리로 진출해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난세에 군사령관을 지냈다. 그 시대는 루이 14세가 절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보정치로 “짐은 곧 국가”라며 “태양왕”으로 신적 숭배와 백성을 가렴주구와 고혈착취로 자기가 사는 베르사유 궁전 건립에 재정을 쓰고 백성들은 신분계급의 갈등과 빈부차에 치솟는 빵값의 식량난에 허덕이는데, 기마경기, 불꽃놀이, 콘서트 연극과 무용 및 사치와 향락으로 보내다 80세에 죽고, 루이 15
“요사이는 그놈의 돈타령 TV뉴스는 보기 싫어! 돈이 권력과 사돈이 되어 대통령도 탄핵에 올랐는데 그래도 대통령 해먹겠다고 머리 쳐들고 거들먹거리는 인간들이 10명도 넘으니!” 전철 경로석에 앉다보면 오고가는 여론의 얘기 중에 튀어나온 말인데, 나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돈, 돈, 그놈의 돈타령 세상인가? 하는 말이 새롭게 떠올랐다. 지난번 칼럼에서도 날라온 벙어리 선거 돈이라도 불의의 재물이라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되지 않기 위해 과감하게 던져버린 돈 얘기를 했는데 그래도 지나고 보니 복음과 구제를 위한 선한 사역에 쓰지 않은 회오가 남는다고 했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1~2) 1974년 말 긴급조치 하에 8개월 옥고에서 나오니 도저히 지역사회에선 평판이 나빠 목회를 할 수 없었다. 1975년 8월 한 달간 기도와 금식기도를 하고 시내를 뒤지며 새로운 목회지를 찾다가 가까운 안락동으로 정하고 전세금을 신문지에 싸들고 버스를 타고 이사벨 여고를 지나서 동래 가는 다리를 건너는데 갑자기 시끄럽게 들리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는 말씀대로 목회한 존 모리슨(John Morison)의 안수식이 끝난 직후에 이웃의 목사가 방문해 “목사님은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건강의 한도를 넘지 않도록 조심하셔야지요”라고 충고했다. “염려 마십시오. 게으른 목회자가 오히려 먼저 천국 간답니다”라고 응수로 대답했다. 그런데 6개월 후에 그 목사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에 찾았더니 “당신이 전에 나에게 한 말을 기억하세요?” 모리슨은 더듬으며 “아, 하지만 그런 건 생각지 마세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때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아직 낮 일때 일을 부지런히 하십시오. 일할 수 없는 밤이 지금 나에게 다가오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한 후 임종에 임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6:6) “여기 70세 되신 어르신네는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어서 “80세 되신 분은 손들어 보세요” 또 아무도 없었다. 설교 후 예배가 끝난 뒤에 나를 포천 양로원에 초청한 김익수 목사와 원장에게 물었더니 여기 요양원에 있는 80명은 거의 90세 되신 분들로 계신다고 했다. 반수는 침상에
중고등학교시절엔 원로목사님들의 설교에서 늘 들어온 말씀으로 의심은 마귀가 주는 것이니깐 예수님도 그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교회를 세우는 천국열쇠를 약속한 후 십자가를 지시려는 예수의 말씀에 항변하는 그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엄중히 책망하셨다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마귀는 언제나 물리치라고 설교하셔서 늘 유념해 왔었다. 그러다가 대학교 3학년 때 김철수 철학교수의 말에 지난 12년간 단순히 믿어온 하나님의 말씀에 회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의심 많은 도마를 비난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오히려 지성인들은 ‘방법론적 회의’(methodological skepticism)를 거치면 맹목적 추종에서 탈피하여 신앙이 더 확고해진다. 도마 사도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고백한 후 가장 멀리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게 되었다”는 것이 말씀의 요지였다. 그 해 미국의 달라스 침례교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대구 제일장로교회에 부임한 이상근 목사님을 초청해 전교생 부흥회를 가진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대구 대봉동 이천교 근방에 하숙하면서 수요일이나 주일 저녁예배는 가
이번에는 콩의 진실이다. 콩(대두) 관련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에게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콩은 홍조(폐경기 일과성 열감)에서 전 세계 기아문제에 이르기까지 만병통치약과 같은 칭송을 받아왔다. 거대 농업기업들은 콩이 건강에 좋다는 이미지를 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실은 콩은 인류가 지금까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고도로 정제된 산업생산물이다. 콩은 공기 중의 질소를 고정할 수 있기 때문에 초록색 거름으로 여겨졌다. 보리, 조, 쌀, 밀을 의미하는 한자에는 곡물을 뜻하는 글자들이 들어있는 반면, 콩을 뜻하는 한자에는 뿌리를 뜻하는 글자가 들어있다. 콩은 음식이 아니라 간작용으로 길렀기 때문이다. 콩에는 엄청난 양의 반(反)영양소가 들어있어 다른 씨들보다 훨씬 더 많은 처리 과정을 거쳐야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된다. 첫째, 콩에는 트립신 억제 인자가 들어있다. 트립신은 췌장에서 나오는 소화효소다. 바로 이 때문에 콩을 먹으면 가스가 차고 배가 더부룩하면서 복통과 설사증상이 생긴다. 그런데 콩을 발효시키면 트립신 억제인자의 대부분을 무력화 할 수 있다. 그래서 된장, 간장, 고추장은 몸에 좋은 발효식품이다. 오랜 기간 발효시켜 만든 된장이 아시
교회 목양실 벽에 ‘평화의 기도’ 목판 작품이 걸려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웬만한 교회의 주보에는 실리고 교회 행사 유인물에도 자주 실리는 것이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이다. 사실 이 기도의 작자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는 말도 있으나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 전문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 어두움에 빛을 /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 오는 자 되게 하소서 /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성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의 기도를 언제 올리는 것이 신앙적일까? 언제 이 기도를 올리는 것이 신학적으로 합당한 것일까? 평화의 기도를 시도 때도 없이 올리면 될 것인데 뭘 그렇게 기도 올리는 시점을 따지는가? 그렇다. 그러나 따질 이유가 있다. 이 기도는 구원받기 이전과 구원받은 이 후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대망의 새해가 밝아왔다. 묵은 해는 영원의 시간 속으로 사라졌으니 과거의 모든 사념을 뒤돌아보며 얽매이지 말고 웅비의 내일을 향해 현재를 최선을 다해 일어나 행동하라. 넓은 세상을 향해 인생의 경쟁에서 용기있게 일어나 그대의 밝은 빛을 비춰라. 미래는 바로 그대의 축복과 은총의 광장으로 두 손 벌리고 다가오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아니다. 시간은 돈 아니 황금도 아니고 바로 그대의 생명이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프랑스의 크리스천 시인 쟝 라신(Jean Racine) 기도의 시에 아멘하자 주님이시여, 주님의 빛을 / 우리 위에 부어주소서 / 우리의 온갖 질병을 고쳐주소서 / 악마들을 물리치는 / 주님의 강한 손으로 / 우리를 얽어매는 / 모든 쇠사슬을 끊어주소서! 5분 남은 인생 「죄와 벌」의 저자인 도스토예스키는 29세에 국가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영하 50도나 되는 외딴 유배지에서 어느 날 그는 사형을 받기 위해 기둥에 묶여 있었다. 사형집행자는 남은 시간이 5분정도라고 알렸는데 그는
우유,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슴이 많이 아프다. 우유업계에 종사하는 많은 분들에게 죄송하고…. 하지만 진실은 알려야겠다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널리 혜량하시기 바란다. 아직까지도 우유 섭취에 대한 찬반양론이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완벽식품이 얼마나 있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무수한 가정의 식탁에 오르내리고, 음식점의 단골 식재료로 사용되며, 특히나 성장기 어린이에게 필수 영양식처럼 인식되고 있는 음식이라면 결코 대충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거대 낙농업자들과 우유회사들은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하여 우유가 몸에 좋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한편, 잘 만들어진 우유 광고를 지속적으로 내보내 소비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이경원 박사, 미국 자연의학 의사).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완벽 식품 우유, 과학적 근거가 없다. 다음은 티에리 수카르(Thierry Souccar)의 책, 『우유의 역습 (LAIT, MENSONGES ET PROPAGANDE』을 추천한 몽펠리에 의과대학 암 전문 외과의 교수 앙리 주와유의 글이다. “우리는 우유에 중독되어 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락토올리즘(lactohol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라고 예수님은 첫마디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금년은 12월 18일이 주일이라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25년 전 1991년 그해 9인의 사형수 중에 마리린 몬로의 비명사한 36세 나이와 같은 강영리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와 눈이 맞아 7년 전 남편을 교살(목 졸라 죽임)하고 그것도 모자라 시모도 교살하려다 미수범으로 발각되자 두 아이는 고아원으로 보내고 1심과 2심에서 사형선고 받아 대법에 항소했으나 기각으로 사형집행이 확정되었다. 다른 죄수들은 그해에 사형집행이 되었으나 강영리는 늦게나마 감옥에서 복음을 받아 철저히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 금식기도로 참회하며 다른 죄수들을 사랑하여 베풀고 열심히 전도하여 80여명이 회개하는 모범수가 되는 바람에 5-6년이나 덤으로 옥중에서 연명하게 되었다. 치정과 돈에 빠진 포악한 살인마가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었으나 91년 12월 18일 오후 2시 교도관의 호출로 감옥문이 열리자 그녀는 접견인줄 알고 기뻤으나 교도관이 사형집행이라 할 때 잠깐 놀라 당황하다가 곧 침착하게 추스르며 아래와 같이 유언했다. 남은 영치금은 동료 죄수들에게 돌리고, 묘지는 전주 문중산의
내가 이 동네 구두수선공을 알게 된 것은 20여년 전으로 돌아간다. 유명회사의 (브랜드)가 있는 가방 끈을 고쳐달라고 내밀었더니 자기 전공분야기 아니라 하면서 일언지하에 수선거절을 당한 사건으로 인해 그를 알게 되었다. 자기는 구두수선공이지 가방수선공은 아니라서 가방을 잘못 고치면 어쩌나 생각하는 직업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까짓 대강 고쳐주고 수수료 받으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었다. 구두수선에도 전공 버전공이 있다는 철학이었다. 이번에는 등산용 막가방의 손잡이가 떨어졌기에 이것을 큰 바늘로 쿡쿡 박아달라 했더니 아무 말도 없이 튼튼히 박아 주는 것이었다. 마침 신고 갔던 구두도 닦아 주겠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보통 때 그는 나의 구두를 광내주고도 일체 수수료를 한사코 사양해 왔다. 그러나 오늘은 짐짓 내 마음이 꼭 수수료를 주고 싶어서 지갑을 꺼내자 그는 목사님과 자기 사이엔 돈이 오고가면 안 되는 관계라고 극구 또 거절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지갑을 다시 주어 넣었다. 멍하니 좁은 구두방 박스 안에 앉아 있노라니 어떤 청년이 구두가 발을 조이며 불편하니 구두의 좌우를 좀 넓혀 달라는 주문을 해 왔다. 그러면서 이 청년은 그게 아버지 구두인데 아버지
“몇 주 전에 산 복권표인데 알아봐 주세요”라고 했다. 기계에 넣어 확인해 보더니 5,000원으로 5장 구입한대로 5,000원 본전을 내어주었다. 부산서 개척교회 시절 교회당을 지하와 1층 올리고 2층과 준3층을 증축할 돈이 없어서 ‘에라 로또나 한번 걸리면 되겠지!’하고 부산역에서 만원 복권을 샀으나 허탕 친 일이 40년 전 그때 있었는데 ‘이번에는 본전이 되었으니 그래 다음에는 세 번째로 시도해 볼까?’하는 생각도 스쳐갔다. 요사이 매스컴의 주제가 돈으로 흐르는 세상이다. 지금뿐만 아니라 예부터 세상은 ‘돈, 돈, 돈!’ 그놈의 돈이 무엇이길래! 생각하다가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제일이다’는 세상의 흐름을 보았고, 보고, 또 그런 세상으로 흘러갈 것이리라. 세계 선교를 하려면 돈에 부대낄 때가 한두 번이었던가? 지난 10월 19일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의 길거리와 숲 그늘밑에 모일 2만명 전도집회도 주강사로 못간 세 가지 이유 중에 하나가 돈 2,000만 원 준비였다. 기름이 있어야 차가 달리는 것을 이제야 절실히 깨닫게 되다니! “돈은 범사에 응용되느니라”(전10:19)는 솔로몬의 청지기 정신을 모른 채 남에게와 구령선교에 퍼주고 이제껏
현대의학과 자연의학의 세계는 아주 다르다. 우선 질병의 원인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치료법도 전혀 판이해질 수밖에 없다. 자연의학(대체의학, alternative medicine)의 세계에서는 질병의 원인이 단순한 만큼 그에 대한 치료법도 단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연의학의 질병관이 너무나 단순하며 때로는 신비주의적이고 미신적이며 비과학적이라고 현대의학에서는 질타할 수도 있다. 이 비과학적이라는 말에 오늘날 전 세계 자연의학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막스 거슨(Max B. Gerson) 박사는 차라리 자신은 비과학적인 세계에 들어가겠다고 공언한 바가 있다. 막스 거슨이 젊었을 때의 전문분야는 내과와 신경과였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심한 편두통을 앓아 많은 고생을 했는데 그에 대한 치료법을 아는 의사가 없었다. 많은 선배 의사들에게 편두통에 대한 치료법을 물어 보았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그에 대한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평생 고생을 감내하면서 생활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편두통에 대한 치료법을 반드시 찾아내리라 결심하고서 틈이 나는 대로 옛 사람들이 쓴 글들을 읽어나가면서 연구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저는 “모태 신앙인”이었습니다. 혹자는 우스갯소리로 “못 해 신앙인”이라고 말합니다. 30년 넘게 큰 어려움이 없이 평탄하게 살아오면서 믿음 좋으신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나 신앙도 뜨겁지 못하고 영혼에 대한 간절함도 느끼지 못한 채 안일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제가 전도에 대한 열정을 품게 된 것은 서울로 이사 오기 전에 다녔던 수원교회 조충구 목사님을 만나고부터였습니다. 목사님은 매주일 오후 교인들과 함께 노방전도를 나가셨는데 그 때 웬만한 신앙인은 모두 나가는 터라 저 또한 그냥 따라 나갔습니다. 그동안 아는 사람에게 교회에 나오라는 말은 했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용기를 내게 되었고, 3주차 나갈 때는 간절히 기도하고 나가서 처음으로 나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불과 10여분 만에 그 사람이 뜨겁게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2년 이상 주일 노방전도를 나가며 전도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을 때, 학교 동료 선생님으로부터 “전도훈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13주 과정인 전도훈련에 참가했습니다. 그 전도훈련은 1주일에 한번 교육받고, 그 방법대로 그 주간에 1명이상에게
마태복음 5, 6, 7장을 통칭 산상수훈이라 칭한다. 이 제목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이 산에서 내리신 교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훈이라 하기엔 우리에게 너무 무거운 짐인 듯해서 통칭하던 수훈이라 하지 않고 장수를 말하게 된 것이다. 평상시에는 필자도 산상수훈으로 부담없이 부르고 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5:39~41) 나눠 줘야 한다는 교훈에 이르러서는 선뜻 실천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서강대학교 영문학 교수였던 고 장영희 씨는 그의 에세이 “내 생애 단 한 번”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었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신부가 옆 좌석에 있는 사람들과 각인이 지금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 나눠 주기를 해 보라고 해서 겪은 경험이라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가방이나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서로 나눌 물건들을 찾기 시작했다. 봉헌금만 가지고 달랑 맨 몸으로 갔던 나는 당황했다. 아무리 주머니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다. 구원은 마치 손의 손등과 손바닥처럼 회개와 믿음의 양면성 가지고 있다. 신구약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회개의 촉구’이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언제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선지자들은 백성들을 향하여 목이 곧고, 얼굴이 뻔뻔하고, 이마가 굳은 백성이라고 외쳤다. 목이 곧은 것은 교만한 것을 말하는 것이요, 얼굴이 뻔뻔하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요. 이마가 굳다는 것은 회개하는 지혜가 없이 자기의 소견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선지자였던 침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고 외쳤고,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마3:11)라고 선포했다. 예수님은 침례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후에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