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비둘기는 좋은 새로 등장한다. 성령이 예수 위에 머문 예가 있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요1:32) 또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도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그러나 무릇 모든 예화나 비유에 등장하는 사물은 그때의 교훈을 위한 단편적 일회적일 수가 많다. 가령 누룩만 하더라도 이단 교훈으로 누룩을 말하기도 하고 천국의 확장을 의미하는 누룩으로도 말해지고 있다(마13:33, 마16:6). 이런 것을 서두에 말하면서 비둘기 인생이란 주제로 설명하려는 것은 비둘기의 답답한 삶의 일면 때문이다. 공원에 가 보면 비둘기가 떼를 이루어 날았다가 내려오곤 또 온종일 옆도 살피지 않고 땅을 내려다보며 쪼아 댄다. 이게 혹 먹이가 아닌가 저게 혹 먹이가 아닌가 하고 무조건 눈에 띄는 것을 쪼아 본다. 먹이면 먹고 아니면 뱉으면 된다는 식이다. 가만히 보노라면 이 짓을 하루 종일 계속한다. 그 조그마한 창자를 채우려고 세상모르고 땅을 쫓는 저 비둘기를 보노라면 위도 못보고 하늘구경도 못하고 오직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만을 찾아
대학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그의 글이 잊혀지지 않는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oard)는 서커스 장소에서 일어난 화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커스 주인은 불을 끄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하여 맨 먼저 만난 광대를 붙잡고 빨리 동리에 나가서 화재 진화를 요청하라고 했다. 이 광대는 서커스 준비로 이미 무대 연기를 위한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을 벗을 여유 없이 곧장 동리로 달려가 “불이야!” 하면서 서커스 장에 불을 꺼 달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광대의 행동이 연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여 모두 마음껏 박수를 치며 웃었다. 광대가 더 광분하고 불을 꺼 달라고 소리쳐 호소할수록 사람들은 그 열렬한 연기에 더욱 크게 웃었다. 결국 서커스 장을 태운 불길은 온 동리를 덮쳐 불 속에 파멸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목사의 구령에 대한 경고가 교인들의 웃음거리로 넘겨졌을 때의 결과는 우리 이웃과 한국과 지구촌도 다 지옥 불로 타고 만다는 뜻이 아닐까? 주님의 유언이요. 지상명령인 구령의 사명을 잊어버린 오늘 우리에게와 교회에게 주신 경고와 경종이겠다. 복음전도로 구령의 시급성을 알리는 “지옥, 불이야!”라는 말에 우리는
어느 누구도 외딴섬은 아니다 (No man is an Island) 시인 John Danne의 말이다. 우선 한문의 사람 인(人) 자(字)를 분석해 보면 두 가지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의존함으로서 사람이 된다는 뜻 글자인 것이다. 또 한문의 여(女) 자를 보자. 세 획으로 된 것인데 그 어느 획이든 빠지면 아무 의미가 없다. 여인은 남자의 허리를 잡을 때 여인이 된다는 뜻이다. ㈠은 남자이고 나머지 두 획은 여자되기 전의 형상이 아닐까. 운명에 의해 가족원이 되고 선택에 의해 친구가 된다고 했다. 운명이든 선택이든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네가 살고 내가 사는 것이겠다. 듣는 바에 의하면 교도소의 형법 중에 최고의 형벌은 독방 조치라고 하는데 그만큼 single alone은 괴롭다는 것이겠다. 인생은 친구 없이는 재미없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몇몇 인사들의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G. K. 체스터톤(G.K Chesterton)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우리는 놀라운 충정심을 피차간에 발휘해서 견딘다”고 엘버트 휴브라드는 말했다. “친구라면 그대에 관해 잘 알고 또 말없이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남
“일생을 하루같이 살라”는 옛말이 떠오른다. 오늘은 가을을 맞는 10월의 첫날이라. 3:30분에 일어나니 2020년의 새해를 맞기 전, 남은 4개월을 잘 설계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예수님보다 50여년을 더 살아왔는데 무엇을 했는가? 송구스럽기 늘 짝이 없었지만 나의 여생이 짧아지니 천국소망을 바라는 좋은 새날이구나! “내일 일을너희가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안개니라”(약 4:14) 아브라함의 175세, 모세의 120세, 여호수아의 110년, 장수(60), 희수(70), 산수(80)을 지나 졸수(90)을 향해 사도요한같이 천수 곧 100세수를 누린다해도 17년 밖에 내겐 남지 않았으니 짧아진 여생을 어떻게 더욱더 금쪽같은 시간을 아끼며 “죽도록 충성하라”(계2:10 이하) 명령하신 말씀 따라 선한 청지기의 새로운 결단과 도전을 위해 매진할 것을 각오해 본다. 요단강 건너 천국입성시에 나의 주 예수님을 만날 때 부끄럽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나 자신만의 준비되어 충성된 삶뿐만 아니라 내가 섬기는 교회의 어린 양무리들, 대부분 중국에서 한국
“하나님은 어떻게 신앙의 선조들과 음성으로 말씀하셨는가?” 높고 높으신 신이요, 영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비천한 인간들과 대화하셨는가? 구약성경에서 아담, 노아, 모세, 여호수아, 사사들, 사무엘 그리고 선지자들, 제사장, 다윗 같은 왕들과도 제사나 기도에 음성으로 응답하셨는가? 신앙의 연조가 들수록 이상하고 의아하게 늘 생각해 왔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에게도 중요한 시점에 말씀을 주셨다. 1974년 말 긴급조치 하에 8개월 옥고에서 나오니 도저히 지역사회에선 평판이 나빠 목회를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7)라는 말씀으로 기도에 응답해 줬다. 1975년 8월 한 달간 기도와 금식기도를 하고 시내를 뒤지며 새로운 목회지를 찾다가 가까운 안락동으로 정하고 전세금을 신문지에 싸들고 버스를 타고 이사벨여고를 지나서 동래로 가는 다리를 건너는데 갑자기 시끄럽게 들리던 도로 위의 차와 버스속의 사람 소리가 사라지고 너무 조용하고 두려운 정막 가운데 “너는 내려서 사직동을 둘러보고 결정하라!”는 조용한 음성이 들렸다. 이 음성은 매우 똑똑하면서도 부드럽게 울렸으며,
요사이 젊은 가수들의 노래는 그 몸 움직임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정신을 잃게 한다. 심하게 표현하면 소아마비 장애인의 몸놀림 같은 것을 보노라면 동정심마저 든다. 그리고 천부의 자기 목소리로 소리를 낼 것이지 온갖 변성(變聲)이란 변성은 다 내어서 어쩌면 광인(狂人)의 길거리 외침 같게도 들린다. 귀가 따갑다. 그런데 대중가요 가수 신모 군의 노래를 듣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내게 준다. 신모 가수는 요사이 젊은이 무리에 속하지만 다른 젊은이 가수와는 창법이나 그 창 태도가 전혀 다르다. 내가 신모 가수의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데에는 그럴만한 나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우선 그는 노래 부를 때 조금의 미동(微動)도 없다. 조그마한 미풍(微風)도 없는 양 결코 그 몸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완전히 부동자세로 노래를 부른다. 어쩌면 그의 머리카락 한 가닥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고 그의 의상의 한 폭도 꼼짝하지 않고 몸에 딱 달라붙어 있다. 그의 몸과 옷은 일체가 되어 있다. 흥분하는 격한 모습도 없다. 어떤 노래를 불러도 항상 그런 자세로 임했다. 어쩌면 저렇게 순박할까? 손발을 허공에 대고 한 번 흔들어 볼만도 한 데 끄떡없다. 그는 그런 유혹도 받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16:26).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사랑하시어 3년간 복음전도와 구령사역 후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기적으로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놀라운 기적의 열매를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드디어 형무소 간수들이 “이 놈의 영감탱이 입 못 닥쳐!”라고 소리 질렀다. 그토록 완력을 가하는데도 아랑곳없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다가 개처럼 끌려 형무소 사무실로 나갔다. 일본의 검사가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노인에게 다가가 “영감님!”하고 불렀다. “예!” “예수 천당을 그만하라는데 왜 계속해서 혼구멍이 납네까?” 이때 최권능 목사의 눈빛이 번쩍이며 검사를 보면서 “검사 양반, 내래 온 전신에 예수신이 꽉 차 있어서 어찌할 수 없습네다. 소리치지 않으면 안됩네다!”라고 말했다. 검사는 혀를 끌끌 차며‘이 영감을 저렇게 예수에게 미치게 하는 그 엄청난 힘은 무엇일까?’하고 중얼거렸다. 최봉석(일명 최권능) 목사님은 평양 강동현 최준서 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노방전도자
누에 농사는 딱 한 달 농사다. 누에알에서 부화되어 뽕잎을 먹을 만큼 먹은 누에들은 더 이상 뽕잎 먹기를 거부하고 섶에 오른다. 섶에 오르는 누에들은 유리 속을 들여다보듯이 투명한 몸뚱이를 지닌다. 그 몸속에는 온통 명주 실크로 충만되어 있다. 섶에 오른 누에들은 제각기 자기 자리를 잡은 뒤 그 입으로 무한히 길고 긴 실크를 뽑아내어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가 마침내 고치 집을 짓고 자기는 그 속에서 번데기로 남는다. 이렇게 하는 작업이 딱 한 달이라서 농부들에게는 단시간에 손질을 올리는 고마운 누에 농사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지어놓은 누에집 고치가 매달린 것을 보노라면 흐뭇하고 아름답기도 한대, 그 밑에는 비극적인 지옥세계가 있다. 남이 뽕잎 먹을 때 자기들은 무슨 짓을 했던가. 동료들은 섶에 올라가 집을 짓건만 다른 누에들은 섶에 오르지도 못하고 그 섶 아래서 흐물거리고 있다. 그것들에게는 더 이상 뽕잎 제공도 없다. 때는 이미 늦으리. 애원해도 뽕잎 배급은 없다. 배도 고프고 힘도 없는 누에 잔존들. 몸 색깔은 누렇게 부패하고 있고 썩는 냄새까지 풍기면서 땅바닥에서 허물거린다. 뽕잎 주던 아낙네는 이 누에들을 빗자루로 슬슬 쓸어 담는다. 그리고 “구
우연한 기회에 남편들의 탈선외도에 대한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현상이 있다고 어떤 성(性)전문 강사가 전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강사는 탈선자의 개인적인 이유는 각각 다를 수 있지만 보편적으로 남성의 탈선외도에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내가 그 강사의 요지를 대강 기억하기로는 남편 탈선의 이유로는 첫째로 남편의 외도가 본처에게 주는 상처의 끔찍함을 모르고 있다는 것과 둘째로 본처만 알지 못하면 남편의 외도가 문제될 것이 없다는 묘한 문화 환경과 셋째로 본처로부터 떠밀림을 당하는 듯 남편의 인기가 없어지는 듯 느껴지는 남편의 감정과 넷째로 본처와의 침대 생활(Bed life)이 통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표면적으로 볼 때는 상당히 그럴 듯한 외도의 이유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보는 남편의 외도는 그 이유를 인간의 타락성 분위기에서 찾는다(롬1:24~27). 세상 사람들은 결혼의 영적인 의미를 알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을 접하지 아니한 그들이 어떻게 성경이 말하는 부부관계의 영적 의미를 알겠는가? 아담과 하와는 그리스도와 신부교회의 원초적 상징이다. 그리고 남편 간의 성교(Sexual action)는 두 인격결합의 최고 표현이며
“인사 서로 나눕시다. 나 황경찬 목사요.” “예, 저는 한명국 목사입니다.” “그래서 어디서 목회하시오? 아침식사 나누면서 얘기나 합시다.” “저는 서울침례교회라고 충무로에 있습니다.” “나도 거기서 멀지 않은데서 목회를 하고 은퇴를 했지요. 나는 성결교단으로 치부동성결교회였지요.” “들어오실 때에 보니 포니차를 잘 운전하시던데 혹시 목사님은 여기 제주도에 사신가요?” “그래요. 은퇴하고 나니 누가 오라는 사람도 점점 없어지고 한 때 총회장을 할 때는 초청도 많았는데…목사는 목장이 있어야지. 평생 양아치로 살았고 양젖을 먹고 살았는데 집에 가만히 있으니 견딜 수가 없어. 작년에 나이 80에 이곳 멀리 제주도에 와서 개척했는데 2년이 지나니 지하교회이지만 40명의 교인으로 늘어나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목사님 대단하시고 존경합니다. 어느 누가 80세에 개척교회 꿈도 꾸겠어요. 죽도록 충성해야지요. 오늘 저는 80세에 부름받은 모세처럼 목사님을 기억하고 언젠가는 제2의 소명으로 목사님을 따를 용기가 생기네요.” 때는 1987년 목회현장의 긴장도 풀고 또 추수감사절에 있는 제2회 “예수잔치” 준비기도를 위해 멀리 제주도 기도원에서 만났던 황경찬 목사님은 1
나는 한국 순교사를 읽은 중 많은 위대하고 성스런 순교자들이 있었지만 목사가 아닌 김윤섭 전도사의 순교와 초대교회 사도 요한의 신복제자로 폴리갑의 순교직전 대담을 잊을 수 없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실과 세계선교를 다니며 종말을 맞는 수많은 교회들과 훌륭한 목회자들을 만났지만 으뜸으로 늘 떠오른 두 성자의 최후를 추모해 본다. ‘순교사화집’을 읽고 감명이 깊었던 십자가 신앙의 선진을 소개하고자 한다. 김 전도사는 평안도 선천 태생으로 20세에 예수님을 믿고 평북 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박천 덕인교회를 개척하고 의주 월하교회를 부흥시켰다. 또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그는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一(死覺悟) 결단과 다니엘 선지자처럼 입지불변(立志不變)의 전도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는 열 번이나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저들은 그를 의자에 묶어서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고 억지로 머리를 숙이게 하여 신사 참배케 하고는 굴복했다고 시인을 강요했고, 갖가지 회유와 말할 수 없는 고문을 가했다. 결국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조건 하에 석방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오자 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8회에 걸쳐 일본 경찰에게 붙들려
비록 부도덕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천국 갈 수 있으나 율법 폐기를 못 믿는 거룩한(?) 사람은 지옥행을 달린다. 여간 복음에 정통한 용기백배한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이런 표현을 토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발설자의 용기라 할 것까지 없다. 성경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말했을 따름이다. 위의 말을 더 쉽게 표현하면 이런 것이다. 덜 성화(聖化)된 사람이라도 천국 간다는 것. 그리스도 안에 육적인 그리스도인. 하나님 집에서 어린아이 같은 그리스도인. 아직도 단단한 밥을 못 먹고 젖만 먹는 어린아이 그리스도인. 이들도 천국은 자신있게 자기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좀 덜 신령한 자,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도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3:1) 그런데 외형적으로 경건하고 선행을 베푸는 자 같아도 율법 앞에서 율법 처리를 100% 정리 못 한 자는 지옥행자라는 것이다. 율법이란 어떤 것인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너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학 출신자가 된 사람에겐 개인의 명예나 지위 그리고 높은 경제 대우를 받는다. 동물의 세계에서 힘센 놈이 암컷을 차지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성공한 사람이 미인을 아내로 맞고 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상 아닌가. 운동을 잘해서 유명한 금메달을 딴 사람은 명예나 부가 보상으로 따른다. 한국에서는 모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들은 군면제라는 특혜보상도 줬는데 지금 그 제도를 고려할 것이라 했다. 세상에는 보통 보상(補償)때문에 돌아가는 시스템 같다. 교통사고로 죽은 자도 보상을 받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당한 부상과 죽음에도 보상이 따른다. 사람의 액션에는 거의 보상이 따른다. 식당종업원이 숟가락 놓아주고 호텔사람이 손님의 가방 끈 하나 만져줬다고 꼭 팁 이란 것이 있는데 그게 다 보상 개념에 속한다. 독일의 사상가인 토마스 아 켐피스가 말한 이론에는 “사람들은 작은 보상을 받기위해서는 장거리 여행에 항상 바쁘지만 영생보상을 위해서는 한발자국 뛰기도 힘들어 한다”고 했다. 보상 없이는 온 세상이 목석처럼 꼼짝 안하는 것 같다. 길들인 동물들이 어쩌면 저렇게 재주를 잘 부리나 했더니 그들에게도 보상이 따라 주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사람 관계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천자문에 사자소학과 명심보감까지 배운 나에게 어느날 두각객이란 여승의 말을 들은 어머님의 조언에 따라 절에 대리고 갔다. 거기서 성가여래상과 관음보사상, 북두칠성단에 7번씩 절을 하게 불교신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교회에서 귀신병을 고친 이후에 180도로 달라져 3년 동안 나를 교회를 인도하기 위해 노력하셨고 결국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말았다. 나는 교도소 선교를 하다가 교도소 8개월을 살고 나온 뒤엔 더욱 열심히 갇힌 자의 이웃으로 교도소선교회장까지 하면서 혜경 스님을 만났고 서울교회에 온 뒤 그를 초청하여 간증집회를 열었다. 사도 바울의 개심을 연상케 하여 나의 눈물방울을 맺게 했다. 대한 불교 정토종 교육국장이었던 혜경 스님(본명 : 김성화)이 불교단체의 내분과 정치 문제로 김해 교도소에 수감됐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늘상 하던 대로 불경을 읽기 위하여 대출 신청을 했다. 그런데 그날은 대출 신청한 불경이 아니라 기드온에서 발행한 조그만 신약성경 한 권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스님은 의아해서 신청하지도 않은 기독교 책을 왜 가져왔느냐고 하자 성경을 가져다 준 청년은 “여기에도 진리가 있을 것이니 한번 읽어보십시오. 저는 내일 제대합니다
부부유별(夫婦有別)이란 말은 동양의 오륜에 나타나는 말이다. 부부간에는 구별이 있다는 사상이다. 그것은 사람됨과 함의 차이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부부무별(夫婦無別)의 시대가 되고 말았다. 끝까지 부부유별의 사상을 지켜야만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임무이기도 하다. 어떻게 부부유별이 된단 말인가. 우선 신체적 생리적 차이 때문에 구별된다. 성전환이란 요상한 수술도 있다 하지만 날 때부터 신체구조가 달라서 여자가 아이를 낳았지 남자가 낳은 경우는 아직 한 번도 없다. 부부유별을 버리고 부부무별이 된 오늘이기에 남자가 남자끼리 부끄러운 일을 하고 또 여자가 여자끼리 부끄러운 일을 하니 이것을 동성연애라 하던가? 피조물도 자웅유별(雌雄有別)이다. 암컷끼리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수컷끼리 또 부끄러운 일을 안 한다. 거미 곤충만 보더라도 암컷은 몸집이 크고 수컷은 몸집이 작은데 이놈들은 암수가 알아서 짝놀음하고 수컷이 암컷에게 잡아먹히고 나중에 암컷이 무수한 알을 배출한다고 한다. 사람이 거미 앞에 부끄럽게 된 세상이다. 성경도 일찍 경고한 바 있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