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가장 큰 힘 또는 생명력은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진리는 화장할 줄도 모르고 조미료도 모르지만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습니다. 언제부터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못 믿을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좀 더 쉬운 말로 예를 든다면 가장 거짓말쟁이는 정치인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정치인들의 정책 시행과 룰을 적용함에 있어서 일관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으니까 사재기를 하고, 믿을 수 없으니까 투기를 하고, 믿을 수 없으니까 도피를 합니다. 용케도 투기꾼들을 잡아들이는데도 큰손은 계속 생기고 투기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습니다. 하기야 법(法)이란 물 위에 떠다니는 돛단배(삼수변에 갈거)라면 생리적으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끄는 대로, 미는 대로 가는 것이라면 할 말이 없습니다. 선진국일수록 도시계획이 잘 돼 있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두텁습니다. 그러나 후진국일수록 정책의 편파적용으로 도로가 구부러지고 정치를 불신합니다. 병균의 서식은 부패물질에 있습니다. 악덕 투기나 큰손의 서식은 어떤 맥락에서 파생해 오는 것일까요? 어디 그뿐입니까? 대학 입학 시험관도 믿고 악기점 주인도
유튜브에 대한 선호도는 젊은 층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데 젊은 층이 선호하는 연예인이 과거에는 공중파나 영화 스크린에 나오는 스타였다면 최근 미국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제일 좋아하는 연예인을 조사한 설문에서 상위 1~6위까지가 모두 유튜버(유튜브 운영자)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멕시코, 브라질, 영국, 심지어 핀란드까지 유사한 결과를 나타냈다. 유튜브에 대한 젊은 세대의 관심은 더욱 증가할 것이며 이 같은 특성은 앞으로 유튜브의 역할이 다음 세대의 삶의 영역에서 증대되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러한 트렌드를 인식한 기업과 사회조직은 소통하기 위한 채널로 유튜브를 활용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정치인들이 유튜브의 영향력을 인지하고 유튜브에 개인방송을 올리며 자신의 입지와 정치적 소견을 다지며 소통의 창구로 이용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유튜브를 활용해 정보를 공유하는 특성과 소셜미디어의 유명세를 이용한 개인방송 마케팅이 활성화되는 현상을 고려할 때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기독교 정보와 신앙을 세상에 알리고 소통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구체적인 전략이 요구된다. 특별히, 영향력 있는 기독교 인사들의 유튜브 활동을 통해 기독교 정보를 공유하는 사역과 유용한 기독교 콘
우리 옛 사람들은 전염병을 ‘역병’이라고 불렀고 서양 사람들은 ‘흑사병(the black plague)’ 또는 ‘페스트(pest)’라 불렀다. 현대 의학자들은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의 주범 역시 바이러스의 일종으로 규정한다. 중국 우한에서 바이러스가 시작됐다는 뜻에서 사람들이 ‘우한 폐렴’이라고 불렀다. 그 다음에는 사람들은 바이러스의 모습이 코로나 같다는 뜻에서 ‘신종 코로나’라고 불렀고, 마침내 사람들은 2019년도 12월에 발생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코로나19’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름을 어떻게 지어 불러도 그 특징은 사람의 생명에 치명적인 악성 바이러스로 이전의 어떤 바이러스보다 감염이 잘 되는 전염병이다. 구약성경에 역병은 패역한 세대에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들 중에 한 현상이다. 신약에는 역병에 대해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상 마지막 때의 증세들 중에 하나가 “전염병”임을 말씀하셨다.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마지막 때의 증조를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만을 언급하는데 유독 누가복음은 전염병과 무서운
지난 호에서는 요한복음 오병이어 사건의 문맥에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존재와 관련된 교훈들을 통해 나타난 인자의 존재와 역할에 관한 내용을 살펴봤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표면적으로는 나사렛 예수로서의 인간이시지만, 근본적 존재성에 있어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영원한 생명의 공급자이시다. 이제 이 세상에서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마치신 후에는 인자가 이전에 계시던 곳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신비한 연합이 완성되고 완결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로 복귀하실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논쟁으로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세상의 빛이며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한 교훈들에 나오는 ‘인자’ 말씀들 속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살펴본다. 예수님은 이미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명백하게 언급해오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들을 영접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그들을 향하여 그들의 비극적 결말을 경고하셨다(8:21, 24). 예수님의 이 경고의 말씀은 엄숙한 선언이면서 또한 끝까지 거부하는 그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이었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공개
4) 기술의 혁신을 추구 현대사회는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빠르고 그 주기가 짧아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데 발생하는 복잡한 문제에 대한 대응방안과 해결책을 찾기도 전에 또 다른 문제가 양산되는 상황이 전개된다. 정부와 기업은 이러한 문제해결을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며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고 있으나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황임을 고려할 때,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미래적이고 선제적인 혁신기술과 방법이 절실히 요구된다. 특별히 4차 산업혁명을 지지하는 기술 낙관론자들에 따르면 과학기술의 발달은 혁신적인 방법을 통해 세계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며 돌파구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한다. IOT는 기술혁신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연결하고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신속하게 활용해 공유하도록 돕는다. IOT에는 사물과 데이터의 연결이 가능하도록 기기를 연결해 주는 센서가 110억 개에 달하고 있으며 이 수치는 2030년에는 100조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는데 이 연결기술이 확장될수록 데이터의 활용범위가 넓어지고 상호작용을 통한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넣어 융합의 범위를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시대 성공회를 개혁하려한 청교도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첫째, 모든 예배와 신앙행습은 성경에 근거해야 하는데, 성경에 나오는 예배는 예식서의 예전적 형식의 예배가 아니라, 성령의 임재 하에 자유롭고 살아있는 예배였다. 따라서 획일화된 예배를 생산하는 성공회의 공동기도서는 폐지돼야 한다. 둘째, 가톨릭교회의 절기들을 없애고, 대신 주일을 엄격히 성수해야 한다. 주일날 세상적인 오락과 경건치 못한 언행과 행위들은 금하고 경건하게 지켜야 한다. 셋째, 예정과 특별구속, 하나님의 언약은 성서적 진리이므로 믿어야 한다. 청교도들의 언약사상(계약사상)은 존 칼빈과 스위스 종교개혁자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로부터 기원했다. 칼빈의 언약신학은 예정론과 연계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언약을 맺었으며, 따라서 언약은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이 일방적인 약속이라 하였다. 한편 불링거는 구원에 있어 인간의 반응을 필수적인 요소로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쌍무적 계약사상을 주장했는데 즉,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화해와 축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소나 닭들을 방목하며 키우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참 평화롭고,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묶여 있거나, 갇혀있는 모습을 볼 때면 왠지 안쓰럽고, 불쌍하게 보이곤 했습니다. 그 차이는 “자유”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근심, 걱정, 불안, 시기, 질투, 미움, 낙심, 절망, 두려움 등 우리가 이런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것이 진정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참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최고의 “복”인 “자유”가 바로 이러한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선 이 자유가 진리 안에 있으며, 진리를 알 때 비로소 이 모든 것이 가능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역을 해오면서 교회 임원진들과 회의를 할 때, 교회 내에 물건을 구입하는 일에 있어서나 또는 단합회 선물을 어떤 것으로 할 것인지 그리고 교회 리모델링 등 여러 의견들에 있어서 늘 마음을 비우고 가능한 한 성도들의 의견에 많은 비중을 두고 지내왔지만 그러나 진리에 대해서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사수해왔습니다. 왜냐면 진리는 하나님 말씀 곧 하나님 뜻이기
목사님께 가난한 집사님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의 지혜와 명철로 제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는 오랫동안 사귀어 온 친구가 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학교도 다니고 함께 먹고, 함께 등산도 하면서 무엇이든지 함께 동고동락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빵 장사를 해서 돈을 좀 벌더니 어느날 변해 버렸습니다. 제가 좀 힘든 일이 있어서 금전적인 부탁을 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그 뒤로는 이제는 길에서 서로 만나도 아는 척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인사는커녕 저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목사님은 한참 동안 눈을 감더니 나지막하게 말을 꺼냈습니다. “이쪽으로 오셔서 창문 밖을 쳐다보세요? 무엇이 보입니까?” “산이 보입니다. 집이 보입니다. 빵 가게도 보입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이리 오셔서 거울을 보십시요! 무엇이 보입니까?” “제 얼굴이 보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두의 마음이 유리창처럼 투명합니다. 그래서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보면 도와주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 그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이 고백했던 말, “여호와 이레”. 우둔하고 연약한 사람의 생각 너머에서 준비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외치는 소리다. 단 하나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삼일길을 걸어가 사랑하는 아들을 결박해 단 나무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었던 아브라함. 준비해 놓으신 그 분의 손을 모르고도 순종할 수 있었는데, 적어도 우리는 그를 위해 벌써부터 준비하시고 기다리셨다는 말씀의 주님을 알고도 순종하지 못한다. 부족하지만 작은 순종에 준비하시고 기다리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10여년전 한국의 모든 사역을 정리하고 미국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기도하던 아내가 처가가 있는 논산 시골 마을에 아동센터를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가지고 있는 생활비도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선교의 씨앗을 심고 싶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위해 기도했다. 2년여 동안 가깝지 않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아내와 교대로 몇 차례를 오가며 아동센터를 세웠다. 급식비라도 보조금을 지원 받기 위해서는 2년 동안 개별적으로 운영을 해야 하기에 가능한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는 전통적인 변신론의 테두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고통 받는 사람에게 직접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에서 잘 보여 줍니다. 삼인칭적 경험과 일인칭적 경험의 차이지요.” 강영안 저(著)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IVP, 19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기독교 변증학의 거성(巨星) C.S. 루이스는 고통에 관해 두 권의 책을 썼습니다. 한 권은 고통을 객관적인 어조로, 이론적으로 다룬 ‘고통의 문제’이고, 다른 한 권은 자신이 겪은 슬픔을 관찰한 ‘헤아려 본 슬픔’입니다. 전자가 3인칭 시점의 이야기라면 후자는 1인칭 체험의 이야기입니다. ‘고통의 문제’는 마치 고통이 저만치 있는 것처럼 거리를 두고 고통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제일 유명한 구절이 이것입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그러나 ‘헤아려 본 슬픔’에서는 다릅니다. 루이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만년에 뒤늦게 만나 결혼하게 된 사랑하는 아내 조이 그레섬이 죽은 직후 이 책을 씁니다. 이 책에서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했던 자신의 말을 잊은 것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다른
4차 산업혁명은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나타나는 기술의 융합과 연결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산업구조와 새로운 생활의 패러다임을 지칭하는 말로 그 특징을 나타내는 요소를 살펴보면 사물인터넷, 빅 데이터, 플랫폼, 인공지능 등이 나타난다. 물론 이외에도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다양한 특징과 현상이 존재하나 전반적인 과학기술과 산업체제의 변화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은 이 연구의 범위나 목적을 넘어서기에 위에서 열거한 일반적이며 대표적인 특징들에 대한 논의에 집중하려 한다. 1) 플랫폼(Platform) 플랫폼은 4차 산업혁명에 등장하는 주요 키워드 중 하나다. 플랫폼은 본래 기차를 타고 내리는 정류장을 의미하는 영어단어로서 사람들을 모으고 새로운 목적지로 보내는 장소를 의미하는데 현대사회는 이 용어를 기술 혁신을 통해 사람과 사람 또는 사물을 연결하는 인프라를 제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비즈니스의 생태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다. 전통적인 기업이 제품을 생산해 생산자와 다른 쪽에 연결된 소비자 사이의 중간역할을 통해 이윤을 창출했다면 플랫폼 기반 기업은 혁신적인 과학기술과 플랫폼을 중심으로 모인 사용자들 간의 개방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의 필요를 연결해 새로
한국침례교 최초의 순교자는 1918년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 받은 박노기 목사, 김희서 교사, 전영태 총찰, 최응선 감로였다. 이들은 10월 20일 포시에트해(海) 모커우 지점에서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으로 인해 배가 파선해 해상에서 순교했다. 이 일이 연추와 수청 전 지역에 알려지면서 많은 교회 부흥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동아기독교 순회전도자들은 대게 육로로 이동했는데 왜 이들은 ‘육로’가 아닌 ‘바닷길’로 이동했는지 궁금하다. 이들은 당시 국경지대에 마적단(馬賊團)들이 들끓었기 때문에 이를 피해 바닷길을 선택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연구자가 지난해 1월 연해주의 고려인 역사관을 방문해서 초기 한인이 탔던 배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 이유는 배가 너무 초라한 목선(木船)이어서 오늘날의 국제여객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배였다는 사실이다. 큰 풍랑을 만난 작은 배로 인해 순교한 것이었다. 4. 평가 시베리아는 동아기독교의 교회개척이 가장 단기간에 이뤄졌고 빨리 문을 내린 지역이다. 동아기독교의 시베리아 교회개척은 1909년 2월에 첫 교회가 세워졌고, 1925년 가을에 으르싯쓰교회가 마지막으로 개척됐다. 시베리아에 44개의 동아기독교가 세워지
그런데 거의 같은 시기의 러시아의 문호 끄리일로프(Krylov)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어떤 두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한 사람은 세상에서 살인을 하고 잡혀서 사형을 받아 죽고 한 사람은 유명한 저술가로서 명성을 떨치며 존경을 받다가 나이가 많아 죽어서 심판대에 서게 됐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유죄가 인정되어 지옥으로 가서 벌을 받게 됐습니다. 둘 다 자기에게 주어진 가마솥에 들어가게 됐고, 가마솥 밑에서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었으나 살인죄를 짓고 사형을 받고 온 죄인의 불보다 오히려 책을 많이 썼던 학자의 불이 더 뜨거웠습니다. 학자는 “재판장님! 저 사람은 사람을 죽인 흉측한 살인자지만 저는 그런 죄를 지은 일도 없고, 남의 것을 한 푼도 훔치거나 떼먹은 일도 없는데 불이 더 뜨거운 것은 공평하지 못합니다”라고 항의를 하자 재판장은 “저 사람은 한 사람의 생명을 죽였거니와 너는 네 쓴 책으로 수많은 영혼들이 병들고, 죽게 했노라. 그러므로 너는 불이 더 뜨거운 것이 마땅하니라”고 선언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볼테르야말로 수세기를 이어오면서 그의 높은 지식과 넓은 학문에 비춰 불멸의 지성에 틀림이 없지만 하나님을
저는 요한복음에서 ‘인자’(사람의 아들) 칭호가 나오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관한 요한의 신학적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호에서는 오병이어 표적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다시 찾아온 무리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에 나오는 인자 말씀을 통해 제시되는 신학적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표적의 놀라운 영광을 체험했지만, 그 표적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하고 육신의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다시 찾아온 무리를 향해 예수님은 그의 존재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신의 양식을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영원한 생명의 떡을 주러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이번 호에는 오병이어 사건 후에 진행되는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님의 긴 교훈에 나오는 인자 말씀에 담긴 기독론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지만, 그가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자기 ‘살’(육신)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고 반문하는 유대인들과 변론하시면서 자기의 말씀의 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 1981년도에 사랑하는 제 아내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져 연애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당시에 저는 산악인으로서 암벽등반에 심취되어 있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산을 너무 좋아해서 친구들로부터 “산적 두목”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제 이미지는 늘 산과 연관 지어져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산이 얼마나 좋던지 집에 와서도 방에서 잠을 자기보다는 옥상에서 하늘을 보며 자는 것이 더 행복했을 정도로 산과 저는 아주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어느 날 사랑하는 제 아내에게 산 사나이다운 멋진 면모를 보여 주고 싶은 생각에, 늘 암벽 등반하던 서울 도봉동에 있는 선인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그 현장에서 산악인들의 활동 상황을 다 목격한 제 아내가 “길조 씨도 이런 암벽에 올라가나요?”라고 질문을 하길래 “그럼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내가 훈련시킨 후배들인걸요.”했더니, 제 말을 듣던 아내의 얼굴에 감탄보다는 어둠의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 두 사람이 그곳에서 내려올 때 제 아내가 저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