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모임에서 부산에 있는 Y목사님이 대표기도를 하면서 “예수님은 왕이시요,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했는데 그것이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 믿기 전에는 열심으로 도를 닦아온 ‘수도자’였다. 알지 못하는 전능자를 찾아서 자신과 합일을 이루며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서 참선을 해왔다. 그것을 위해서 직장을 바꾸기도 했고, 설악산 지리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련을 쌓는 경력이 아주 많았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고, 베드로처럼 주님 기뻐하시는 신앙고백을 하는가가 궁금했다. 그의 얘기로는 기도원에서 어떤 목사님을 만나 영성에 관한 대화를 나눈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 목사님은 그에게 최고의 큰 도(道)를 알려주겠으니 믿어보지 않겠냐고 권유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전해줬다는 것이었다. 그 후 산에다 텐트를 치고 몇 개월 함께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기도하는 생활을 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여러 가지를 경험했는데 이런 것도 있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 한 번은 기도하는 데 하늘에서 레이저 광선 같은 빛이 자기 머릿속으로 들어오면서 지금까지 도를 닦으며 쌓아온 모든 것들을 부수며 날려버
물이 0˚에서 얼음이 되고 100˚에서 끓는 현상을 우리는 생활에서 마냥 보고 지나친다. 그야 물이니까 그런 거지라고. 이런 현상은 무슨 힘에 의해 생겨나는 것일까. 저절로 얼고 저절로 끊는다는 자연주의적 사고로 만족할 수 있을까. 대개 사람들은 현상만 받아들일 뿐 그 배후는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다. 그야 전문가가 다룰 문제라고 더러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묻노니 현상이 먼저냐 현상되게 한 원리가 먼저냐? 즉 물이 늘 그러하니 그것이 원리가 되었는가? 아니면 물이 늘 그러하도록 하는 배후의 힘으로 원리가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은 원리보다 현상에 생각을 집중하고 여기서 더 나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현상을 추구해 원리 같은 것이 있노라고 결정하겠다는 것이 소위 귀납적(歸納的)방법이라 한다면, 현상 배후의 어떤 원리 혹은 법칙이 있어서 현상이 나오게 됐다고 생각하는 바가 소위 연역적(演繹的) 방법이다. 과학은 귀납적이고 철학은 양자수용적이고 신학은 연역적이라는 것이 학문의 성격에 의한다. 선원리(先原理) 후현상(後現象)은 성경적 교리이다. 세상만사가 있어서 창조주를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가 계셔서 세상만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창조론 사상이다. 현상
80고령 나의 친구들은 이미 60대에 틀니 신세를 졌다고 하는데 나는 80이 넘어서야 틀니를 넣고 다니게 됐다. 따라서 틀니와 나와의 친숙 관계는 매끄럽지 못하다. 어느 때는 틀니를 집에다가 빼어놓은 채 집을 나섰다가는 뒤돌아 와서 다시 틀니를 착용하곤 한다. 그때 틀니는 외롭게 주인을 불러도 주인은 말없이 제 가실 길 가시다가 되돌아와서 다시 그를 알아 모실 때 틀리는 외롭지 않단다. 틀니의 존재 이유는 나 아니고는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밤낮 틀리는 내 생각에 자고 깬다. 내가 입에 넣어주지 않으면 틀리는 보기도 흉측스럽고 따분하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틀니를 아주 달갑게 여기지도 않는다. 아직 그것 이용에 서투른 만큼 밤에 빼어 뒀다가 아침에 착용할 때마다 이놈의 외계물이 왜 입에 틀어 와야 하느냐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사실 착용한 지가 몇 개월밖에 안 되어서 그 틀니가 들어올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 않는다. 다른 생니들도 이질감을 느낀다. 그러나 틀니도 이런 감정들을 알지만 자기의 존재 이유가 천래(天來)의 생니 사이에 보존 역을 해야 한다는 치공 틀의 제조 목적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싫어도 들어와야 되고 미워도 다시 한 번 미움 받아도 들어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의 배를 빌려 가르치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고 해 그들이 나가 두 배 가득하게 고기를 잡았고, 또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요21:6)고 했을 때 순종했더니 153마리를 잡았다.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이 5명의 전 남편이 있었던 것과 현재 남편도 제 남편이 아닌 것을 예수님께서 아시고(요4:17~18) 지적해 그녀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는 눈을 뜨게 하시어 구원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어 3일 만에 다시 살 것을 여러 번 예언하셨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교회에서 약속한 헌금을 빼돌린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베드로는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행5:3),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행5:9)고 책망했다.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가이사랴의 빌립 전도자 집에 유할 때 네 딸도 유언자로 있었는데 아가보 선지자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될 것을 허리띠로 예언했다(행21:8~12). 바울이 배 타고 로마로 가는데 행선에 하물과 배 및 생명에도 타격이 있을 것(행27:10
그 동안 모아온 글들을 엮어 ‘우리는 주님의 동산이다’이란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그리고 졸작이지만 여러 선, 후배 목회자들과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막상 누구에게 선물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고, 우체국을 통해서 보내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책을 받았다는 연락조차 없었지만 대부분 핸드폰으로 말이나 글로써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그들 중에는 감동 있는 글이기에 몇 시간 만에 다 읽었다거나 부부가 함께 읽었거나 교인들의 모임에서 독후감을 나눠봤다고 알려줬다. 이 목사님은 신학교 교수, 병원 원목, 교회 담임 목회자 등을 역임한 선배이시다. 이 분이 카카오톡으로 나에게 글을 보내주셨다. “김 목사님, 선물해준 책을 매일 밤마다 한 편씩 읽고 있어요. 매 편에서 귀한 의미를 얻습니다. 앞으로도 매일 밤에 한 편씩 읽을 거예요” 두 달이 지난 후 그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밤 마지막 편을 읽었어요. 그동안 잠자기 전에 한 편씩 재미있게 읽어왔어요. 179페이지에 오자가 있던데 고치면 좋겠어요” 이 분은 연세가 우리 나이로 88세인데 어쩌면 후배가 쓴 책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눈의 피곤으로 책 읽기를 그만 둘 수 있을 텐데 끝까지 읽어주셨
지난 원고에는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상황에서 예수님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자기의 죽음을 땅에 떨어져 심겨지는 밀알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에 나타난 의미를 살펴봤다. 이번에는 그 말씀의 연장선에서 예수님이 자기의 증언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질문과 그것에 대답하신 말씀에 담긴 인자의 존재에 관하여 살펴본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무리의 반응을 전달한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말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12:34). 무리는 율법에 기초한 메시아관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인자에 관하여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함을 언급한다. 여기서 무리가 가진 메시야관이 무엇이며 또 그들이 올리어지심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제시된다. 먼저 무리는 율법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현존을 말한다고 간주한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에서 지금까지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의존하고 있는 율법이 무엇인지는 구체
“그 이유를 말해주마. 처음에는 나도 내가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단다. 지금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하지만 오늘도 내가 계속 더 크게 외치고 울부짖는다면 그들이 나를 변화시키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겠니?” 엘리 위젤, 리처드 D. 헤프너 공저(共著) ‘이방인은 없다’(산해, 6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옛날 소돔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기 직전까지, 심지어 유황불이 떨어져 성이 망하는 그 날 아침까지, 성문에 서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이방인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도 그의 말을 듣고 약간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차츰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외쳤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변함없이 외치고 있는 이 이방인의 말에 감동받은 아이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불쌍한 아저씨, 아무리 아저씨가 외쳐도 사람들은 전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시나요?”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도 이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을 알지. 하지만 오늘도 내가 계속 더 크게 외치고 울부짖는다면 그들이 나를 변화시키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겠니? 나는 그
둘째로 일관성이란 오른쪽에서 왼쪽까지 균등하게 적용됩니다.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성경의 해석과 법의 적용에 있어서 일관성(균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혜나 무시가 없을 때 분파가 생기지 않고, 지역감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과부나 세리 또는 죄인의 영혼이나 서기관 혹은 제사장의 영혼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든 유다든 사마리아이든 어느 땅이든지 간에 균일하게(일관되게) 실천하신 예수님을 봅시다. 세리의 집에 유하시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까? 남의 자녀는 접시 하나만 깨도 부주의한 녀석이 되고 내 아이는 장독을 깨도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장독이나 된장은 또 사면 되는 것이니까”하는 식의 적용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하는 기독교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톨스토이의 이야기 중에 “빵을 보상한 작은 악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악마 두목이 승진을 기다리는 작은 악마의 능력 시험을 위해 농부를 화나게 해주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농부는 여느 때처럼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한낮이 되어 점심을 먹으려고 도시락을 열었으나 빵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작은 악마가 먹어치워 버린 것입니다. 농부는 허기졌으나 심성이 착
비밀유지는 상담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에 하나이지만, 위급한 상황들을 고려한 예외가 있다.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알려줘야 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비밀유지가 기본 원칙이지만 예외가 있음을 미리 말해주는 것이다. 첫째, 내담자나 타인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이다. 상담을 하러 와서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울하거나 속상하거나 불안할 때,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갈 수도 있다. 너무 화가 날 때,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살이나 타살을 암시하는 말을 할 때는 홧김에 한 말 일지라고 절대 가볍게 넘기지 말아야 한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지, 진심으로 의도가 있는지, 방법을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해서 위험의 정도를 가늠해야 한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그친다면 절대로 스스로나 남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유서를 쓴다든지, 주변 정리를 한다든지, 때와 장소, 방법 등 구체적인 계획을 말하고 의도를 드러낼 때는 당장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 지켜볼 수 있는 가족에게 연락한다든
전에 우리 교회에서 부흥회를 개최했을 때 있었던 일이다. K집사 가정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고 집으로 초대했다. 방문해 기도한 후에 갑자기 강사가 K집사 부부에게 당황할 말을 던졌다. “이 집 부부는 자녀를 왜 이렇게 심히 미워한데요?” “강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끔찍이 사랑할뿐더러 교육에 대한 열정도 대단합니다.” 아내가 민망해하며 분위기를 바꾸려하자 “틀림없이 어느 자녀를 미워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알려주시니 말하는 겁니다.” 강사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재차 같은 뜻의 말을 전해줬다. 그러자 놀라운 것은 K집사 부인이 그 말을 인정하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둘째 딸을 외국에 입양시키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습니다. 이래선 안되는 줄 알면서도 얘가 워낙 힘들게 하고 미운 짓을 하니 어쩔 수 없이 싫어지고 미워지더라구요.” 나는 담임 목회자로 이 가정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자녀 문제가 이토록 심각한 상태인 줄은 그때서야 알게 됐다. K집사의 둘째 딸은 태어날 때부터 10개의 손가락이 모두 붙어있는 장애를 가졌었다. 그 손가락 하나하나를 분리해서 정상인처럼 만들기 위해선 병원 수술비 부담도 엄청나게 컸을 뿐더러 가족들 고통도 이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2:10) 목회 사역을 한 곳에서 오래 했습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도 이젠 하나, 둘씩 퇴직해 서로 연락하고, 왕래하며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아버지!”하며 따라다니던 손주도 이젠 많이 자라서 어느덧 초등학생이 됐습니다. 늘 부교역자를 두고 사역해오던 제가 작년에는 교회 내의 행정적인 변화로 말미암아 부교역자 없이 혼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역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 잡다한 여러 일들도 많아졌습니다. 즉, 예를 들어 겨울철에 교회 현관에 있는 화목 난로에 들어갈 땔감들을 구해오는 일부터 시작해서 그것들을 주중에 절단하고, 청소하는 일까지 매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차량 관리나 쓰레기 분리수거, 심지어는 주중에 소망회 차량 봉사를 하는 등. 어떤 때는 소망회 차량 봉사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원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나도 할아버지인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모셔오고, 모셔다 드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 뒤따르는 부속적인 생각이 “혹시 이렇게 은퇴할 때까지 차
사라 윈체스터(Sarah Winchester)의 남편은 소위 그 유명한 ‘윈체스터 총’을 만들어 팔아서 큰 부자가 됐으나 1918년 유행성 감기에 걸려 죽은 후 부인 사라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로 이사했다. 사라는 고통과 슬픔 중 강신술에 대한 오랜 관심으로 말미암아 죽은 남편을 접촉할 수 있다는 무당을 찾아가게 됐다. 무당은 그녀에게 “당신이 계속 집을 짓는 동안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사라는 그 무당의 말을 믿고 이미 17개나 방이 지어진 미완성의 저택 한 채를 사서 이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8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집을 지어갔다. 이 건축비는 무려 500만 달러나 됐다. 당신 하루의 인부 임금은 50센트(500원)였다. 오늘날 하루 임금을 50불로 계산할 때 화폐가치가 100배가 됐으니 건축비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 저택은 방이 150개, 욕실이 13개, 문짝이 2,000개, 벽난로가 47개, 창문이 무려 10,000개나 됐다. 그리고도 사라 윈체스터는 80년 이상 건축을 계속할 수 있는 건축자제를 남겨 뒀다고 한다. 그 집은 단순한 관광명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내가 그곳을 구경하러 갔을 때
이집트 하면 고대문명의 신비를 간직한 태양의 나라로서 인류 최초의 농경이 이뤄진 나라 중 하나이고 B.C 3000년경 인류 최초의 빵을 만든 나라 아닌가. 그런데 지금 국민 8000만 명에 이르는 이집트는 세계 최대 밀수입국으로 전략가는 바람에 온 국민이 굶주리고 있다. 왜 농경 국가가 밀 생산을 못하는가. 농업 경시 풍조다. 밀 생산을 가볍게 봤던 것이다. 주식인 밀을 대신에 딸기, 멜론, 수박 등을 재배해 그것을 판돈으로 밀을 수입하겠다는 정책을 폈다. 전 농림부장관 유세프 왈리의 정책이었다. 밀의 나라는 오직 제일 먼저 밀부터 생산해서 많은 빵을 만들 수 있어야 했다. 딸기나 멜론이나 수박은 간식은 되어도 주식이 못 된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와 같은 영적 영양실조와 기아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무슨 이유인가? 성경에서 나오는 말씀의 결핍 때문이다. 성경 설교가 없어졌다. 대신에 ‘딸기 설교’ ‘멜론 설교’ ‘수박 설교’가 행해지고 있다. 그것들은 주식이 아니잖나. 빵이 주식 아닌가? 밥을 마다하고 딸기만 먹으며 살고 있나. 당연히 영양실조 아닌가. 생명이 없는 타 종교에는 수다한 종교 행사가 요란스럽다. 그들은 내어 놓을만한 진리가 없기 때문에 갖가지
황성옛터는 바벨론으로 대치되고 봄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하늘 천국으로 대치해보면 어떨까. 내가 황성옛터 유행가를 즐겨 부르는 이유는 요한계시록 18장의 멸망하는 바벨론과 19장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대비시켜 있기 때문이다. 우선 황성옛터 가사 전체를 실어본다. 제목 : 황성옛터(1930년) 작사 : 왕평 작곡 : 전수진 노래 : 이애리수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이뤄 /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여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끌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있거라. 쇠락해 버린 황성옛터를 찾은 나그네의 서러움이 극에 달하지만 별 수가 없단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며 있노라”는 나그네였다. “이몸은 흘러서(?) 옛터야 잘 있거라” 작별하는 나그네였다. 우선 계시록 18장의 패망하는 바벨론을 보자. 도무지 바벨론은 무
대학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그의 글이 잊혀지지 않는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소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oard)는 서커스 장소에서 일어난 화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커스 주인은 불을 끄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해 맨 먼저 만난 광대를 붙잡고 빨리 동리에 나가서 화재 진화를 요청하라고 했다. 이 광대는 서커스 준비로 이미 무대 연기를 위한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을 벗을 여유 없이 곧장 동리로 달려가 “불이야!” 하면서 서커스 장에 불을 꺼 달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광대의 행동이 연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여 모두 마음껏 박수를 치며 웃었다. 광대가 더 광분하고 불을 꺼 달라고 소리쳐 호소할수록 사람들은 그 열렬한 연기에 더욱 크게 웃었다. 결국 서커스 장을 태운 불길은 온 동리를 덮쳐 불 속에 파멸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도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요단강을 건너 휘황찬란하게 아름다운 천국에 이를 때에, 우리를 통해 구원받은 수많은 영혼들이 몰려나와 나팔 들고 환호하고 영접하는 아우성을 들으리라!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영합니다!” 성령을 받아 모신 우리의 지상과업은 예